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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교회론

성도의 교제와 집사의 직무

성도의 교제와 집사의 직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계시고 말씀과 영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곤궁(困窮)에 처해 있는 이웃이 발견된다. 곤궁에 처한 이웃이 있는 곳에 사랑의 봉사(구제)가 있게 된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봉사가 곧 실행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4:34에 교회 중에 아무도 핍절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며 천국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법을 준행하며 사는 곳이면 이 사랑의 봉사는 항상 재연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봉사(구제)를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는 모든 신자가 몸소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교회의 특별한 직분인 집사의 기능을 신약성경에 의하여 규정하기가 힘들게 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성도의 교제(Koinonia)에 대해 신약성경에서 살펴보자.
성도의 교제
신자는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고전1:9) 사도들은 일반신자들이 자기들과 사귐을 나누기 위해 자기들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한다고 하였다(요일1:3).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6-7)고 증거하면서 신자가 마음 속 깊이 나누는 영적 사귐의 의의에 대해서 말하였다. 
성도의 사귐은 성만찬(聖晩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교제)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교제)이 아니냐?(고전 10:16) 여기에서 참예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가지는 깊은 마음의 연합을 일컫는다. 그리스도와 사귐을 나누는 자는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는 다른 신자와 함께 항상 깊은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들간의 사귐은 바로 작자가 그리스도아 가진 사귐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교회를 일컬어 믿는 자들간에 샘명의 교제를 가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귐을 나누었다(행 2:42). 그들은 서로가 한 형제로 연합된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연합하고 한 마음으로 서로 사귐을 나누는 가운데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를 몸소 물질과 사랑의 위로로 도와주는 행동적인 봉사가 있게 되었다. 성도들간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와 주었다. 이렇게 도와주는 행위를 신약성경에서 코이노이나와 동근동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사랑의 봉사를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뜻 깊은 일이다. 이리하여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 '연보(捐補 : Collecte)'라는 의미도 있지만 - 몸소 도와줌(handreiking)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마케도냐와 아가야 교회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얼마간 기쁘게 동정한 사실에 대하여 롬 15:27에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교회가 항상 선행과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을 잊지 말라는 권고도 하였다. 
섬기는 자(디아코노스)와 성만찬
위에서 살펴 본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섬기는 자'(집사직)와 성만찬과의 상호관련성을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섬기는 자'와 성만찬은 모두 성도의 사귐과 관계가 있다. 이 성도의 사귐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자들 가운데서 이룩된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 나눈 교제의 열매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귐을 나누게 된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은 섬김으로 도와주는 봉사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서 성만찬과 섬기는 자 사이의 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사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멀리 떠나 살 때에는 섬기는 자됨과 성만찬의 상호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섬김으로 도와주는 봉사적(집사적) 도움(diakonale hulpbetoon)은 교회의 성만찬과 같이 그 근거를 그리스도와 관계에 두고 있다. 섬기는 자됨은 주의 식탁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함으로서 나누는 사귐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한 성도들이 당면한 어려움과 곤고에 허덕이는 성도들을 도와 주며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가운데 성도의 사귐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섬김은 특별히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이 허덕이고 있는 곳에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
우리들 가운데 애용되고 있는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매력이 있다. 첫째로 이 말이 성경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과 다음으로 이 말은 성도들만 도와주어야 한다는 근시안적인 고정관념을 배격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와 줄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는 말은 구약성경 욥기 29:12과 시편 72:12에 나온다. 이 두 성경의 상황은 각각 다르다. 욥기 29장은 족장 중심의 족장사회(族長社會)에 대해서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는 내용이다. 전장(全章)에 걸쳐 욥은 동방의 족장으로 표상되어 있다. 욥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정직과 공의와 자비의 덕을 충분히 실천한 사람임을 본다. 욥은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가 없는 고아를 건졌다."고 말했다. 
