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3부작,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이성의 문제, 의지의 문제,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룬다.
이성의 문제란 진리의 문제를 말하고 의지의 문제란 선의 문제, 곧 종교의 문제를 다룬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서 신을 요청한다. 실천이성비판이 선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이 종교로 귀결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이성비판이 불가지론이라면 실천이성은 종교가 요청되는 우리 현실에 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은 계시를 매개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성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룬 판단력비판은 왜 판단력일까? 아름다움이 단지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거룩함 역시 판단력에 기반한다. 판단이란 개별적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포섭하는 과정이다. 아름다움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임에도 판단에 기반한다.
칸트는 이 판단이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이다. 규정적 판단이란 이미 있는 어떤 보편 범주로 포섭하는 과정이라면 반성적 판단은 이런 보편 범주로 포섭할 수 없을 때 해야하는 판단을 말한다.
우리 이성과 의지가 정서와 욕구를 지배할 때만 이런 종류의 판단이 가능하다. 대부분 예술적 판단이란 이전의 없던 것들에 대한 판단이며 신자의 삶의 모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 범주로 포섭되지는 않는다.
그럴 때, 필요로 하는 것이 반성적 판단이며 거룩함의 감각이 있는 사람만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카너만이 말하듯이 우리 시스템 1 곧 감성적이며 인지적인 지름길을 찾는 판단은 반대로 시스템 2 곧 이성적이며 의지적인 판단을 왜곡하는 체계를 발달시킨다.
전통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사람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고 전제했고 현대의 경제학도 그런 기반위에 서 있었다. 카너만의 연구는 이 형이상학적 가정을 뒤집었다. 이 경험적 연구는 인간의 인지 과정이 판단력으로부터 이성과 의지로 전개되어 간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는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판단을 위해서 보편의 범주를 체계화했다. 그리고 그 보편의 체계화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섭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신자가 경험하는 현실세계는 그런 보편적 범주가 확립된 채로 있지도 않고 그런 규정적 판단으로 포섭할 수 없는 여러 개별적 경험들이 얼기설기 제멋대로 엮여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지 적응의 과정들이 시스템 1을 발달시키는 기본적 환경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것이 먼저 발달하고 차후에 그 바탕 위에 시스템 2를 발달시키기 때문에 이성과 의지는 항상 왜곡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현실이 그렇게 다 범주화할 수 없는 반성적 판단을 요구하는 현실에 처해 있고 미숙한 사고를 하는 어린 시절 아이는 시스템 1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익숙한 방법이다.
결국 거룩함을 드러내는 판단력이란 반성적 판단이며 이것은 판례의 증가를 넘어 보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포섭하는 능력인 것이다. 레위기 등에 등장하는 정결과 부정은 여러 판례들은 규정적 판단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의 판단은 반성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거룩함이란 그래서 그 자체로 예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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