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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전체성과 레비나스의 타자

독일 자유민주당(FDP), 녹색당(GRÜNE), 좌파당(DIE LINKE) 등이 휴대폰 GPS 추적을 개인 기본적 침해로 보고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 현재 독일내 환자수가 7만명이 넘어섰다. 아마도 GPS 추적법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미 이웃 나라인 오스트리아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독일은 늦은감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 보다시피 좌파적인 정당들은 개인의 기본권을 강조하는 국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독일의 이런 태도는 과거 나치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한국 역시 60-80년대 오랜 독재와 전체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 독재를, 남한은 박정희 독재를, 공교롭게도 7.4 공동성명 이후 겪었다. 북한식 좌파 독재가 되었든지 남한식 우파 독재가 되었든지 같은 전체주의 노선을 걸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힘써야 할 것은 탈전체주의일지 모른다. 대마불사론이라든지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풍토라든지 과거 군사문화가 만든 잔재가 공동체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공동체주의는 우리 민족에게는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를 명분으로 전체주의나 쇼비니즘으로 기우는 것은 우려스런 일이다.

과거 독일 역시 나치라는 전체주의를 경험했고 하이데거 같은 거장 독일 철학자조차 나치에 동조하자 칸트와 헤겔, 훗설과 하이데거의 독일철학을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이 전체주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고기토로부터 시작된 자기 동일성의 문제로 이해하는 철학자가 등장했다. 그가 바로 레비나스이다.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태계 러시아인이었다. 레비나스는 독일식의 전체주의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데카르트의 제3성찰, 곧 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타자성을 이끌어낸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으나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와 나치를 겪으면서 그의 철학은 타자철학으로 선회하게 된다.

레비나스의 대문자 타자는 신을 가리키며 소문자 타자는 우리 이웃을 가리킨다. 훗설이나 하이데거의 자기동일성의 전체주의 철학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데카르트 이전의 신적인 세계관을 다시 소환한 것이다. 물론 그 출발이 데카르트의 제3성찰이라는 점에서 고기토와 훗설의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지향성 구조와 시간과 세계 안의 현존재로서 주체로서 존재자 개념은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전체성과 무한(1961)에서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는 랭보의 싯귀에 대한 인용에 더해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이런 알리바이 속에서 형이상학은 생겨나고 유지된다.”라고 말하는데 하이데거적인 세계내 존재의 맥락을 보여준다. 거기에 진정한 삶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형이상학이 탄생하고 세계 안에 없는 진정한 삶을 목마른 자처럼 세계 저 너머, 곧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데 그것이 바로 타자이다.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하나님이라는 타자로 말미암아 이웃이라는 타자로 말미암아 주체에 진정한 삶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이땅의 기독교는 독일 기독교가 나치에게 동조했던 것처럼 전체성에 함몰되어 있을지 모른다. 전체주의 일본제국이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의 강요에도 자기동일성으로 전체주의가 작동했고 교회는 타자성을 잃어버린채 신사참배에 동조했다. 대문자 타자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아마 우리 문화에 적용해보면 이웃공동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체성에 함몰된 사마리아인의 레위인과 제사장은 이웃이 될 수 없었다. 이웃 앞에 선 신앙만이 참된 타자 앞에 선 신앙이며 거기에 진정한 삶이 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유대인 누구도 타자로 바라보지 않았으며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낯설었으나 예수께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였다.

자기동일성의 주체가 주체 너머의 타자에 맞닿을 때만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삶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