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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유대인의 율법관 (2)

유대인의 율법관 (2)
주님께 호의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중생을 가르치심
그때 예수님께서는 기본적인 원칙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도리입니다. 물론 중생이라는 것은 아담 이래로 있던 일이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로소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그 교리의 체계를 세울만한 사람들은 바리새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하지 못하고 나갈 때 주께서는 중생에 대한 것을 바로 엮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이란 문제는 물론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니까 어느 시기에나 필요한 것이지만, 특별히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시기를 ‘네 사고, 혹은 사상이 입각해야 할 자리는 중생이라는 새로운 생명, 새 사람, 그리고 새로운 능력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새 생명에 터를 두고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신을 의지한 삶
오늘날에도 문제는 동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속죄를 그냥 승인하면서도, 마땅히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할 때 자기 인간의 능력으로 각고면려(刻苦勉勵)해서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과 그 하라고 하시는 지시에 따라 단정히 사는 것을 자기 인간의 능력으로 이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하고 새 사람으로 생활하는 중에 맺는 열매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돼 있는 인간, 즉 본래의 큰 죄악의 정욕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의 인간이 약간의 선과 의를 사모하고 나갔다고 해서 그것을 곧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윤리 면에서도 성신님을 의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품성이 나에게 구성돼서 나타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새 사람의 거룩한 나타남입니다. 
바울 선생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갈 2:8)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야 할 것인데, 그러지를 못하고 내가 내 인간적인 선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일을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부정당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언제나 잘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크라이테리아로 삼아서 내 생활을 때때로 비판해야 합니다. ‘혹시 여기에 나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내 선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내 열심을 가지고, 내 종교적인 정열을 가지고 하려는 것은 아닌가?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그 도리대로 지금 걸어 나아가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자기 장성의 분량에 맞게, 거기에 해당한 대로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장성의 분량 이상을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이론이나 생각 하에서 각고면려하고 노력하고 자자영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함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가 특별히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이것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저것은 질질 끌려가면서 행하게 된다. 내 안에 나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롬 7:15~23) 그것을 가리켜서 거기서는 ‘그 죄’란 말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한 인격적인 발휘를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할 때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옛 사람이라는 말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도 나오고 로마서 6장 6절에도 나옵니다. 그것이 마땅히 십자가에 못 박혔어야 하는데, 그리고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그것을 그대로 주워 입고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냥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과 미의 의욕을 가지고 일을 이루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옛 사람으로도 인간적인 어떤 성취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으로 끝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종교를 형성해 간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그것은 유대교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끝까지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서, 그 거룩하신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 나간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겠다고 열정적으로 일을 한다면, 우리 역시 큰 오류 가운데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부인돼야 합니다. 아상(我相)이 없어져야 합니다. 
이 기본적인 말들을 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님만을 의지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 내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이뤄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침으로서 율법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물론 우리에게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지침이 율법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지침으로서 율법, 즉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신 그 사실에 대해서까지 무감각하게 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것이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한다는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거룩한 의(義)의 현현(顯顯)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런고로 지침으로서 율법은 우리 생활의 규례로서, 혹은 규정으로서 존중돼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하신 바 내용, 즉 여러 가지의 소망과 약속들로도 서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여러 가지 명령으로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라, 하지 말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내리신 율법으로는 광의의 것과 협의의 것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안 믿으면 네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법칙이고, 이 법칙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 율법으로, 즉 법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복음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지 않고 반항하면서 복음의 은혜를 저절로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하는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과 복음이 함께 늘 서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거룩한 명령을 내가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이룰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의지해 그 힘을 빌어서 아름다운 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나’인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그 나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 나는 그 장성하는 자취를 보여야 합니다.
* 김홍전 [예수님의 행적 제6권](전주: 도서출판 성약, 1993) 268쪽~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