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딤후 2:1-26)
김홍전 목사
1. 하나님의 뜻과 일생의 방향
우리의 일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5:14-15절에서는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바가 있다면 그것을 들어주시는 줄을 아는 까닭에 또한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데에는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뿐더러 마태복음 7:21절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했습니다. 우리의 생활 행보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 제 마음대로 하면 아무리 그가 열심히 종교의 일을 행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경우에 최종적인 단안을 내리는 결정적인 요소 혹은 최종적인 심판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행보에서나 하나님 앞에 무엇을 소원하는 것에서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르고 그냥 관념적으로 그러리라 하고 지나치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품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어떤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며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해 나가는 일이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안에서 나에게 맡기신바 사명의 내용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이라고 할 때는 꼭 종교적인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우리 인생의 모든 방면에, 소위 문화적인 여러 부분에 하나님의 통치 대권과 그 뜻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의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발 하나 내딛는 것, 말 한마디 하는 것, 행동거지 하나 하는 것, 손 하나 내미는 것까지 꼭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겠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할 때는 진실로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큰 문제는 일생의 방향입니다. 예를 들면 배가 지금 큰 바다에서 정확하게 어떤 항구를 향해서 어떤 방향을 정하여 갈지라고 반드시 출발점에서 항구까지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향로를 좇아서 왼쪽으로도 틀었다 오른쪽으로도 틀었다 하는 것이고, 가다 고래 떼나 상어 떼 같은 큰 고기 떼를 만났을 때 부짖쳐서 싸우는 것보다 조금 우회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조타수가 다시 방향을 돌려서 빙 돌려서도 갑니다. 그러나 그 배의 전 항로의 방향은 그것이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이고 따라서 그 배는 항상 목적지인 그 항구를 목표로 삼고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의 일생의 목표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큰 목표지에 두고 그곳을 향해서 늘 가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갈 때 형편에 따라서는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다시 한쪽으로 방향을 틀고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조금의 장애나 빈틈이나 틀어짐이 없이 꼭 그 방향으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온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주께서 세우신 목표를 향하여 바르게 가게 함소서](수2:7) 하는 것은 ‘일직선으로 늘 가게 합소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가다가 그 목표를 벗어나 목표 왼쪽이나 오른쪽에 있는 다른 목표를 향해 가지 않고 똑바로 그 목표를 향해 늘 간다는 이야기이지 우리의 가는 길이 일직선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중의 비행기라도 출발점에서 도착지까지 일직선으로 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로에는 여러 가지 기상상 조건이 붙어 있어서 난기류가 많은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일직선으로 지나가면 항공상 위험이 많으니까 그런 데를 일부러 돌아서 다른 항로를 취해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갈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목표지에 도달하기에 가장 효과 있는 방법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데 나의 의의가 있는 까닭에 그 의의를 충분히 성립시키고 나타낼 수 있는 성장이라는 것이 항로 중에 혹은 항행 중에 혹은 목표를 향한 나의 행진 중에 늘 필요합니다. 나의 성장에 따라서 내가 행진하는 방식과 내 식별력도 달라집니다. 그런고로 일 년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일 년의 성장이 있어서 일 년 후에 생각하는 방식이 다소 달라지면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어떻게 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자기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가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원래 하나님의 뜻을 마음 가운데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그의 안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고 깨닫고 그것을 기꺼이 행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기본적인 일이라고 우리가 이미 배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는 마태복음 7:21절의 말씀대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먼저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 사람이 그것을 알 자격이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합니다. 무자격한 위치에 있으면서 암매한 가운데 밤낮 빙빙 돌면서 하나님 뜻을 행하겠다고 구두선과 같이 구호만 외쳐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둘째는 “알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그에게 있어야지 아무리 그 뜻을 알기는 알아도 자기로서는 어려운 일이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얻는 것인지도 이미 알고 그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셋째는 “암만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 가운데 그렇게 하기가 싫으면, 즉 하나님의 뜻을 안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태하기도 하고 핑계를 대기도 하고 그냥 천연하기도 해서 결국은 흐지부지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사랑해서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의 열정과 의지의 구체적인 작용과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한 인간의 자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러한 자격 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데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 즉 성령님의 역사로 그러한 지식과 지혜와 마음의 요구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에게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 나가게 하십니다.
