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 역사로 본 청교도 개혁운동과 회심론
서 론
한국 장로교의 고려파 1세대들 중 박윤선을 제외하고 한상동, 한부선, 한명동, 전영창, 장기려 등은 경건에 관한 글이나 자료를 많이 남기지 않았으나 그들은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경건한 삶을 보면서 가르침을 받고 그 감화 속에 경건과 신학을 익혀 왔던 세대로서 우리는 그들이 남겨준 경건에 대한 유산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우리로 자신을 보지 않고 개혁주의 청교도정신의 열매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로 안내 받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청교도들의 사상을 신앙과 생활로 균형 있게 정리하여 ‘정통’과 ‘순결’이라고 하는 청교도적 색깔의 표지(標識)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청교도정신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청교도의 신앙정신이 도움이 되는가? 청교도들이 주장했던 원리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느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청교도들의 시대상황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성숙함과 진지함 때문에 그들이 제기했던 신앙의 원리들이 지금도 여전히 실질적이고 긴박한 우리들의 문제로 살아 있다고 본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라는 말이 생겨나기 수세기 전 사람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1275-1342)를 비롯해 후스(John Hus, 1372?-1415),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의 성경 제일주의, 브레드포드(John Bradford, 1510-1555)의 외형이 아닌 심령의 경건, 후퍼(John Hooper), 데링(Edward Dering), 그린햄(Richard Greenham, 1535-1594)이 보여준 구원받은 심령의 자유사상,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가 역설한 예배와 목회와 행정에 관한 규범적 원리로서 성경을 보는 시각,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쓴 기념비적 ‘기독교 지침서’(Christian Directory)와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에서 보여준 포괄적이고 윤리적인 목회자 상(象)이 그 절정이다.
그리고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그의 후계자들에게서 깊이를 잃지 않은 대중화 실제화에 대한 관심이 청교도주의를 형성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는 셰퍼드(Thomas Shepard, 1605-1649)의 회심론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나단 에드워드의 체험적 회심론은 제1차 대각성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제2차 대각성을 비롯 미국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이런 신앙사상이 오늘 우리 시대에는 너무도 퇴색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오늘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 인지 역사를 통해 살펴보며 그리스도인의 이상(理想)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청교도 정신을 연구할 가치가 있으며 필요가 있다.
청교도들은 우리에게 영적 성숙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예리함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정열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이상과 꿈을 소유한 자들이었으며, 실천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고, 목표를 지향하는 방법론 자들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당한 질고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겪은 고난은 그들 신앙을 단련시키고 원숙하게 했으며 성장을 이루게 했다. 그러나 편안함과 호화스러움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한다.
성숙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주어진다. 청교도들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열정에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기질의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영적전투로 잔뼈가 굵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적투쟁을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신을 주님을 따르는 순례자요 군사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투쟁이 없이는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삶 전부를 영적 전쟁으로 간주했다. 그 전쟁에서 그리스도는 대장이시고 그들의 무기는 말씀과 기도의 눈물이었다. 그들 깃발은 십자가였고 그들 모토는 이것이었다. “고난당한 자가 정복한다!”(Vincit qui patitur)
처음에는 청교도들도 영적 전투에 패했다. 그래서 교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비(非) 주류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결국 양심을 압박해 오는 박해 때문에 개혁해 보려했던 영국교회(Anglican Church)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휫필드(George Whitfield, 1714-1770)는 청교도들을 이렇게 말했다. “목사는 십자가 아래 있을 때 잘 싸우고 전할 수 있다. 또 십자가 아래 있을 때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 청교도들이 그토록 불타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그들의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1662년 제정한 영국의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formity, 1559)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창고, 들판, 대로, 헛간에서 외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글을 쓰고 전파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저술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부어졌던 특별한 은사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청교도 정신을 형성했던 그 역사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Ⅰ. 중세의 청교도들
누가 최초의 청교도이며 누가 최후의 청교도인지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었고 종교개혁 이전에도 개혁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청교도란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청교도가 있었고 그런 별명이 중단된 이후에도 청교도는 계속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훗날 청교도 정신의 특성이 되었던 개혁원리들을 신봉하고 전했던 중세기 때의 두 사람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축척 된 신앙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원래의 교훈을 회복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청교도 정신과 사상의 모범을 보여준 마실리우스와 위클리프를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1)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1275-1342)
1275년 파두아(Padua)에서 태어나 파리에 서 의학을 배우고(1311년) 후에 이태리 아비뇽 (Avignon)에서 개업했다. 그러다가 다시 파리 로 가서 윌리엄(William of Ockham)에게서 철학 과 신학을 배웠고 후에 철학과 신학 교수가 되었고 파리대학 학장(1313년)이 되었다. 1324년에 발표한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에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교회와 국가 간의 원래의 한계를 정의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쓴 것이다. 이 책은 로마 교황 요한 22세와 왕권 수호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던 루이(Bavaria의 Louis)에게 기증했다.
이 책이 발간 된지 2년 후인 1326년 그는 이 책 때문에 루이 황제에게 피신해 왕의 의사와 학문적 옹호자로 보냈다. 1327년 교황의 파문을 받고 루이의 이탈리아 원정에 따라갔다가 1328년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군대가 후퇴할 때 바바리아로 따라가 거기서 죽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는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금서 목록에 오른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성경의 권위
정경(正經)인 신구약 66권만이 믿음 문제에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성경은 무오하다. 그러나 교황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교황은 현세적 권위도 영적 권위도 가진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교황의 머리로 그의 대변자로 세우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의 권위를 로마가톨릭에 전승해주지 않았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 교회 직분과 은사
감독들과 장로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주님의 일을 행하는 직분 자들이다. 감독들과 목회자들은 회중에 의해 선출 된 자들이다. 감독과 목회자들은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권면하고 성찬을 집례 하는 것이 그들의 직무이다.
–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섬김
그리스도인의 모든 능력의 열쇠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시며 특별히 그것을 직분 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직분 자는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로서 그것을 활용하며 교회에서는 양 무리들 위에 심판 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의 중재자로 존재해야 한다.
– 교회의 권위와 권징
파문은 오직 성도들의 공동체에서만 있을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고 교황이나 성직자가 죄를 사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기다. 교회의 지고한 권위는 일반 공의회(교회)에 있다. 또 정부의 최고 권위는 시민 공동체에 있다. 그런데 왕이 통치하고 귀족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의 힘으로 그 권위를 백성에게서 빼앗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구약의 제사제도에 기초를 둔 신정통치를 믿지 않는다. 신약의 복음적 율법도 현세의 형벌에 의해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위해서 행사되는 영적이 아닌 모든 강제적이며 물리적인 형벌의 권위를 반대한다. 물리적인 강제와 형법적 권위는 국가에 속한 것이다. 그것도 국가의 법을 어겼을 때에만 적용해야한다. 이단은 그것이 국법에 저촉되어질 때만 국가의 징벌을 받아야한다.
– 그리스도인의 덕목인 관용과 자유
어떤 경우에든지 그리스도인의 관용의 원리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한다. 성도들의 삶의 지침서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적 율법이다.
마르실리우스의 이런 사상들이 청교도 정신이다. 이것이 개혁자들에게 개혁의 빛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려져야 한다. 그는 윌리엄(William of Ockham)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나 윌리엄보다 더 분명하게 개혁원리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위클리프, 후스, 루터를 비롯한 16세기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급진적인 개혁원리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실리우스의 이름을 기억해야한다.
(2)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1) 역사적 상황
1329년경 영국 리치몬드 근처 요크쉐어 (Yorkshire)에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그는 15세 때 옥스포드의 멘톤대학(Menton College)에 입학했다. 그의 스승은 어거스틴 신 학자요 캔터버리(Canterbury) 대주교였던 브레드 월딘(Bradwardine)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꽃’ 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345년 학술단체 의 특별회원이 되어 수사학과 철학을 강의했고 그의 해박한 학문과 식견, 정열적인 매너와 성경과 철학에 뛰어 났고 신학의 깊은 지식 그리고 그의 순결한 사상이 당시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었다.
1348년 아시아와 유럽인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염병이 돌 때 위클리프의 마음속에는 ‘전능자가 심판하시기 위해서 방문하시는 나팔소리’로 들었다. 1360년 벨리오(Bellio)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361년 링컨셔에 있는 필링헴 교구목사로 임명되었고, 1365년경까지 홀(Canterbury Hall)의 협력자가 되었다. 137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편 옥스퍼드에서 연구를 마친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개혁 작업의 많은 부분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그의 개혁의 의지를 밝힌 최초의 책인 ‘수도사에 대한 항의’(Objection to the Friars)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옥스퍼드대학교 내에 함께 살면서 목격한 수도사들의 통탄할 일들을 비판했다. 위클리프는 또 영국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영국은 존(John) 왕 이후 거의 200년이 넘게 교황의 지배를 받아왔는데 막대한 세금이 로마 교황청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교회 직분 자들에게 지출되는 재정도 엄청났다. 이로 인해 영국의 재정 상태가 날로 피폐해져갔다.
이때 위클리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임 된 로랜드(Lowland)의 부르주(Bourges)로 교황을 만나러 가는 대표단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가 부르주에 머무는 동안 교황제도와 교권제도의 부패상을 목도하였으며 요한(John of Gaunt) 공작을 만나서 친구가 되는 유익함도 얻게 되었다. 이 문제를 관련하여 쓴 책이 1375년 ‘신적 통치권’과 1376년 ‘시민적 통치권’이다. 이 책들에서는 왕이신 하나님은 창조 시에 인간에게 세상에 대한 조건적인 왕권을 부여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청지기인 인간이 왕이라 할지라도 도덕적인 죄악에 빠지면 그에게 주어진 부와 권위가 상실된다고 주장했다.
1377년 위클리프의 이 같은 반(反)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잠재우기 위해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가 그를 소환했다. 그러나 요한(John of Gaunt) 공작의 도움으로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또 다시 위클리프는 사제들로 구성된 교회재판에 소환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왕의 모친이 개입하여 사제들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1378년 위클리프의 생애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그에 대한 사제들의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있은 후 그는 회심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지주들의 교황에 대한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악(惡)은 실제적인 악이라기보다 잘못된 교리에 근거한 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탐구하고 성경의 진리를 개진하는 교리연구에 매진했다. 그래서 그는 대중의 인기를 잃게 되고 요한 공작의 보호도 잃게 되었다. 또 1381년 옥스퍼드 대학에서도 쫓겨났다. 그 후 루터월스(Lutherworth)로 가서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그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2)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
위클리프의 신학 중 종교개혁자들과 가장 유사한 것은 그의 성경관이다. 1378년 ‘성경의 진리’(The Truth of Holy Scripture)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교황과 교회보다 더 우위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은 또한 법과 윤리 그리고 철학 등에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진리를 제공한다고 했다. 그의 저서 ‘교회’(The Church, 1378)에서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주장함으로써 참 교회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교황이나 주교는 누가 진정한 교인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구원이란 보이는 교회나 사제의 중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자숭배, 유물숭배, 성지순례를 비판했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을 최종의 권위라고 본 위클리프는 ‘교황의 권력’(The Power of Pope, 1379)을 출판함으로써 교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황제도는 인간이 만든 제도이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좇지 않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했다. ‘성찬론’(The Eucharist, 1380)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떡과 즙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공격했다. 그는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과 지성적 이해라고 했다. 그리고 화려하고 복잡한 형식주의의 예배 절차는 참된 예배를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클리프는 실천적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을 적용하기 위해 그는 보다 효과적인 일들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국가 권력에 관한 글을 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재산을 개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와 같은 이론을 고위 성직자들과 공직자들에게 적용했다. 특히 고위 성직자가 재산을 남용했을 때 세속 권력에 의해 처벌을 받도록 했다. 그는 또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이 교황이 교회 행정을 위해서 별로 필요 없다고 했다. 그는 세속화 된 교황을 이단으로 보고 그를 교황 직에서 축출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장이 점점 과격해 감에 따라 요한(John of Gaunt) 공작과 귀족들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3) 위클리프 정신의 전승자들(Lollards)
위클리프는 방랑 설교자들(Lollards)을 양성해서 파송했다. 이들은 손으로 짠 자주색 옷감을 몸에 감아 발끝까지 늘어뜨리고 신발이나 돈지갑을 갖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설교를 듣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설교했다. 숙식(宿食)은 주어지는 대로 취했고 주기도문과 십계명 및 일곱 가지 대죄를 영국 본토말로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이들을 위해서 소책자, 설교요약, 성경풀이 등을 제공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서와 서신들 중 몇 권을 가지고 다녔다.
