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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공평과 정의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공평과 정의에 대한 메시지다. 토라의 메시지며 토라의 주석인 선지서의 메시지다.

우리 주님도 토라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구약을 읽으며 이것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성경을 헛읽은 것이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과 나그네는 사회적 약자며 이들을 돌보는 것이 공평이며 정의다. 공평은 미슈파트(justice)의 번역어이고 정의는 체다카(righteousness)의 번역어다. 공평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행동방식(mode of action)'을 나타내며 정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적 소양(quality of a person)을 뜻한다.

체다카(righteousness:정의)는 미슈파트(justice:공평)의 상위개념이다. 미슈파트가 엄격히 지켜져야 할 개인의 행동의 구체적 의무라면, 체다카는 자비심(benevolence), 친절함(kindness), 관대함(generosity)의 내포하는 인격적 태도다. 미슈파트가 법률이라면, 체다카는 억압 받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동정심이다.

우리는 토라의 법조문을 따라서도 이웃에게 사랑을 행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토라의 정신, 곧 우리 심비에 새겨진 사랑의 계명을 따라서 이웃에게 자비를 나타내어야 하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다.

신약과 구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경외함을 율법이 요구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이다.

성경 전체에 이 메시지가 가득해서 그냥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나올 판이다. 그럼에도 낙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거르는 일이 팽배하다. 동성애는 성경이 금하는 많은 죄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혼은 인간이 지닌 여러 연약함이 빚은 죄일 뿐이다. 마음의 음욕이 육체적 간음보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간음이든 동성애든 이혼이든 본질은 삼위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시는 관계 중에 계심을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부를 사랑하시는 자, 성자를 사랑받으시는 자, 성령은 사랑 그 자체라고 했다. 삼위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은 그의 도덕적 통치를 따라서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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