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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습관으로서 세계관

사람은 행동만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도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다. 대니얼 카너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말하는 인지적인 지름길로서 휴리스틱(heuristic)은 어떻게 형성될까? 예를 들어, 새벽에 일어나 엄마를 깨우지 못해서 방 한켠에서 소변을 본 6살 짜리 여자 아이가 엄마를 깨울 수 없었던 것이 휴리스틱이다. 아이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 어떤 것이 되고 어떤 것이 안 되는지에 대한 편향(bias)을 가지게 된 것이다.

벼룩은 보통 자기 몸 크기에 수십배의 높이를 뛰어 오른다. 보통 1미터 이상을 뛰어 오른다. 그러나 벼룩을 병에 넣고 유리로 덮어두게 되면 벼룩은 반복해서 뛰다가 여러 번 부딪히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부딪히지 않는 높이 그러니까 유리천정보다 낮은 높이로만 뛰어오르게 된다.

벼룩이 이렇게 적응하는 신체적 적응이 사람의 마음에서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인지적으로도 일어난다. 그러나 이 인지의 과정은 단지 인지의 과정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6살 여아가 엄마를 깨우는 것에 도전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엄마를 깨울 때 닥치게 되는 정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른들의 눈에는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그것으로부터 정서적 타격을 입었고 그런 종류의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휴리스틱과 그것이 빚어낸 편향 속에 갇혀서 산다. 그리고 이런 편향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라캉은 이런 세계를 세 개로 설명했다.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다.

상상계는 언어라는 상징이 있기 전에 아이가 경험하는 정신적인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은 프로이트의 용어로 옮기면 1차 과정 사고이며 정서나 이미지 형태를 취하고 특정 정서는 특정 이미지로 압축 되어 저장되고 이 이미지는 다른 것으로 쉽게 전치된다.

상징계는 이런 상상들이 기표로서 언어로 발달한 결과다. 개인들이 쓰는 다양한 언어적 함축은 1차과정 사고를 넘어서 2차과정 사고로 발달하고 논리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쌓인다. 그러나 그 기표가 의미하는 기의는 1차과정 사고의 상상계의 이미지들로부터 유래한 것이어서 사고 자체가 평향적일 수밖에 없다.

실재계는 이런 기표와 기의로서 구성된 한 유기체가 대면하는 세계로서 지젝에 의하면 이것은 물리적 세계와는 다르다. 그렇게 편향의 렌즈를 가진 채 실재계에 발을 딛는다. 우리가 만나는 이 세계는 다양한 휴리스틱이 빚어낸 편향의 결과다.

예수께서도 내 눈에 들보를 먼저 보고 나중에 티를 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지닌 편향들 속에서 인지적 지름길을 찾았던 우리 정서들이 과거에는 사실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사실이 아닌 내가 세계에 덧씌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채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정립해도 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하부구조인 무의식적이고 편향적인 우리 삶의 자리가 삼위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 기독교적 세계관 역시 굴절될 수밖에 없다.

최근 안타깝게도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서 둘로 갈라졌다. 같은 기독교인이면서 같은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 정치적 편향이 둘을 하나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지성적 운동이기 이전에 우리 욕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건설되고 그 위에 상부구조로서 기독교 세계관을 건축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참된 믿음을 거룩한 감정에 있다고 할 때, 이 정서는 일종의 애착이자 욕망이다. 그리고 이 욕망이 극도로 활성화된 상태를 의지와 지성이라고 설명한다.

습관에서부터 달라지지 않고 단지 아카데믹한 것으로서 기독교가 서 있은 것이 오늘 한국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색깔을 입은 원인이다. 과거 불교나 유교가 그런 전철을 밟았던 것처럼 그런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삶과 가정의 삶이 다르고 신앙은 교회라는 자루에 담긴 소금이며 직장과 가정에서의 습관과 교회에서 보이는 삶의 형태가 다른 것이다. 교회에서는 교육받은 대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습관이 바뀌는 교육이 아닌 까닭에 수많은 제자훈련과 부흥은 사사시대의 나선형 하강의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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