메시야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 72 편의 상황은 욥기에서 나타난 족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족장이 권위의 자리에서 도와주는(이를 일컬어 족장적인 도움이라 한다.) 것과는 다르다. 시편 72편의 표현은 사실 족장 사회의 힘없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상기시켜 주지만 여기에서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운다는 것을 그 출발점이 왕의 영광이 아니라 가난한 자, 힘없는 자의 권익을 위한 것임이 명백하다. 왕과 치리자는 공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이 공의는 힘 없는 자, 가난한 자를 위한 공의이어야 하는 것이다. 메시야 왕이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비참한 자도 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는 말은 그 기원이 이중적이다. 이 말 가운데 족장적 도움의 요소만 배제한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섬기는 자 됨'과 그리스도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섬기는 자의 직분으로 규정지어야 한다. 이것은 시편 72편의 내용이나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로 계시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로 마가복음 10:42~45에 명백히 있다. 주를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은 권력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것과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야 한다. 제자되는 길이 바로 섬기는 자가 됨에서 출발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족장사회 권위사회 위계사회(位階社會)에 대한 하나의 반항(反抗)이다. 그리스도가 닫스리는 세계에는 피라밋과 같이 권좌에 앉은 사람이 그 아래있는 비천한 자를 다스리는 사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섬기는 자가 되어 우리의 발 아래 앉아 계시려는데 누가 감히 그리스도를 짓밟고 섬김을 받으려 하겠는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행위나 인권이 짓밟히는 일에 대해서 항상 대담한 저항이 일어나야 한다. 각자가 낮은 자리에 처하여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되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탄에게만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예종(隸從)의 공포에서도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항상 우리 마음가운데 새겨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상전(上典)은 하늘에 있다! 땅에서 누구든지 상전이 되어 그리스도가 예종의 자리에서 해방시킨 형제를 압제할 수 없다. 
성도는 섬기는 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가운데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는 말을 행동 표어로 삼아야 한다. 교회에는 고귀한 지위도 비천한 지위도 없다. '하층계급'도 '하층사회'도 '소외된 무리들'도 있을 수 없다.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도울 자가 없는 곳에 도우라'는 속담에 담겨진 다른 요소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도움의 범위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포함된다는 사실과 일반 세속사회의 발전도 바람직한 것임을 기억하자. 사회가 발전하는 가운데 정부는 빈곤한 자를 위하여 법을 올바르게 집행하며, 전보다 더욱 각인에게 사회적 기회가 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화란과 같은 나라의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은 기독교 사회활동 및 정치활동의 열매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활동은 바로 시편 72편에 근거를 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도와주어야 할 일들이 적지 않게 산재해 있다. 도와주눈 일은 무제한이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집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있다. 섬기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전히 실현되고 있지 않는 사회와 부권주의(夫權主義, pateralisme)와 계급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에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직분자로서의 집사의 직무
이제 집사의 직무에 대해서 말하느 성경의 자료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디아코노스('집사' 혹은 섬기는 자)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보통 수종드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에게 모두 사용된 말이다.(고후 3:6, 6:4, 11:23.. 여기서는 우리말로 '일군'으로 번역됨). 디아코노스는 원래 비천한 일 특히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일반적인 정의로는 신이나 초월적인 영적 세력을 섬기고 수종드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공궤(供饋 : beddiening der talels - 식탁 시중); 새번역 성경에서는 '먹이는 일'이라고 번역함)를 돈과 자연물(naturalia)을 분배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교회 회중들이 돈과 자연물을 사라으이 선물로 식탁에 놓았다. 이로 보건대, 식탁시중(공궤)은 좁은 의미의 구제(armenzorg)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신빙성이 없다. 식탁에 선물을 놓는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탁시중'을 고전 11:20이하에 서술된 형태의 만찬시중을 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성도들간의 사랑과 사귐의 줄이 튼튼하였다. 그들은 이 사귐이 사랑과 공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는 축줄되어야만 하였다. 
