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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소통과 자아의 문제

소통과 자아의 문제 


노승수 목사


타인에 몸글에 자신의 생각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경청하고 듣는 것이 기본적 매너입니다. 다른 생각이라면 자기 담벼락에 쓰는 게 맞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은 자기 담벼락에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을 두고 자기를 깠다며 노발대발하기도 하던데, 그런 자들은 논외로 하구요. 정상적이며 상식적인 선이라면 소통의 기본은 타인의 생각을 듣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댓글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누구 말에든 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공감하기보다 그가 표현한 특정 단어나 생각에 자기 생각이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화 시에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타인이 이야기하는 중에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내 귀와 마음에 들릴 리가 없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종종 책을 읽다가 어떤 단어에 걸려서 생각이 딴 데로 새는 경우가 있습니다. 머리속으로는 그 생각을 눈으로는 책을 읽죠. 이 경우 백이면 백 모두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타인의 몸글에 자기 생각만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경우만 다를 뿐이지 근본적인 패턴은 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든 인격은 경청에서 출발합니다. 경청이란 매우 수동적으로 보이는 듣기를 적극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hearing과 listening을 구분합니다. 단지 들리는 것과 적극적으로 듣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저 타인의 몸글의 문자만을 읽고 거기서 유발되는 자기 생각들을 떠올리는 사람은 소통이 불가능한 다른 언어의 소유자들입니다. 몸글의 문자만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읽으며 설혹 다른 생각이라도 거기에 반응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그 다름을 포용하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홀의 beyond culture라는 책에 보면 문화를 둘로 나눕니다. 고 맥락 문화와 저 맥락 문화인데, 전자의 대표는 동아시아 문화를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는 미국이나 유럽을 들 수 있습니다. 고맥락 다시 말해서 언어 사용에서 단순하게 팩트를 고려하는 소통이 아니라 관계를 고려하는 소통은 관계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많은 해석과 함의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시아인의 자아가 더 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비대한 자기중심성을 고맥락 안에 숨기는 것이죠. 그래서 타인의 사소한 다른 의견도 잘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의견이 아니라 나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런 자아의 비대화는 도가나 불가의 범아일여 사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자기를 우주적 자아로까지 확장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으면 잘 대답을 못합니다.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에게 말하기에 너무 민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경험들을 통해서 알고 있고 그것을 맥락 안에 감추어 온 것입니다. 영화 사도 세자에서 영조가 사도 세자를 겁박할 때 주로 쓰던 선위 역시 이런 고맥락 언어로 선위라는 액면가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었을 때, 선위로 사도 세자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죠.

그러므로 소통이 잘 되려면 맥락 안에 감춘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드러내고 겸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도 많이 서구화되어서 이제 비즈니스 쪽에서는 이런 고맥락 소통은 거의 없어진 거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 문화 속에서는 고맥락 소통이 있고 교회의 담임 목사 교체 시기에는 이런 고맥락 문화가 분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수많은 오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선 세대의 이해 방식과 뒷 세대의 이해방식이 다른 것이죠.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서는 팩트와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맥락 뒤에 숨겨둔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비대해진 자신의 자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이것이 소통 가운데 줄어들도록 해야 합니다. 소통이 적을수록 내가 비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이뤄져야 하니까요. 그러나 소통이 많아지고 위임이 많아지면 나를 비대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젠 대화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문화와 소통 방식도 변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앞으로 미래 교회는 이런 맥락의 전환이 일어나는 교회만 살아남을 겁니다. 이건 저의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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