또한 그 사람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하고 비교도 해 보고 올바로 판단도 하는 작용이 필요한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개야, 너 이거 해라’ 하면 ‘예 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리가 많은 지식, 소위 판단 기준으로서 있어야 할 많은 재료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나 자신의 이성과 지적인 활동과 판단력이 항상 명확하고 활발하게 사역하고 역사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내 심령이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의 조명을 간절히 구함으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내게 가르치는 뜻이다’는 확증과 확신이 마음 가운데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그냥 입으로만 말하고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 가운데 확신이 있어서 움직여야 천 사람이 천 소리를 하고 백 사람이 백 소리를 하더라도 요지부동하고 그 길로 자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집이 아니고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덮어놓고 아무 근거 없이 그냥 자기의 성벽으로 고집을 세우고 그냥 눈먼 장닭같이 밀고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밀고 나갈 때는 확신이 있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세상 사람은 못 알아들을지라도 진리를 가진 사람 같으면 진리 위에 서서 확실히 진리에 준한 바른 이론이 있고 바르고 합리적인 토대에 기초한 확신을 가질 만한 지적인 요소가 그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요소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 나아갈 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줍니다.
2. 하나님의 뜻과 교회
우리의 품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적인 품성의 열매로서 성령의 열매, 혹은 빛의 열매라는 말씀들이 성경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요컨대 도덕적인 성격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성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는 일생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품성에 있어서 다소 하나님 앞에 선하고 진실 되고 참된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자신의 일생의 문제에서는 모두 제 마음대로 해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운전하시사 거룩하신 목표에 이르게 할 아무런 소지와 조건을 안 갖추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냥 덮어놓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배와 같이 어디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든지 그 시대에 난 교회는 그 시대 역사의 물결 위에 떠서 자꾸 목표를 향해 어떤 항행의 역사를 만들고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의 크신 뜻을 따라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이 그저 착하고 부드럽고 관대하고 남에게 친절하고 한 품성상의 문제, 즉 도덕적 성격상의 문제만을 위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일생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그 뜻대로 가야 할 것이고 그 길은 내 개인의 길만이 아니라 교회의 길이다’ 하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믿고 그의 의해 좌우간 결단을 내리고 내린 결단에 의해서 좌우간 행동을 취하는 데서 인도함을 받든지 완전히 하나님의 싫어 버림을 받든지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만일 그 사람들의 대다수가 하나님께 자기의 일생을 다 맡기고 다 바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기를 인도하시는 대로 가겠다는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그 길은 무엇인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개인 개인을 인도하시는 그 손으로, 개인을 인도하시는 그 일과 방법으로 동시에 전체 교회를 인도하시는 결과를 늘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인도함을 받아서 그 시대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나님의 뜻의 맞게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인도를 받지 않고 저절로 어떻게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땅에 존재하는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몇 사람이 모여서 천당 가려고 하고 자기 마음을 위로해 주는 정신적 위안처로나 삼고 계 뭇듯이 모여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계획과 통치의 사실이 자연히 어떤 역사를 지어 나감에 따라 그 역사를 구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교회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일생을 하나님께 완전히 다 드렸다는 확실한 마음의 결단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생활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바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무엇을 하도록 하시는가를 차례차례 배우면서 차츰차츰 각성한 대로 모두 그 길로 자꾸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칠 때에 중요하게 가르친 것이 있습니다.
