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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

중세의 의화 개념은 칭의와 성화가 뒤섞인 개념이다. 형벌의 면책으로서 칭의와 내재적 자질의 변화로서 성화가 서로 뒤엉켜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를 탈취하는 도적때가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되 나누지 않으면서 주입으로만 설명하던 것을 칭의는 전가로 성화는 주입으로 설명했다. 물론 믿음 역시 주입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세신학이 쓰지 않던 전가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에 순종하심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만 머물게 했다.

여기서 율법의 모든 요구는 아담에게 하신 먹는 날에는 "#반드시_죽으리라"를 포함하는 요구에 대한 순종이다. 즉 십자가의 대속이 이 율법의 요구의 정점에 있는 순종이다. "#먹지_마라_반드시_죽는다"는 조건문으로서 이 언약문은 논리적으로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즉 "#먹지_않고_순종하면_영생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이 실패한 이 언약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구원은 단지 사망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데 있어야 한다. 이것이 로마서 5:12-21을 석의하는 기본 개념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두 대표, 곧 아담과 그리스도는 사망과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확인하는 바며 생명은 믿음과 회개로만 확인이 가능하다. 즉, 사망에서의 도망으로서 믿음과 생명을 얻음으로서 회개가 동반되어야 확인이 가능하다. 그래서 WCF는 "#구원에_이르는_믿음"과 "#생명에_이르는_회개"를 나누어서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는 율법의 이 요구에 만족케 하심이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사망을 대속하심 자체가 행위 언약적 요구라는 의미다. 그래서 1603년에 세상을 뜬 장로주의자 토마스 카트라이트 역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했다. 이는 "#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의_전가"가 16세기적 이해라는 의미다. 1561년 우르시누스가 대요리문답을 작성할 때도 이 신학적 이해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하이델베르크 60문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종교개혁 초기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 전가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함께 종교개혁의 신헉적 건축물로 함께 전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해들이 더 정교해짐으로 WCF에 행위언약 개념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행위 언약이 세 일치신조에 없음으로 후대에 더해진 것이라는 논리는 북미 개혁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페더럴 비전주의자들이 늘상하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세 일치 신조는 높이 사고 WCF는 하찮게 여기며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등장한다. "#그리스도의_능동적_순종"은 "후대에 더해진 것"이라면서 "WCF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기 종교개혁 때부터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전가 개념과 함께 맞물려 있는 개념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만 우리 죄를 사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에게 의가 주입되었다고 설명했다. 거기서 빚어진 열매가 세미펠라기즘 곧 행위구원론이었다. 그럼 당연히 종교개혁자의 입장에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문제가 된 주입된 의의 개념을 거부하고 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며 그 의가 믿음으로만 우리 것으로 여겨지는 전가 개념을 채택하고 그렇게 보속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심조차 그리스도가 다 행하신 것이라고 돌려야 전가된 의가 온전해지며 우리가 생명에 이르기까지 온전해질 수밖에 없다. 여러 글과 말로 귀 아프게 설명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