위클리프는 기적, 우화, 성인들의 생애에 의존하는 당시의 설교자들의 설교와는 전혀 다르게 성경의 단락을 강해하는 강해설교를 했다. 당시 이 같은 방랑 설교자들(Lollards)의 설교를 듣고 따르는 무리가 날로 증가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길에서 만났을 때 그 중에 한사람은 틀림없이 위클리프의 제자였을 정도로 확장되었다.”고 연대기 작가 나이톤(Knighton)은 기록하고 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평민들 사이에만 퍼진 것이 아니다. 영국의 귀족들 가운데서도 많은 지지자들이 있었다.
(4) 위클리프의 죽음과 로마 가톨릭의 정죄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Gregory Ⅺ)는 위클리프 체포령을 내렸다. 교황의 교서 내용을 보면 “위클리프는 마르실리우스와 요한의 삐뚤어진 견해와 무식한 학설과 그들의 저주 받을 사상에 몇 마디 용어만 약간 바꾸어서 사용하는 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1384년 12월 31일 교회 목사관에서 죽었다.
1413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의 글들을 불태우도록 했고, 1414년 콘스탄스(Constance) 회의에서 그의 유해를 묘지에서 파내버리도록
위클리프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원한에 사무친 로마 가톨릭은 무덤에서 그의 뼈를 파내어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후 강물에 뿌렸다.
정죄했다. 교황은 또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그들은 사탄의 구덩이 속에서 올라온 두 마리 짐승이다. 가장 고집스럽고 뉘우치지 않는 이교도들이다.”라고 했다. 1428년 그의 뼈가 또 다시 화형을 당해 뼈의 재가 루터워스의 스위프트(Sweeft) 강물에 뿌려졌다. 그래서 그 재와 함께 그의 사상도 대서양으로 흘러가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5) 위클리프의 사상과 청교도 정신
성경만이 법과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며 최고의 권위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떤 선행으로도 불가하다. 화체설을 거부하고 성만찬의 영적 교훈만을 강조한다. 사적 판단의 권리를 옹호한다. 교권주의 사제직은 잘못이다. 예정과 선택교리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법에 의하면 모든 사제와 감독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같은 사상과 더불어 우리가 위클리프를 청교도정신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을 직접 듣고 읽도록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법 아래로 돌려놓고 성경 말씀대로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일반 대중의 손에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 원어는 몰랐으나 라틴어 학자였기 때문에 라틴어판(The Latin Vulgate)으로부터 성경을 번역하여 최초로 자국어인 영어로 성경을 읽도록 공헌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할 때 170부나 필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14세기의 위클리프는 16세기의 청교도들과 동일한 개혁사상을 가진 선구자였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새벽 별’로 불린다. 또 롤라드(Lollards)로 불리는 그의 후계자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주후 1500년 중엽 영국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간직하였다가 개혁자들에게 연결시켰다. 이렇게 보면 16세기의 찬란한 종교개혁은 갑자기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니다. 수세기 전부터 흘러내리던 개혁사상의 물줄기가 16세기에 한데 모여서 개혁의 홍수를 이룬 것이다.
Ⅱ.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 치하의 청교도
(1) 정치적 상황
로마 가톨릭의 교리들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 서 영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단교를 당했 다. 그 결과 헨리 8세는 교회의 머리로 교황의 위치를 차지한 후 수도원을 억압하고 보다 진보 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전의 로마 가톨릭으로 복고시키려는 사람들은 교수형에 처 하거나 왕국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헨리 8세의 통치기간 중에 7만 여명이 극형으로 처형되었다. 모든 분야에 공포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왕의 재판관, 배심원, 의회, 대주교회의 등은 백성들을 위한 자유의 수호자가 되는 대신 폭군의 공범자들이 되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을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리적으로는 철저한 로마 가톨릭의 신봉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참모들의 조언은 형형색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책을 거듭 바꾸며 갈팡질팡했다.
예를 들면 1536년 ‘10개 신조’(Ten Articles)를 허락했다. 거기에는 로마 가톨릭의 여러 의식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신앙의 권위 있는 표준이고,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신학의 표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례, 고해성사 및 주의 성만찬만 인정하고 나머지 성례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연옥설, 성자숭배, 유물숭배, 우상, 성지순례에 대해서 관점을 바꿨다가 1538년에 그 모든 입장을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또 1539년 ‘6개 신조’(Six Articles Act)를 허락했는데 거기에는 화체설을 부인하면 이단으로 사형에 처하고 또 미사 때 사제에게 하는 고해성사도 의무조항으로 넣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예배는 라틴어로 드려야하며, 조각상들도 다시 제자리에 놓도록 하고, 로마 가톨릭의 제복을 다시 입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왕이 로마 가톨릭의 모든 교리와 의식들을 그대로 다시 보전하려고 한 것이었다.
헨리 8세의 이런 행동은 청교도들을 분노케 했다. 그래서 영국교회개혁신앙 노선을 확신했던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크랜머(Cranmer) 같은 사람은 “좋다. 우리는 이 문제를 참아야 한다. 왕은 변덕을 잘 부리니 앞으로 그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알 수 없다. 그가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1년도 못되어 마음이 변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입장이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잉글랜드에 그대로 머물면서 왕의 모든 조치에 복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의 조치는 무자비한 조치이며 도무지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커버데일(Miles Coverdale), 후퍼(John Hooper), 힐스(Hills)등이다. 이들은 대륙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불링거(Bullinger), 쯔빙글리(Zwingli), 칼빈(John Calvin)등과 교제하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의 종교의식이나 성직자의 예복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자세를 보인 급진적인 개혁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교리의 오류에 눈을 뜨게 된다. 이들은 대륙의 개혁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 단계 더 나가 종교적 의식주의(religious ceremonialism)를 배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단순히 교리를 바꾸고 거짓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훈을 제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이행되어야 하며 구체화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는 모두 다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고 하신 말씀을 자주 인용하면서 개혁운동이 성취 될 때까지 계속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것이 전형적인 청교도의 행동방식이었다.
(2) 영적인 상황
헨리 8세 시대의 혁명은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급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외형적인 일들이 일어난 당시의 영적인 운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먼저 문예부흥의 충동이었다. 학문의 부흥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에라스무스(Erasmus)는 네 번에 걸쳐 영국을 방문했다. 그가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의 학문적인 결실이 자연스럽게 거기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그의 라틴어 성경 번역과 참고 주석을 단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은 대학과 학자들 간에 성경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일깨어주었다. 그래서 당시 윈체스터(Winchester) 감독 가르딘(Gardine)은 에라스무스를 ‘루터가 낳은 알에서 부화한 밉살스런 새’라고 묘사했다. 또 콜(Cole), 레나커(Linacre) 등은 이태리 방문 후 돌아와 신(新) 학문 정신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영국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자는 롤라드(Lollards)였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의 불씨는 위클리프의 정신을 추종하던 롤라드들에 의해서다. 그들이 불씨를 끄지 않고 연기 속에서 키워가고 있을 때 인문주의라고 하는 바람이 불어준 것이다. 거기에다 독일로부터 불어오는 개혁사상의 열기를 영국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의 글이 영국으로 들어옴으로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것이다. 이렇게 롤라드들에 의해 발생되고 독일로부터 불어오는 개혁의 열기와 사상이 개혁의 동력이 되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결정적인 자극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지도적으로 해낸 사람이 바로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이었다.
(3)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1) 준비기
그는 1494년 영국 웨일즈(Wales)의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다. 1515년에 옥스포드의 Magdalene Hall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 받았다. 그리고 곧 이어 캠브리지( Cambridge)대학에 입학한 그는 루터교로 전향하였다. 당시 캠브리지는 르네 상스사상과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독일의 개혁자 루터의 교리 등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편집한 헬라어 성경(Novum Testamentum)을 접하게 되었다. 또 캠브리지에서 빌네이(Thomas Bilney), 프라잇(John Fryth)과 같은 평생 개혁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헬라어 성경은 어둠과 죽음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높은 곳으로부터 비쳐주는 빛이었다. 특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는 말씀이 그들에게 큰 빛을 주고 심령에 평화와 기쁨을 준 구절이 되었다.
1519년에 캠브리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틴데일은 코스트올스(Cotswolds)에 있는 월쉬(John Walsh)경의 Sodbury Hall에 머물면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토론을 좋아하는 월쉬는 지역 신부들과 토론장 마련하기를 좋아했는데 그 자리에 틴데일도 참석했다. 그러나 틴데일은 곧 그 토론회에 실증을 느꼈으며 그 대신 주변 마을에서 설교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브리스톨(Bristol)의 노천극장에서 설교했다.
그러나 그는 곧 지역 신부들로부터 제지를 받았고 파문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틴데일은 그곳 로마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이 진리에 무지하고 진리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과 논쟁에서 성경에 호소하는 그의 주장은 교회와 교황을 더 우위에 두고자하는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그는 여기서 교황이 적그리스도임을 확신하였고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본문의 흐름과 의미를 알게 하지 않고는 교회 안에서 절대로 개혁이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도 못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틴데일은 이를 계기로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역 성경은 라틴어에서 위클리프가 번역한 위클리프 성경(Wycliffe Bible)뿐이었다. 그러나 그 역본은 라틴어 성경(The Latin Vulgate)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어서 원문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틴데일은 자신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원본으로 하여 영어로 번역함으로 정확한 영어 번역 성경을 출판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2) 성경번역
1523년 틴데일은 런던의 턴스톨(Tunstall) 감독이 성경 번역하는 일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런던에 돌아왔다. 그러나 턴스톨 감독은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던 차에 무역업을 하던 부유한 몬마웃(Humphrey Monmouth)을 우연히 만나 그의 도움으로 성경 번역을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옛 캠브리지의 동료 프라잇(John Fryth)도 그를 도와 성경 번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 번역하는 일이 발각되어 더 이상 런던에서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틴데일은 1524년 독일 함부르그(Hamburg)로 도망가 거기서 성경 번역을 계속해 마침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마쳐 후원자인 몬마웃에게 보냈다. 그리고 틴데일은 또 위텐버그(Wittenberg)로 가서 루터(Martin Luther)를 만났다. 그 후 그는 다시 콜론(Cologne)에 머물면서 1526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여 웜스(Worms)에서 인쇄를 했다.
