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판단하소서"
본문 : 시편 26편
본문 : 시편 26편
노승수 목사
정말 오랜 만에 블로그에 목회강단을 올리는군요. 오늘도 담임 목사님께 전화가 와서 수요일 저녁예배를 부 탁하셨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목사님의 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시편 26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에 앉아 26편의 말씀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합니다.
본문 번역(사역)
1 주님,나를 판결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 주님, 나를 검사하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1)과 마음을\제련하여 보십시오.\ 1) 직역 : 콩팥
3 나주님의 인자하심이 내 눈 앞에 있었고,\
나는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4 나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함께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5 나는 악인들의 모임을 싫어하고,\
그들과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6 주님, 내가 손을 씻어\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7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8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내가 사랑합니다.\
9 나의 이 목숨을\죄인의 목숨과 함께\
나의 이 생명을\살인자2)들의 생명과 함께\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2) 직역 : 피의 사나이들
10 그들의 손에는\음란한 우상을 들고 있고,\
그들의 오른손은\뇌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1 그러나 나는\올바르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12 주님, 내 발이 옳은 자리3)에 굳게 서서,\ 3) 직역 : 평지에, 혹은 평탄한 곳에
예배하는 모임에서\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본문의 이해
본문은 지난 번 다루었던 시편 4과 같이 기도시에 해당합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본문의 주제는 1절과 11절에 나오는 "완전함에 행함"이란 표현입니다. 여기서 완전함이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완전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문자적 번역인 NASB나 KJV은 intergrity로 번역합니다. "흠없음" 혹은 "본래의 모습"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원어는 톰(tom)인데, "온전함, 순전함"의 의미를 갖습니다. 톰은 온전한 삶을 이루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옳은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감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걸어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walk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 걷는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
본문의 구조는 크게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은 마지막 11-12절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완전함에 행하다'는 구절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5절의 악인들을 '미워하다'와 8절의 여호와의 성전을 '사랑하다'가 대조를 이루며, 6절의 무죄의 '손'과 10절의 악인의 '손'이 대조를 이룹니다. 또 1-3절에서는 '행하다' 가 4-5절에서는 '앉다'가 라는 동사의 대조가 눈에 뜨입니다. 뿐만 아니라 5절의 악인들의 '무리'와 12절의 의인의 '회중'이 의미상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락
이부분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글들을 읽었는데, 대체로 1-3절, 4-5절, 6-8절, 9-12절로 전체를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내용상의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적은 본문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에 있고, 보다 간단한 구조를 원해서 독일성서공회가 발간한 독일어 성경이 구분한 구분지를 따랐습니다.
1-2절 : 도입 및 전체 주제에 대한 간구
3-8절 : 기도자의 결백을 주장하는 탄원
9-12절: 범죄자들과 무관함에 대한 탄원
본문 주해
1-2절 :
1절과 2절은 26편 전체의 주제를 설명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주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온전히 행하였음을 주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셔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알아보시라고 간구한다.
특별히 개역성경에 뜻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문은 우리의 콩팥을 의미하는데, 구약 성경의 인간관에 따르면 염통과 마찬가지로 콩팥도 육체적인 기관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움직이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염통'(또는 '마음')이 생각과 결단의 자리로 통한다면 '콩팥'은 감정이나 양심의 자리이거나 자기의 가치를 가장 깊이 느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알아보신 것처럼 지금 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의 깊은 것을 하나님이 알아보시고 그것을 살펴주시길 간구합니다. 다윗의 간구는 예레미야 20:12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이것은 지금 다윗이 몹시도 곤란하고 억울한 상황에 놓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형편에 처했을 때,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형편을 아뢰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봐달라고 청원하고 있습니다.
[적용] 나는 내 삶에 어려움이나 오해 등을 당해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에게 하소연 합니까? 아니면 진실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까?
3-8절 :
다윗은 곧 바로 믿음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어렵고 억울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예화] 이 본문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식사 중에 하나님이 참 좋은 예화를 주셨습니다. 점심시간이라 상담실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노상헌 목사님의 가정에서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식사시간에 무밥이 나와서 목사님의 맏아들이 사모님께 불평을 늘어놓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해석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현재가 좋으면 과거의 아픔도 아름답게 해석되고 현재가 나쁘면 과거가 나쁘게 해석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과거를 해석하는 레퍼런스라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들으니 참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2% 정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현재가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레퍼런스라면 그것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곰곰히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생각해보니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불신자는 현재를 자신의 과거를 해석하는 레퍼런스로 삶는다면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현재의 삶을 해석하는 레퍼런스로 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보니, 다윗이 딱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용] 다윗은 억울한 형편에서도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레퍼런스를 자신의 현재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두었고, 그러기에 이와같이 억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현재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이렇게 선택할 수 있었던 까닭이 4절 이하에서 나옵니다.
