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는 장로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장로교인들에게 익숙한 이름 외에 한국과 관련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최초로 온실은 1619년 만들어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로 서양에서 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성종 실록에 보면 "1월 어느 추운 날, 연산홍 한 분을 임금께 올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왕은 "제때에 피지 아니한 꽃은 인위적인 것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올리지 마라"(성종실록 13권 왕의 전교 중에서)라는 기록에서 조선의 온실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기록만으로 조선의 온실이 더 오래 전에 있었음을 입증하기에는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2001년에 청계천8가 고서점 폐지 더미에서 책이 한 권 발견되었는데 세조 1459년 경 어의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의 필사본이었다. 이 책은 조리법을 담은 책 이었는데 책의 발견으로 가장 오래된 요리 전문서로 수운잡방(需雲雜方)의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조선의 온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동절양채(冬節養菜)라는 부분에 온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기록해두고 있는데 삼면에 벽을 쌓고 기름종이를 바른다. 남쪽 면은 살창을 달아 마찬가지로 기름종이를 바른다. 연기가 나지 않도록 구들을 잘 놓고, 그 온돌 위에 한 자 반(약 91cm) 높이의 흙을 쌓는다. 아궁이에 가마를 올리고 가마에서 끓는 물의 수증기를 방안으로 들여서 한 겨울에도 6월의 기온을 유지하는 온실을 만든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온실은 하이델베르크 온실에 비해서 170년이나 빠르고 그 기능도 탁월했는데 하이델베르크는 실내에서 난로와 스팀을 통해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다보니 식물이 익어버리거나 결로 현상이 빈번이 발생해 생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온실은 바닥 온도조절에 습도는 천정에 붙인 채광과 통풍이 좋은 한지창으로 인해서 결로 현상 없이 습도를 조절해서 겨울에도 야채를 생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