그리고 성경 출판을 기업적인 투자로 생각하는 상인들과 그의 여러 동역 자들의 도움을 받아 최초로 영어로 번역 된 신약성경은 짐짝들 사이에 숨겨서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성경배포에 열심을 가진 헌신 자들을 통해 영국 각처에 배포했다. 그때 최초로 인쇄된 영어 신약성경은 모두 1만 8천권이었다. 그 후 계속해서 개정판이 나왔다.
그러나 틴데일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구약성경도 번역하기 시작하여 1530년에 모세오경을 완역했다. 그리고 1535년에는 여호수아에서 역대하까지 번역을 마쳤다.
3) 그의 최후
그러나 틴데일은 망명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기를 사모했다.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다가 1535년 안트베르펜(Antwerpen)에 있는 한 영국인 상인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그는 영국 국왕의 하수인에 의해서 밀고 되어 채포 된 후 벨기에 브뤼셀 근교 빌보르데(Vilvorde)성으로 이송 거기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1년 이상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구약성경 번역을 계속하다 이단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1536년 10월 6일 형장으로 끌려 나가갔다. 틴데일은 마지막으로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Lord, open the King of England’s eyes!)라고 외치면서 교수대에서 죽어갔고 그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4) 왕의 권위로 전국에 배포 된 틴데일 성경
1530년 이미 로마 가톨릭 종교회의에서 틴델일의 모든 책을 불태워 버리라는 교황의 교서가 내려졌고 월시(Wolsey)를 비롯한 감독들은 회수된 틴데일의 책들을 런던의 성 바울교회당에서 불태웠다.
그러나 틴데일이 죽은 후 틴데일의 친한 친구이자 개혁자였던 커버데일(Miles Coverdale)은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을 참고로 1537년 ‘Thomas Matthews’ 역본이라는 이름으로 구약성경을 영어로 완역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영국 국왕에 헌정했다. 그러자 왕은 그 성경을 영국 국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실질적으로는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과 구약 창세기에서 역대기 하까지의 번역본의 보충 판이었다.
이렇게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은 왕의 권위로 영국에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가 죽은 지 1년 후 그가 번역한 신구약성경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모든 교회에 비치되었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훗날 틴데일의 이 성경 역본은 ‘King James Version’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 성경의 기초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카버데일(Miles Coverdale)은 제임스 왕(King James VI of Scotland)에게 틴데일이 영국 최초로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미완의 신구약성경(후에 King James Version)을 보충 완역하여 헌정했다.
5) 틴데일이 보여준 청교도 정신
우리는 틴데일에게서 위대한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한 다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모든 장애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위한 불굴의 정신으로 성경 번역을 추진했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직접 듣고 읽어야한다고 확신했다. 당시로서는 그 일을 로마 가톨릭이 허락을 해줄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에 허락 없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화형(火刑)을 자초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신구약 성경을 번역 출판하여 은밀히 반포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죄는 왕의 허락 없이 영국을 떠난 것이다. 그 역시 아주 비장(悲壯)한 행동이었다. 분명 그것이 당국자의 눈에는 국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틴데일은 성경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의 허락 없이 독일로 건너가 루터의 지원을 받아 그 위대한 성경 번역의 일을 마무리했다.
틴데일의 이 두 가지 행동은 청교도 정신의 전형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교도 정신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바를 위해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 그것이 청교도 정신이다.”
그가 남긴 다른 책들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해설한 ‘사악한 맘몬의 비유’(The Parable of the Wicked Mammon), 교회에서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와 우위성을 가지며 국가에서는 왕이 가장 높음을 강조함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황제도를 비판한 ‘그리스도인의 순종’(The Obedience of a Christian Man), 헨리 왕의 캐더린과의 이혼을 반대하며 교황제도의 실체를 파헤친 ‘고위 성직자들의 실상’(The practice 0f Prelates) 등이 있다.
Ⅲ. 에드워드 6세(Edward Ⅵ, 1537-1553) 치하의 청교도
(1) 시대 상황
영국의 에드워드 6세는 불과 9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청교도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청교도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선왕에 의해 헤릇포드 백작(The Earl of Hertford)이 섭정으로 지명이 됐다. 그리고 소머셋(Somerset) 공작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소머셋은 에드워드의 어머니(Jane Seymour)의 남동생이었다. 그는 청교도들을 지지했고 종교문제와 정치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를 허용하는 훌륭한 인물로서 가난한 농민의 친구였다. 그의 통치기에 허용된 종교의 자유로 많은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진척되었고 그 결과로 개신교의 교세가 우세하게 되었다.
그는 1547년 국회에서 평신도들도 성찬 시에 잔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같은 해에 ‘6개 신조’(Six Articles Act)를 취소했으며, 1548년에는 성상들을 교회당에서 철거했다. 그리고 1549년에는 사제들의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영국의 종교적 혼란이 점점 심해지자 국회는 개혁을 추진하고 질서를 잡는 수단으로 1549년 ‘종교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켜 영국개신교도들에게 영어로 된 ‘공동 예배모범’(Book of Common Prayer)을 반드시 사용하게 했다. 이런 와중에서 소머셋은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로 곤란을 당하다가 1549년 10월 섭정의 자리에서 축출되고 와르윜 백작(the Earl of Warwick)이 섭정 자리를 장악했다. 이때 크랜머(Thomas Cranmer, 1486-1556)가 ‘42개 신조’(the Forty two Articles)를 작성 국왕 에드워드의 제가를 받아냈다. 에드워드는 1553년 7월 6일에 죽었다.
(2) 요한 후퍼(John Hooper, 1495-1555)
이 시대에 순결한 신앙정신을 발휘했던 사람이 후퍼(John Hooper)였다. 후퍼는 감독 직에 임명을 받고 처음엔 이를 수락할 뜻을 가졌다. 그러나 크랜머와 리들리(Ridley)는 후퍼에게 감독은 전통적인 예복을 입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후퍼는 이를 반 대하여 감독직을 포기하고 ‘신성한 고백과 항의’(A Godly Confession and protestation)를 출판했다. 그러자 크랜머는 그를 감옥에 감금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통적 예복에 대해서 삼단논법으로 자기의 반대주장을 펴나갔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대전제 – 교회에서 요구되는 모든 내용은 성경에 규정된 것이거나 중립적인 것이어야 한다. 소전제 – 예복은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성경에 규정한 것도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결론 – 그러므로 누구도 이런 것을 교회에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는 좀 더 설명하기를 중립적인 것이란 사용해도 유익한 것도 해로운 것도 아인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전제에 네 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첫째, 중립적인 것은 성경에 근거해야한다.
둘째, 성경에 그러한 근거가 없으면 그것을 행하던지 행하지 않던지 개 인의 신앙 양심에 맡겨야한다.
셋째, 그런 것을 정하려면 교회의 용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넷째, 그러한 것을 교회에서 장려하려면 억압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원 하는 심령으로 지키도록 해야 한다.
이를 좀 더 소개하면 이런 중립적인 것(The thing indifferent)으로 인하여 영국 국교회주의(Anglicanism)와 청교도주의(Puritanism) 사이에 분열이 조성된다. 청교도 입장에서는 후퍼가 그리고 영국 국교회 입장에서는 크랜머(Thomas Cranmer)와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갈라서서 논쟁을 했다.
1) 국교회 편에 선 크랜머와 리들리의 입장
크랜머나 리들리는 “복음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를 보전하는 일에 최대의 관심 을 가져야한다. 중립적인 문제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보전 되는 한 모두 다 만족해야 한다. 로마 가톨 릭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할 자유를 얻고 있 는 한 다른 것은 무시할 수 있다.”는 주장 을 했다. 즉 점진적인 진행의 입장이었다. Thomas Cranmer 그리고 교회는 그 체험과 지혜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성경의 교훈을 새롭게 인식해 나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입장은 교회 정치와 예식 문제에 있어서 발전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 더해질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2) 청교도들의 입장
그러나 청교도들은 “중요하지 않은 중립적인 것을 왜 강요하는가? 그런 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왜 우리가 복종해야하는가?”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감독이 무엇인가? 감독을 주(主, Lord)로 묘사할 수 있는가? 지금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감독이 통치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강조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교훈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한다.” 즉 오직 성경만이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대륙의 개혁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얻게 된 것이다. 이 에드워드 6세(Edward Ⅵ) 시대의 문제는 결국 “대륙에 갔었는가 가지 않았는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 시대에 크랜머는 15년 동안 잉글랜드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리들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도덕성에 관심을 가졌지 제도개혁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누구나 대륙에 나가서 제네바나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어 가는 교회개혁을 본 사람들은 그것에 깊은 영향을 받아서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리들리도 순교하기 전 후퍼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리들리는 사제가 예복(surplice)을 입는 것을 거부했다. 교회 밖에서 성직자 특유의 옷을 입는 것도 반대했다. 교회의 예배와 관련된 다른 여러 가지의 예복들도 반대했다. 리들리는 순교하기 전에 지난날을 자책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어리석고 가증스러우며 연극에 있어서 악역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이들이 에드워드 시대의 청교도들이다. 이들은 1555년 메리 여왕 치하에서 화형을 당했다.
Ⅳ. 메리 여왕(Mary I of England, 1516-1558) 치하의 청교도
(1) 시대 상황
앞의 두 통치시대에 정착되었던 개혁의 내용들이 로마 가톨릭에 충실했던 메리가 영국의 통치자로 즉위함과 동시에 모두 다 사라져버렸다. 크랜머, 리들리, 후퍼, 라티머 등 그 밖의 에드워드 시대의 다른 감독들은 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그들은 다 화형 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가디너(Gardiner), 본넬(Bonner), 헷스(Heath) 등 로마 가톨릭 감독들이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런던의 감독으로서 본넬은 메리 여왕의 가장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메리의 즉위 후 3년 동안에 무려 300여명이 화형으로 순교했다. 이런 가혹한 메리의 피의 정치는 영국 국민의식 속에 교황 권에 대한 깊은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라티머(Latimer)가 순교하면서 자기 뒤의 기둥에 메여 죽어가며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리들리(Ridley)를 향하여 외친 그의 말이 있다. “리들리! 두려워 마시오! 대장부다우시오! 우리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악의 세력이 끌 수 없는 영원한 불을 붙여 놓고 갑시다!”
(2) 망명한 영국의 개혁자들
메리는 1555년에서 1558년까지 통치했는데 이 기간 동안 중요한 일은 영국에서 일어났던 일보다 대륙에서 일어났다. 이 기간에 많은 청교도들은 대륙으로 피신해야 했다. 영국에 그냥 남아 있던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는 처형되었다. 어떤 사람은 제네바, 어떤 사람은 스트라스버그로, 어떤 사람은 쥬리히(Zurich)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하는 사람들은 프랑크루트(Frankfurt)를 경유하여 메인(Main)으로 간 사람들이다. 거기서 대단히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때 제네바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크게 공헌을 했었던 위팅햄( William Whittingham)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잉글랜드 교회를 위해서 예배모범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배 모범은 1552년 작성 된 ‘에드워드 기도서’(Edwerdian Prayer Book)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사제의 탄원기도(Litany)는 빼버렸고 사제복(Surplice)은 입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고백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목회자, 감독, 장로, 집사는 임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이 프랑크루트에서 모인 영국교회를 위한 모델이었다. 이 교회에 목회자로 영국에서 망명 온 낙스(John Knox)가 지명되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영국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드렸다. 그때 영국으로부터 피난 온 콕스(Richard Cox)가 거기에 왔다 그리고 그는 이 모임에 대해 반대하면서 “모임은 영국에서 행한 것 같이 행해야하고 영국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낙스는 “주께서 그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지도록 허락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 국교회(Anglicanism)와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콕스와의 논쟁으로 인해 낙스는 프랑크루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낙스는 제네바의 칼빈에게로 갔다. 거기서 낙스는 훗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꽃을 피우게 될 참으로 많은 교훈을 배웠다.
