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정수논쟁 (Marrow Controversy)은 18세기 신율법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내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신율법주의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신학을 따라가는 신학사조로 인간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믿음과 회개, 행위로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신학이다. 즉 복음이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였는데, 그 율법이 믿음과 회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배경은 1717년 스코틀랜드 한 노회의 목사고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목사 후보생에게 한 것에서 비롯된다. "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이 정통교리가 아님을 믿습니다. 곧 그리스도께 나아옴과 우리와 하나님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I believe it is not sound and orthodox to teach that we must forsake sin in order to our coming to Christ, and instating us in Covenant to God.)"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는 이 문장은 2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신율법주의를 따라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폐기주의를 따라서 회개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본디 이 문장은 그리스도께 나아옴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나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행위가 아무 쓸모 없음을 알기에 그리스도께로 피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유익을 누려야 함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다분한 해석상의 오류가 존재했고, 결과적으로 한 목사 후보생이 이 문제에 답을 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이후에 이 목사 후보생은 총회에 안건을 제시하였고, 1718년 총회는 이러한 문장을 제시한 노회에게 이 답변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 그 목사 후보생을 목회자로 임직시키라는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하여서 1718년에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 (현대신학의 정수?)라는 책이 재출간된다. 1645년에 에드워즈 피셔 (Edwards Fisher)가 쓴 이 책은 4명의 인물 (전도자, 율법주의자, 율법폐기론자, 그리고 어린 기독교인-young Christian)이 특정한 신학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작품은 토마스 보스턴이 한 서재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뒤로 1718년에 제임스 호그 (James Hog)에 의해 재출간 되었는데, 신율법주의에 폭탄을 던져버린 이 책에 대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즉각 반응을 하게 된다. 신율법주의를 지지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20년 총회에서 the Marrow (정수)의 신학과 그 지지자들 (토마스 보스턴, 제임스 호그 등)을 율법폐기론자로 정죄하기에 이른다. 분명하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정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신율법주의의 선입견으로 정수와 그 지지자들을 틀리게 정죄했다.
간단하게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 정수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약속으로서 주어졌으며 신자의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신자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열매로 일어난다는 것이 었다. 또한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었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정수를 반대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는 것이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를 거부하고 보편속죄론(universalism)을 지지한다고 이해했다. 그렇기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복음은 오직 준비된 죄인들에게만 제공되어지며 구원의 확신은 신자의 선행에 있고, 순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두려움 가운데 임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수논쟁은 속죄교리,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제공되어지는지(gospel offer)에 대한 논의였다. 물론 이는 필연적으로 복음과 율법, 그리고 신자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다른 설명도 논의가 되지만 다음에 다루어볼까 한다.)
짧게 요약하자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신율법주의는 알미니안주의와 로마카톨릭의 교리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용하면서 발생했다. 신율법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복음의 정수를 올바르게 제공한 토마스 보스턴과 정수 지지자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의해 율법 폐기론자라는 정죄를 받았다. 정수와 그 지지자들이 올바른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했음에도 말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해서, 한국교회가 행함있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보며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부분은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신학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J.V. Fesko의 Beyond Calvin을 참고하면 좋다 *좀 많이 비싸다). 복음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값진 구원을 거저 준다. 그 구원은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감사함으로 선행의 열매들을 맺게된다. 즉,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어 있지만 결단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칭의는 언제나 성화에 선행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간다. 전도자 이기 때문에 전도자 답게 살아야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구분된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에 무언가를 더하는 일도, 또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값싸게 만드는 일도 우리는 피해야할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안에서 은혜 안에 전진하는 길을 우리는 배워가야만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례자의 길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또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을 주신 분께서,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 까지 이루어가실줄 우리는 확신하기에 이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다.
#메로우논쟁 #정수논쟁 #신율주의 #토마스보스톤 #에드워즈피셔
출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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