4절 :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않았습니다. 간사한 자와 동행치 않았습니다.
5절 : 그는 행악자를 미워했고, 악한 자와 앉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4절과 5절의 주요한 반복은 앉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도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음이 복있는 자의 특징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에 익숙해 진다는 누앙스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죄의 습관을 일컫는 문학적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죄된 습관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죄된 습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허망한 사람 : 거짓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NIV는 사기꾼들로 번역했고, 쿰란 사본들에서는 '외식자'로 번역이 됩니다. 왈키라는 신학자는 히필형 단어로 해석해서 '그들은 자기 길을 감춘다'로 읽었습니다. 한 마디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 쟁기를 손에 쥐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앉지 않고 동행치 않는다 : 이 두 단어는 4-5절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앉지 않는다는 지속적 완료형으로 인격적으로 받아주고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된 사람을 인격적으로 용납하고 그와 지속적 교제를 하지 않았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동행치 않다에서 동행은 기본적으로 '들어가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다. '교제하다' , '친분을 나누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동사는 미완료형태여서 교제와 친분이 지속되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용] 혹시 내게 이런 부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거짓을 증오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허망한 사람과의 지속적 교제는 우리 영혼을 패망케 할 것입니다.
6-8절은 이 허망한 자와 다른 기도자의 5 가지 믿음의 행동들을 설명합니다.
1. 손을 씻고
2.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3.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4.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고
5.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
1. 손을 씻고 : 구약 성경에서 손을 씻는 행위는 다양한 정황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손을 씻었습니다(시 24:4) 아마도 이 의식은 성전 입장의 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시 73:13) 두번째는 제사장 임직의 결례(출 30:19ff)이고, 세번째는 정결 맹세(왕상 8:31-32) 등등인데 본문의 문맥상 자신의 결백함을 증거하는 기도의 문맥에서 보자면, 무죄함을 호소하는 손씻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내어주었던 빌라도도 이런 문맥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씻는 행동은 자신의 정결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적용] 참으로 믿음의 자녀는 삶이 정결해야 합니다. 정결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보듯이, 주의 진리 중에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담대함을 가지고 탄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연약하여서 날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바로 그 삶을 교정하는 행위를 손을 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라고 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뉘우치지만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과연 나는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말씀에 의해 정결한 삶을 살기로 선택합니까?
2.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 이 구절의 해석은 분분하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에 따라 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 18:26)
열왕기 말씀에 의하여 보자면, 기도의 응답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께 제사 곧 기도를 드린 후에 이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뒤집으면 우리 삶에 낙심할 만한 일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설명드린대로 자신의 현재를 래퍼런스 삼아 과거를 해석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낙심과 희망의 희비가 교차할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그런 점에서 낙심치 않는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3절의 설명처럼 주의 인자하심이 늘 목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주의 단에 두루 다님은 그러므로 믿음의 기도를 가르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에 래퍼런스를 두지 않고 자신의 장래에 래퍼런스를 두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과 한 알 안의 씨는 헤아릴 수 있지만 씨 하나 안에 있는 사과는 헤아릴 수 없는 법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가능성을 보는 눈이며 주의 단을 두루 다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결심의 권유법'으로 '두루 다니겠습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즉, 다윗은 두루 다닌 것보다 두루 다니길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가요?
3.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 새번역(2001)은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 응답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본문의 누앙스에 '큰 소리로'라는 누앙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란노의 우리말 성경, 아가페 쉬운 성경, 그리고 카톨릭의 새성경도 이런 누앙스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의 표현은 감사입니다. 앞의 두루 다님이 '결심의 권유법'이듯이 감사의 소리 또한 그런 누앙스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1-2절에 보았듯이 다윗은 억울함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감사의 노래를 주의 인자하심을 신뢰함으로 소리 높여 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고 : 기인한 일은 이스라엘이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선언합니다.