1) 첫 번째로 조직된 청교도교회
낙스(John Knox)는 프랑크루트를 떠나 제네바로 왔는데 그는 평화롭고 마음에 기쁨을 주는 사역을 발견했다. 칼빈의 영향으로 제네바에 망명 온 영국인들 교회가 있었는데 낙스가 그 교회의 목회자가 된 것이다. 이곳에 위팅햄( William Whittingham)도 프랑크루트로부터 왔다. 매년마다 있는 목회자 선거에서 낙스는 굿맨(Christopher Goodman)을 동역자로 하고 재 선출되었다. 샘슨(Sampson), 밀스(Miles), 위팅햄(Whittingham), 커버데일(Coverdale) 같은 사람이 장로이며 콜리(Francis Knolly)같은 분이 평신도로 구성 된 독특한 교회였다.
이 교회에서 ‘일반기도서’(A Book of Common order)가 사용되었다. 이 책의 초판은 이미 프 랑크루트에서 출판되었던 것인데 그 제목이 ‘제네바의 영국 회중이 사용했으며, 저명 하 고 신학적으로 박식한 사람 칼빈에게 인정 을 받은 성례전과 기타의 사역과 기도의 형 태’라는 긴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낙스의 기도서’라고도 불리고 ‘제네바의 책’ John Knox 이라고도 불리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후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일반적인 기도서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장로교적인 청교도주의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도 점점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감을 볼 수 있다.
2) 제네바 성경 번역 출판
망명길에 오른 이들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대륙 개혁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교회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교인들에게 그들 모국어로 된 성경을 들려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순결한 하나님의 교회와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성경적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그들은 칼빈(Calvin), 베자(Beza), 볼링거(Bullinger) 등이 취한 입장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국인 영국에서 시도하다 중단했던 성경 번역을 망명지 제네바에서 재개한 것이다. 위팅햄을 중심으로 하여(John Knox도 가담) 신약성경은 주로 위팅햄에 의해서 그리고 구약은 샘슨, 밀스, 커버데일 등에 의해서 번역되었고 1560년에 완역하여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소위 ‘제네바 성경’(The Geneva Bible)이라고 불리는 영어판 번역 성경이다.
이 성경이 번역 출판됨으로 해서 고국에 남아있던 청교도들은 큰 위로와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제네바의 영국 망명객들이 이루어놓은 가장 훌륭한 일은 몇 세기 동안 가장 보편적으로 읽혀진 ‘제네바 성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경 번역본이다. 망명지의 청교도들은 끝까지 개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외국에서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고국에 보급함으로 개혁의 기반을 넓혀 가는 작업을 계속했다.
Ⅴ. 엘리자벳(Elizabeth I of England, 1533-1603) 치하의 청교도
(1) 엘리자벳 여왕의 즉위와 개혁주의 노선 선택
엘리자벳 여왕은 오래 동안 사생아로 살아왔지만 이미 그의 아버지 헨리 8세의 생존 시에 국회는 그녀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한 바 있었다. 그녀만이 헨리 8세의 여러 자녀 중 능력과 통찰력과 개인적인 인기에서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그녀는 남성적인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이면서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경박한 몸치장을 물려받았다.
1588년 12월 27일 여왕이 즉위할 당시 영국은 아직 로마 가톨릭교회가 국가 종교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은 갖지 못했으나 그의 출생과 그의 생모의 결혼을 인정치 않은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필연적으로 개신교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정교사들에 의해서 접하게 된 개혁정신을 그녀의 왕국을 위해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녀가 개혁사상의 선택 동기는 종교적 관심에서 보다 정치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영국 내에서 로마 가톨릭의 절대권을 신뢰하는 세력이 적었고 개혁사상을 가진 망명자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활동함으로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력은 생산능력 면에서 매우 약해져 독립국가로서 문제가 제기되었던 때였다. 여왕은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의 정치적 기반을 로마 가톨릭 세력에서 새로 부상하는 반(反) 로마 가톨릭 세력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의 요구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개혁주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 교회 최고 통치자로서 여왕
여왕은 당면한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 개혁안들을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 헨리 8세가 처음으로 주장했던 왕의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반포했다. 그리고 다시 여왕은 1559년에 에드워드 6세의 지시로 크랜머가 처음 1549년에 작성하고 1552년에 1차 개정 그리고 1553년에 2차 개정을 했던 ‘42개조 공동기도서’를 다시 개정 ‘통일령’(act of uniformity)으로 공포하여 모든 예배의식을 이 ‘통일령’에 의해 집행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
이를 거부하면 그 이유를 밝히도록 했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왕실 관리들은 거부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서약을 강요했고 끝까지 서약을 거부하면 교회활동을 구체적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이 이 기도서에 서약을 거부했던 이유는 끝 부분의 “교회당의 장식품이나 성직자의 예복은 그대로 유지되고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청교도들의 주된 교회활동은 모국어인 영어성경을 준비하는 일, 청년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 개혁사상이 담긴 책들을 출판하는 일, 교회당 안에 안치해 둔 성체 함과 성상을 없애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성직자는 성직 예복을 입지 않고 사역하는 일이었는데 이런 모든 일들이 왕실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여왕은 자기의 종교정책 지지자들만 주교직에 임명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에 파커(Matthew Parker)를 비롯해서 엘리(Ely) 주교에 콕스(Richard Cox) 그리고 런던(London) 주교에 그린달(Edmund Grindal)을 임명함으로 여왕은 영국 교회를 장악했다.
2) 엘리자베스 여왕과 청교도의 결별
1558년 엘리자베스(Elizabeth)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날은 모든 개혁을 갈망하던 자들에게 처음에는 기쁨과 소망의 날이었다. 새 왕은 이복 자매인 메리와 달리 개신교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개신교인들은 희망하기를 에드워드 6세의 통치가 끝나면서 마무리 짓지 못했던 영국의 교회 개혁이 이제 다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깊은 절망에 빠져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왕이 되자 자기주장만 강조하며 자기는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감독 지명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면서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인들이 초기에 반대했던 의식들을 그대로 보존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같은 여왕의 새로운 종교정책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신앙교리는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으로만 확정한다.
둘째, 종교의 예전과 교회 조직은 지상 교회의 최고 통치자인 왕에 의 해서 주도되어야 한다.
여왕의 이런 입장은 개혁자들의 입장과 로마 가톨릭의 입장 둘 다 수용하려는 정치적 중도주의였다. 그러자 개혁을 바라던 청교도들은 그러한 정책이 확정되고 시행되어지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설교할 수 없음을 알고 로마 가톨릭적인 예전, 장식, 교회제도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순결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소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3) 청교도 진영의 분열
대륙에 망명 가있던 그린달(Edmund Grindal)은 런던의 감독이 되고 그 다음에는 캔터버리(Canterbury)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볼링거(Bullinger)와 다른 개혁자들에게 편지로 자신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스며있는 기도서와 예복과 의식들을 없애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고 말했다. 그는 대륙의 개혁파 예배를 경험했고 그것을 이제 영국에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서 그린달은 뜻대로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린달(Grindal)은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몇 가지 의식들 때문에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 따져보면 불법적인 것도 아니다. 특별히 복음의 순전한 교리가 그 순결성과 자유와 함께 보존되어 있는 한 우리는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즉 로마 가톨릭의 몇 가지 의식 때문에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복음을 전파할 자유를 갖고 있으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도 안에 머물면서 여왕에 대해 저항했다.
그는 만일 주어진 공직을 거부한다면 틀림없이 여왕은 로마 가톨릭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복음을 전파할 자유를 가졌고 교리도 바르므로 몇 가지 의식들에 때문에 교회의 공직을 거부한다면 자기들의 영역을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게 내어주는 격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파커(Parker) 대주교를 비롯해서 중도 자들(Richard Cox, Edmund Grindal, John Jewell)의 입장이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영국 국교도들의 입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옥스퍼드의 청교도들(Thomas Sampson, Miles Coverdale, John Fox, Laurence Humphrey, Lever 등)의 입장은 달랐다. 이들은 여왕의 중도적인 입장을 반대했다. 더 나은 시대를 바라보면서 상황이 바꾸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왕의 그런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에서 이겨내자!”라는 그린달(Grindal)과 같은 생각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국 국교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은 수동적인 저항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그것은 잘못된 자세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륙에서 함께 지냈던 옛 동지들이었지만 입장 차이를 느끼며 서로 갈등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4) 성직자 대회
1563년 영국 성직자 대회가 있었다. 청교도들은 이 대회에서 마지막 싸움이 될 일을 계획했다. 그들의 계획은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제네바 식의 가운을 사용하고 대신 로마 가톨릭의 제복(Surplice)을 벗자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사제들이 입는 백의(白衣)의 제복은 로마 가톨릭 냄새가 나는 유물이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제네바식의 가운을 입고 성찬식 때 무릎 꿇는 것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성자의 날도 폐지하고 세례 받을 때 십자가를 표시하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대회의 표결에서 58대 59 한 표 차이로 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1563년 대회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5) 제복논쟁(Vestiarian Controversy)
청교도들은 다시 후방공격을 시도했다. 제복(Surplice)에 대해 계속 투쟁했다. 1653년부터 1567년 사이의 제복논쟁 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시도했다. 교회의 수장이 된 여왕은 대주교 파커(Matthew Parker)에게 성직자들은 누구나 제복을 입고 기도서를 사용해야만 된다는 경고 서한을 1565년 1월 25일자로 보냈다. 여왕은 자신이 교회의 머리로서 대주교에게 모든 주교는 예복을 입고 기도서를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여왕의 이 명령은 청교도 주교들에게 큰 시련이 되었다. 그들은 교회의 주교인 동시에 국왕의 신하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왕을 머리로 하는 국교회에서 보다 교회 밖에 있는 목사들이 교회 개혁을 위해서 더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취리히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왕의 요구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면 수용하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왕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보다 큰 목적을 이루자는 사람들과 그러한 왕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주어진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순수한 개혁의 길로 나아가자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이 일로 인해서 영국 교회의 청교도들은 힘을 하나로 결속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만 것이다. 일부 청교도들은 제복을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실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주장했다. 제복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되고 있으므로 가톨릭 적이라는 것이다. 후퍼(Hooper)가 앞서 지적했듯이 제복(Surplice)이 연상시키는 것 때문에 로마 가톨릭적이고 우상 숭배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례 때 어떤 것을 두르든지 다른 의복을 입는다고 해서 고상함과 경이로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것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 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반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은 이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다.
6) 청교도 장로 정치제도의 기원
칼빈(Calvin)과 베자(Beza)의 영향 아래 있던 제네바에서는 어디서나 장로 정치제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1570년 봄부터 이 장로정치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했다. 캠브리지 대학교 카트라이트가 사도행전 강의를 하면서 교회정치의 원형인 장로정치 체제를 언급했다.
