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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신학과 동양학

사서 중 중용의 "서"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하늘의 마음은 미약하고 사람의 마음은 위태로우니 오직 하나로 정진하여서 그 가운데를 붙들라 그것이 중용이다.

뭐 대충 이렇게 의역이 가능할 듯 하다. 하늘의 마음이라고 번역해 둔 것은 사실상 성리학의 문맥상 하늘 그 자체의 마음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에서 만나게 되는 하늘의 마음 곧 선한 마음은 미약하고 그 흔적이 희미해서 사람들이 알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그런가하면 사람의 마음은 위태로운데 치우치기 쉽고 죄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하늘의 마음을 성(性)이라고 하고 사람의 마음을 정(情)이라 했다. 그리고 미미하여서 알기 어려운 하늘의 마음의 끝트머리를 사단(四端)이라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들었고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을 칠정(七情)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성리학이 사단칠정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론 논쟁적으로 보면 만물과 마음에서 이치가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주리론과 성정과 같은 기가 주를 이룬다고 생각한 주기론이 있다. 주리론은 회재(晦齋) 이언적과 퇴계(退溪) 이황의 전통으로 계보가 이어졌고 주기론은 화담(花潭) 서경덕과 율곡(栗谷) 이이의 전통으로 그 계보가 이어졌다.

주리론은 서양 철학과 신학으로 보면 주지론 전통의 아퀴나스 계통이며 주기론은 주의론 전통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코투스 계통이다. 퇴계는 이성을 더 중요시 했고 율곡은 의지를 더 중요시 한 셈이다.

아퀴나스에게서 원의는 하늘의 마음에 해당하고 신망애는 그 습관과 덕이 자란 것을 의미한다. 아퀴나스에서 몸은 사람의 마음에 해당하고 열등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해는 퇴계나 이언적의 이해와 닮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을 따르는 개혁파는 원의가 하늘의 마음인 것은 맞지만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우리 의지가 노예적이라는 데 더 초점을 둔다. 그런 점에서 율곡이나 남명 학파의 전통이 개혁파 신학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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