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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율법의 용도(2)

율법의 용도(2)


노승수 목사


율법의 용도와 관련하여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세가지 용도는 이미 말씀을 드렸기에 따로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특별히 2문에서 세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첫째, 우리의 비참 둘째, 구원의 방편, 셋째, 감사의 삶 이 세가지는 모두 율법의 용도와 얽혀 있습니다. 건축물이 하중에 대한 설계를 하듯이 신학도 그저 사람이 짜내어 맞춘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신학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것 역시 신학이지요. 마치 종교 다원을 주장하는 자가 기독교가 유일성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합니다. 정말 다원을 주장하려면 기독교가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을 수용해야 그것이 진정한 다원이지요. 그러나 다원주의자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기독교의 유일성에 깊은 반감을 표시하지요. 그들은 다원주의라는 허울을 숭배하는 것이죠. 신학무용론도 비슷합니다. 마치 해석하지 않고 읽는 것과 마찬가지요. 누가 성경을 읽으면서 해석을 하지 않습니까? 해석이 없는 경우는 없지요. 신학무용론은 그런 점에서 구호에 불과합니다. 이상은 반틸 교수님의 논증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율법의 1 용도가 비참함을 깨닫는 수단으로 율법이라고 했지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1부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은 신자나 불신자 할 것없이 죄를 깨닫도록 하는 용도로 주어졌습니다. 심지어 율법이 없을 때는 양심이라는 율법이 기능하여서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그님은 딤전 1장의 말씀을 이상케 번역을 하셨던데요. 쉬운성경이나 표준역만 보셔도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0은 율법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용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둘째 용도가 율법이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인도하는 용도라고 했는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부가 바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믿음이란 방편에 대한 설명인데요. 무엇으로 설명했냐면, 사도신경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믿음의 내용이고 이것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로마서 3:21이하에도 나옵니다. 율법외에 다른 한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증거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를 유심히 살피시면 다 아시겠지만 바울은 율법을 단순히 구약의 십계명에 국한하여 사용하지 않고, 모세 오경 전체를 일컬어서 사용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 그 자체라는 의미로 율법을 사용함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이나 기타 여러 성경에서도 동일한 용례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지금 제 컴이 아니라 학교에 와 있어서 시간이 잠시 나 쓰는 글이라 제대로 된 검증 구절을 못 올림을 양해 바랍니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외의 한 의가 무엇이냐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3장을 읽으시면 어렵지 않게 파악되리라 사료됩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믿음의 구체적 내용으로 사도신경을 제시하여 그것으로 두번째 용도 즉,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편으로 믿음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셋째, 용도는 성화의 준거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우리가 얼마나 성화되어 가는 지를 살피는 외적 준거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룩하고 착해지고 이런 것이기 보다 바울의 자신을 죄인으로 각성하는 정도가 점증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번째 기능은 중생자에 한해서만 작동하는 기능임을 알 수 있지요. 이미 성화의 준거라 하였으니 이 성화는 중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이것을 함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율법 폐기가 사실이라면 로마서 7장의 1인칭 현재형으로 진술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구절이 포함된 7:14절 이하의 고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율법은 의인에게 필요없는 것이라면 왜 이미 중생하였을 뿐 아니라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계시의 수여자였던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이것은 율법이 신자 안에서 부패한 본성을 발견하도록 하고 그것을 발견하면서 자신에게 더욱 더 절망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붙들도록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야 7-8장의 연결이 이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바로 이 성화의 삶에 대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세번째 부분의 감사의 삶을 말하면서 어떤 내용으로 설명하는가 하면<십계명>과<주의 기도>를 가지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왜 감사의 삶을 설명하면서<십계명>을 설명할까요?<주의 기도>는 또 왜? 
소요리 문답 88문에 보면 우리가 은혜를 얻는 외적 수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송 직접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요.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흔히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하니 성례와 말씀은 그냥 말씀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두 가지로 압축이 되지요. 말씀과 기도입니다.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 주제가 조금 산만하게 번질 위험이 있지만 이것을 설명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힘드네요.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펠라기우스는 은혜가 아니라 행위의 구원을 주장하다가 정죄가 되지요.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 이 펠라기우스주의는 끊임없이 부활을 합니다. 이는 마귀의 궤계이지요. 이것이 거짓된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하냐면 선행적 은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신자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그 결과 그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주장들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했습니다.<은혜의 주입>이란 말을 싫어했는데요.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주입이 된다면 그것을 기초로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한다고 이런 주장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더 설명하면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논의가 될 것 같아서 여기서 설명을 멈추겠습니다. 은혜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며 이것은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은혜가 임해야 신자가 성화 곧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은혜를 주시는 외적 방편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신자는 믿음으로 여기에 합력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은혜를 신자가 얻으면 죄가 죽어지게 되고 신자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점차 자유케 되는 성화의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다시 세번째 용례와 하이델베르그의 감사의 삶의 문제로 돌아가서요. 십계명과 주의 기도를 설명하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소요리 문답 88문이 이야기 하는 은혜의 외적 방편이기 때문이요. 이 외적 방편을 통해 은혜를 얻지 않고는 신자가 거룩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신자의 삶에 율법이 성화의 준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앞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사용한 용례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만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의 소요리 문답,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보시면 다 이 구조 즉, 율법의 세 가지 용례와 사도신경, 십계명, 주의 기도 순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의 완전판에도 이 구조는 여전합니다. 
그럼으로 제가 이미 설명드린대로 율법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양심의 법이 되었든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든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아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한 의가 있는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율법과 성전, 신약에도 율법과 참성전이신 그리스도 이 경륜은 창세전으로부터 지금까지 바뀌거나 변화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율법 폐기를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잘 안되어서 중간에 그리스도로 구원 얻는 도리로 바꾸셨다는 이야기 밖에 안되지요. 성경에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구원의 경륜 속에 율법과 성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가지셨던 아이디어 입니다. 율법에 폐기라는 측명을 굳이 고려하자면 그림자였던 성전과 절기와 제사와 월삭들은 그림자임으로 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고로 더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치는 도덕적 통치이며 신자의 삶에서 율법은 우리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기에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입니다. 도서관이 문닫는다고 나가라고 하네요. 더 설명안해도 아시리라 믿으며....
학생 열람실에 컴퓨터가 마침있어서 조금 더 이어서 쓰겠습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의 기도 사실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이런 정도를 두고 신학이 어떻고 하기가 조금 민망하지요.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런 기초도 제대로 교육이 안되었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오늘과 같은 혼란의 원인일 것입니다. 저는 신앙고백서들과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정독하실 것을 권합니다. 쓰다 보니 몇자 안되는 군요. 그냥 밥 먹으로 갈 것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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