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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율법의 용도(1)

율법의 용도(1)


노승수 목사


율법에는 세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억제하는 용도로 주신 것입니다(롬 3:20이하).  둘째, 율법은 죄로 인해 절망한 인생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용도로 주신 것입니다(갈 3:24이하). 셋째, 율법은 중생자에게 성화의 준거로 주신 것입니다.(롬 8:4이하)
율법을 폐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논의에서 핵심이 빠져 있는 것 같아서 몇자 거들어 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과 의도를 오해함이 아닌가?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제3문. 당신의 비참한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제4문. 하나님의 율법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마태복음 22장에서 요약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두번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5문. 당신은 이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히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해서 이 요구를 이룰 사람이 없지요. 그럼에도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지요.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다 절망하여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너무 잔혹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이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는 바 참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하셨지요. 멍에는 구약 신약을 통틀어 율법을 가리키는 구상어로 사용됩니다. 가르침을 받으라 하셨으니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신 까닭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은 이는 그가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받게 되는데, 렘 31장에 나오는데로 마음과 심비에 새긴 율법으로 남편이라도 이혼하게 되는 율법과는 달리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온전히 행하게 되는 그런 언약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래서 중생자는 전에 지킬 수 없던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에 응할 있게 되고 그 정도를 보고 우리가 어느 정도 성화에 다다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책과 오염으로부터의 구원이지요. 즉, 사망의 형벌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이 없다면 온전한 구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형벌로부터의 해방을 흔히 '칭의'라 부르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흔히 '성화'라 부릅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은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것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는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자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성화의 준거가 된다는 것은 로마서 7장에 나온대로 내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 를 깨닫는 수단이 아니라 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초기 사역에서는 만삭되지 못한 자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다가 말기 사역에서는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성화란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도한 만큼 내가 거기에 어울릴 수 없는 내 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의 삶을 살게 된다고 했지요.
하이델베르그는 참된 복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나 죽으나 위로를 받는 삶은 세가지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제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서 당신이 기꺼이 살고 기꺼이 죽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답.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내가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아는 것이요, 세째는 내가 이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감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인 됨과 그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율법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아야만 이르는 길입니다. 율법은 그런 점에서 결코 폐하여 질 수 없고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율법이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입니다. 흔히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은 세대주의적인 잘못된 이해입니다. 구약에도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경륜은 구약에서는 율법과 성전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율법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 정도로만 약하려 합니다. 율법을 경시하면 분명한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중시하는 자도 주의해야 할 것은 잘못하다가 바리새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라기 보다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성취는 외적 율법이 아닌 심비에 새긴 율법과 그것의 성취자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러므로 한시도 내가 율법을 지킨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죽을 힘을 다해 지키려다 자신에게 절망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부인이 되는 것이지요. 율법이 인도하는 바 참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 나오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회개하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됨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됩니다. 이 때 율법의 제 3 용도 곧 중생자에게<성화의 준거>로서 율법이 여전히 유의미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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