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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16,17세기와 중세의 심리학

16,17세기와 중세의 심리학

노승수 목사

칼럼이라고 하기엔 많이 허접한 글입니다. 그냥 새벽 예배 후에 마음 속에 떠오른 것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아침에 글을 쓰면서 우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나는 항상 잘 해야 한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이 많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많은 생각들 그것을 주님이 주신 것일 수 있을텐데, 많이 흘려 버린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잘 정리되지 않으면 않은대로 이렇게 흔적을 남겨 보려고 합니다. 나중에 더 잘 정리되면 감사한 일이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주신 은혜에 만족하는 삶을 위해서 라도 그래야 겠습니다. 바로 아래 칸 안에 있는 부분은 신학교 다닐 때, 정리해 두었던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16,17세기와 중세의 심리학_The Psychology of the Middle Ages and of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d
Cf. habitus fidei (믿음의 성향)
habitus (심리적 기질, 또는 성향)
= a way of reckoning with the ability of the mind to know or do certain things
and such dispositions are :
(어떤 것들을 알거나 행하기 위해서 사고 능력을 통해 판단하는 방법으로서,
그러한 기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nnata (inborn) :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타고난
insita (ingrafted) : 이식된, 접붙임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을 통해서 얻게 된
acquisita (acquired) : (자기 노력에 의해서) 획득된
infusa (infused) : 주입된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밖으로부터 주어져서 자기 것이 된)
성경이 말하는 믿음(fidei)는 ‘habitus infusa’이다. 즉, 외부(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나의 것이 된 것이다.
WM 11. 1.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 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LQ 77. 의롭다 칭하심(칭의)과 거룩케 하심(성화)은 어느 점에서 다른가?
답. 비록 거룩하게 하심이 의롭다 하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 곧 의롭다 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리시는 반면, 거룩하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이 은혜를 주입하시어 신자로 하여금 그 은혜를 인하여 옳게 하시는 능력을 주신다. 전자에서는 죄가 용서되고, 후자에서는 죄가 억제되는 것이며,
종교 개혁자들은 당시 팽배했던 ‘반펠라기우스 주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면이 있었습니다. 특히<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거의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행적으로 은혜를 ‘주입’하여 주심으로 그것에 의해서 구원에 합당한 공로인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구원은 사람들이 행한 공로에 의해 좌우되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정돈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은혜라는 용어인데요. 은혜는 신학적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는 사전에 은혜가 주입되었다고 말함으로 이미 어거스틴 시대에 정죄되었던 ‘펠라기우스주의’의 정죄를 빗겨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펠라기우스주의 망령의 부활’인 셈이지요.
이런 까닭에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칭의에 있어서 ‘주입’이란 용어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대로 믿음으로 의를 ‘전가’ 받는다고 합니다. 이 의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의이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 전혀 공로가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 이 의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이 때, 종교개혁자들은 특별한 한 가지 설명을 하는데요. ‘믿음’에 관하여는 ‘주입’이란 용어를 사용해서 ‘주입된 습관’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대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신앙 감정론>에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말할 때, 이 거룩한 감정이 바로 ‘주입된 습관’입니다. 중세기와 종교개혁시기에 신학자들은 이런 심리적 상태를 일컫는 용어들을 위에 정리해 둔 데로 4가지 정도로 구분하였고, 특별히 믿음을 성향 혹은 습관으로 이해했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개인 엠블럼에서 사용했던 심장을 받치고 있는 손 모양의 문양은 이 믿음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라틴어 Credo 믿는다는 단어는 심장을 의미하는 Cre 와 주다를 의미하는 Do 가 합쳐진 합성어 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이 엠블럼 주변에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신실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라고 섰던 것이지요. 믿음은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하도록 돕는 도구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칼빈의 핵심 교의였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있는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 그것이 로마서가 설명하는 의의 방식입니다.
칭의를 이렇게 설명하고 나서, 성화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조금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공로를 전가받은 참된 신자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 곧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입 받아야만 우리 삶에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가 가능하다는 방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인죄론과 연관지어서 설명하자면, 원죄의 문제에서 죄책의 문제는 칭의를 통해서 부패 곧 죄의 세력의 문제는 성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대요리 문답 77문이 말하듯이, 칭의를 통해서는 죄가 용서되고 성화를 통해서는 죄가 억제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미 정의를 했던 바,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동이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 은혜를 얻을 외적 방편을 주신 것이지요. 소요리 문답 88문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소88.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을 전하는 표현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는 표현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은 그의 규례인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의미하며 이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효력이 있는 것이다.
신자가 성령을 선물로 받고 그 성령님의 죄를 억제하며 죄의 세력을 파괴하는 활동을 더욱 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 점차 신자다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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