3. 아들이라는 호칭의 의미
오늘 우리가 디모데후서 2장을 읽었는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꾼의 성격과 할 일을 표상 적으로 간단간단하게 몇 마디로 표시해서 일꾼을 이런 면에서 한번 바라보고 저런 면에서 한번 바라보고 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디모데를 형용하는 말이 일곱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도덕적인 인간의 품성을 이리저리 표현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 즉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신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 일곱 가지 중에 첫째는 일꾼의 성격을 규정한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디모데에게 일꾼의 여러 가지 특성을 표현하는 표상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먼저 그를 부르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들’입니다. ‘내 아들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라는 말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아들아’ 하고 부른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지만 이 혈맥은 정신적인 혈맥인 까닭에 그 신앙과 정신과 목표와 사업을 이어받은 것을 말합니다. 위대한 아버지인 바울의 전부를 다 이어받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바울 선생이 그때 주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디모데가 받아서 보충하고 잘 보완해서 결실하게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은 위대한 신학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또 그리스도 교회의 맨 처음의 일을 조직해서 밀고 나간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해서 여기저기에 교회를 세웠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다른 어떤 사도보다도 더 심오하게 잘 가르친 위대한 신학자요 교사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그 신약 교회적인 형태를 구체적으로 조직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을 강렬하게 부작시키고 그 성격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한 인물은 다른 사도보다도 바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둘이 완전히 합치되게 해서 한 혈맥이 되게 하고 한 식구가 되게 하고 한 집이 되게 하셨다는 그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가르치고 그것을 구현하게 하고 제일 처음 모델을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발전시켜야 할 텐데 그 큰 사업을 누가 계승했느냐 하면 디모데가 계승했다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성령님이 바울 사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여러 가지 계시를 잘 보존하고 해석하고 전달하고 널리 펴서 거룩한 교회가 능력 있게 전진하도록 목회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목회 서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평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가장 위대한 목회자로서 신약 교회의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도 바울 선생이 시작해 놓은 큰일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을 맡아서 계승해 나간 것입니다.
교회가 믿고 올바로 생각해 갈 것들을 바울 사도 선생이 깊이 있게 주었으면 그 다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실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형태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능력 있게 공고하게 되어서 전진하겠는가 하는 일이 남아 있는데 그 일을 잘 말아서 해 나간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가 바울 사도의 아들인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아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도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지도자로서 “어떻게 일해 가야 하는가”를 가르친 것입니다. 이 일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내게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사부 되시는 바울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셔서 우리가 주의 명령으로 받을 중요한 계시가 여기 있다” 하고 네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맡기면 그들은 그것을 듣고 가지고 나가서 또 가르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가 계승되어 교회 안에서 바로 보존되고 선포되어 나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4. 여섯 가지의 용어와 하나님의 뜻
그 다음부터 이 디모데가 하는 일의 특성을 형용한 말들이 여섯 개 나옵니다. 3절에서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5절에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해서 ‘경기하는 자’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 다음에 6절에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해서 ‘수고하는 농부’란 말씀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일꾼’이라는 말은 좀 더 광범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데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도 일꾼이고 저런 방식으로도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일꾼이라고 하면 말하자면 일하는 사람이다 해서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렇게 나아갔고 그 다음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이는 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이라 하는 말로 표현한 것이 21절에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20-21절). 이것이 여러 가지 불결한 데서, 말하자면 진리에 관해서 그릇되고 썩은 생각을 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이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그런 불결한 도리와 잘못된 사상을 버리고 늘 건실하고 신선하고 깨끗한 도리 가운데 서 있으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24절을 보면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해서 ‘주의 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디모데를 ‘아들’이라는 말로 불러서 적어도 여섯 가지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은 군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일꾼, 그릇, 주의 종 이렇게 여섯 가지 면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들의 생활을 이 여섯 가지의 면에서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혹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농부와 같이,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혹은 경기하는 사람으로 각각 그 특성 있는 면을 가지고 활동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너는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네가 수고하는 농부 노릇하기를 원한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법대로 잘 경기하는 경기자, 훌륭한 체육인이 되는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귀히 쓰는 좋은 그릇이 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내 종으로서 나를 주인이요 상전으로 삼고 나의 주종 관계가 명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이런 것들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른 데서 자꾸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런 점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성격을 구비하고 있고 원하시는 그 임무를 제대로 행하며 원하시는 그 자리에서 지금 일하고 활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도 종류가 다양하게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가 한꺼번에 다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자기의 자격이 있습니다.
5. 장성의 분량에 따라 말씀이 다양하게 역사함
이미 우리가 배운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각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그 밭(마음)의 성질과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옥토라고 할지라도 30배 결실하고 어떤 사람은 60배 결실하고 어떤 사람은 100배 결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크고 굵고 단단한 것이라도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자기가 소화할 뿐 아니라 먹었으니까 양분이 되어서 충분히 그 말씀과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따라서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채소만 약간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채소를 먹든지 혹은 좋은 고기를 잘 먹든지 그렇지 않으면 궤휼이 없는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해서 그것만 먹고 살든지(벧전2:1-2참조) 그 사람의 자격대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힘에 겨운 것을 함부로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는 멸망을 자취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늘 주의해야 합니다(벧후1:20-21/3:15-16참조).
