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붙인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 선교사인 동시에 신학자요 철학가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East Windsor, Connecticut 에서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 디모데 에드위드 (Timothy Edwars)는 이곳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에스더 (Esther)는 North Hampton이 있는 Massachusetts 주에서 시무하는 솔로몬 스토다드 (Solomon Stoddard) 목사의 딸이었다. 자녀 11명을 두었는데 요나단은 다섯 번째 아이여서, 위아래로 10명의 여자 형제를 둔 독자로 자라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적인 경건 생활에 썼으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가정학교에서 철저한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던 중 13세에 예일대 (Yale College)에 입학하였다. 뛰어난 관찰력과 지적인 호기심으로 곤충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거미줄의 모습과 형태, 목적에 관한 상세한 과학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는 여기서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 내는 신비한 모습에서 창조자의 끝없는 선하심과 오묘하신 지혜를 발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작 뉴톤의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14세에는 “자연 과학” (Natural Philosophy)라는 제목으로 물질주의와 무신론을 반박하는 글을 모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식의 경지에 다 다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 (touch)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었기에, 기독교인의 학문 추구를 적극 장려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마음을 가진 신앙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섭리를 터득하는 지혜를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 17세에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바로 예일대 신학부에 진학하여 목회자 과정을 2년간 공부하였다. 신학생 시절인 1721년 (18세)에 그동안 의심을 가졌던 예정론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divine sovereignty)과 성경과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인식(“new sense”)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경건 생활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재학 중 1년간 뉴욕시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1723년에 졸업한 후 3년간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724~26).
24세 때 (1727)는 장인이 시무하던 North Hmpton에 부목사로 갔는데, 2년 후인 1729년에 장인이 돌아가시자 30세에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회 말년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권고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성만찬 문제에 있었다. 그가 성장할 때는 청교도들 2세의 신앙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즉 열정적인 신앙이 식어갔던 것이다. 요나단은 장인이 시작한 Halfway Covenant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입교하지 않는 아이들도 성찬에 참석해도 된다는 주장)를 반대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초신자들도 교회에 초청하여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요나단의 생각은 신앙이 없이 성만찬에 참석하면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요나단 에드워드는 회심한 세례교인만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가르치고 실행하였다 (1749년). 여기에 반발을 느낀 교인들의 불평이 생겼다. 불평을 늘어놓았는데 목회자가 서재에 너무 많이 앉아 있고 심방이 부족하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함), 너무 잘산다, 장로들의 자녀들을 책벌한다 등이었다. 이리하여 요나단은 1750년 7월 1일 고별설교를 하고 23년간 시무한 교회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751년에 인디언 마을인 Stockbridge에서 그는 원주민 선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 언어 습득, 병치레, 인디언 전쟁들, 강력한 개인적인 적들로부터 공격당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저술 활동에 심혈을 쏟았다. 그의 유명한 저서 "Freedom of Will"이 이때 출판되었다 (1754년). 그의 유고작인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1765)과 "The Nature of True Virtue" (1765)에서 하나님의 완전성과 창조성을 연결시켰다. 주요 질문은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였다. 모든 것이 완성된 하나님은 더 이상 소원이 없는데 (모든 것이 실체화 됨) 왜 창조를 하셨나? 하나님께서 달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창조하실 때 원인은 없다 라고 이야기하면 세상과 인생의 목적이 없게 된다. 심심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하심으로 하나님은 더 완전한 분으로 되고 있다고 과정신학에서 이야기한다. 그러면 세상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가? 그에 의하면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다보며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내적 하나님 (God ad intra), 외적 하나님 (God ex extra)을 구분하고 있다. 내적인 하나님이란 사랑의 힘으로 연결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내면적 구조를 말한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완전한 실재화 (disposition to love and beauty)를 이룬다. 이 사랑과 아름다움의 본성 (nature)과 힘 (power)이 외적으로 표현 (재현, 발표) 되는 것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내적인 사랑의 삼위일체 관계, 내적인 아름다움, 영광이 외적으로 계속 발표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함으로써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되풀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죄를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삶과 생애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도록 보여주시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신다. 인간이 예수를 보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도록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힘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 못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것을 되풀이시킨다.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무궁 (infinite) 하기에 이것을 다 표현하기 위해 무궁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종말이란 무엇인가? 에드워드의 종말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가 완성될 때 예수께서 재림 (교회는 신부, 신랑 예수의 혼인잔치) 하신다는 것이다 (wedding without end). 인간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세속사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계속 반복되어 상처를 치유하며 위로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히 계속된다. 영원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내적 아름다움과 사랑을 되풀이하여 끝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천국에 대해 열망 (exciting expectance)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요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이 물려받은 개혁전통을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맞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의 사상 배경에는 다음 것들이 있었다.
