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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성경신학으로 담아낸 프린스턴 구파의 신학

"하나님 나라", "성경신학", "언약신학", "이미와 아직" 이런 표현들이 처음에는 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쓰던 표현입니다. 더 정확히는 정통신학에서 벗어난 자들이 쓰던 표현입니다. 심지어 출애굽기 19:5의 "소유"라는 표현도 고대 근동의 문서에 나타나는 외교전문용어에요.

 

그럼 이런 용어를 쓴다고 그 신학이 자유주의거나 고대근동에 영향을 받은 걸까요. 거기에 세례를 베풀어 사용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류들은 다 칼뱅 신학과 교부 신학 안에 수렴되어 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도 없던 것 지어내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시대에 요구에 따라 확장하여 풀어낸 것이죠. 그게 당대의 신학자의 몫이구요.

 

하나님 나라를 교부들이 사용한 용례를 들어 보면,

 

제2클레멘드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약속된 것들을 받을 것이다(2Clem. 11.7.).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 안에서 항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자.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느 날 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2Clem. 12.1.).

 

터툴리안의 묘사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육하신 말씀이며 그는 새 계명과 하늘나라의 새 약속을 선포하셨고 영광 중에 오셔서 성도들을 영생과 약속된 하늘의 기쁨에로 인도하실 것이며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Tertullian, Praes. Haer. 13,).

성도들의 부활이 그들의 공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천년의 기간이 지난 세상의 파멸과 심판으로 모든 것이 불태워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 천사의 존재로 변화되어 불멸성을 부여 받게 될 것이고 하늘나라로 옮겨질 것이다(Tertullian, Adv. Marc. 3.25.).

 

이 묘사들은 하나님 나라의 내세성에 강렬한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 그러니까 자유주의자들이 주목하던 하나님 나라는 종말이나 죽어서 가는 내세성이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었고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프린스턴 구파의 정통 장로교회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는 개념으로 잘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조차 이미 교부들 안에 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오리겐의 글을 보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자신 안에서 자라나 열매를 맺고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적 계명에 순종하는 모든 성자는 소위 잘 정돈된 도성 안에 거주하는 것과 같다. 성부와 그분과 함께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된 영혼 안에서 그에게 임재하신다(Origen, Orat. 25.1.).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자유주의자가 사용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자유주의자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이미와 아직"이 쿨만 같은 이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그가 사용하던 개념을 우리가 다 버릴 필요가 있습니까? 오히려 쿨만의 표현은 칼뱅 안에 이미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에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Inst. 3. 25. 2.)"라고 묘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와 아직"은 프린스턴 구파의 신학인 게르할더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과 그 신학을 그대로 이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리처드 개핀의 박사 논문 "부활과 구속"의 기본 프레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도래한 나라로서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로서 "이미와 아직"을 성경의 주해를 통해서 입증한 정통 개혁파 신학 안에 현존하는 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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