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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죄와 율법

죄와 율법 

노승수 목사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구별하는 일에 무지한 것이 그동안 기독교를 부패시켜 왔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부패시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이다(The Christian Faith, 1558).
- 데오드르 베자-
내 신앙의 길이 바르게 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신자에게 성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뜻보다<죄를 발견해 간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신앙이 성숙해 가는 지표가 무엇이냐? 
<죄의식이 깊어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이 지점에서<바른 신앙>과<거짓 신앙>이 갈리게 됩니다. 율법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바르게 정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율법의 용도>를 통해서 이미 밝혔듯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관계 없습니다. 다만 신자에게 있어서는 신앙 생활이 깊어 질수록<죄의식>이 더욱 또렷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뚜렷해진 죄의식을<율법주의자>는 자신이 전전긍긍하며 해결하기 위해 율법에 극성적 열심을 보이고,<반율법주의자>는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됨으로<죄의식>이 날로 무디어지고 결국 신앙의 열매로 갖은<방종>과<방종주의>가 나타납니다.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그룹이<구원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날로 깊어가는 죄의식>으로 자신에게 절망합니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율법의 역할로 이것을<율법의 2 용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흔히 느끼기에<깊어가는 죄의식>과<복음 안에서의 안식>은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혹시라도 이글을 읽으시면서 이런 의문이 드신다면 아직 복음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셨거나 어느 정도 오해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와<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책감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정상적인 과정을 자기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정상적 과정을 견디기 어려움으로 인해<복음>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이 고안한 방법,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복음이 아닌 사람이 전하는 복음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죄에 대해 더 예민>해지는 까닭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성화의 과정에 있다면 죄를 더 많이 짓기 때문에 죄의식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기 때문에 죄의식이 더 날카로워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견디기는 너무나 어렵지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럴 때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유사 은혜>곧<율법주의>나<반율법주의>를 고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어떻게서든지 죄를 안지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하면 자신의 죄책감의 상당한 부분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율법을 준수하면 죄책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리새주의에서 보듯이 율법을 준수하려는 강력한 의지는<거울>과 같은 율법의 기능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마치 거울을 우리에게 얼굴의 흠결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화장과 분장이라는<외식>을 통해서 이 흠결에 대해 무감각하게 하는 것이지요.<외식>이란 심리적 기제가 죄의식에 강렬하게 저항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결국 이런 삶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반율법주의>는 성경이 증거하는 율법에 대한 증거 중에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시킬 만한 구절들에 기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이제 자유이니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기만하게 됩니다. 이는 초기에<유사 은혜>현상이 나타납니다.<죄책감으로부터의 상당한 정도의 해방>을 경험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마 13장에서 말하는 돌밭과 유사합니다.<기쁨으로 받지만>복음에 뿌리가 없음으로 점차<방종>으로 나아가고<양심이 둔해지게>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상적으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죄문제를 그리스도께로 가지고 나갑니다. 그리고<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렬하게 촉발하는 원인도 바로 이 율법이 고발하는 죄와 그에 따른 죄의식 때문입니다. 애통하여서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용도로 말씀을 부지런히 사용하여서 자신의 심령을 기경하고 기도라는 은혜의 외적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신자에게 참된 만족과 안식이 주어지지요. 이 때 만족과 안식은 자신의 행위나 공로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와 공로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확신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면서 깊은 죄의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고, 죄의식의 근거는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성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죄인 중에 괴수 였다>고 하지 않고<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깊은 죄의식 때문에 바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왜? 그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 중에 있는 신자라 하더라도 율법으로부터 날마다 자신의 죄를 각성케 되고,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그 성령을 좇아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이 땅을 사는 동안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롬 8:4) 그것이 바로 율법의 3 용도 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긴 율법의 완성은 바로 '사랑'(롬 13:10)입니다. 주님께서 요약하신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마 22:37-40)이지요. 
그리고 우리 삶에서 이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신앙이 성숙하고 연조가 늘어감에 따라 증가하는 증거들에 의해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점차 방증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원의 확신이란 예수를 믿을 당시에 잠시 잠깐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년조가 더해감에 따라 점증하고 방증하는 것이지요. 그 적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깊은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안식하고 흔들리지 않는 까닭은 이 일을 이루시는 이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능하신 구속의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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