(2)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
그는 캠브리지 근교 로이스톤(Royston)에서 1535년에 태어났다. 청교도 개혁자로서 유명한 레버(Thomas Lever)가 있는 성 요한(St. John) 대학에 1550년 입학해 1554년 B.A.학위를 취득하고, 1556년 메리 여왕의 통치기간 캠브리지를 떠났다가 1559년 다시 돌아와 1560년에 M.A. 학위를 받고 2년 뒤 문학사과정 시험관으로 선출되고 또 트리니티(Trinity)대학의 회원이 되는 등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뢰 받는 인물이 됐다.
1565년 아일랜드의 아를레이(Arleigh)지방 대주교 로투스(Adam Lotus)의 초청으로 성당 목회자로 갔다가 거기서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을 만나고 특별히 볼링거(Bullinger)를 알게 된다. 이 같은 아일랜드에서의 2년은 청교도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되었고 1566년 11월 캠브리지로 다시 돌아와 신학사 학위를 받는다. 1567년 12명으로 구성된 대학 예배의 설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다. 여기서 그는 설교가로 유명해진다. 수많은 학생들과 학교 밖의 청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569년 캠브리지의 신학교수(Lady Margaret대학)로 임명이 된다.
1) 사도행전 강의와 장로주의
카트라이트(Cartwright)는 사도행전 첫 두 장을 강의하게 되었을 때 교회정치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성도들 모두 자기 교회 목사를 선출함에 있어 동일한 한 표씩을 가지며 목사는 잘 가르칠 수 있어야하고 또한 안수를 받기 전에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라고 했고 사도행전 1:15을 강해하면서 “베드로의 앞장섬은 이곳에서 특별히 위대해서가 아니다. 그는 한 설교자요 부름 받은 전달자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카트라이트의 가르침은 기존 영국 교회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카트라이트는 성경 해설자로 머물 수만은 없었다. 삶으로 실천해 보이지 않는 설교란 의미 없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대교회는 모든 시대가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사상 때문에 영국교회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장로주의 교회를 제시하였으며 기존 교회를 향한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2) 카트라이트와 화잇기프트의 대결
카트라이트의 새로운 교회정치 제의에 많은 사람이 열렬한 호응을 보이자 그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있던 화잇기프트(John whitgift)는 설교를 통해 카트라이트의 영향력을 억제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는 이미 힘을 잃었다. 카트라이트가 더욱 영향력을 얻게 되자 1570년 8월 학교 당국은 그를 휴직케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화잇기프트를 중심으로 카트라이트가 주장한 20개 조항을 문제 삼아 그를 심문했다. 이 20개 조항은 후일 청교도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 국교회가 문제 삼았던 그중 몇을 소개하면 다음가 같다.
–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사도적 교회를 모델로 해야 한다.
– 오직 목사만이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를 집례 해야 하며 목사는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 공식 석상에서는 오직 정경으로 인정된 성경만 낭독해야 한다.
– 목사는 자신이 목회 하는 성도들의 장례식만 인도해야 한다.
– 성경 66권은 모두 다 꼭 같이 중요하다.
– 예배 중에 복음서를 읽을 때 일어서는 것 또 예수님의 이름이 나올 때 절을 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 세례 시에 십자가를 긋는 행위는 미신적이다.
결국 카트라이트는 1570년 12월 11일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날 카트라이트는 대학 교수들 거의가 모인 가운데 부총장 화잇기프트로부터 결정적인 양자택일의 답변을 요구받았다. 그 때 카트라이트는 정중하게 그 제안들이 자신의 것이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쳤으며, 그것들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제안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주교제도는 비 성경적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
–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모든 교회는 감독(목사, 장로)과 집사를 두어야 한다.
– 교회의 감독은 순수하게 영적 기능만 담당해야 하며 집사는 구제에 힘써야 한다.
–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는 지역교회가 있어야하며 그 지역교회 성도를 신앙으로 지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 목사는 각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 교회정치의 실질적 책임은 그 교회 목사와 장로회에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당당하게 카트라이트는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는 다음 해인 1571년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를 방문하면서 칼빈 주도하의 개혁교회의 참 모습을 목격하고 개혁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3) 급진적인 장로주의 자극
여왕과 주교단 그리고 하원은 새롭게 번지는 장로주의를 의식하면서 연합으로 교회 개혁안을 1571년에 제정했다. 그러나 이 39개조로 되어 있는 개혁안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미미한 것이어서 도리어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청교도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 내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윌콕스(Thomas Wilcox)와 필드(John Field)는 1571년 6월 ‘국회에 보내는 탄원서’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 책의 내용 중 ‘대주교와 주교는 성경을 반대하는 악마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놀턴(Thomas Norton)과 베자(Theodore Beza)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 책 속에 청교도 운동의 핵심교리인 장로정치 제도의 틀을 제시한 점은 영국 청교도 운동의 개혁자들이 남긴 역사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 장로주의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 운동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매우 강력하게 교회를 개혁해 갈 수 있었던 신학적 근거가 되었었다. 만일 이 장로주의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없었다면 청교도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장로주의 운동의 확산과 좌절
그린달(Grindal)은 요크(York)의 대주교로 있을 때 시골 목사들의 장날 모임을 매우 긍정적으로 지켜보다가 그가 1576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받게 되자 그는 목사들의 장날 모임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생각하고 이를 지원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해갔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군주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 교구 내에는 자격 있는 설교자 3,4명이면 족하다. 부목사와 신부들을 두어 자격자의 설교를 복사해서 교구 백성들에게 읽어주면 된다.”라고 하면서 대주교에게 그렇게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여왕의 명령에 그린달은 강력한 표현으로 “나는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거스르면서까지 목사의 설교권을 억압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 양심적인 충언 때문에 그린달은 대주교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대주교는 군주의 종이지 군주의 비판자는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는 그린달이 죽은 1583년까지 공석으로 두었다가 화잇기프트(John Whitgift)에게 계승되었다. 화잇기프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권위주의적 정치를 수용하여 모든 성직자에게 기도서를 준수하고 예복을 입을 것을 촉구하면서 다음 세 가지 내용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첫째, 왕의 절대 권위를 인정한다.
둘째, 기도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반되지 않는다.
셋째, 39개 신조문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청교도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둘째 조항이었다. 400여 명의 성직자가 이 조항 때문에 서명을 거부하고 추밀원(Privy Council)에 청원을 제출했는데 월싱햄(Sir Francis Walsingham)등에 의해서 그 청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대주교 화잇기프트는 서명조항을 제한하여 서명토록 타협을 주선했다. 그런데도 서명을 거부한 자들은 그의 생활 터전에서 추방하도록 결의했다. 화잇기프트의 이런 그의 정치적 술수 때문에 온건한 청교도와 극단적인 청교도 모두를 자기의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1580년 장로주의 운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터너(Peter Turner)와 필드(John Field)는 1584년 소집된 국회를 대항해서 런던그룹과 함께 압력단체를 조직하고 영국 지방으로부터 개혁을 위한 의견을 수집하여 국회의 교회개혁을 위한 청원서를 접수시켰다. 그 청원 내용을 보면 설교하지 못하고 있는 목사들의 형편, 주교 관할 구역의 형편, 백성들의 무지 상태를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청원을 했다.
– 기도서 대신 제네바 예배서(Geneva Service Book)를 채택할 것
– 개 교회는 목사, 장로회에 의해서 다스려지도록 할 것
– 지역교회는 목사, 장로가 선출한 대표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할 것
물론 이러한 청원이 엘리자베스 치하에 있던 의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청원서에 나타난 장로주의 정신은 1570년대에 시작되었던 목사들의 장날 모임에서 토론 발전 된 것이고 그것이 이제 조직적으로 성문화 되어 국회에 청원되었던 것이다. 비록 국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청교도 개혁자들의 사상이 장로주의로 집약되어졌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로 인해서 장로회 운동은 신속하게 확산되어 갔으며 청교도를 조직화 하는데 이 장로주의가 그 신학적 기초로 제공되어졌던 것이다.
이 무렵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가 제네바에서 런던으로 돌아와 이 장로회 운동을 지원했다. 카트라이트는 트래버스(W. Travers)와 함께 ‘신앙훈련서’(Book of Discipline)를 출판하여 칼빈주의적 정치서로 배부했다. 이 책자가 1646년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홍보 책자로 쓰기 위해 ‘교회정치의 규칙’(A directory of Church Government)이라는 명칭으로 출판되었던 책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개혁자 멜빌(Andrew Melville)등을 위시한 여러 개혁자들이 런던으로 망명하여 영국 장로교 운동에 합세했다.
그리하여 영국 장로주의 운동은 1586~1588년 사이에 강력하게 확산되어 갔었다. 장로주의자들은 지역 활동을 통해서 평신도 청교도들을 국회에 내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개혁을 위해서 극단적으로 장로정치 체제를 요구함으로써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불길처럼 일어났던 장로주의 운동은 점점 그 힘을 상실하다가 1593년 화잇기프트(Whitgift)와 벤크롭트(Bancroft)의 집요한 탄압에 위축되고 말았다. 그 후 50년 동안 장로주의는 영국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청교도 운동은 소멸되지 않고 그 정신을 계속 심화시켜갔다.
5) 청교도 신학교육
-청교도 지도자의 산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캠브리지와 옥스퍼드는 1570년 이후에 확산되는 청교도운동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다. 이 학교에 찾아든 학생들은 교황주의 체제에서 자라난 자들이었으나 이 학교에 들어와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청교도 교수들에게 배우면서 교회 조직과 정치체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장로주의 정치제도가 성경적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설교할 것인 가도 배우게 되었다. 이 학생들은 교구 교회에서 실천적 경건을 훈련받고 학교에서는 권위의식을 배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설교하는 설교자가 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강단은 악한 현실을 선하게 바꾸어 가는 데 우선적으로 활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되어져야 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영혼을 회개시키고 변화시켜 가는 자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 캠브리지에서 크게 영향을 끼쳤던 교수는 데링(Edward Dering), 퍼킨스(William Perkins), 카델톤(Laurence Chaderton) 등이었다. 이들은 교육목적을 ‘교육받는 설교자를 배출’하는 데 두었다. 그래서 성경신학, 주경신학, 설교학을 집중적으로 강의하고 교육방법으로는 상호 토론식으로 혁신했다.
-청교도 목사들의 재교육-
상호 토론을 통한 진리전달 방법은 대학 강의실에서 가능했을 뿐 아니라 목사들의 재 교육방법으로도 유익했다. 시골에서 사역하던 목사들이 장날이 되면 장이 서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정규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청교도 주교들은 이들의 모임을 위해서 장소를 마련해 주고 하사금을 주어 격려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식사하며 온종일 토론했다. 이들의 토론 내용은 정해진 성경 본문을 돌아가면서 해석하고 그 밝혀진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이 주는 교리를 확정하고 그 교리에 비추어서 잘못된 교회의 제도와 비리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가끔 지방 관리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들의 모임에 대해서 툰(Peter Toon)이 지적하기를 “목사들이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여 그 본문에 비추어 교회의 부조리를 비판했던 것은 타락한 성직자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유익했으며 각자의 주장과 교훈의 교리가 통일성을 가져오는 데 유익했다.”고 한 평가는 옳다. 바로 이들의 모임이 청교도 정신을 결집시키고 확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린달(Grindal)이 감독으로 있던 런던 교구의 성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왕과 대주교의 명령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런던 교구에 배포했다. 이 서한의 핵심적인 내용은 “성직자의 옷은 그 자체가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신자들을 거짓된 예배로 미끄러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런던 교구 내의 성직자 폭스(John Fox)를 위시해서 27명이 국가로부터 성직록을 받지 못하게 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 운동 지도부는 런던 교구내의 성직록을 받는 성직자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직록이 끊긴 목사들 때문에 오히려 런던 안팎으로부터 동조자를 많이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청교도운동은 성직록을 받지 못하는 목사들 영향아래 있게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인 목사 스토우(John Stow)에 의해 ‘Puritan’(청교도, 淸敎徒)이란 용어가 ‘주님의 흠 없는 양들’이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Puritan(청교도)이란 이름이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이들을 가리켜서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on)이라고 불렀었다.
