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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죽음에 대한 성경사상

죽음에 대한 성경사상
이정석 교수
성경에서는 죽음을 분리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이 세상으로부터의 이별이며 가시적인 육체로부터 인간의 주체인 영혼의 분리인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과 하나님과의 죄로 인한 영적 분리 및 단절인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으로 나누어진다. 인류의 최초 거처였던 에덴동산에는 영생을 가능케 해주는 생명나무와 먹는 날에는 정녕 죽게 되는 사망나무로서의 선악과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사탄의 미혹과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사망나무인 선악과를 범하고 섭취했을 때 인간의 신체와 감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결과하였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선고를 받고 생명나무로부터 단절되어 육체적인 사망을 회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불멸의 육체로 창조되지 않았고 본질상 흙에 불과했으나 생명나무의 영양 공급으로 인하여 생명이 영원히 연장될 수 있는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주하의 자연과 그 소산은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영원히 지속시켜 줄 수 없었고, 더욱이 그로 인한 원인과 자연의 악화된 환경은 인간의 체력을 점약시켜 오늘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아담 이후 노아(홍수 이전)까지는 900세 전후, 심지어 천세에 가까이 향수하였으며,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감소하여 아브라함 시대에는 200세 이하로 떨어졌고, 다윗 시대에는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건강하면 80이라”(시 90.10). 물론, 인간의 수명은 개인 혹은 집단의 체력과 환경여건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범죄로 인하여 육체적 사망의 운명에 있으며, 여기에는 형벌적이며 심판적 성격이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이 보다 심각하게 다루는 죽음은 영적 사망이다. 아담과 이브에게 예고하고 적용한 사망도 바로 영적인 죽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범죄 즉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오랜 기간 삶이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죽음도 완전한 단절보다는 보다 친밀한 일상적 코이노니아에서 단절(중단)되었고 제사에서 흠향하는 소원한 관계로의 이행인데,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의 화해를 전제로 하는 제사제도에서만 관계가 가능한 구도로 전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으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고 말씀하였는데, 이는 신자도 회피할 수 없는 육적 사망이 아니라 영적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보았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할 때도 영적 사망을 가리키며, 이에 대조되는 생명, 혹은 영생은 더 이상 단절 없는 하나님과의 화해와 그로 인한 교제(관계)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사망이란 멸절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영적 사망을 영혼의 멸절로 보지만, 이는 비성경적이다.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후 심판을 받게 되며, 그에 따라 영원히 영광이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영적 사망을 영혼의 멸절로 보는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한다.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육체는 무덤에서 썩게 되며 영혼은 사자의 세계, 즉 음부에 가게 된다고 가르쳐 준다. 그 곳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욥 10.21)이다. 외형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의 죽음은 동일하며 심지어 짐승의 죽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만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 사망의 줄, 사망의 올무, 사망의 문이라는 표현과 음부의 줄, 음부의 올무, 음부의 문이라는 표현의 공통점은 사망과 음부가 거의 동일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 6.8에 음부가 사망을 뒤따른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죽으면 음부의 문을 통하여 음부에 갇히게 됨을 의미한다. 육체적인 사망 상태의 모든 영혼은 음부에 갇혀 있다.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졌고, 그가 심판을 위하여 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 1.18. 20.13)를 사용하며, 그 후 현세적이고 시한적 존재인 “사망과 음부”는 불못, 즉 지옥에 던지우게 된다(계 20.14). 음부는 인간의 육체적 사망과 관계되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인류의 2중 부활 이후에는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 사망이 더 이상 존재치 않고 불못에서 멸절된다(고전 15.26, 계 21.4). 물론, 이것은 육체적 사망이며 모든 인류가 통과하는 “첫째 사망”으로서 첫 아담의 모든 후손이 당하는 운명이지만, 영적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둘째 사망”은 불신자들이 육체적으로 2차적인 죽음의 고통에 진입하는 “불못”으로서, 그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는 것이다(계 2.11, 20.6, 14, 21.8).
