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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사상의 핵심적 요소 3가지와 자유의지에 관한 고찰

청교도 사상의 핵심적 요소 3가지와 자유의지에 관한 고찰


이제 본격적으로 청교도 사상과 그들의 독특한 특성을 살펴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다루기보다는 계몽주의와 비교될만한 청교도들의 성향인 하나님 주권 사상과 성경에 대한 견해(절대 진리로 인정하고 설교함), 그리고 그들의 신앙생활 즉, 삶(신앙의 실천, 죄 죽이기)이라는 3가지 주제로 일축하여 깊이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청교도들이 고민한 자유의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 받은 아더 힐더샘(Arthur Hildersam)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기도로 하나님께로 날아가 위로를 구해야 한다. 죄의 용서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심판들로부터의 구원보다 더 요망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종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의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5)
인간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권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 상황의 어떤 변화 이전에(기복적 신앙) 우선,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 자체가 소망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주권자로 인정한 청교도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존 오웬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고 소용도 없는 것이다.6)
또한, 청교도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예배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앙모, 신뢰, 기원, 감사가 요구된다고 했다. 앙모(adoration)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며 신뢰(trust)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며, 기원(invocation)은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만 의지할 것을 구하는 마음의 습성“이고, 마지막으로 감사(thanksgiving)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라고 하였다.7)
청교도들의 예배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에 있다. 특히 아주 독특한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이 감사함이든 의지함이든 기도함이든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칼빈의 지극히 성경적인 사상을 잘 이어 받아 그들의 예배관과 성경관등을 잘 정립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목적으로 한다. 칼빈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주권 사상이기 때문이다.8) 그리고 또 한가지 청교도들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교리이다. 9)
사도행정은 교회가 사도들과 신자들의 활동적인 노력으로 자라고 퍼졌음을 잘 예시한다. 조직된 전도와 선교 사역은 모든 교회의 책임이다. 이러한 노력이 없으면 교회 성장이 없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활동을 통해서 목적하신 일을 성취하신다.…웰리엄 그린힐(William Greenhill)은 ‘회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에스겔서 18장 32절의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의 말씀으로 회심자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시켰다.…청교도 전통을 이어받은 조지 휫필스(George Whitefield)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죄인들의 유일한 강구책은 자신들에게 눈을 돌려 구원해줄 수 있는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10)
사실, 그들은 성화에 대해서 가장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설교하고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실천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강하게 인정하고 선포하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또한 아주 세밀하고 힘있게 주장하는 것이 설득력있기 위해서는 고도의 논리적 지성이 요구된다. 그들은 바른 삶을 위해서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기도했으며 성경의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기 위해 그런 삶을 살았다. 그들은 주권자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둘째로 성경에 대한 견해(절대 진리로 인정하고 설교함)이다. 우선 계시에 대한 존 오웬(John Owen)의 생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시’라는 말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전달이라 본다. 또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며 그 메시지는 아무리 불가해 보일지라도 절대적인 신봉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 증거하였다고 본다. 아담, 아브라함,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스스로 확신하여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행동했다. 11)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12)은 성경을 신적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임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신뢰에 대해서 가장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성경 안에서 그 증거들을 찾고 있어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임을 선언한다. 또 그는 “성경의 권위는 그 신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고 했다.(Works, 16:297, 309.) 리처드 백스터와 존오웬은 “성경에 어떤 오류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토마스 왓슨(Tomas Watson)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했으며(Packer, p19.) 존 엘리어트(John Eliot)는 ”성경의 글은 곧 하나님 말씀이다“라 했다.(Carden, p4.) 13)그리고 그들의 성경의 능력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자. 
청교도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성경 역사에 투영시켜서 읽었다. 성경이 그들의 상황을 향해 말씀한다고 확신한 청교도들은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성경을 행위의 근본으로 보게 된 원인은 성경이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 까닭이다.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 양심의 저 깊은 곳에 까지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능히 고친다.”고 했다.(Rogers, A Treatise of the New, p. 385.)14)
인크리스 매더는 성경이 “마음에 감추어 둔 은밀한 생각까지도 추적한다”고 했다. 15) 굿윈은 “이 능력은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고 민첩하게 한다. 한마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다.”라고 했다.(Knott, The Divine Authority of the Scriptures Asserted, p. 36.)16) 이처럼 청교도들은 성경을 신적인 권위를 두고 대했으며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기며 살았다. 성경이 무오(Inerrance)하고 불오(Infallibility)한 진리의 말씀임을 그들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주장하였다. 
