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이 세대를 위한 복음

패커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바꾸어버렸다."

근데 사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영향이기보다 시대의 사조에 가깝다. 맑스의 표현처럼 사람의 의식은 물적 토대에 의해서 결정되고 우리가 사는 여러 환경들이 과거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시대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한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였고 아버지의 위상이 매우 높았지만 우리 삶을 보면 알겠지만 오늘 사회는 아버지의 위상이 그렇게 높지 않다. 이런 생활방식의 변화는 물적 토대의 변화에 기인한다. 사실 서구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이 100년이 되지 않았고 여성들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군수 공장은 돌아가야 하는데 남자들은 다 전쟁터에 나가 있고 여성들이 군수 공장에서 일하면서부터 였다.

달라진 세상은 하나님의 경륜적인 면이 있다. 권위는 건강하게 옳게만 쓰인 것이 아니라 굴절과 왜곡과 착취를 위해서 쓰였고 그런 권위들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 시대에 복음이 여전히 의미있으려면 하나님을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리더십으로 다가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레베카 피벗이 쓴 전도에 관한 책에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히피들이 많던 대학가의 한 보수적인 교회에는 나이든 분들만 가득했다. 이 교회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젊은이 한 명이 설교가 시작된 시간에 교회당에 들어섰다. 온 교회의 신경은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교도 풍의 교회에 히피스런 반 바지에 샌들차림으로 나타난 청년은 이리저리 앉을 자리를 찾다가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서 맨 앞자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목사도 회중도 사실 이 긴장으로 인해서 제대로 설교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 때 그 교회의 직분자 한 명이 이 청년에게 다가섰다. 많은 분들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일어난 일에 긴장하며 숨죽이며 그 장면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 직분자는 그 옆에 다가가 털썩하고 같이 주저앉아 예배를 드렸다.

오늘날 복음은 이런 접촉점과 섬김이 없이는 젊은이들을 만날 수 없다. 청년의 복음화률은 3-4%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들은 전혀 다르게 자랐으며 삼포, 오포, N포 세대로 온갖 스펙을 대학에서 준비하고도 우리 시절의 젊은이보다 훨씬 더 성실하고 잘 구비되었음에도 직장을 얻지 못하고 비혼으로 내몰리는 세대를 살고 있다. 기성세대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여전히 젊은이에게 열정페이를 요구하며 자기 기득권을 당연한 권리로 알고 젊은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이 세대는 이전 세대처럼 가부장적 권위를 권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가부장적 권위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뚜렷이 없는 문화에서 자랐다. 그저 돈을 벌어오는 정도의 역할 외에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만큼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바쁘다. 일터에서 그들의 삶도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시대는 진정한 아버지를 부재하게 했다. 복음은 이 아버지상을 회복하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과 달리 권위와 진노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을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여야 한다. 히피 청년에 교회 들어왔을 때, 그들의 외모를 인해 겪는 위화감을 극복하고 교회와 복음에 관심을 갖는 그들의 눈높이에서 시작해야 한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치의 날을 기념하자  (0) 2019.01.18
계륵과 조조  (0) 2019.01.18
타자와 주체  (0) 2019.01.18
옳음과 성공  (0) 2019.01.18
다른 세대가 오고 있다.  (0) 2018.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