[적용] 나는 주의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5.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 : 5절의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 그러므로 여기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은 물리적 성전을 사랑하는 것보다 12절에 설명하는 '회중' 곧 '의인의 회중'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의 첫 본질은 바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표지임을 설명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성전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교회의 지체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에 대한 애정과 예배당에 대한 애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말은 성전을 금으로 치장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내가 주의 교회를 사랑한다면, 마치 우리가 집안 일을 하듯이 교회의 여러 형편들을 돌아본다는 말입니다. 집에서는 깨끗이 치우고 청소도 하면서, 교회에서는 아무렇게나 어질러두고 그것을 보고도 전혀 치울 마음이 없다면 그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지체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쓰는 여러 모임의 장소들에 대해서 구비하고 돌아보며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우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계신 성전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9-12절 :
9-12절은 1-2절의 확대해석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1절의 나를 판단하시라는 말씀은 9절의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시라는 간구입니다. 10절은 이 악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악특함과 뇌물이다. 악특함은 매춘과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뇌물로 공의로운 판결을 굽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는 자인지 뇌물을 주는 자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판결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는 뇌물을 받는 자 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속을 구합니다. 긍휼히 보시길 간구합니다. 12절의 평탄한 데는 올바른 데를 가리킵니다. '섰사오니'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3-8절의 결심과 믿음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다윗을 평탄하고 바른 곳에 세우신 하나님을 송축함으로 시를 마무리 합니다.
[적용]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저자가 자신의 옳음을 강변하는 것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과 함께 하지 않는 것도, 살인자와 함께 하지 않는 것도 그 발이 평탄하고 옳은 곳에 서게 되는 것도 자신의 완전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그러기에 주님을 송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만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3절)과 긍휼하심(11절)과 구속하심을 결과 자신이 온전히 말씀 가운데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내 생애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사람의 본성에는 일이 틀어질 때, 삐뚤어지려는 심성이 존재합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인생을 막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만한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과 그 구속에 래퍼런스를 두고 재해석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며 진정한 기도입니다. 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2009. 3.31.
10;30 담임 목사님과 통화하다.
11:00 시편 26편을 전하기로 기도 가운데 정하다.
13:10 뉴라이프 상담실 식사하러 잠깐 중단하다.
13:33 식사후 다시 시작하다. 식사시간에 귀한 은혜의 자료를 주심에 감사하며...
15:00 극동방송 김대은 PD와 방송출연 문제로 잠시 통화하다.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 출연 제의를 거절하다.
15:24 초고를 완성하다.
15:43 여러 번역본들을 참조하여 사역하다.
15:48 원문을 살펴 사역에 각주를 달다.
15:52 내담자가 와 설교 작성을 일시 중단하다.
17:09 다시 설교 작성을 시작하다. 시간이 별루 없다. 저녁에는 두란노 강의 내일 오전, 오후에는 안산 동산교회 강의가 잡혀 있어서 강의 준비도 겹쳐 있다. 주여 도우소서~~
17:25 두란노 기독상담학교 강의 준비 및 이동을 위해 설교 작성을 중단하다.
2009. 4. 1.
8:23 일부 수정하다.
1. 손을 씻고
2.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3.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4.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고
5.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
1. 손을 씻고 : 구약 성경에서 손을 씻는 행위는 다양한 정황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손을 씻었습니다(시 24:4) 아마도 이 의식은 성전 입장의 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시 73:13) 두번째는 제사장 임직의 결례(출 30:19ff)이고, 세번째는 정결 맹세(왕상 8:31-32) 등등인데 본문의 문맥상 자신의 결백함을 증거하는 기도의 문맥에서 보자면, 무죄함을 호소하는 손씻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내어주었던 빌라도도 이런 문맥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씻는 행동은 자신의 정결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적용] 참으로 믿음의 자녀는 삶이 정결해야 합니다. 정결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보듯이, 주의 진리 중에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담대함을 가지고 탄원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연약하여서 날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바로 그 삶을 교정하는 행위를 손을 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라고 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뉘우치지만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과연 나는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말씀에 의해 정결한 삶을 살기로 선택합니까?