셋째로 신앙생활 즉, 삶(신앙의 실천, 회개)이다. 제임스 패커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기독교 신앙에 모든 것이 포함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활 전체도 하나로 이루어졌다. 즉, 완전한 자각과 활동과 향유, 모든 피조물의 사용과 개인의 능력과 창조력의 개발, 이 모든 것의 자신의 모든 은사들을 바르게 인식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거룩한 것’으로 만듦으로 하나님을 존귀케 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 통합되었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간의 구별이 없었다. 그들은 피조물이 그들이 관련하는 한에 있어서는 신성하였고, 무슨 종류의 활동이든지 간에 모든 활동들은 성별되어야 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천국에 마음을 둔 열심 안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충만한 기도와 목적을 가지고 실천하는 질서의 남녀들이 되었다. 그들은 삶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통합하였고, 예배를 일과 통합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자기 사랑과 통합하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총합하였고, 넓은 범위의 관계적 책임들을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관계적 책임들과 통합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의 넓은 범위 전체를 한데 융합함에 있어 놀라운 조화를 이루었다.17)
청교도들은 성경을 그저 설교하고 어떤 고상한 지식으로 향유한 것이 아니라 삶의 분명하고 절대적인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평등사상을 내비추기도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된 세상에 이원론적인 시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는 확실한 구분을 두어서 지극히 성경적인 인식을 하고 겸손히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예배와 삶의 분리에서 오는 카톨릭의 은패 된 고질적인 부패를 경험한 그들은 예배와 일, 삶을 통합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관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개선해 나가는 놀라운 경건성을 보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 ?”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종말론적인 인식을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설교하고 그런 실천을 했다. 하루하루를 마지막인양 정성스럽고 거룩하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카리 그로프턴(Zachary Crofton)은 청교도적 입장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습관, 능력, 원칙, 샘, 뿌리 그리고 성벽이다. 믿음은 속이 비고 단일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이 아니다. 회개는 모든 참회적 행동들과 다르며 구별된다. 회개는 한 시간 또는 하루의 일이 아니라 부단한 계획이며 과정이며 영혼의 성향이다. 태생, 양육, 교육, 교훈, 예술, 지식, 도덕적 권고, 친절한 충고 그리고 복음 사역 자체도 전능하신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 없다면 회개를 이룰 수 없다. ‘회개를 주시는 것’은 높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점적이며 대가없는 특권이다. 회개는 율법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의 은혜이다. 회개는 복음에 의해 전해지고 언약에서 약속되며 세례에서 보증되고 성령에 의해 산출되고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독특하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모든 면에 있어 초자연적이다. 따라서 돌아오는 모든 죄인은 하나님께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31:18)라고 기도해야 한다.(Zachary Crofton의 글 인용) 18)
청교도들에게는 삶 속에서 항상 죄와의 싸움을 염두해 두고 있다. 그들의 사상 안에서 회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삶에 초점을 둬야만 가능하다. 그들은 죄의 성격을 잘 알았고 인간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다. 회개란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과도 같은 것이다. 그 이유는 회개가 성령과 예수의 연합사역으로 성취되는 은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냥 상투적인 문구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회개를 감격에서 솟구쳐 나오는 의지로 실천했던 것이다. 이 곳에서 그들의 성화사상이 아주 핵심적으로 산출된다. 
청교도 신학자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은 머리에서 심령까지 이르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신뢰’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약속들에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 자기 의존과 죄에서 돌이킨다. 이로써 그는 자기 영혼에 믿음의 기질을 표현하고 확립한다. 그리고 일단 확립된 믿음은 새 생활의 역동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믿음은 소망을 낳고, 사랑으로 역사하며 인내로 자신을 단련하며 선행에 나서며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기쁨과 평안의 원인이 된다. 19)
믿음에 대해서도 그들은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속에만 자리잡은 아무 능력도 성취도 없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삶과 연관되고 통합될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이런 믿음은 계속해서 결실을 맺는 것이다. 소망을 낳고 사랑을 낳고 선행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항상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도리를 얘기 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처 입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를 향한 믿음으로 성령께서 회복시키시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들은 그런 삶으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 구속주로 시인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을 바르게 가지고 그의 말씀인 성경을 온전히 인정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항상 대면하듯 그리고 그 말씀을 최고의 지침으로 삼고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 있는 권세를 믿고 있기 때문에 죄 앞에서 항상 담대하며 겸손(하나님 의지함)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관한 생각들이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가 자유롭게 대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무서워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담대한 ‘얼굴’을 닮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부모들의 사랑을 완전히 가질 수 있는 것을 안다. 20)
청교도들의 자유의지에 관한 생각은 자못 순수하다. 어린 아이를 예로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 신앙이 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역대기에 나오는 다윗의 찬양대를 볼 때, 하나님은 그 예배형식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고 송축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예배와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자녀 된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길 원하시며(창18:21-33; 출 17:8-16; 딤전 2:1) 하나님의 사역에 참예하길 원하신다.(마25:21-23; 엡3:6) 청교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았으며 왕 같은 제사장(벧후2:9)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길 몸부림 쳤다. 
