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게 실존은, 첫째, 실존은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된 의미와 가치의 체계로서 세계, 곧 푸코의 언어로는 에피스테메, 쿤의 방식으로는 패러다임을 뜻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둘째, 미래의 모습과 삶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의미로서 실존은 현대적 언어로 옮기자면 사회적 관계와 그 의미로, 둘째 의미로서 실존은 희망이나 메니페스토를 의미하겠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세계에 내 던져진(피투된) 존재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내던져짐은 제각각의 독특성을 지니죠. 그런 존재자로서의 실존은 시간선상에서 존재하게 되는데 과거는 "있어 옴" 현재는 "마주 함" 미래는 "다가감"으로 설명한다. 실존은 과거로부터 정체성을 얻고 미래로부터 존재 가능성을 얻는다. 이런 통합을 통해서 각자 독특한 실존이 된다. 그리고 그 실존에게서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양분이 된다. 그렇게 현재를 마주하여 책임짐으로 현존재의 실존은 드러난다.
현존재는 현재를 마주하여 그것을 책임지는 대신에 현재에 빠져서 타인의 기준대로 살아가면서 변화하고 사라질 존재자들을 소유하고 집착하기도 한다. 결국 현존재는 자기가 마주한 현재를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그 수준이 정해진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에게서 불안은 일종의 삶의 동력이다. 소유란 대부분 안정을 향한 욕망이며 안정이란 시간 속에서 흩어져버리를 존재자를 붙들고 집착하는 데서 느끼는 현재에 빠져있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불안에서 시작한다. 그 불안이 안정을 지향하는 순간 기독교적 관점에서보면 신자의 기도는 멈춘다. 그가 맺는 세상과의 관계맺음, 타인과의 관계맺음은 안정의 희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정을 희망하는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어다보면 불안이 우리 실존의 근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동력을 부여하는 것, 소유하지 않고 그 불안을 마주함으로 영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불안은 일반적 의미의 불안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와 그 가능성을 문제 삼는 것이 불안이다. 그래서 그것이 동력인 것이다. 불안은 비본래적인 것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것, 곧 신학적 의미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은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떠맡으라는 경고의 순간인 셈이다. 현존재는 불안을 느낄 때만 자신을 돌아보며 그 불안을 회피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양심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영어나 독일어의 경우, is나 sein이 "~이다"와 "~있다"를 함께 의미해서 하이데거는 이것에 혼란이 있다고 설명을 해서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다. 그런데 우리 말에서 '날씨가 좋다" "바람이 분다" 등에 사용되는 "~이다"가 하이데거의 존재를 의미하고 "사람이 있다"에서 "~있다"가 존재자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는 영원한 놀이"라고 표현했다. 이 존재의 놀이가 드러낸 일시적 결과물들이 존재자이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자는 주체를 의미하고 존재는 세계를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훗설의 조교를 했던 하이데거는 훗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지향성의 문제를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맺음으로 설명했다.
구조는 삼각형을 이룬다. 현존재가 꼭짓점이라면 그것과 관계맺는 두 변의 끝점에 "도구"와 "타인들"이 있다. 인간은 세계 안의 존재이며 동식물과 무생물은 세상 안의 존재며 현존재인 인간의 존재 양식은 실존이며 동식물의 존재양식은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 presentness-at-hand)이며 사물이나 도구의 존재양식은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 readiness-at-hand)이다. 단지 사람이란 용어가 오염되었다고 보아서 이 용어를 '세계 안에 있음"이라는 의미로 현존재라고 표현했고 Dasein은 "거기 혹은 여기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안에서 세계와 관계맺는 존재자의 상태를 현존재라고 일컬은 것이다.
타인들은 다른 현존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타인들과 "더불어 있고"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늘 신경을 쓰며 산다 이것을 "심려"라 표현했다. 이 심려는 세계의 또 다른 모양이기도 하다. "함께 있는" 존재인 타인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로 인해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 거리가 가까워질 때, 가장 큰 문제는 현존재의 고유성을 상실할 때 타인들의 삶의 방식에 동조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삼위일체에서 성부의 권위와 성자의 순종이 성부와 성자를 같은 위격으로 만들지 않고 가까움에도 고유한 위격을 지니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있어야 할 존재인데 자신의 고유함과 주체성을 헌납하고 그 거리를 줄여가면서 나와 그들의 고유한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공장의 팩토리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이 현존재로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함께 있음에서 타인의 일부가 되었을 때 가장 좋은 점을 "책임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왕과 독재자에 열광한다. 마치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곤경을 목격할 때, 책임이 분산되는 효과처럼 여러 사람의 일부가 되고 스스로 책임을 전가하고 소유로부터 자기정당성을 얻는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현재를 마주함으로 책임을 떠맡는 삶을 현존재의 실존이라고 했다. 윤리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이데거 자신은 독재자였던 히틀러와 나치에 동조하게 되고 만다. 1933년 5월 1일 나치에 입당하면서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된다. 이것이 그의 나치 참여의 시작이다. 이 문제 때문에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동조에 실망해서 야스퍼스에게 가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녀의 박사논문이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나는 사랑의 개념이었다. 그녀는 하이데거에게서 세계 개념에 대해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하이데거와 달리 아렌트가 공적 영역을 강조하게 된다.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능동적 삶을 강조하면서 1. 노동, 2. 작업, 3. 행동의 조건을 강조했는데 특히 행동은 개인의 실존 행동이 아니라 공적 영역을 위한 봉사, 참다운 세계 건설을 위한 개념의 행동으로 설명했다. 이 역시 하이데거의 나치 동조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약점은 실존이 내밀한 불안 경험에 기대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앞의 현존이 아니라면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실존은 결국 하나님이 없이 그리고 그것의 공적 실천으로서 율법이 없이 그가 말하는 실존이 지닌 불안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준다.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현존재와 실존 개념을 신학적 관점으로 본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의 설명과 아주 같지 않을 수 있다. 하이데거의 원래 계획은 인간 존재를 1부로 존재 일반을 2부로 나눠서 다루는 것이었지만 1부의 1편인 현존재의 예비적 분석과 2편인 현존재와 시간성만을 묶어서 존재와 시간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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