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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실존과 본질(1)

실존주의에서 실존은 존재를 말하고 본질은 존재하는 것의 목적을 의미한다. 보통 자연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예컨대,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는 본질이 있기에 존재하고 책은 읽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이 본질로부터 존재 곧 실존을 유발한다. 자연 만물은 스스로의 본질을 바꿀 수가 없다. 외부적 요인이 아니고서는 그 본질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샤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_1945년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라는 강연에서 최초로 등장)라는 표현은 자연의 이런 구성과는 정반대의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그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본질이 먼저 있지 않고 그저 태어나 존재한다. 어떤 역할이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역할과 목적 곧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이런 방식은 성경과 신앙고백서와 정반대의 진술인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와 선택이라는 점에서 현상적으로 일정하게 실존주의는 우리 상태를 설명하는 지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이 성경적 본질이라고 하더라고 그것을 발견해가는 과정 자체가 실존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죄 때문이고 우리 의지가 죄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실존은 여전히 근대적인 인식론적인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 외부적인 빛인 계시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사실을 적시하는 지점이 있다. 실존이 선택을 통해서 내적인 빛을 통해서 본질에 다가갈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개혁파 신학은 "전적 무능력"이라고 했다.

 

바르트가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객관적 계시의 빛, 곧 본질에 대한 지식이 실존 안으로 비춰지는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그런 것처럼 인간 역시 본질이 그의 실존을 규정해야 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본질로부터 셋의 실존적 인격으로 드러나는 방식과 닮아 있어야 한다.

 

계시는 내 안에 들어와 내 경험적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러하기도 하지만 계시는 우리를 참 신학이요 원형신학이신 그리스도 그 자체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참된 것은 우리 밖의 계시로부터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마이클 호튼은 이렇게 표현했다.

 

"Plato wants us to find ourselves by looking inside ourselves, but the Bible shows that we find ourselves by looking outside of ourselves."

 

호튼의 플라톤에 대한 설명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과 성경을 통해서 우리 본질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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