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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부활 기독교 신앙의 기초

기독교는 위태로운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것이죠. 1세기 기독교 밖에서 예수와 그 종교에 대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탈루스의 기록은 현존하지 않지만 아프리카누스의 인용으로 그 내용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어둠과 지진이 있었다는 교회 밖의 증언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들은 이를 자연 현상으로 해석하려 시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줍니다.
20세기, 역사적 예수 연구의 유행은 예수의 삶에서 신화를 걷어내고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경의 기적을 사람들의 상식이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단연 이중 으뜸은 그의 부활입니다. 그의 12 제자가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이 스스로 조작한 부활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는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도박 논증을 합니다. 내 인생을 어디다 걸겠는가 하는 것이죠. 신이 있다는 데 걸 수도 없다는 데 걸 수도 있습니다. 있다는 데 걸면 선하게 살게 되며 그것 만으로도 삶이 풍성해지며 사후의 영생 복락을 보장 받습니다. 그런데 없다는 데 걸면 삶이 망가집니다. 지 멋대로 살기 때문이죠. 칸트도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 곧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신을 요청합니다. 세상의 정의와 공정을 위해서 신이 요청된다는 것이죠. 게다가 파스칼의 논변처럼 사후에 심판과 천국이 있다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신을 믿는 데 자기 인생을 걸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거나 거짓입니다. 둘 외 어떤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이라면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짓이라면 지상 최대의 사기 사건이 됩니다. 만약 예수가 이 사실을 알고 의도했다면 사기이고 사실이 아닌데 그리 믿었다면 미치광이가 됩니다. 당시에도 예수를 미치광이나 귀신 들린 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한 가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사실로 받는다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 받고 거짓이라면 이 같은 사기가 없음으로 세상에서 없이 해야 할 종교라는 도전 앞에 서게 됩니다.
그를 향해 어정쩡하게 좋은 선생이라든지, 분위기가 좋아서 교회 간다든지 하는 선택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나는 내 인생을 어디에 걸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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