2.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 이 구절의 해석은 분분하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에 따라 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 18:26)
열왕기 말씀에 의하여 보자면, 기도의 응답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께 제사 곧 기도를 드린 후에 이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뒤집으면 우리 삶에 낙심할 만한 일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설명드린대로 자신의 현재를 래퍼런스 삼아 과거를 해석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낙심과 희망의 희비가 교차할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그런 점에서 낙심치 않는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3절의 설명처럼 주의 인자하심이 늘 목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주의 단에 두루 다님은 그러므로 믿음의 기도를 가르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에 래퍼런스를 두지 않고 자신의 장래에 래퍼런스를 두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과 한 알 안의 씨는 헤아릴 수 있지만 씨 하나 안에 있는 사과는 헤아릴 수 없는 법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가능성을 보는 눈이며 주의 단을 두루 다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결심의 권유법'으로 '두루 다니겠습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즉, 다윗은 두루 다닌 것보다 두루 다니길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가요?
3.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 새번역(2001)은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 응답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본문의 누앙스에 '큰 소리로'라는 누앙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란노의 우리말 성경, 아가페 쉬운 성경, 그리고 카톨릭의 새성경도 이런 누앙스로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의 표현은 감사입니다. 앞의 두루 다님이 '결심의 권유법'이듯이 감사의 소리 또한 그런 누앙스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1-2절에 보았듯이 다윗은 억울함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감사의 노래를 주의 인자하심을 신뢰함으로 소리 높여 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4.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고 : 기인한 일은 이스라엘이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을 선언합니다.
[적용] 나는 주의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5.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 : 5절의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 그러므로 여기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는 것은 물리적 성전을 사랑하는 것보다 12절에 설명하는 '회중' 곧 '의인의 회중'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교회를 사랑하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의 첫 본질은 바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표지임을 설명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성전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교회의 지체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에 대한 애정과 예배당에 대한 애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말은 성전을 금으로 치장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내가 주의 교회를 사랑한다면, 마치 우리가 집안 일을 하듯이 교회의 여러 형편들을 돌아본다는 말입니다. 집에서는 깨끗이 치우고 청소도 하면서, 교회에서는 아무렇게나 어질러두고 그것을 보고도 전혀 치울 마음이 없다면 그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지체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쓰는 여러 모임의 장소들에 대해서 구비하고 돌아보며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우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계신 성전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9-12절 :
9-12절은 1-2절의 확대해석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1절의 나를 판단하시라는 말씀은 9절의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시라는 간구입니다. 10절은 이 악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악특함과 뇌물이다. 악특함은 매춘과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뇌물로 공의로운 판결을 굽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는 자인지 뇌물을 주는 자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판결과 연관지어 묵상할 때는 뇌물을 받는 자 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속을 구합니다. 긍휼히 보시길 간구합니다. 12절의 평탄한 데는 올바른 데를 가리킵니다. '섰사오니'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3-8절의 결심과 믿음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다윗을 평탄하고 바른 곳에 세우신 하나님을 송축함으로 시를 마무리 합니다.
[적용]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저자가 자신의 옳음을 강변하는 것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과 함께 하지 않는 것도, 살인자와 함께 하지 않는 것도 그 발이 평탄하고 옳은 곳에 서게 되는 것도 자신의 완전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그러기에 주님을 송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다만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3절)과 긍휼하심(11절)과 구속하심을 결과 자신이 온전히 말씀 가운데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내 생애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사람의 본성에는 일이 틀어질 때, 삐뚤어지려는 심성이 존재합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인생을 막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만한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과 그 구속에 래퍼런스를 두고 재해석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며 진정한 기도입니다. 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2009. 3.31.
10;30 담임 목사님과 통화하다.
11:00 시편 26편을 전하기로 기도 가운데 정하다.
13:10 뉴라이프 상담실 식사하러 잠깐 중단하다.
13:33 식사후 다시 시작하다. 식사시간에 귀한 은혜의 자료를 주심에 감사하며...
15:00 극동방송 김대은 PD와 방송출연 문제로 잠시 통화하다.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 출연 제의를 거절하다.
15:24 초고를 완성하다.
15:43 여러 번역본들을 참조하여 사역하다.
15:48 원문을 살펴 사역에 각주를 달다.
15:52 내담자가 와 설교 작성을 일시 중단하다.
17:09 다시 설교 작성을 시작하다. 시간이 별루 없다. 저녁에는 두란노 강의 내일 오전, 오후에는 안산 동산교회 강의가 잡혀 있어서 강의 준비도 겹쳐 있다. 주여 도우소서~~
17:25 두란노 기독상담학교 강의 준비 및 이동을 위해 설교 작성을 중단하다.
2009. 4. 1.
8:23 일부 수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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