그런고로 말씀의 모든 어려운 요구를 그 자리에서 다 감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자격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장성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무엇으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그 작용하는 일에 대해서만 ‘나는 정당하게 제 위치에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의 기초로만 그에게 의미를 가지지 그 이상의 의미를 못 가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만 밤낮 생각하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이상의 여러 가지 것에 대해서는 우매하고 전연 청맹과니 같고 귀머거리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 주시기만 조르고 앉아 있지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런 유치하고 항상 저회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사욕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사욕에 속한 사람 혹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마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좋은 음식을 먹을 줄 모르고 겨우 채소나 먹는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쳤습니다(히5:12-14참조). 그러나 어린아이면 어린아이답게 궤휼이 없고 순수한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젖을 먹고라고 잘 커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지런히 장성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일꾼으로 쓰실 때 어떤 면에서 어떻게 쓰시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스와 같이,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이 이하게 들어가서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고 영과 혼의 모든 생각을 다 드러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는 바, 말씀의 작용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늘 나타나도록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히4:12-13참조).
그러니까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분석해 보고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비로소 깨닫고 알고 마음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힘을 더 구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그릇된 것을 고쳐 나가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발에 등불이 되고 자기의 길에 빛이 되어서 매일 매일 나가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비춰 주는 빛과 같아서 항상 ‘이것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다’ 하는 것을 알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시119:105참조).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고도적인 사람”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큰 검이 되어서 자기의 적인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 말하자면 마귀와 그 국권 조직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것을 파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나가서 검을 영롱하게 잘 써서 승리를 거두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엡6:12-17참조).
이와 같이 그 사람의 자격과 장성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했는가, 어떻게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잘 썼는가에 따라서 말씀이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각 사람의 속에서 역사하는 대로 그 말씀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은 못하지만 적어도 주의 종이라는 기본적인 의식 가운데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싸움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자기를 부르신 대장을 기쁘게 하려고 대장이 출진하는 대로 자기도 나가 출진하고 나가라 할 때는 칼을 들고 나가서 적과 더불어 싸우고, 마귀가 화전을 쏘고 정사(헬: 아르케)라든지, 권세(헬:엑수시아)라든지, 세상 주관자(헬:코스모크라토르) 같은 이런 마귀의 국권 조직이 다 덮쳐 와서 싸울지라도 그것들을 좌우로 쳐 가면서 나아가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주의 종 노릇부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의 종 노릇을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 있는 대다수에게 ‘나는 주의 종이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겠다 하는 의식 가운데에서만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의 종이니까 주께서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과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해야 할 사람이다’ 하는 그 주종 관계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6. 죄의 종에서 주의 종으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을 때 주종 관계가 어떻게 맺어졌는지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맨 처음에 나를 구원하셨을 때 비로소 자기가 죄의 노예 상태 가운데 있다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 과거에 나는 죄의 종이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주의 종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것을 모르고 죄가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도저히 모르고 그것이 보통 인간 세상의 생활 방식이요 생활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복음도 기쁜 소식이 안 되고 주님께서 구속하시는 구속이라는 사실도 그에게 별로 기쁜 소식이 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만한 정도로 살 때는 ‘기쁜 소식이라면 죽어서 후분이라도 좋게 천당에라도 가고 이 세상에서는 그저 괴롭게 살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될 수 있는 대로 그저 액을 면하고 살다가 좋은 데로 가겠다’ 하는 정도에서 끝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자기가 과거에 죄의 종이었다는 