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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십일조 제도

구원받은 무리는 하나가 돼 하나님의 교회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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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 말하려면 그냥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율법을 배워 하나님의 교훈을 크게 얻고 그 교훈이 가르치는 대로 사는 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다 이뤄질 것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키고 살 때에 거룩한 백성으로서 특성을 유지하며 그것을 더욱 드러낼 것이었습니다. 예배에 관해서, 또 일반 국민 생활에 관해서 명령하시는 법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이 법들을 보면 백성 전체가 서로 연합해서 한 나라를 이뤄 갈 것을 상정想定하고 목적했지, 개인이 따로따로 ‘너는 네 떡 먹고 나는 내 떡 먹는다.’는 식으로 살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가지 예로 십일조 제도를 봅시다.
아론 계통이 레위 지파 가운데 한 계통임을 다 잘 아시는 사실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막에서,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을 위해서, 또 모든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업의 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열한 지파는 여호수아가 각각 나눠 주는 대로 기업을 얻어서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밭을 갈고 일구면서, 또는 양을 기르면서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소출의 십일조를 내어서 레위 사람에게 줘라.’ 하셨습니다. (민 18:21~24) 또 각 지파별로 따로따로 흩어져서만 살 것이 아니라 흩어져 살면서도 적어도 일 년에 세 번은 여호와 앞, 곧 그 이름을 두신 곳인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절기를 지키며 같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의식을 길러라 하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경비는 십분의 일을 내어서 행해라 하셨습니다. (신 16:16, 17; 14:22~27) 또 고아나 과부, 가난한 자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위해서 3 년마다, 해마다가 아니고 3 년에 한 번씩 십분의 일을 내어서 그들을 돌봐라 하셨습니다.(신 14:28,29) 십일조 제도를 생각할 때는 이런 것들을 놓고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명하신 이 십일조 제도에서 크게 배울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레위인이 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의 소유나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없었습니다. 레위인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전부 제거했다고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레위인은 열한 지파 없이 자기들만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따로는 존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믿음도 전혀 상관없이 먹고 사는 것만 위주로 한다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 같이 그냥 먹고 마시고 마음대로 살고 그렇게 하기로만 하자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징은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자기들이 구원을 받은 그 목적대로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반드시 이 레위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에 서로 공동의 의식을 가지고, 공동의 신앙을 가지고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모일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제물을 다 준비하는데, 그것은 경비가 많이 드는 일이므로 자기 소득의 십일조를 내어서 그 일을 힘써 해야만 통일된 거룩한 백성으로서 유지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서 자세히 보면 각 지파별로 따로따로 살림하고 자기들끼리 행동할 가능성이 많이 있었고, 사실, 역사상 그렇게 된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일 년에 세 번 내 앞에 모이라.’ 하신 데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우리가 한 백성이다. 한 하나님께 동일한 구원을 받은 한 백성으로서 우리가 가야 할 하나의 목표가 있고 가야 할 길이 있으며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해마다 그치지 않고 경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두 지파가 따로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백성이 되도록, 큰 힘을 거기서 발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지파 간에 대립해서 어떤 때는 싸우기도 하고, 서로 시기하고 다투기도 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한 아버지 밑에서 지내면서 서로 시기하고 나중에는 동생을 팔아먹기도 한 일이 있었던 같이 부족이 서로 연합해서 큰 하나를 이뤄 사는 그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지파하고 저 지파하고 칼을 들고서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연합케 하지 아니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이와 같이 나눠 가지고 시기하고 다투고 전쟁하고, 그래서 나라가 안 되게 됐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각각 열두 지파가 따로따로 살림할지라도 일 년에 적어도 세 번은 여호와 앞에 그들 공동의 하나님 앞에 와서 함께 여배를 드리면서 절기를 함께 지내라. 유월절, 오순절, 또 장막절에 그렇게 해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 같은 백성이라는 것, 같은 신앙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길러가게 됐던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부지런히 농사해서 소득이 나오면 거기서 십분의 일을 거기다 쓰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써야만 통일된 거룩한 백성으로서 자신들을 유지하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또 의지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봐야 그 백성이 다 같이, 뒤처지는 사람이 없이, 생존 경쟁이 심한 다른 나라와 달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 십일조 제도에서 이런 거룩한 공동체 의식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 율법에 명한 것인데 이것을 배움이 없이 신약 시대에 살면서도 거두절미去頭截尾 하고 십일조라는 말만 뚝 따와 가지고서 교회에서 그 제도를 그냥 사용하려고 하면 무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십일조를 남용하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관한 모세의 법을 남용하고, 또 안식일 제도를 남용해서 주님의 책망을 받기도 했는데, 오늘날 십일조 제도를 남용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따로 모여서 한 나라를 이뤄 사는 것이 아니고 각 나라, 지상의 나라에 살면서, 그러니까 각 나라의 시민으로서 자기 의무와 자기 몫을 하면서, 세금을 다 내면서, 또한 믿음으로 모여 교회 일원으로 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만 충성했습니다. 충성할 다른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바로 자기 나라였고 다 같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가 곧 자기 교회였습니다. 옛날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그랬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점이 다릅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모인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가 똑같이 기업의 분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각각 생활 정도가 다릅니다.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오면 그 생활 정도가 현격하게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야 골고루 다 땅을 분배해 주셨으니까, 대개 고르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빈부의 차이가 없이 균등하게 살았지만, 오늘날은 하나님의 백성들 생활 조건이 그때와 다릅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구약의 제도를 신약에 그대로 적용하면 맞지 않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이 문제에 관한 신약의 큰 교훈은 첫째로 억지로 내지 말라는 것이고, 또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고후 8:12)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했습니다. 이 원칙 하에서 하는데, 있는 대로 한다는 것은 힘써 연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없어도 살 만하니까 낸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있는 대로 낸다.’,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것을 생각하고 성의를 다해 아주 힘써 드리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에 지나치게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힘에 겹도록 하고도 즐거워하고 후회함 없이 연보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두면 교회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다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는 저울로 달듯이, 자로 재듯이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꼭 소득의 십일조를 내야겠다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이 자기 동족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또 이방인 교회들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한번 말도 해보지 못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저 대해를 건너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힘에 겹도록 연보를 해서 보냈습니다. 민족을 초월해 하나님의 하나 된 백성이라는 인식이 그들 속에 들어왔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정신이 충분히 발휘됐던 것입니다. 넘치게 발휘됐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은 모습과 율법의 내용을 살펴볼 때, 구약 시대에도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으로서 얻는 풍성한 내용의 구원이고 개인주의적인 구원이 아닌 것을 우리가 배웁니다. 예나 오늘이나 하나님 구원의 내용은 동일하게 풍성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 나라로, 주의 일을 우리 일로 여기는 사람이 교회의 이런 필요를 느끼고 즐거이 그 짐을 질 것입니다. 오늘날도 십일조의 뜻은 살아 있고 신약의 백성도 십일조 정신은 배워서 지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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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은 이와 같이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개인주의가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은 이처럼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하면서 이런 풍성한 구원의 내용을 모르면 우리 주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 될 것입니다.
***1991년 1월 28일 한국기독대학인회(ESF) 초청 강설, 최낙재 [구원이란 무엇인가](서울: 성약출판사, 1993) 61쪽~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