어떤 사람이라도 만찬을 준비하기 위하여 물질적 고통을 크게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만찬은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배설하도록 힘썼다. 
이 식탁의 사귐에서 부자와 빈자가 모두 함께 나누어 먹고 사랑안에서 최상의 일체가 이루어졌다. 초대교회의 이 만찬에서는 구제의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 식탁을 꼭 구제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의 사귐은 최초로 연회를 베푸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하는 가운데 점차 사랑의 봉사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상호부조(相互扶助)에 열심을 쏟았다. 이 때는 모든 제도와 형식이 태동(胎動ㅖ)하는 단계이었기 때문에 아직 만찬과 구제의 구분선이 뚜렷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항상 사랑의 봉사를 하였다. 교회의 규모와 외원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이 생겼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과부들의 수도 늘어났다. 이 문제는 심지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 예루살렘에서 외인(外人) 취급 받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매일 구제에서 자기 과부들이 소홀이 여김을 받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사도들이 이 사실을 알자 곧 특별한 사람들을 택하여 구제와 공궤하는 직무를 위임하였다. 공동의회에서 이 직무에 알맞은 사람들이 피택되어 사도들에게 나아가 안수를 받아 임직하였다. 이들은 맡은 임무가 무엇이었던가? 그들이 식탁(만찬) 시중도는 일이나 그와 비슷한 일을 맡았다고 의심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살림이 빈궁한 자를 돌보아야 했다. 이들은 분명한 직책을 맡고 있었기는 하지만 그들의 직무가 초대 교회 후기에 알려져 있는 집사의 직무와 동일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의 피택받은 7인과 후기의 집사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연관성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해 보는 것은 의의가 있을 줄 안다. 
신약성경에서 집사(diaken)라는 말이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집사가 교회의 직분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은 성경의 두 곳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로, 빌립보서 1장 1절, 여기서 집사는 감독들과 나란히 그리고 감독들 다음에 그 명칭이 나온다. 집사의 임무에 대해서는 어떤 내용도 전하고 있지 않다. 빌립보서 전편에서도 집사의 직무에 대하여 분명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사들이 감독들과 나란히 이 편지의 수신자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집사들이 사도들과 함께 실제로 구제(사랑의 선물)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디모데전서 3장 8~13절(1~7절까지는 감독에 대해서 말하고 다음으로 집사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에서 집사가 될 사람에게 필요한 성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으나 의식적으로 집사가 가져야 할 교육상의 능력에 대한 요구는 빠져 있다. 다만 집사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 돈에 관해서인데, 일구이언하지 말며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집사가 가정을 빈번히 심방하고 재물을 관리하는 것과 상관이 있는가? 이것은 다만 추측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디모데전서 3장 8절 이하에서도 집사의 직무(Ambttaak)에 대해서 전혀 읽어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사(diakonos)라는 이름과 고대교회가 시도행전 6장을 집사직과 관련시킨 점에 근사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집사의 직무는 연보(捐補)를 관리하고 구제하는데 있다. 집사의 직무의 내용을 집사라는 명칭의 근원적인 의미와 신약 성경에서 집사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에서 이렇게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성장하게 되자 집사의 직무는 그와 발맞추어 늘어났다. 동시에 집사의 직무는 조직화되고 정책적인 계획수립 또한 요구되었다. 이로 인하여 집사의 직무는 갈수록 독립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구제와 병행하여 예배를 두우는 의식적(儀式的)인 기능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볼 때 집사가 도와주고 구제해야 할 범위는 교회 성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도울 자가 없어 도움을 요청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직무가 이행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주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전세계의 주요 구원주이시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긍휼히 여기는 행동은 원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장벽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우리들로 하여금 원수를 사랑하고 대적자들 위하여 기도하도록 요구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질문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하니하느냐?"(마 5:46)
교회는 온 세상을 위한 주의 복음을 들고 말과 봉사로 종의 자리에 처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편집부)
개혁신앙 2집(1974년 1월 15일) p. 56-62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