음부는 구약에서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로 지칭된다. 스올의 어원으로는 לאשׁ과 לעשׁ이 가상되는데, 전자는 ask, enquire의 뜻으로 the place of inquiry, 즉 왜 죽음과 고통의 장소에 왔는지 질문하는 소리가 가득찬 곳, 혹은 반대로 음부의 주관자가 그들의 tkaf에 관해 조사하는 장소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후자는 hollow, deep의 뜻으로 깊고 음침한 장소를 가리켜 보다 구약의 표현과 일치한다. R. H. Charles는 1913년작 A Critical History of the Doctrine of Future Life에서, BC 8C 이후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모순된 경해가 공존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스올이 여호와와 독립된 권세라고 생각하다가, 후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거기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시 139.8, 암 9.2, cf. 시 88.5, 사 38.18)는 것이다. 가끔 스올 강하가 죄값인 듯한 구절(시 55.15, 잠 9.18)도 있으나, 이는 사망이 죄값이라는 사상의 단순한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동의어로서 아바돈이 나타나는데, 잠 15.11과 27.20에(번역된 대로) “음부와 유명”의 연결은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여지며, 사망과 연결된 파괴의 의미로(욥 31.12, 26.6, 28.22, 시 88.11), 음부와 다른 별도의 장소가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관계가 그러하듯 한 곳의 다른 표현 내지 사망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계 9.11의 무저갱의 사자는 히브리어로 Abaddon, 그리스어로는 Apollyon이라고 불리었는데, 여기서 아바돈은 사망의 의인화이다. 그 외에, תחשׁ이나 רוֹבּ는 구덩이라는 뜻이 있으나, 공히 육적 사망이 결과하는 corruption같이 죽음의 양상을 가리키며 무덤의 구덩이를 의미하여 사망 내지 음부와 동의적이다(용 33.24, 시 16.10, 겔 28.8, 시 30.3, 겔 31.14). 이 스올은 LXX에서 하데스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그리스 고전에서 지하세계(underworld, netherworld)나 사자의 세계를 의미하였다. 신약에서 하데스는 마 11.23, 눅 10.15에서 가장 낮은 곳을 지칭하며, 마 16.18에서는 음부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사망과 파괴의 권세를 묘사하고, 행 2.27, 31은 시 16편을 인용하며 그리스도의 영혼을 음부에 버려두지 않고 3일만에 다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망의 문을 열고 부활케 하심을 설명한다. 계시록에서는(1.18, 6.8, 20.13-14) 음부가 사자의 영혼들이 갇혀있는 장소로 나타난다. 이는 모두 구약의 스올과 일치한다. 그러나, 눅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새로운 사실을 가르쳐준다. 의인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고통의 장소인 하데스에 가는데, 그 두 장소 사이에는 “큰 구덩”이 끼어 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이고 일컫는 장소가 음부의 상층부로서 일부인지 음부가 아닌 별도의 장소인지는 분명치 않으며, 거기에는 삼위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고 신자의 대표인 아브라함이 중심이다. 스올 내에 선악인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상은 에녹서 22.1-14에 나타나며, 후기 유대문헌에서 발견된다. 시 49.14-15는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속을 말하는데, 그 문맥이 눅 16장과 동일한 부자의 멸망과 가난한 자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연결될 수 있다. 시 16과 17.15에서도 동일한 사상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παραδεσος는 페르시아에서 온 단어로서 울타리(담)가 있는 정원을 가리킨다. LXX에서 에덴 ןגּ을 이 단어로 번역했으나, 히브리어 표현은 סדרפּ로 왕의 숲이나 과수원을 가리킨다(느 2.8, 전 2.5, 아 4.13). 신약에 3회 사용되었는데, 문제의 눅 23.4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today 해석 문제가 있지만, 여자적으로는 신자가 죽음 직후에 낙원에 간다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고후 5.6-8 등의 논리도 몸을 떠난 영혼은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 2.27이나 벧전 3.19 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3일 동안 하데스에 계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눅 23.43의 today나 고후 5.6-8의 논리는 보다 종말론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다른 보다 분명한 2회의 용례는 중간기적 장소보다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을 가리킨다. 고후 12.4에는 바울 사도가 은혜 중에 “삼층천”에 비몽사몽간에 끌려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이를 “낙원”이라고 명시하였다. 유대 랍비들은 하늘이 7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보는 하늘과 하나님이 계시는 םימשׁ ουρανος 사이에는 많은 층의 하늘이 있다고 보았으며, 히 4.14에서도 예수님이 여러 하늘을 통과하여 승천하였다(dielhluqo,ta tou.j ouvranou,j)고 말한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3층천이란 7층천의 중간단계라기 보다 하나님이 계시는 최고의 하늘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며, 이는 3층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간 낙원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동일하며, 단지 중간기적인 “아브라함의 품”으로 보기 어렵다. 나아가, 계 2.7의 낙원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처소로, 성도들이 심판 이후 영원히 거하는 곳이다. 마 11.23에서 음부가 하늘과 정반대에 있는 곳이라면, 단지 둘 사이에 “큰 구렁”이 있을 뿐 서로 볼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이 중심이 아닌 “아브라함의 품”과 낙원을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눅 23.43과 고후 5.6-8에 근거하여 낙원과 일치시키는 것도, 눅 16장이 비유라는 점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1은 사람이 죽은 후, 의인은 최상의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뵙게 되며,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가서 고통스러운 대기상태에 간다고 고백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품, 낙원, 하늘을 모두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위하여 이 두 장소 외에는 다른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언함으로서 중간적인 연옥을 강력히 부정한다. 그런데, 성경은 영벌의 장소인 γεεννα와 사망 후 즉시 가는 ὰδης를 구별하고 있으며, 천국으로 일컫는 ουρανος는 영복의 장소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후에 가는 곳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사망은 그것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 극복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육적 사망과 영적 사망은 타락에서나 구속에서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육적 죽음은 영적 죽음의 표상과 결과로 나타난다. 고로,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지며(사 25.8), 이는 고전 15장과 계 21장에서 성취가 보고된다. 그리스도는 사망으로 사망을 사망시킨다(히 2.14). 그리고,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며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부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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