의식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에는 항상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의 큰 사실을 두 가지의 큰 일로 얼른 나누기가 어렵습니다만 생각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의 형벌에서 나를 면케 해 주신 속량의 속전을 바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죄의 형벌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과 진노를 받을 사람으로 있는 나를 건져 내시고 영원히 진노를 받아도 죄 값을 다 갚지 못할 나를 건져 내실 만큼 그렇게 그 속전, 즉 주의 죽으심의 값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속전을 요할 만한 죄를 내가 가졌었고 그렇게 내 죄는 크고 무서웠던 것이며 하나님 앞에 절대적이었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동시에 또 하나 알아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뿐 아니라 죄 자체가 나를 얽어 누르고 쥐고 있으면서 나를 끌고 나간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죄 있는 사람으로서 이미 심판의 선고를 받은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울뿐더러 저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선고 가운데 벌써 정죄 받은 상태에 있어서 죄의 강력한 세력 하에 그냥 노예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주의 속죄의 공효는 나를 그런 죄의 노예 상태에서 건져 내셨다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속해 내셨다}는 것은 “값을 치르고 구출해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노예 시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죄 값을 다 치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노예가 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공의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만큼 죄가 있으니까 죄의 노예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딱 나올 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그만큼 죄인이었지만 그 죄 값은 여기 있으니까 이것을 받으면 이제는 해방시켜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강력한 주장 앞에 능히 대답할 수 있는 예수님의 속전이 들어갈 때에 죄의 노예 상태에서 속함을 받아서 해방이 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어서 돌아보았을 때에 자기가 지금까지 노예 시장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어서 자유를 누렸을 때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가 자기를 지지누르고 얽어 누르는 생활을 하다가 자기가 어떻게든지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 것을 알고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해서 다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를 믿고 의지했더니 희한하게도 죄가 나를 얽어 누르는 그 큰 능력이 나를 침해하지 못하는 것을 홀연히 경험하게 됩니다. 죄의 능력이 나를 침해하려고 전과 같이 덤빌 때에 주여 나는 주께 속하고 주님의 속전을 믿습니다. 주님의 속량하심을 믿습니다. 속량이 능력이 나를 구해서 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나를 건지시지 않았습니까? 할 때 홀연히 내 마음 가운데 평안이 오고 자유가 와서 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항거하고 자연스럽게 주님의 인도를 받는 심정 가운데 들어가는 이 사실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증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종교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신비한 면이 늘 있어야 합니다. 죄가 자기를 얽어 누르고 지지누르려고 할 때 주여 죄가 나를 이기려고 합니다. 물론 죄는 나보다 힘이 셉니다. 하지만 주님의 속량의 크신 능력은 나를 이미 속전으로 사 내오셔서 자유의 위치에 두셨습니다. 할 때 홀연히 자기에게 완전히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냐. 죄가 다시 너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네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까닭이다. 로마서 6: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옛 사람, 곧 죄 있는 그 인격과 죄 있는 그 인간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느냐 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아 이것이 자유로구나 하는 것을 알고 아아 과거에 이렇게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을 때는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인간의 당연한 상태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떤 생각이냐 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감정의 동물이다 하는 소리나 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밸이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나 하고 한 번도 자기의 밸이 자기 스스로 제어되지 못하고 한 번도 자기 마음이 큰 성을 쳐서 빼앗는 용사와 같이 딱 제어되지 못하고 한 번도 마음에 온전한 안정과 평강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 평안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자기 속에서 부글부글 북적거리고 산다면 죄의 노예 상태 가운데서 건짐 받은 무슨 증거가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긴 신앙생활 가운데에는 죄가 다시 나를 지지누르고 얽어 눌러서 끌고 나가는 시간도 있는 것을 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호소하고 부르짖고 의지하면 주님이 나를 건져서 자유로운 위치에 두사 그 죄를 능히 항거할 수 있게 하고 능히 발로 밟을 수 있게 하십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죄를 지을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만 늘 존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저항하면 저항하는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이기게 하셔서 항상 평강을 얻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7. 죄를 이기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죄에 대한 저항에는 첫째, “그 죄에 대해서 맹렬하게 조금이라도 변호하지 않고 용서치 않는 마음”과 둘째, “내가 스스로 이길 수 없다는 마음”, 이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이것은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은 죄다. 