특별히 필드(John Field)와 윌콕스(Thomas Wilcox)가 설교하던 교구(Holy Trinity Minories)는 역사적으로 고귀한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자기들의 설교자를 자기들이 선택할 수 있는 독립성을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교구는 자연히 청교도운동의 본거지가 됐으며 청교도 지도자들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교구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 교구의 어떤 성직자는 자기는 원치 않지만 항명파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하면 회중들이 그에게 제복을 입거나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 운동은 성직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일반 성도들의 운동이기도 했다.
또 당시 영국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사람들을 모두가 교회 밖에 있는 비(非) 국교도 라고는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개인적으로 왕정을 구축하는데 비(非) 성경적 요소를 묵인하는 입장에 있었다. 복음과 정치 사이에는 비(非) 성경적 요소가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법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 청교도 지도자들도 있었다. 그 대표자가 런던의 감독이었던 그린달(Grindal)이었다.
그린달이 볼링거(Bulling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제 감독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들어오기 전에 오래도록 싸웠던 교회 개혁의 문제들을 이제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왕과 국회가 최선의 판단을 하도록 일해야 할 자는 이제 우리들이다. 몇 가지 예식이나 제도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방치해 둘 수 없다. 아직도 교회는 순수한 복음교리가 남아 있다. 힘을 합치자!”라고 호소했다.
그린달로부터 이와 같은 제의를 받은 자인 볼링거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 캠브리지의 St. Magdalene대학 총장이었던 험프레이(Laurence Humphrey)와 옥스퍼드의 그리스도교회(Christ Church) 학장이었던 샘슨(Thomas Sampson)은 그린달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교회 개혁을 돕기 위해 교회 밖에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흩어진 개혁 신자들을 모아놓고 목회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교회 개혁을 전개해 나갔다.
‘Church History of Britain’을 쓴 풀러(Thomas Fuller)는 “청교도 정신은 에드워드(Edward) 왕의 시대에 수태되었고, 메리 여왕 시대에 태어났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에 젖을 때고 양육되었으며, 제임스(James)왕 시대에 성장하여 키가 크고 늠름한 젊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촬스(Charles) 왕의 시대에 성장하여 키가 크고 비로소 그의 적인 교권제도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복할 수 있는 완전한 강함과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을 갖게 되었다.”라고 평가한 말은 청교도에 대한 의미 있는 요약이다.
지금까지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단절했을 때 개혁의 대로가 열리는가했으나 다시 왕정에 눌려 개혁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끝까지 개혁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 밖에서 망명지에서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고국의 성도들에게 보급함으로 개혁의 기반을 다지고 넓히는 작업을 계속한 것을 보았다.
또 일부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정체제 속에 들어가 효과 있게 주도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교회 밖에 남아서 양심을 지키며 개혁의 토양을 일구어 갔음을 보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치하에서 일어났던 청교도의 역사 중에서 특히 장로주의 운동의 주장과 확산 그리고 그 좌절까지를 개관해 봤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청교도를 생각할 때 성직자들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청교도들이 국교 체제 밖에서 활동했는데 성주나 유력한 상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국교 체제 속에 있는 청교도와 국교 밖에서 활동한 청교도도 있었으며 전문 성직자 청교도도 있었고 또한 그들의 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한 평신도 청교도들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회복을 위해서 지칠 줄 모르는 청교도 개혁자들의 열정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교회 안에서 밖에서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하고 그리고 가능한 일부터 추진해 갔던 그들의 열정과 의지가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Ⅵ. 청교도의 회심론(回心論, conversion)
개혁자들은 부패한 예배와 조직만이 아니라 부패한 교회의 회원 자격을 공격했다. 즉 사악한 이름만의 교인을 교회로부터 추방하려 했다. 초대교회 때는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 축출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 사악한 자들은 교회가 회원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가져다주는 조직임을 감지하고는 스스로 물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점점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회가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을 거부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1)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도나투스파(Donatism)는 여러 세대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점도 흠도 없는 성결(聖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항하여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정통 기독교 사상을 지도하게 될 교회론을 주장했는데 가견(可見) 교회와 불가견(不可見) 교회 두 개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다. 불가견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구원 얻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 죽은 자, 산자, 앞으로 태어날 자들을 총망라한다. 그러나 가견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로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한 산자들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견 교회의 모든 회원이라고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입으로만 신앙고백을 한다고 다 진정한 신앙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록 가견 교회가 전적으로 순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성경을 거스리는 악인들을 눈에 띄게 회개 할 때까지 교회에서 추방함으로써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어거스틴은 인정했다.
청교도들의 교회 회원 자격조건 : 후대 교회는 어거스틴의 이 원칙에 따라 교회 회원 자격을 제한하려는 노력을 했다. 청교도들은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가견 교회를 불가견 교회에 더 접근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교회 회원 자격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국가의 모든 시민이 곧 교회의 회원’이라고 주장하는 영국교회가 어떻게 참 교회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청교도들이 보기에는 영국교회의 소위 신자(信者)라고 하는 이들 중 다수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위탁하고 헌신한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한 번도 자발적으로 복음에 순복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계명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교구 안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구 교회의 회원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에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로 불리는 자들은 오직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이 인정되는 사람들로만 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교회로부터 탈퇴해서 자기들의 교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교회의 회원들이 불가견 교회의 회원에 보다 더 근접하기를 바라서 회원자격의 표준을 높게 설정했다. 이들의 전제는 인간의 공로는 무시해야 하며 구원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견 교회가 그 회원을 받을 때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표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윌리암 퍼킨스는 한 개인이 믿음을 얻게 되기까지의 단계를 열 단계로 분류했다. 처음 네 단계는 예비적 것이다.
1) 말씀이 전파 되는 곳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 우리 본성의 강퍅함을 깨뜨리고 굴복시키는 현상들을 동반할 수 있다.
3)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고분고분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율법에 대 한 지식 즉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이해는 또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독특하고도 고유한 죄들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된다.
4) 율법의 두려움으로 인도한다. 이 결정적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 없고 속수무책인 상태를 깨닫고 구원에 대해 절망한다.
여기까지는 구원의 은혜의 실제적인 역사가 없을 수도 있다. 멸망할 자들도 여기까지 올 수 있고 그 이상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그 후 여섯 가지의 단계가 주어진다.
5) 자기 마음에서 복음 속에서 설명되고 전파된 구원의 약속에 대한 심각한 고려를 발견하게 된다.
6) 그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의 불꽃 즉 믿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을 점화시키신다.
7) 그러나 믿음이 점화 되자마자 전투가 시작되어 영혼은 의심과 절망 에 대항하여 열렬하고 지속적이며 간절한 용서의 간구로 싸우게 된다.
8) 이 전투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지만 결국은 확신과 자비의 설득의 느낌을 낳는다.
9) 그 뒤에 복음적 슬픔 즉 그것이 죄라는 이유로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이 따른다.
10)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순종으로 그의 계명에 순종 하고자 애쓰는 은혜를 주신다.
예비적 단계 후의 모든 현상들은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없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관련된 개인의 의지를 통해 작용하고 그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그가 육신에 머무르는 한 믿음이 들어올 때 시작된 전투가 계속될 것이다. 심지어 확신의 단계에 도달한 후에도 그의 의심은 계속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중지 된 다면 그것은 그가 단지 망상에 빠져 한 번도 믿음을 가진 적이 없으며 은혜의 언약 안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증거다. 망상의 위협이 항상 존재 하는데 왜냐하면 은혜에 의해 생긴 확신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거짓 확신이나 안전과 쉽게 혼동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아더 힐더샘(Arthur Hildersham 1563-1631)
아더는 거짓 확신과 참 확신 구별하는 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참 확신은 오직 말씀의 설교를 들은 후에 일정 기간의 절망 뒤에야 주어진다. 성도들은 항상 자기들에게 많은 두려움을 가져왔던 속박 의 영을 가졌던 때를 기억할 수 있다.
2) 거짓 확신을 가진 자들은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에 의한 고통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 성도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일반적 설 득이나 혹은 자기들 속에 있는 어떤 공적 미덕에 근거하는 법이 절 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에 근거한다.
4) 진정한 확신은 행실의 변화를 동반한다. 그것은 퍼킨스가 은혜 역사 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고 청교도들이 성화라고 부른 하나님의 명 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러나 성화가 비록 칭의의 증거이기는 하지만 틀릴 수 있는 종류의 증거로 생각했다. 진정한 확신과 거짓 확신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계속적인 불완전 함이었다. “성도들은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종종 고통을 당한다. (중략) 그러나 이 거짓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종종 아주 자신이 있고 결코 의심하는 법이 없다.”
이것이 청교도 설교자들의 계속적인 메시지였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청교도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믿음의 결핍에 대한 거짓 없는 슬픔’의 증거라고 했다.(Ezekiel Culverwell) 또 “우리 속에서 구원에 관계되는 어떤 은혜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다.”(W. Perkins)라고 했다.
(4) 셰퍼드(Thomas Shepard, 1605-1649)의 회심론
셰퍼드는 건전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참된 회심의 네 가지 과정 혹은 요소를 제시한다.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네 가지 준비 단계로 1) 깨달음(conviction) 2) 통회(compunction) 3) 겸손(humiliation) 4) 믿음(faith)의 과정, 혹은 요소를 갖게 된다고 봤다. 조나단 에드워즈 의 회심론은 이러한 셰퍼드의 회심론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면 셰퍼드의 회심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깨달음(conviction)
회심에 있어 성령의 첫 번째 작업은 죄를 확 실하게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는 말씀을 근거로 성령이 첫 번째 하시는 일은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으며 그들이 죄책과 죄의 지배아래 있음을 확신시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Thomas Shepard 다. 그 다음에 성령은 의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없이는 믿음도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죄를 못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왜 구속 주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죄에 대한 인식 없이 예수를 왜 믿을 것이며 누구로 알고 믿을 것인가?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우선 마음의 번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성경적이 근거로는 그는 사도행전의 본문을 제시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유대인들은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먼저 말씀을 듣고 자기 죄를 본 후 비로서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즉 먼저 죄를 ‘보고’(see) 그 다음 그것을 ‘느끼며’(feel) 그런 다음에 ‘믿게 된다.’(believe)는 것이다. 즉 먼저 지성적인 이해에서 출발하여 감성적 인식으로 전진하며 그 결과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회심론의 핵심이었다. 죄와 비참에 대한 감각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먼저 죄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죄와 비참에 대한 느낌이 있을 수 없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이 모든 멸망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성령이 제일 먼저 확신시키는 죄는 특정한 죄라고 믿었다. 성령이 일차적으로 확신시키는 죄는 자신만이 아는 어떤 죄 혹은 어떤 특정한 죄이다. 성령은 일반적인 범과들을 가지고 사람을 사로잡지 않는다. 특정한 죄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신다. 보통 주님은 먼저 어떤 하나의 큰 죄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생각하게 하신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머지 모든 죄를 지적해 내신다.
