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작정 교리가 개혁파 성도에게 주는 영적 유익

작정 교리가 개혁파 성도에게 주는 영적 유익


노승수 목사


작정 교리에 대해 비판하는 주된 비판 중 하나는 우리의 윤리적 삶을 약화시키고 성도의 삶의 거룩함을 약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 말은 사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은연 중에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윌리암 캐리가 선교사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장인이었던 목사는 '자네가 그렇게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하면 하실 걸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작정은 은연 중에 신자의 삶의 순결과 의무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모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곧 그의 의지는 대체로 4가지로 형태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지와 나타난 의지 혹은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의지의 대조를 잘 보여주는 말씀은 신명기 29:29의 말씀입니다. "은밀한 것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드러난 것들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속한 것이니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본문에 은밀한 것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지 혹은 작정적 의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드러난 것들은 하나님의 나타난 의지 혹은 교훈적 의지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 둘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드리는 이 설명은 성도들의 삶을 위한 소박한 이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신 29:29은 이 둘이 모두 다,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 진도를 나가기 전에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려야 이해가 수월하겠지요. 작정적 의지란 하나님이 역사의 모든 순서를 정해두시고 그 정하신 바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에 하나님이 정하신 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심으로 그의 의지는 단연 모든 것을 우선하여서 관철되는 것이 당연지사라 하겠습니다. 허나 동시에 예컨대, 항상 기뻐하라, 혹은 범사에 감사하라 등 역시도 하나님의 의지이지만, 사실 그 의지가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이것이 항상 관철되지는 않지요 그런 점에서 이런 형태의 하나님의 뜻을 교훈적 의지라고 합니다. 대체로 교훈적 의지들은 우리와 자손들에선명하게 드러난 반면, 작정적 의지들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근데 성경을 보면 이 작정적 의지 곧 하나님의 감추워진 지혜와 경륜에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성도의 구원에 관한 예정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 때문에 앞서 설명한대로 성도의 윤리적 삶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직면하게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교리를 듣고 성경에서 이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정말 성도의 삶에서 윤리적 수준이 약화되고 성화가 더디거나 일어나지 않게 될까요? 사실 우리 교회에서의 삶을 대체로 살펴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현상적으로는 분명 그렇습니다. 근데 개혁파가 주장하는 바가 뭔가요? 성경이 우리 삶의 원리이지 생활의 표준이며 원천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상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본문 곧<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씀을 온전히 신뢰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작정의 교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두 가지 정도의 예를 들어보려 합니다. 첫 번째 예는 작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삶을 더 방만하게 한다는 예증이고 두 번째는 작정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삶을 더 고양한다는 예증입니다. 
군대 시절을 돌아보면, 훈련이 가장 힘겨웠던 거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격과 사격 훈련 전에 있는 군기 훈련 PRE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피가 나고 알이 베이고 이가 갈린다고 PRE라고 하기도 했었지요. 이 두 훈련의 특징은 사람을 참 피곤하고 정말 악이 바치게 한다는 점입니다. 훈련생들에게는 이 훈련이 언제 끝날지, 몇회를 반복하고 그만 두게 될지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훈련생들은 금세 지치게 되고 훈련 교관들에게 이를 뿌득뿌득 갈게 되지요. 언제 끝나는지 알지 못하니 견디기가 힘들고 이제 끝이구나 하는 시점에 다시 반복하니 정말 성질이 납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방만한 태도로 제대로 훈련을 일사분란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그것은 다시 훈련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지리한 싸움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그 때를 떠올리면 피로감이 저절로 몰려옵니다. 해병대 훈련소의 훈련이었기에 그 혹독한 기억은 저절로 저를 지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목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삶은 오히려 윤리적 삶의 성숙도를 더 결여시키고 삶을 피곤한 것으로 만듭니다. 
두 번째 예는 스포츠 경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라토너나 수영 선수, 육상 선수들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은 압니다. 특별히 마라토너는 거의 생사를 넘나드는 경기를 하지요. 42.195km의 긴 레이스는 죽음의 고통과 같습니다. 특히나 35km 지점은 사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한계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근데 놀라운 일은 이런 한계를 넘어서 그들이 결승점에 다다를 때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막판 스퍼트로 속도를 높입니다. 그 이유는 결승점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 수영대표선수 박태환의 막판 스퍼트는 유명하지요. 막판에 더 가열차게 실제 자신의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더 열정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힘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결승점이 어디인지를 아는 까닭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작정교리는 성도의 삶을 방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참으로 구원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졌다면, 신자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 중에도 믿음이란 영적 망원경을 통해 장래의 우리가 들어가게 될 구원의 참 소망을 Zoom In해서 현재의 것으로 누리기 때문입니다.신자가 구원의 지식에서 자라 갈수록,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을 신자의 삶에 나타내실수록,신자는 더더욱 주를 위해, 주를 향해, 또 주님께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성도의 삶에서 작정 교리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앎으로 그의 삶에 윤리적 수준이 약화되거나 방만하여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는 이 구원의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마라토너가 결승점이 눈 앞에 보이는데, 오히려 태만하게 방만하게 자신의 경주를 할 선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 가운데 두신 작정을 드러내심은 우리을 태만케 하심이 아니라 더더욱 주를 향해 천국을 향해 소망의 경주요 믿음의 경주를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는 "그러므로 이처럼 많은 증인들이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히 12:1). 
만약 우리 삶에 낮은 윤리와 태만이 나타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종국으로서의 결승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스가 이야기한 '종말이 구원에 앞선다'는 명제의 또 다른 국면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종말의 결승점을 오늘 우리 삶으로 가져오는 능력입니다. 이런 구원의 지식을 가진 자가 어떻게 자신의 삶과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있어서 태만하여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결코 작정과 예정의 지식이 신자의 삶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길 바랍니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존적 아이들  (0) 2018.02.14
산만한 아이들  (0) 2018.02.14
장로교회론이 의미하는 바  (0) 2018.02.13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회관  (1) 2018.02.13
통섭(通涉)과 통섭(統攝)  (0) 201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