그런고로 그것을 변호하고 어쩌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마음”과 둘째, “나는 이것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 전부를 의지하겠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자기의 마음에 네가 한번 이겨 봐라. 그만한 것은 넉넉히 참을 만하고 그만한 것은 이길 만하다 하는 마음이 북적거리고 일어날 때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기려고 할 때에는 그 작은 것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 뒤에 큰 덩치가 와서 나를 덮입니다. 죄라는 것은 마치 낙타의 코가 천막 안에 들어오면 코만 들어오는 듯 하다가 조금 있으면 낙타 몸뚱이이가 다 들어와 있더라 하는 식으로 조그마한 죄가 들어올 때 이것은 내가 넉넉히 싸워서 이길 만하다. 그만한 정도는 내가 수양도 쌓고 그랬으니까 이길 만하다 하고서는 자기 스스로 참아 보려고 하면 얼마 있다가는 더 큰 놈이 와서 자기를 지지눌러 버리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게 보이는 것이라도 내가 스스로는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속죄의 크신 공효가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나를 건져 내오셨다는 것을 내 생활로 증험하면 그 다음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분명히 가르친 바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네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병기 노릇을 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의를 가지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죄의 노예 상태 가운데서 놓여나온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부를 맡기고 전부를 드리고 ‘전부를 잡으십시오’ 해야지 ‘은혜 주시고 구원하셨으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으면 죄의 큰 세력이 와서 다시 집어 가서 자기의 종노릇을 시키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신자가 예수를 믿은 뒤에도 여전히 사욕의 생활과 인간적인 생활에서 못 벗어납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그 마음에 도무지 평강이 없이 밤낮 북적거리면서 이 세상 사람과 같은 생활을 그냥 그대로 계속하고 사는 것입니까? 이유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 보려하면서 자기의 욕심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해 보려는 속임 가운데 빠진 까닭에 그렇고, 더 중요한 문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전부를 다 드렸다는 심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리면 과거와 같이 자기의 욕심으로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든지 자기가 한번 대성해 보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고 할 재주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 내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다 드렸는데 무엇을 가지고 내가 이제 성공해 보고 무엇을 다시 해 보겠다고 생각하겠는가? 내 생이 둘인가? 내 생은 하나뿐이다. 내 생명은 하나고 내 일생도 하나다. 내 생명을 전부 다 드렸는데 이제는 무엇을 가지고 내가 이것도 한번 해 보고 저것도 한번 해 보고 이렇게 성공해 보겠다고 하는가? 할 길이 없다’ 하고 단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념을 하지 않고 ‘내가 요렇게 한번 해 볼까, 저렇게도 한번 해 볼까, 무슨 의의 있는 일을 해 볼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를 얻고 그 다음에는 ‘자유를 주셨지만 내가 어디로 가라.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갈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자, 너희는 평안히 가거라’ 하고 예수님이 놓아 주셨다 해도 ‘저희를 자유롭게 해 주신 주님이시여, 저희에게 자유와 무한한 사랑을 이렇게 주셨는데 저희더러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저희가 어디로 가리이까? 그러므로 저희는 죽으나 사나 주를 따라가겠습니까’ 하고 시몬 베드로처럼 말하는 것입니다(요6:67-68참조). 이것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8-9)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입니다. 그것이 “자든지 깨든지 주님하고 같이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8. 히브리 종에 관한 법
그런고로 ‘주님, 이제는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든지 저를 종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네가 정말 내 종으로 나하고 일생 살기로 확호하게 생각하느냐,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주여, 내가 주인님을 사랑하고 또 이 생활을 사랑합니다. 주의 손아래서 이렇게 사는 이 생활을 내가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과거에 생활을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영구히 주의 종으로 삼아 주십시오’ 하면 ‘오냐!’ 하십니다. 그럴 경우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법에 따르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 가서 그렇게 입증을 시킨 다음에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그의 귀를 문에 댑니다. 자기의 집을 대표하는 것이 집에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집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라’ 하는 뜻으로 문설주에 그 귀를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습니다(신15:16-17참조).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40:6) 하는 말씀에서 {내 귀를 통해서 들리신다}는 말은 “귀가 뚫어져서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모든 것을 바치고 주님만을 한사코 따라가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비로소 주의 음성이 주인의 음성으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냐! 네가 다른 것은 모두 싫다 하고 그저 나만을 따라오겠다고 하니 그러면 내가 너를 데리고 가마. 너는 이것은 이렇게 해라. 저것은 저렇게 해라’ 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내 눈 앞에 보이시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에게 무엇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뜻을 알 수 있는 기본 자격을 거기서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종이 됩니다.
