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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노승수 목사
시편은 몇가지 장르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장르는 선택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예컨대, 액션 영화의 문법과 이야기 전개와 드라마의 문법과 이야기 전개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그 장르의 이해는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나 음악을 감상할 때 전개되는 이야기 혹은 선율과 tomif에 의해 극적 긴장감과 음악적 긴장감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 127편은 교훈시에 해당합니다. 1, 37, 49, 119, 127, 133등이 시편에서 나타나는 교훈시들입니다.
이러한 교훈시들에서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에서 율법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시편 1편 같은 경우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의인 곧 복있는 자라고 증거합니다. 시편 119편에서도 율법에 대한 사랑은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애정과 함께 묵상되는 율법은 은혜의 무진장한 근원이 됩니다. 시편 작가들은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선포하며 인과응보를 주로 다룹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통적인 가르침과 항상 들어맞지 않는 것이 보통이죠? 예컨대, 악인들이 성공하고 의인들이 실패한다든지, 악인들을 이 땅을 사는 동안 떵떵거리며 살고 죽을 때도 평온합니다. 이에 반해 의인들은 갖은 고난과 어려움과 가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의 여러가지 왜곡이 가져다 주는 불일치로 인해서 신앙인들은 마음이 괴롭습니다. 몇몇 시편의 작가들은 신앙의 위기를 거의 절망으로 몰고 가면서 고통을 통해서 연단되어서 그들의 생각과 감성을 순결케 하고 성화시켜가는 것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시편 127편은 이런 교훈시적인 배경 특히 성도가 겪는 여러가지 환난이나 좌절 그리고 절망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27편 표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의 노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70인역과 제로니모는‘계단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개역 성경은'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해서'계단'이란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120-134편에 이르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계단의 의미보다'return home'곧'순례의 노래'의 성격이 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 삼차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노래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순례는 하늘의 도성에 대한 성도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소망이 이 땅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올 새 예루살렘 곧 하늘의 도성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 가운데 1년 3차에 걸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추수의 절기이지만 추수는 가난에 들어가서 농경을 하면서 얻게된 의미이고 보다 본질적 의미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하여 준 절기로 유대인들은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교절에 출애굽하고 만 1년 만에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유하다 율법을 받아 내려왔으니, 칠칠절은 거의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전해준 날짜와 일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은 농경에 의한 추수가 없었음으로 이 율법 수여의 절기가 더 적절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또한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 곧 7월 10일 일년 일차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함을 받은 후에 7월 15일부터 지내는 절기로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이에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원하신다면, 제가 한 설교"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제입니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1년 3차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며, 육의 양식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양식에 소망을 두는 삶을 강조하는 절기동안에 부르던 노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표제에 보면 이는'솔로몬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적인 키(Key)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내용은 본문을 살피면서 차근차근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무엇입니까?'헛되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것도 성을 지키는 것도 수고하고 고생하는 일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헛되다는 표현을 대하면 우리는 전도서의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고 이 글의 저자 역시 솔로몬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일생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지혜와 부와 권력, 그리고 수많은 아내들,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노래하길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자는 이르기를 그러기에 노년이 속히 이르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이 시편 역시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대부분 이런 일들입니다. 자신의 집을 세우는 일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혹은 성을 지키는 것 곧 권력을 얻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밤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호와 경외함이 없이는 다 허사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 무수한 노력을 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다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무위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지나치게 이런 세상일에 집착하는 것은 경건한 자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품어야 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 후반부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후반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였으니 응당 앞의 1절과 2절 상반절과 원인결과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 추구가 헛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의 삶의 특징을 기술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두 가지를 해석해야 하는데 첫째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이고 둘째는 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은 솔로몬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5)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범죄함으로 그 자녀가 죽는 벌을 당하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주신 아들이 솔로몬이었고 그가 태어났을 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이고 그를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여디디야로 불렀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예디드는 주로 여호와의 사랑을 크게 받는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혹은 유다) 민족과, 개인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사랑은 사랑 받는 백성들에게 보호(베냐민, 신 33:12)와 번영(시 127:2)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표현은 보호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세상의 번영보다 우선한다는 표현인 셈입니다.
두번째는 잠을 주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선 문맥들 곧 1-2절 상반절의 내용과 연관해서 해석될 수 있고 둘째는 뒤의 문맥들 곧 3-5절의 내용과 연관해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앞선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잠이란 집을 세우는 수고, 성을 지키는 수고, 일찍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을 먹는 수고와 고생에 반대되는 비유개념으로서의'잠'입니다. 이 경우 잠은 안식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식케 하십니다. 안식은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더더욱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라는 점에서 잠은 안식으로 특별히 구원의 개념으로 더더욱 해석되어야 합니다. 안식한다는 것은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안식한다는 것은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주일성수를 구약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오늘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다른 것을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경륜을 역사속에 보이셨을까요?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골 2:16-17). 그러므로 오늘날의 안식의 의미는 일을 쉬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왜 일을 쉬어야 합니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대한 주제임으로 제가 다시 다른 설교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식케 하십니다. 주일은 우리가 오락을 그치고 주의 말씀을 읽으며 그날 들을 주일의 설교를 묵상하고 되샘질 하는 일들로 시간을 보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 그의 구원함을 위하여 택정하신 자들에게 안식의 잠을 주십니다.
둘째, 이 잠은 후 문맥과 연관하여 해석되어지는데 후문맥의 핵심 키워드는'자식'입니다. 3절에'자식'과 그 비유 관념인'태의 열매'가 나오고 4절에도 자식이, 5절에는 자식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이것'이 등장합니다. 비유관념과 대명사까지 포함하여 총 4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개념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수고의 헛됨과 잠을 이야기 하다가 느닷없이 자식이야기를 할까요? 문맥이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자식이야기 일까요?
이것과 잠은 그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잠은 여기에서 부부관의 은밀한 사랑의 행위에 관한 비유관념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의 결과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많은 약속의 자녀들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으로 읽어야 합니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네 자손의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언약이 여기에서도 유효한 것입니다. 왜 많은 자녀가 축복입니까? 거기에 언약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이루려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명예, 권력, 그런 일들의 추구가 헛됨을 말하고 참 경건한 성도들은 가정 생활에 충실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참된 기초가 부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한국 사회의 많은 가정은 가정의 기초가 부부가 아니라 엄마와 아들 혹은 엄마와 딸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어오는 기계 취급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이며 부부간에 아름다운 사랑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가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가정들은 부모 자식관계가 너무 결속이 심하여서 결혼 후에도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못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이 가정 생활의 위기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고부갈등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가정의 건강한 기초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줍니다. 동시에 많은 자녀들은 약속의 자녀임으로 이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통해서 미래를 보지 않습니까?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려서 못 먹었다면 먹는 것은 마음 껏 먹게해주려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그럼 신자들은 이 자녀들을 통해서 어떤 미래를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 시편이 순례자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자입니다. 진정한 영적 노마드 인 셈입니다. 유랑자는 그 땅에 정착할 자처럼 땅의 것에 집착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축복이 되려면 우리 안에 이러한 일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의 헛됨을 깨닫고 하늘의 소망을 두는 신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2008년 11월 19일 현산교회 수요 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