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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율법과 복음의 관계—멜랑히톤, 칼뱅, 루터, 그리고 맥주

율법과 복음의 관계—멜랑히톤, 칼뱅, 루터, 그리고 맥주
우병훈 목사
아래 내용은 이전에 들었던 멀러 교수님의 수업 내용(The Theology of Calvin)을 대화식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강의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중간중간에 제가 직접 질문한 내용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대화식으로 각색하여 처리했습니다.
칼뱅에게서 율법과 복음
나: 보통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칼뱅은 어떻게 보았는지요?
멀러 교수님: 칼뱅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네. 심지어 루터파 신학에서도 역시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구약과 신약의 구분으로 보지 않는다네.
나: 루터파 신학에서도요? 그렇군요.
멀러 교수님: 칼뱅은 성경 본문에 따라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율법으로 이끄는 부분이 있고, 복음으로 이끄는 부분이 있다고 보았지. 그 구분이 좀 쉬운 텍스트가 있고, 어려운 텍스트도 있지.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율법인가, 복음인가?
나: 글쎄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는데요?
멀러 교수님: 그렇다네! 만일 자네가 불신자이면 이 말씀은 율법이 되고, 자네를 정죄하는 말씀이 되네. 그러나 자네가 신자이면 그리스도의 의가 함께 하고, 그것은 복음이 된다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확고히 정해진 구분(rigid distinction)이 아니라네.
나: 그러면, 구약에도 복음이, 신약에도 율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멀러 교수님: 칼뱅이 바로 그것을 말했다네. 그는 또한 그 본문과 읽는 이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지.
율법의 세 가지 용법—칼뱅과 멜랑히톤의 경우
나: 이것은 칼뱅이 말한 율법의 세 가지 용법과도 통하는데요?
멀러 교수님: 그렇지. 율법에는 시민적 용법(civil use), 선도적 용법(pedagogical use), 규범적 용법(normative use)이 있다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생각했지. 시민적 용법은 구원에 관계 없는 부분이라네.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지. 선도적 용법으로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가지. 규범적 용법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 특히 이런 용법이 강조되지.
나: 칼뱅이 이런 것을 말했는지요?
멀러 교수님: 그렇다네. 칼뱅뿐 아니라, 멜랑히톤도 역시 말했다네. 순서나 설명 방식은 좀 다를 수 있지만, 거의 비슷하지.
나: 그렇다면, 칼뱅의 신학과 멜랑히톤의 신학이 이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는 말씀입니까?
멀러 교수님: 맞아. 율법의 용법뿐 아니라, 성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역시 비슷하지. 그것 때문에 멜랑히톤은 루터의 전통을 떠났다고 비판 받기도 했어.
루터에게 율법의 제 3용법?
나: 그렇다면, 루터는 율법의 이런 세 가지 용법을 말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신지요?
멀러 교수님: 그게, 음... 좀 복잡한 문제라네. 현대 루터란 학파 내에서도 루터가 제 3용법, 즉 규범적 용법을 말한 적이 있다, 없다를 두고 논쟁이 심하다네.
나: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멀러 교수님: 음... 글쎄. 일단 1534년에 멜랑히톤이 율법의 제 3용법을 발명했네. 그때 루터(1483-1546)는 살아 있었지. 그러니까 루터도 역시 멜랑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제 3용법을 보았을 텐데, 한번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어요. 우선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네.
나: 그렇다면 루터가 멜랑히톤의 주장을 인정한 겁니까?
멀러 교수님: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는 또 없네. 루터가 멜랑히톤의 제 3용법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루터에게 율법은 언제나 죄를 지적하는 기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네.
개혁파 신학에서 율법의 제 3용법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이 없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것만 있지. 하지만 루터에게는 인간이 율법을 절대로 완전히 행할 수 없고, 우리가 절대로 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네. 따라서 루터에게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기능을 자주 부각되지.
이런 루터의 생각을 따라서, 일반적으로 루터파 신학은 율법의 선도적 기능을 강조한다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제 3용법(규범적 용법) 안에서조차 죄를 정죄하는 요소가 나타나기도 한단 말일세.
나: 그런 점에서 루터파 신학에는, 개혁파 신학이 말하는 감사의 법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 적겠네요?
멀러 교수님: 그렇지 루터란의 규범적 용법에는 감사 속에서 규범적인(thankfully normative) 요소가 없다네. 오히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선도적 역할(pedagogical use)이 많이 나타나지.
사실 루터는 이 점에 있어서, 역설적 측면이 있어요(Luther was paradoxical about this).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어. 신자는 의인이자 곧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말이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지만, 그럼에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죄인이지. 의인이자 곧 죄인, 루터는 역설을 사랑해(Luther loves paradox).
역설(paradox)을 사랑한 루터
나: 그 점에 개혁파 신학도 유사한 것 같은데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말하기를,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순종을 겨우 시작했을 뿐”(114문)이라고 말하잖습니까?
멀러 교수님: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약간 달라. 칼뱅은 그런 것을 역설(paradox)로 보지 않았어.
칼뱅과 루터의 고린도전서 1장에 대한 주석을 비교해 보게. 칼뱅은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스캔들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 되겠지만,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더 이상 십자가는 스캔들과 어리석음이 아니라고 주석하지. 하지만 루터는 크리스천에게도 여전히 십자가가 스캔들과 어리석음이 된다고 말해요(It stays scandal and foolishness).
나: 루터는 역시 역설을 사랑하는군요.
멀러 교수님: 계시론도 마찬가지야. 칼뱅도 역시 숨어계시는 하나님,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했지.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숨어계시기도 하지만, 때로 계시하시는 분이시기도 해요(Sometimes God is hidden, sometimes God is revealed). 그러나 루터에게 하나님은 항상 숨어계시면서 동시에 계시하시는 분이시지(God is always hidden and revealed).
나: 루터는 역시 역설을 사랑하는군요.
멀러 교수님: 하지만 칼뱅은 역설을 안 좋아했어(Calvin does not like paradox).
맥주와 역설
멀러 교수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게 사실 로마 제국의 흔적이 있어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화란어를 말하는 벨기에, 슬라브 나라들은 모두 맥주가 발달했지. 반대로 프랑스 맥주, 이탈리어 맥주는 엉망이야. 대신 그 나라들은 와인이 아주 좋지. 이 차이가 뭐겠나?
나: 글쎄요...
멀러 교수님: 지도를 한번 보게. 로마가 다스리던 국가들은 모두 와인 문화가 발전한 거야. 칼뱅은 월급의 일부로 레드든, 화이트든 와인을 받았어요. 반대로 루터는 월급의 일부로 맥주(Das Einbecker Bier)를 받았지.
루터의 『탁상담화』를 읽어보게. 식탁에서 맥주 마시면서 한 대화야. 루터의 탁상 담화는 아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유머(very invincible humor)가 많지. 그리고 교황의 나쁜 신학을 말할 때, 욕도 자주 하지. 바로 그런 데서 역설이 나오는 거야. 생각해 보게. 역설이 와인과 어울리겠나, 맥주와 어울리겠나? ^^; [마지막 세 문장은 저의 삽입임]
술의 신학까지 가르치신 멀러 교수님의 박식함에 다시 한 번 놀라면서, 저는 교수님과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 루터는 아인베커 비어를 특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이트(The Beers of Martin Luther) 참조.
http://home.earthlink.net/~ggsurplus/beersluthe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