이렇게 주의 종은 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항구히 그의 종이 된다는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항구히 주의 종이 되는 것이지 6년만 살다가 석방될 종이 아닙니다(신15:12참조). “영원히 내가 주의 집에서 살겠습니다” 할 때 귀에 구멍을 뚫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히브리 종이 주인집에 와서 살다가 주인이 그를 혼인시켰는데 나중에 7년이 되든지 희년이 되어서 ‘이제 너는 가거라’ 하고 석방을 시킵니다. 그럴 때 ‘주여, 내가 내 가정을 사랑하고 주인이 나에게 얻어 주신 바 이 배우자를 사랑합니다. 내가 또한 주인을 사랑합니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출21:4-6/신15:16-17참조). 이 말은 다른 말로 할 때에는 ‘거룩한 그리스도 교회의 의의와 가치와 참된 신령한 자태를 내가 사랑하고 사모합니다. 내 생활이 과거와 같이 내 멋대로 자기를 중심으로 개인을 중심으로 개인의 완성이라는 것을 목표로 살던 데를 떠나서 교회 자체가 내 생의 목표가 되고 교회의 완성이 곧 나의 완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대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이 자기의 새로운 집,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주인 되신 그 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세상에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자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인이여, 내가 내 집과 주인을 사랑합니다’ 하면 주인이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법칙은 주의 종이 되는 사람의 중요한 법칙입니다. 주의 종으로서 이 법칙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주의 말씀과 주의 뜻”을 알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과 주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무엘상 2: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9. 귀히 쓰이는 그릇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맨 끝에 ‘주의 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뒤에 ‘군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주 고도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군사, 경기자, 수고하는 농부, 일꾼 그리고 그릇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끝에서부터 거꾸로 설명하면, “그릇된 도리를 식별해서 그릇된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바른 도리를 늘 먹고 자기의 마음 가운데 늘 담아 둘 때에 좋은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그릇이 되는 데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릇된 말씀과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넣어서 잡탕이 된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받아 가지고서는 ‘기독교도 이렇게 문화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고 현란해야 하고 찬란해야 하고 화려해야 한다’는 이런 식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진리인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아서 그 진리를 자기 마음 가운데 올바로 간직하고 주께서 정결케 하신 그 은혜 가운데 늘 살면 좋은 그릇이 됩니다.
밤낮 진리를 배운다고 해도 일단 자기의 문제가 있을 때 그릇된 것인지 옳은 것인지 분간도 못하고 잡된 것인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인지 기뻐 받으실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이 세상 법칙으로 자기에게 무슨 좋은 행운이 오리라고 생각되거나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입이 아프게 가르치고 누누이 설명한 것을 포기해 버리고 간단하게 자기의 이익을 좇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만을 꼭 간직하고 여타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사상이 나를 지배할 때에는 그것을 포기해야겠다” 할 때에 깨끗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이고 귀히 쓰이는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자로서 준비되어져간다는 것은 무작정 기도하고 말씀만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진리의 말씀만을 가지고 자기의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사상을 포기할 때 준비된 자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합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집이란 큰 집안을 말합니다. 큰 집안에서 귀히 쓰시려고 할 때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제일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제일로 삼습니다. 그 집의 중심은 “빛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종합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격을 표시하려고 할 때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신 것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고 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정의 같은 말이 있다면 세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앞의 두 가지 이외에 또 하나는 “하나님은 신이시니”(요4:24) 하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는 말은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다 하는 말보다도 강력한 말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말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큰 집의 중심적인 성격과 요소는 빛과 사랑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지혜와 지식 가운데 있을 때 빛이 있는 것이고,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으로 충만해 있을 때 거룩한 사랑이라는 도덕적 품성의 종합적인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주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인 자기를 사랑하고 보존하듯이 이웃도 하나의 인간으로, 하나의 인격으로,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은사 받은 그릇으로서도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사랑할 대상은 ‘주 너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계명의 큰 뜻입니다. 그것을 마음 가운데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가운데 품고 또한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의 가장 강한 성격을 가진 자니까 귀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가 풍성하고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어서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을 가장 아끼고 살아가는 생활을 할 때에 귀한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른 데서 찾지 말고 항상 이렇게 명백하게 우리에게 일러 주신 말씀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차례차례 말씀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군사’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우리는 주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서 주의 종노릇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무턱대고 일을 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종으로서 확호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따라가려는 간절한 심정을 언제든지 잃지 않고 살아가는데서 주께서는 쓰십니다.
각 사람은 주님의 뜻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르치며 알기를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아서 주의 거룩하신 뜻대로 자기의 생활을 경영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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