청교도들은 ‘준비주의’(preparationism)자들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 즉각적인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무 사항들들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삶을 개혁하고, 십계명에 비추어 자기반성을 하고, 다가오는 대 심판 날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이다.…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진리의 조명과 확신을 심어주는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라고 지적해 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며 즉각적인 구원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면을 고수한다면 이 양편 사이에 아무런 혼란이 없다. 믿음의 방편과 즉각적인 구원을 받는 믿음의 권한은 모순이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다. 21)
또한, 그들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참으로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그들은 은혜의 수단들(The Means of Grace)을 강조하는데, 이는 ‘값싼 은혜’를 경멸하는 그들의 강직한 생각에서 비롯한다. 즉, 이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로 믿음을 얻고 구원을 받았으니 자유의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방종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또한 연약한 인간들은 무언가를 의지하고 기대어야만 세상을 살 수 있다는 식의 반기독교적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위해서 온갖 지성으로 개혁적인 청교도 신학을 이루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자부심을 느꼈다. 22) 그들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위한 투쟁, 진리로 인한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약한 비이성적인 자들이 아니라 참된 이성적인 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 2권 4장에서 자유의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죄에 묶여 악 밖에 어느 것도 핼할 수 없다는 것은, 창조에 의해서가 아니고 본성의 부패 때문이라는 것이다.23)…사도 바울에 따르면, 왜 신자들이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하는가?(딤후4:8)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택함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때문이지, 그들 자신들의 노력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쓸데없는 공포는 떨쳐 버려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함과 관대함은 무궁무진하며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마치 우리들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그 은혜를 상급으로 주신다. 24)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 안에서만 합당화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철저한 이성과 지성으로 성경을 사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뿌리를 이해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의지란 그의 뜻을 힘껏 쫓고 악과 대항하고자 하나님 편에 계속해서 매달리도록 애쓰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된다. 청교도들의 성화론은 결코 신인협동설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사상에 기초한다. 
註)
5) 제임스 패커(J. I. Packer), 청교도 사상, p96에서 아더 힐더샘(Arthur Hildersam)의 시편 51:1-2의 교리해석 인용. 
6) Ibid, p135에서 존 오웬(John Owen)의 WorkS, Ⅳ:203인용.
7) 오덕교, 언덕 위의 도시, P108에서 칼빈(John Calvin)의 Inst., 2.8.16.인용.
8) 정성구, 칼빈주의 사상과 삶, p9-p10.
9) 에롤 헐스(Erroll Hulse),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181.
10) Ibid, p186-p188.
11) 제임스 패커(J. I. Packer), 청교도 사상, p113-114.
12) 에롤 헐스(Erroll Hullse).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133. 
13) 리랜드 라이큰(Lerand Lican), 청교도 - 이 세상의 성자들, p284.
14) Ibid, p305-p306.
15) Ibid, p307.
16) Ibid, p308.
17) 제임스 패커(J. I. Packer), 청교도 사상, p22-p23.
18) Ibid, p241-p242.
19) Ibid. p249.
20) 제임스 패커(J. I. Packer), 하나님을 아는 지식, p285.
21) 에롤 헐스(Erroll Hulse),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226-p227.
22) "청교도의 설교는 그 관심에 있어 경험적이었다. 설교자의 최고 관심은 하나님을 알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명백히 실천적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 하나님을 아는 지식, p397-p398.
23) 존 칼빈(John Calvin), 기독교 강요, 제2권 4장 p161.
24) Ibid, 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