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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육의 추동(Treibe, derive)와 영의 추동(affection)

육의 추동(Treibe, derive)와 영의 추동(affection)


노승수 목사 


프로이트는 만 3세부터 오이디푸스기라고 보았다. 리비도라는 생리학적 힘이 자기를 향해서 추동하다가 대상을 향해 추동하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추동은 욕동으로도 번역되며 생의 힘 같은 개념이다. 창세기 2:7에 생령(네페쉬 하야)이라고 불리는 상태는 인간에게만 적용한 단어가 아니라 모든 동적인 생물을 일컫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몸(창 36:6)으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는 영혼(프쉬케)으로도 번역되며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한다. 구약은 몸과 영혼의 통전적 생명체로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데(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이 에너지를 리비도라는 단어로 설명을 한 것이다. 


이 추동의 힘이 대상을 향한 추동으로 옮겨 가면서 자기와 동일시되는 엄마와 달리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서 겪는 경쟁에서의 박탈감이 내사되어 초자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를 두고 경쟁관계를 형성한다. 경쟁에서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훨씬 크고 힘이 센 아빠에 대한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이 때 아빠의 기준들이 자기 안에 내사되는 것이다. 이 내사이론으로부터 현대정신분석의 대상관계론이 발달했다. 시카고 정신분석학파의 알렉산더가 처음으로 프로이트가 설명한 역전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는데, 곧 분석가가 내담자를 향해 가지는 자기 문제로 인한 추동이 아니라 내담자가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으로 설명했다. 이 설명으로 그는 이단자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예컨대, 야단 맞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핵심감정인 어떤 청년이 직장에 취업해서 직장 상사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위축되어 있고 눈치를 보며 질문도 잘 하지 못하고 상사의 질문에 얼버무리듯이 대답하고 고의는 아니었으나 거짓 보고를 자주하게 된다. 이 청년은 어려서 아버지와 갖던 관계를 상사와의 관계에 암묵적으로 투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상사는 아버지와 같지 않고 친절하고 자상한 상사였다. 이 청년을 불러서 잘 가르쳐 주고 중간 점검도 해준다. 그러면 이런 상사의 태도를 보고 자기 행동을 수정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렇게 엄격한 자동성이 부여된 핵심감정은 계속 지속된다. 잘 물어보지 못하니 제대로 일이 될 리가 없고 결국 자기 방식대로 결과물이 나오고 이는 상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 상사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까? 자연스럽게 야단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청년은 다시 한번 자기 세계관을 확인하며 오히려 안도하게 된다. 내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해진다. 청년이 상사에게 전한 방식을 통해서 이 청년이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전해 받았을 방식에 대해서 유추할 수 있다. 


아무튼 내담자가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란 단초로부터 정신 내에 내사된 체계로 대상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프로이트 이후로 수많은 학자들이 밝혔다. 프로이트가 생리학적인 힘라고 한 추동은 결국 정신으로 표상된다. 이 정신표상을 굳이 구분짓자면 자기표상과 대상표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프로이트는 생리학적 힘이라 정의하고 싶어했으나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힘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정서적인 힘이라고 하면 육체와의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앞서 설명한 성경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도 부합한다. 아담은 자기 형상을 닮은 셋을 낳았다(창 5:3).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지었으나 하나님을 결여한 인간은 하나님 표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버지상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왜곡된 추동의 힘은 아마도 바울이 말한 육의 개념과도 유사할 듯하다. 사실 프로이트라 말한 이 추동과 비슷한 개념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이다. 두 지향하는 힘의 차이점은 프로이트의 추동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힘이라는 점이고 에드워즈의 거룩한 감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힘이라는 점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두종류의 상태를 자기 사랑(amour sui)와 하나님 사랑(amour dei)로 설명했다. 프로이트의 추동이론과 그 추동이 결국 정신적 표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은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될 여지가 많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인간 정신의 건강함이란 이 추동의 힘이 빚어낸 자기표상과 대상표상이 적절한 힘의 안배를 이루는 것에 있다고 본다. 대상표상이 너무 큰 사람은 우울과 억압에 시달리고 자기표상이 너무 큰 사람은 권력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내사된 아버지상으로 대상표상과 그것과 맺어지는 내적인 대상관계는 결코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그 근본적 힘이 자기 만족과 적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믿음의 성격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종교성은 이 두 표상의 관계를 터전으로 시작한다. 중생이 타락한 우리 본성 중에 썩지 않을 말씀의 씨를 심는 것인 것처럼,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애굽의 타성을 다 털어 버린게 아닌 채로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의 세력, 달리말하면 죄의 세력을 진멸하는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 왜곡된 자기상과 타자상을 수정해가야하는 영적 전쟁에 직면해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표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버지표상으로 대체했다(창 5:3).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에게 자연스런 귀결이었을 것이다. 화해와 배려, 돌봄과 포용을 의미하는 누가복음 15장이 말하는 탕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경쟁을 시키는 아버지, 곧 탕자의 큰형의 느끼는 아버지상 혹은 둘째 아들의 아버지상, 곧 종의 주인인 아버지상이 탕자의 아버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종교에서 복음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신실하시며 자비하신 아버지의 계시를 전함에도 불구하고 선택적으로 진노와 엄격하신 아버지만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왜곡은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자기상과 타자상으로서 아버지상이 하나님표상과 그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표상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은 회개를 전제로 해야 한다. 탕자의 비참은 돌이킴의 출발점이고 핵심감정을 직면하는 것은 내 불쌍한 영혼을 대면하는 일이며 탕자의 아버지를 만나는 바른 길이라는 점에서 박탈감의 내사는 종교의 단초가 된다.


뇌신경학적으로도 거울신경은 인간이 대상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사역의 반영이기도 하다. 창세 전에 성부와 성자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중재자로서 성령이 계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성령의 보증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른다. 그리고 그분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타자를 반영하는 표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내사적 구조는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마치 삼위 하나님의 상호 내주의 페리코레시스의 관계 속에 존재하시는 것처럼 삼위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사된 카운터 파트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아버지로 물려받은 그 내사된 상이 원형신학이신 그리스도로 바뀌기까지 우리 내면의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우리가 지닌 왜곡된 대상표상의 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표상의 힘보다 크다면 내 믿음이 온전한지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왜곡이 사실 우리 종교의 출발점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계시의 신비와 그 빛은 우리 영혼에 비추고 우리는 점진적으로 우리 경험 속에서 탕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더 실감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추동이 타락한 본성의 추동이 아니라 믿음이 지닌 추동의 힘으로 대체되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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