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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어거스틴 신학

1. 전기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논쟁한다. 쟁점은 마니교의 결정론과 운명론이었다.

2. 이 때문에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이 나온다.

3. 그런데 후기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논쟁이다. 쟁점은 펠라기우스의 극단적인 자유의지론이었다.

4. 이 때문에 어거스틴은 스스로 모순에 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5. 전기를 통해 결정론과 운명론을 논파하기 위해 자유의지론을 매우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6. 그의 천재성은 여기서 드러나는데 그가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자유의지를 루터의 노예의지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실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어거스틴의 유산인 셈이다.

7. 현대 신학과 루터는 이 노예 의지를 "자원함"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사람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죄를 기뻐한다는 것"이다.

8. 그래서 펠라기우스처럼 순종은 구원이고 불순종은 멸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9. 펠라기우스는 구원이 순전히 개인이 한 선택의 문제로 보았다.

10.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면, 사람은 스스로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먼저 선행 은총을 주신다고 했다.

11. 선행 은총과 후행 은총은 이렇게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등장한다.

12. 어거스틴의 문맥에서 선행 은총은 노예의지 상태를 배경으로 하며 당연히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이걸 현대적 문맥에서 읽는 사람은 신학의 역사적 문맥을 간과하거나 모르고 하는 소리다.

13. 이는 마치 어거스틴이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 믿음의 정통 라인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 같은 오류인 셈이다. 이는 사실 재세례파는 주장할 법한 논리다.

14. 어거스틴은 이 선행 은총을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설명한다.

15. 개인이 선택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신학적 개념이다.

16. 아이러니 하게도 전기에서 결정론을 논박한 어거스틴은 예정 교리에 천착하게 된다. 이는 예정론이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는 논외이므로 설명할 기회가 닿을 때 다시 다루기로 하자.

16.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어거스틴의 선행은총은 이런 개념이다.

a.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구원에 선행하는 것으로 믿었다.
b. 그는 인간이 만연한 부패 상태에 빠져 있으며, 은총 없이는 스스로 구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c. 어거스틴은 은총을 통해 인간이 삼위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7. 그에 비해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이렇다.

a. 펠라기우스(Pelagius)는 은총 없이도 인간이 선한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b.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며, 은총 없이도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c. 펠라기우스에게는 은총이 인간의 삶에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봤다.

18. 어거스틴은 우리 구원의 앞과 뒤가 모두 은총의 결과라 믿었고 이는 그의 성경 주해의 결과였다. 그 근거는 이렇다.

a. 선행은총: 시편 59:10에서 "나의 하나님이 (앞서 가서, prevenient)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라는 구절을 통해 "앞서 가는 은총"의 개념을 확보했다.
b. 후행은총: 시편 23:6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는 구절을 기반으로 "뒤따르는 은총"의 개념을 주해적으로 밝혔다.
c. 시편 59:10의 "앞서 가서"라는 구절은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어거스틴은 이를 통해 선행은총의 근거를 마련했고 시편 23:6을 통해 후행은총의 근거를 설명했다.

19. 결론 명백하게도 어거스틴에게 선행은총 교리, 곧 현대 준비 교리의 오리지널이 되는 이 교리는 선행 은총을 불가항력적 은혜로 설명한다.

20. 선행은총은 후에 알미니우스, 웨슬리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문맥상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21. 이처럼 역사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 단어에 대한 개념만 가지고 신학적 글읽기를 하면 문해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22. 이는 마치 중등 영어에서 take 단어가 잡다 취하다는 뜻을 가졌다고 그 보다 폭넓은 영어 문맥에서 모든 take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take가 그 뜻이 다양하듯이 선행은총도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긴 신학의 역사만큼 그 온도차를 이해하면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