그래서 죄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한 가지 특정한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고 과거 모든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음란, 거짓말, 도적질 등의 죄를 지적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죄인은 자신의 모든 죄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한 것이 바로 한 가지 주된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살해했다는 죄를 깨달은 다음 다른 죄악 된 행습들을 기억했다.
교양 있게 자란 탓에 자기 죄를 깨닫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이 어떻게 죄를 깨우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은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어 자신의 멸망할 처지를 깨닫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낸다. 그런 경우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추하고 은밀한 혹은 노출되는 죄에 빠지도록 방치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과 슬픔을 일으키는 특별한 계기로 삼으신다.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자신에 대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게 만드신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이처럼 죄를 보는 것과 그 악을 깨닫는 것은 별개다.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죄들은 많이 보고 그것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큰 해악을 못 볼 수도 있다. 그 경우 그는 죄를 보면서도 그것을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벼운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해악까지 보아야 죄를 참으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가장 작은 죄로 인하여도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범한 지극히 작은 죄로 인해 영원히 죽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성령은 가장 작은 죄로 인해서도 영혼이 사망하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영원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납득이어야 한다. 영원히 멸망할 수도 있다고 하는 어떤 맹목적인 두려움이나 의심이 아니라 “나는 이 상태로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완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죄에 대한 사망의 심판을 감지할 때 비로소 죄인은 심각해진다. 죄를 알기는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육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도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죄인은 비로소 자신이 흉악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해본 적이 없는 자는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다.
셰퍼드는 성령이 어떻게 죄를 확실하게 깨우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성적인 깨달은 관념적인 것이요, 영적인 깨달음은 실제적인 것이다. 관념상의 깨달음은 영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모두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은 아니요, 죄에 대한 고백이 모두 죄에 대한 깨달음도 아니다. 죄에 대한 관념적인 깨달음과 영적인 실제적 깨달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셰퍼드는 한 비유를 든다.
관념적인 깨달음은 마치 벽에 그려진 사자를 보는 것과 같다. 사자의 그림을 보고 떠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듣고 죄와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들은 아주 비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떨리지는 않으며 이 악들로 인해 당혹해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살아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며 죽음이 그들 앞에 생생하게 제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죄를 보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가 어떤 것인지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참으로 보게 되면 마음이 철렁 내려않는다. 그것은 죽은 사자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 사자와 마주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그는 정죄 된(condemned) 자이며 아직 죄를 확실히 깨달은(convinced)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영적 깨달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분명하고 확실한 빛 속에서 죄와 그로 인한 죽음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할 말은 다 있고 자기의 죄를 정당화시키려는 변명을 한다. 그러나 성령이 죄를 깨우쳐주시면 그는 모든 핑계를 버리고 자기가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핑계에 대해 답변을 하시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서서 “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가 죄악 되며 아주 비참하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둘째,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는 실제적 빛이 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영혼이 이 죄와 죽음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죄를 실제적으로 보게 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인식함으로서’라고 대답한다. “죄가 참으로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주목함으로써 보인다. 그는 죄로 인해 상하신 분이다. 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이 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이 죄를 실감할 수 없다. 죄의 위험성에 대한 말만 듣고서는 영혼이 괴로움이나 갈등을 겪지 않는다. 성령이 개입하셔서 죄를 실감나게 하실 때 비로소 인간은 죄를 ‘최대의 악’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 식으로 죄를 느낀 적이 없다면 한 번도 죄의 실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자요, 그리스도를 최대의 선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셋째, 지속적인 빛이 있다.
영혼은 자기 앞에 있는 죄와 죽음을 계속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의 화살이 영혼에 깊이 박혀 뽑히지 않는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를 깨우치는 성령이 그를 따라다니고 순간순간 맞닥뜨리며 그가 한 일들을 보고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주 작은 죄 조차도 이제 자기 눈 속의 티처럼 여겨진다.
2) 통회(compunction)
다음으로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정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깨달음의 바로 다음 목표는 통회 혹은 죄에 대한 감각이다. 여기 감각이란 자기가 범한 악들에 대한 영혼의 슬픔과 괴로움의 느낌이다. 그래서 회심에 대한 두 번째 단계는 양심의 가책 혹은 죄에 대한 회환으로 번역되는 통회이다.
셰퍼드는 통회를 참회 혹은 죄로 상한 심령(brokenness of heart for sin)과 동의어로 본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죄책감 혹은 죄를 느끼는 것으로 강퍅한 마음과 반대 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찔림을 뜻한다. 즉 영혼이 죄와 비참으로 인해 상하되 죄와 단절될 정도의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통회다. 그래서 셰퍼드는 통회의 삼대 요소를 두려움, 슬픔, 죄와의 결별이라고 주장한다.
– 죄에 대한 통회의 첫 번째 요소 : 두려움
성령은 지옥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사망과 지옥, 죄에 대한 형별에 관한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두려움이 주입되면 죄인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생각으로 움츠러들어 “주님 내가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부르짖게 된다. 성령이 그러한 두려움을 주입하시면 죄인은 이제 자기가 본 그 큰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준비가 된다. 다시 그 두려움의 성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 그것은 성령의 역사다. 그것은 단지 천부적인 양심에서 울어나오 는 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 그것은 분명한 두려움이다. 즉 그 두려움에 의해 죄인들은 자신 들이 비참하다는 것과 그 비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
– 그것은 강력한 두려움이다. 이 강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다는 사실을 성령이 보여주면서 영혼을 흔드는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영혼은 오직 성령이 마음에 주시는 내적 확신의 방법으로 위로를 받기 전에는 두려움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사죄와 구원의 확신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단지 객관적 계시만으로는 안 되고 주관적 체험이 동반되어야 만족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청교도 회심론의 진수다. 그래서 참된 회심을 원하는 자는 이 두려움을 체험해야한다. 셰퍼드는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이러한 두려움으로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신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도전한다.
– 죄에 대한 통회의 두 번째 요소 : 슬픔과 애통
성령은 죄에 대한 기쁨을 제거해 준다. 통회 상태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다가올 재앙을 보지 못하던 영혼이 두려움 때문에 안일함에서 벗어나듯이 슬픔은 죄 안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제거한다.” 이런 상태에서 죄인은 밤낮으로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열함과 허영과 무지의 죄악을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미소 대신에 먹구름 같은 진노만 보게 된다. 셰퍼드는 이 슬픔을 네 가지로 분석한다. 죄에 대한 슬픔은 영적 기쁨 앞에 오는 것이요, 큰 애통이고, 지속적이며, 기쁨의 길을 만드는 애통이다.
– 죄에 대한 통회의 세 번째 요소 : 죄로부터의 분리(단절)
죄로부터의 단절 없이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죄로부터의 분리란 죄의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 혹은 죄 짓고자 하는 의지로부터의 분리다. 즉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분리가 없는 우리의 모든 금식, 겸비, 기도, 눈물을 주님은 혐오하신다. 여기서 셰퍼드는 죄를 버리는 것을 신앙의 행위 시작 이전의 과정으로 본다. 죄인이 죄의식으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겸비해져 죄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 즉 회심과 신앙의 전단계로서 죄로부터의 이탈을 논한다.
새 감람나무에 접붙여 지기 전에 그는 옛 뿌리로부터 잘려야한다. 즉 죄로부터의 분리를 믿기 전 혹은 믿기 시작할 무렵의 회개와 연결시킨다. 죄를 끊지 않고 믿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멸망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당신의 죄로부터 단절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죄와 분리되는 것이 통회의 세 요소들 중 하나라는
셰퍼드의 주장에 어떤 사람들에 의해 반론이 대두되었다. 아직 믿음도 없고 회심하지도 않은 자가 죄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셰퍼드는 또 말하기를 죄와 분리는 단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몰아가게 하는 정도 이상은 아니라고 답했다.
3) 겸비(humiliation)
그러면 죄와 그로인한 비참을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슬퍼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죄와 결별해야 그것이 참된 통회로 인정될 수 있는가? 한마디로 통회를 얼마나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는 통회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통회하면 된다고 대답한다. 통회의 목적은 겸비해져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리스도가 그의 죄를 처리하시게 하는 것이다. 즉 통회의 바로 다음 목적은 겸비해 짐이요 그 마지막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방법에 의해 이 죄로부터 해방을 가능하게 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도덕적 방법과 물리적 방법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한다. 믿음에 의해 회심을 일으킬 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단지 ‘설득하는 도덕적 행위자’ 일뿐 아니라 ‘신적이고 직접적인 행위에 의해 영혼으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역사하는 초자연적 행위자’이기도 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혐오하게 만들 때 성령은 두려움과 슬픔에 의해 마음을 움직이는 도덕적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다. 유다와 가인의 마음이 깊은 영향을 받고 괴로움을 당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렀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령은 물리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자기 손을 대신하신다. 직접 은밀한 가격을 가함으로 그들의 강철처럼 곧은 목을 돌리고 죄의 쇠 같은 힘줄을 끊어 이 단절 혹은 분리가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 예수는 통회에 의해 죄인의 마음을 부스러뜨린 후 즉 상한 마음을 만드신 후 그를 겸비(謙卑)케 하는 일을 하신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셰퍼드는 단지 상한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동시에 겸비해진 심령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떤 수단에 의해 주님은 겸비함을 주시는가? 첫째는 성령에 의해서요, 둘째는 성령이 직접 영혼에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고 답한다. 성령은 교만과 같은 죄악 된 성향을 근절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뒤에는 겸손의 습관과 믿음의 덕에 의해 자신을 낮출 약간의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이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겸비케 한다.
의무를 행하는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속에서 단지 죄와 연약함 죽음과 정죄만을 보게 될 때 죄인의 마음은 낙심에 빠진다. 그로인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이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유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죄인은 주 앞에 엎드러지게 된다. 만일 주님이 그에게 자비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주는 의로우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영혼은 자기가 벌써 지옥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큰 자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겸비의 핵심이라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미 7:9) 주님이 거절하시면 스스로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자처하면서 겸비해질 때 주님은 그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신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 전에 죄인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상태 즉 겸비의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 회심론에 관련된 셰퍼드의 가장 중요한 요점들 중 하나다.
4) 믿음(faith)
셰퍼드에 의하면 믿음은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서 겸비해진 죄인은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를 받아드린다. 혹은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부르실 때 온 영혼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을 받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간다. 그래서 셰퍼드는 ‘그리스도를 받아드린다, 그리스도에게 간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신뢰 한다, 매달린다’ 등의 표현이 다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에서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는 단어와 ‘믿는다’는 단어를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소명을 전제로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어떤 사람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그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다.
여기서 셰퍼드는 지적 동의와 참 신앙 사이에 아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참 신앙을 소유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혹은 지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적 동의는 믿음의 한 요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참 신앙은 단지 이해만이 아니라 의지를 포함한다. 셰퍼드는 이 의지가 주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 때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규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신앙을 묘사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답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인가, 아닌가?’하는 것이 주요하고도 일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믿는 것을 믿음의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보았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밝히 드러난 17세기 청교도시대에는 ‘예수가 메시아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참 믿음이 구성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청교도 시대의 참 믿음은 당연히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다. 참 신앙은 셰퍼드에 의하면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그것은 지적 동의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옴에 있어 의지와 감정들을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했다. 그러므로 셰퍼드의 신앙관은 전인적이었다. 그런 전인적인 신앙의 효과적 원인은 성령이시다.