1) 경험주의 (John Locke)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경험을 통해 들어온 정보로 온 것을 토대로 안 것인데, 마음속의 반성 (reflection), 하나님 존재, 인간의 자유, 인과관계 등을 부인한다. David Hume도 주장하기를 성냥을 그은 것과 불이 붙는 사건이 있을 뿐이지 이 사이에 원인이 없다고 한다.
에드워드의 반박 - 밖의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밖의 정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성령께서 인간 마음을 각성,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연결시킬 수 없다. 성령의 역사로 모든 만사가 하나님과 연결, 그렇지 않으면 사물을 바로 볼 수도 파악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나무를 볼 때 나무의 실재를 봄; 성령의 실재를 주장한다.
2) Isaac Newton의 자연과학 - 자연과학의 역사가 200~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학의 법칙에 의하면, 현재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자연법칙으로 움직인다.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에드워즈의 반박 - 하나님의 주권 강조. 원자 (atom, 전전기임, 운동임)를 당시 과학자들이 더 이상 깰 수 없는 입자라고 주장. 마지막 물체라고 이해. = 원자는 하나의 힘의 작동 (act of resist power) 하나의 운동임; 어떤 유한한 것도 부술 수 없으면 무한한 힘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임. 다른 말로 하면, 과학자들이 말하는 원자의 물체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힘을 추가함. 존재의 원인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함.
3) 알미니언주의 (Arminianism) - 네덜란드 신학자 Jacobus Arminius가 주장한 것이 영국 성공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론이었다. 감리교도 이를 채택하고 있는데 장로교의 예정론에 반박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원죄의 무능력 (disabling effect)을 최소화하며, 도덕성 (morality)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삼는다.
에드워즈의 반박 - 1734년 11월에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로 North Hampton 뿐만 아니라 케네테컷 강 유역 지역에 큰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다. 교인 중 300명 이상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 사건을 보고한 책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1737)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회심의 유형과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4) 대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 1730년대, 1740년대) - 1740~42년 사이에 대각성 부흥운동이 미동부 지역 전역에 번졌다. 영국 감리교 운동의 성공적인 부흥사였던 죠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와 뉴저지 주 장로교 목사인 길벗 테넨트 (Gilbert Tennent)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하고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설교는 대체로 조용한 편이나 대각성 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때인 1741년에 행한 설교였던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에드워드는 대각성 운동을 대체로 지원하였다. 신앙의 체험과 감정문제를 취급하면서, affection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뜨거운 감정, 아는 것과 병행하는 것)과 passion (단순 감정)을 구별한다. affection을 ‘사랑의 열정’이라 번역할 수 있는데, 의지를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적인 열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감정은 단순 감정을 지양한 affection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 (holy love)에 있으며, 이 사랑은 내적인 질과 실지적 결과들에 의해 순수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치며 방대한 신앙저술을 하면서도, 그 시대의 복잡한 심리학, 사회학, 철학, 과학적 논쟁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대한 균형 잡힌 신앙인의 자세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1758년 (55세)에 현재 프린스톤 대학교의 전신인 College of New Jersey (당시 학교는 목사 양성기관이었음)의 학장으로 청빙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노회가 결정하여 편지를 보내어서 (Letter of Nassau Hall)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저술에만 전력을 하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해야 했었다. 학장 겸 교수로 취임하였다 (1758년 2월 16일). 당시 신 개발된 천연두 주사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생겨 투병하다가 총장으로 부임한지 1달 반인 3월 중순경에 사망하였다. 그때가 1758년 3월 22일이었다. 현재 뉴저지주 프린스톤 시내에 있는 공동묘지 (Princeton Cemetery, Cleveland 대통령도 묻혀 있음)에 묻혔다. 그의 부인도 6개월 후 (9월) 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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