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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신자의 성품

신자의 성품 


노승수 목사 


성품이라고 하면, 다정함, 환대를 잘함, 인간관계를 잘 맺음, 감사 표현을 잘함 등등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좋은 사람이란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누구에겐 안 좋은 사람일 수 있다. 좋은 성품이란 환대의 대상이 관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조윤선은 박근혜에게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 좋음이 자기 직무를 벗어나서 온갖 불법에 가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목사에게 너무 좋은 성도들이 많다.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에게 좋기 위해서 원칙을 저버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우리가 말하는 사람 좋다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 나라를 부패 국가로 만들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아는 누군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로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성경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대하는 것을 자주 본다. SNS 상에 인상과 면대면 해서 풍기는 것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참된 신앙적 성품은 말씀에 닻을 내린 삶이다. 그가 보인 환대는 그와 관계 때문에 보인 환대가 아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만 도둑도 자기 자식이 생선을 달라 할 때, 뱀을 주지 않는 법이다. 누구한테 잘하는 것으로 그가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성품의 열매를 드러나지만 그가 보이는 환대와 배려, 사랑과 헌신은 말씀에 닻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율법은 십계명을 근거로 보이는 환대이며 배려이다. 잘못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품위있게 거절하고 권고하며 권계한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며 그를 욕하기보다 위해서 기도한다.


어떤 사람은 윗 사람에게 매우 좋으나 아랫 사람에게 매우 나쁜 사람도 있다. 그가 윗 사람에게 좋은 것은 윗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이며 그의 가려운 것을 긁어줌으로 자신이 얻게 될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 윗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해서 편견이 없으며 공평정대하게 대한다.


우리 문화의 상호의존적 경향은 이런 부패의 실질적 온상이 되었다. 그리고 부패를 좋은 것이라고 포장했으며 그것이 교회에서도 좋은 성품이라고 유통되었다. 그리고 말씀에 신실한 누군가를 꼰대로 보며 앞뒤가 꽉막힌 보수 꼴통이라고 보았다. 참된 신앙적 성숙은 그런 점에서 주체적이어야 한다.


며칠 전 만난 CCC 자매가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상사가 "경상대는 좀 그렇지 않아"라고 물어왔을 때, 자신이 경상대 출신이었지만 상사의 그 편견에 대해서 그가 무안해 할까봐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게 우리 문화의 배려깊은 상호의존성이다. 물론 이 자매는 좋은 의도로 상대가 무안할까봐 그랬지만 실은 이런 행동으로 상대는 지방대에 대한 편견을 고수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순간 나무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경상대 출신임을 밝힘으로 상사의 그릇된 행동에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상대의 생각을 바꾸려 할 필요가 없다. 단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이 니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음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신자의 좋은 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