그러면 나의 믿음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어떻게 구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에 열중하고 있다면 어떤 약속이든 사실상 당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원하는 자 즉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주실 때까지 계속 간구하겠다고 결심하는 자는 요한계시록 22:17을 보라고 권하며 그리스도에 목마른 자는 이사야 55:1-3을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 약속들이 나를 향한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는 자들에게 셰퍼드는 “지금 당신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혹은 초청에 순종해서 믿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믿음의 순종이라고 했다. 초대교회 삼천 명이 믿은 것이 바로 그런 근거였다고 그는 말한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으라.”라고 외치자 그들은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의 권면이 주제 넘는 행동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그 권면을 받아들인 것도 주제 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셰퍼드는 어떤 믿음이 참된 것임을 보증하는 하나의 표지를 제시한다. 만일 믿음에 회개가 동반된다면 믿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 아니다. 그러면 회개가 따르지 않는 믿음도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죄를 알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뢰한다. 그러나 그들의 소위 믿음은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과 슬픔이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기는 하나 회개치 않는 마음과 그분에 대한 멸시로 그분을 찌르는 ‘가시나무 믿음’ 곧 거짓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즐겁게 여기나 그를 따르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것은 달콤하게 여기나 그의 뜻과 연합하는 것은 괴롭게 여긴다.
죄에 대한 슬픔, 사랑, 감사, 겸손 등의 복된 샘들을 낳는 믿음은 성령이 가져다 준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주체는 겸비해진 죄인의 영혼이다. “겸비해진 영혼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셰퍼드는 그리스도는 말씀과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 온다고 답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말씀을 붙잡으면 그를 붙잡는 것이다. 믿음의 생명과 핵심은 온 영혼이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이다. 여기 청교도적 참된 믿음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 왔지만 거부당한 이유는 온 몸으로 오지 않고 반(半) 마음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믿음이란 단지 영혼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이 그에게 나아와 온 영혼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온 영혼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이란 모든 것을 버리고 혹은 팔아버리고 밭과 보화를 사는 것이다.
그러면 온 마음으로 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평안할 때는 정욕을 쫓다가 어려울 때는 그리스도에게 피하는 것이다. 이는 저주받을 위선이라고 셰퍼드는 비난한다.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귀하다. 그러나 지극히 귀하지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매달리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와 세상 정욕 사이에 나뉜 두 마음을 품은 믿음이다. 양심이 괴로우면 그리스도에게 가고 정욕이 자극되면 세상으로 가는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할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셰퍼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릴 것을 권고한다. “오라! 그러므로 가련하고 지치고 잃어버린 멸망할 죄인이여!” 이 같은 주님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보기엔 최대의 죄였다. 그러한 요청을 받은 죄인은 “나 같은 죄인도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같이 허물 많은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실까?”하고 의심한다.
그러나 셰퍼드는 대답한다. “주님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와서 영생을 소유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거저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들어오라고 간청하십니다. 거저 주어진 은혜를 받아드리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5) 거듭난 자의 종교적 정서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거듭난 자의 진정한 은혜로운 정서들(The Religious Affections)을 열두 가지로 밝힌다.
1) 신령하고도 은혜로운 정서들은 마음에 미치는 신령하고도 초자연적 이며 신적 감화들과 작용들로부터 발생한다.
2) 은혜로운 가장 객관적인 근거는 신적인 것들 자체가 지닌 초월적인 탁월함과 호감을 주는 성질의 것이지 이기심이나 자기 애착과 관계 된 것이 아니다.
3) 참되고 거룩한 정서들은 먼저 신적인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 하는데 기초를 두고 있다.
4) 은혜로운 정서는 신적인 것들과 적절하게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 록 하는 조명 받은 마음에서 생겨난다.
5)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들은 신적인 것들의 실재성과 확실성에 대한 판단에서 나온 합리적이고도 영적인 확신을 수반한다.
6) 은혜로운 정서는 복음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7) 은혜로운 정서는 본성의 변화를 수반하다.
8) 은혜로운 정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과 같고 비둘기 같은 영과 기질을 수반하며 그것을 지향한다.
9) 은혜로운 정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그리스도인다운 영적인 자 애로움을 수반한다.
0)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은 아름다운 대칭과 균형을 이룬다.
1) 은혜로운 정서가 고양 될수록 신령한 성취를 향한 영적 갈망이 더 커진다.
2)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은 그리스도인의 실천하는 삶에 작용하여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결 론
그러면 청교도들이 보여준 신앙의 성숙함이란 어떤 것들인가?
(1) 청교도들은 삶 전체가 신앙생활이었다.
그들에게서 기독교가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태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그 한 가지 목적에 통합하려고 했다. 개인의 능력 개발과 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서 성속(聖俗)의 분리는 없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선하다고 봤고 그래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성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행동해야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은 통전적(通典的, Wholistic)이었다. 삶의 통합도 목적도 없이 제 기분대로 살기 좋아하는 이 세대는 청교도들에게서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한다.
(2) 청교도들의 삶은 영적 체험에 근거한 삶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통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었던 것처럼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대로 살기를 힘썼다. 그래서 성경을 조직적으로 묵상했고 그 묵상의 모델은 청교도 설교였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도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을 성결의 불변의 규칙으로 알았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타락하여 부패했는지를 알기 때문에 겸손하려고 했고 자기를 믿지 않으려는 자세를 가졌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죄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감사할 수 있고 내적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었다.
(3) 청교도들은 이루어야 할 꿈을 가진 자들이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주님의 깊고 고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정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4) 청교도들은 경건을 상실한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의 마지막 보 루는 가정이라고 생각했다.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35-1594)은 “우리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아직 이 땅에 있다면 우리 가정에서 보호하고 양육하자.”라고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야합하려는 영국 국교회를 떠났다.
(5) 청교도들은 인간의 생명과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문제 영원의 문제 그리고 인간 영혼의 존귀함에 대한 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개체가 지닌 경이로움을 깊이 느낀 자들이다. 하나님의 친구로 지음 받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6) 청교도들은 중단 없는 교회 개혁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에서 이상은 진실 되고 철저히 회개한 심령이요, 정통적이고 건전한 신학노선을 견지하며, 영적으로는 깨어서 기다리는 분위기가 충만하고, 성격으로는 현명하고 진취적이고 겸손히 순종하는 성숙함이요, 받은바 구원을 즐거워하며 확신하는 상태에 두었다. 이것이 청교도적 목회관에서 시종일관 추구하는 목표였다.
(7) 청교도들은 주님의 교회에서 가능한 쭉정이를 제거하려는 열심 때문에 에 특별한 회심론(悔心論, conversion)을 발전시켰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중생과 회심으로부터 시작 되며 진정한 회심 여부로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고자 했다. 그리고 진정한 회심을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이상과 같은 청교도들의 높은 이상과 목표 그리고 성숙함은 우리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글쓴 이 / 장희종 목사(고신 대구명덕교회) 출처 / 코람데오닷컴
< 회심에 관한 참고도서 >
1) Jonathan Edward, The Religious Affections,『신앙과 정서』, 백금산 역.
2) Stephen Charnock, The New Birth Ⅰ,『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 이태복 역.
3) Stephen Charnock, The New Birth Ⅱ,『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손성은 역.
4) W. Shedd, Sermon to the natural man『 거듭나게 하는 설교』, 서문강 역, 16장
5) Archisald Alexander, 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영적체험』, 서문강 역
6) Richard Baxter, A Call to the Unconverted,『회심』, 백금산 역.
7) John Owen, The Holy Spirit His gift and power,『개혁주의 성령론』, 이근수 역.
8) Peter Masters, Physicians of Souls,『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9) Lewis Bayly, The Practice of Piety,『경건』, 조계광, 안보현 역.
10) 양낙흥,『요나단 에드워즈』, 서론 제3장, 제2부 4장 ‘에드워즈의 중생론’.
11) 헤르만 바빙크,『개혁교의학』, 박태현 역, 4권 51장 ‘믿음과 회심’.
12) 요한 칼뱅,『기독교강요』, 김종흡 외 역, 제3권 3, 6-10장
청교도의 결혼과 가정
1. 청교도의 결혼관
첫째, 결혼은 창조의 법령이며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서 인간의 이상적인 삶에 속한 것이다.
둘째, 성경의 용어로 결혼을 정의하고 묘사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멍에를 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동의로 맺어주신 것이다. 그들은 그때부터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도에 따라 모든 일에 동등한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자녀를 낳고 간음을 피하고 서로 돕고 위로하는 것이다.”(벌링거, 크랜머의 공동 기도서 중)
셋째, 그들은 결혼 상대자들 앞에서 상호간의 진심어린 사랑을 제시하였다. 남편과 아내 서로에 대한 확고한 애정은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의 명령사항이다.(로저스) 청교도들은 부부애정에 대한 긍정적 현실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결혼의 제정, 결혼의 완전한 의미, 결혼의 관리, 결혼의 윤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다. 성경에 근거한 결혼관을 통하여 완전하고 지속가능한 사랑이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2.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
청교도들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 “영혼에는 성이 없다. 아내의 영혼이 자신이 영혼처럼 동등하게 자연스럽게 모든 선함을 나타내도록 하라. 다만 아내의 영혼이 연약한 육체에 의해 약해지고 무력해지는데 주께서 그러한 약한 육체를 입히신 것은 지혜로운 섭리에 의한 것이니 하나님의 선을 위해 더 편리하고 편안한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로버트 볼턴)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그리스도인과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의 공유가 우선적이다. 하지만 이것 이외도 아름다운 마음과 잘 정립된 인격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아름다운 얼굴과 육체보다 중요한 것이다. 결혼한 부부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상호간의 사랑과 봉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서로에게 서로를 주셨다는 확신에 기초하여 그들 사이에 애정의 결속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확신에 찬 결혼이 영속할 수 있도록 부부를 돕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교회나 민사 재판에 의해 결코 교정될 수 없는 간음과 같은 고의적 유기를 제외한 무엇도 결혼의 결속을 해제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들은 결혼 상태에서 사랑과 선의, 존경과 존중, 평화와 만족, 공동목적과 상호의지를 지속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바쳤다.
3. 가족의 범위
청교도들은 부모와 자식뿐만이 아니라 종들, 보살핌을 받고 있는 노령의 친척들 그리고 때로는 거주자들도 포함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핵가족이 아닌 확대가족이었다. “자기 가족을 인격에 있어서나 모두 하나의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가족 내에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중생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존 게리)
청교도들은 가족이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남편을 목사로 그의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은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주일날 가족을 통솔하여 교회에 참석시켜야 하며,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를 시험해 보아 점검해야 하며, 남아있는 이해에 결함을 채워줘야 하며, 가정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이것들을 올바로 배우기 위하여 남편들은 기꺼이 시간을 들여야 한다.
또 청교도는 자녀양육을 매우 중요시했다. 부모는 교육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 부모의 모범은 거룩함의 가장 큰 모범으로 특히 어린 시절의 영향력이 더 큰 어머니의 모범이 중요하다. 이들의 가정생활에서의 신앙생활은 매우 일상적이며 실제적인 계획이었다.
4. 하나님의 소명
부모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자녀들이 상처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공적 소명과 가정의 소명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철저하고 균형 있게 두 소명 모두를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 생활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열정은 신앙 질서에 대한 동경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소명에 관한 택일적 선택과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아름답고 경건한 삶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의무들이 안정되고 충족되는 계획적이고 심사숙고 된 활동들의 선순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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