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기도단상

기도단상


노승수 목사


조용기 목사의 전매 특허가 있죠. 기도 중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 할찌어다' 하는 구문 말입니다. 
기도라는 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뭘 아뢰는 시간이죠. 동시에 기도는 종교개혁자와 그 후예들에 의해서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여기에도 설명이 필요한데, 은혜의 방편이라고 할 때,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실제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실제적인 함의는 이렇습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을 훼방하는 죄의 능력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통로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서, 기도하면 죄를 이기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는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여 온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말씀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엔 말씀은 주로 우...리의 지성에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 같고, 기도는 주로 우리의 의지(감성)에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혹은 타인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명령'할 수 있을까요? 환언하자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은혜'를 누군가가 받도록 명령한다거나 내가 스스로 취하도록 명령할 수 있냐는 겁니다. 
성경 전체로 일관되게 관통하는 생각은, 결코, 단언컨대, 네버, 그럴 수 없다!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이지 명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조용기의 이런 태도를 흉내내는 많은 장로교회 목사나 교역자 혹은 직분자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태도는 그가 속했던 word of faith라는 단체의 사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 익히 잘아는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 노만 빈센트 필 같은 이들이 모두 이 단체 소속이고 조용기도 그 일원이죠. 
이런 사상은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 조용기의 사차원 영성 등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좀더 일반적인 예를 들자면, 수년 전 유행하던 '시크릿'이라는 책의 방식입니다. 마음 속에 생각하고 염원하는 것을 머리로 떠올리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명령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생각이 현실에 구현되는 사상을 담고 있고, 이것이 조용기가 설명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가 흔히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관용구 '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할찌어다.'가 가능한 것이지요. 이 패턴은 신사도 운동이나 백투예루살렘 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신사도의 전매 특허인 '임파테이션'은 자신이 가진 성령을 자신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에게 나눈다는 사상이고 백투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은혜'와 '능력'의 모든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거기에 접근하는 방편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명령해도 좋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이 있군요. 이것은 제가 점심 때 포스팅한 '은사 중지'에 대한 포스팅을 참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 것입니다. ^^



2014.02.24 23:30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격적 사랑의 관계는 거리가 결정한다.  (0) 2018.01.29
건강한 대화  (0) 2018.01.29
자기부인의 딜레마  (0) 2018.01.28
영적인 사람  (0) 2018.01.28
지금 여기에서  (0) 201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