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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종말론 강해(2)

종말론 강해(2)
서철원 교수
제 7 강 
지난번에 읽었던 요한계시록 20장을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20:1-10까지.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제까지 종말론에 관한 서론 부분들을 거의 다했고요. 오늘은 재림과 그리고 천년기론에 대해서 재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 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하고 언제든지 주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믿고 그리고 2천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특별히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간절함이 참으로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예수 믿어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채 다 알기도 전에 한국이 국가적으로 크게 위기의 연속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주의 재림을 열망하고 또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전개될 천년기의 도래를 열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면의 재림을 그렇게 열망하고 또 천년왕국을 그렇게 열렬히 사모해도 이면에는 재림을 그렇게 기쁘고 즐겁게 마음을 확 열고 기쁨으로 맞이할 생각을 하기 보다는 좀 두려움과 불안, 막상 주님이 재림을 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상당히 크게 한국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가 제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잘못 느끼고 혹시 제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천년왕국은 강조를 해도 주의 재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강조가 놓이지 않고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심판의 무서움에 대해서 별로 두려움이 적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제게 들어요. 천년왕국은 지상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아직도 이 현 역사의 체계가 진행되는 것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주의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어도 우리의 운명이 단번에 결정나고 그런 것으로 인류의 역사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닌걸로 생각되기 때문에 아마 주의 재림,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함께 올 심판에 대해서 큰 두려움이 적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막상 천년왕국을 주장하고 그걸 그렇게 크게 기다리는 분들도 생활에 있어서는 천년기를 맞을 만한, 주님의 재림을 맞을 만큼 확실하고 분명하게 진행되지 않지 않는가 그런 느낌을 제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상 천년왕국이 천년왕국 혹은 천년기가 ( )이 교회가 핍박받고 위기에 처하고 존립이 위태하게 그와 같은 때가 될 때에 천년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강렬해졌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 얼마 안돼서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 백만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새롭게 교회가 일어난 놀라운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나라가 다 운명이 끝나갈 그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잘아시고 유명한 조만식 장로, 조만식 장로의 회개가 평양에서 그 큰 회개운동과 그 큰 대부흥운동을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죠. 참, 남한의 이승만 하면 북한에 조만식이라 할만큼 민족을 대변한 큰 지도자가 교회 장로로써 흠잡을 데 없이 잘 사시든 분이었는데 이분이 어느 과부의 재산 처리를 맡아가지고 재산을 처리한 후에 그 과부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라 일부는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일부만 그 과부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래서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집회 때 조만식 장로가 나와서 그것을 회개한 일이 있었죠. 그 회개사건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각성하게 하고 회개운동을 일으키게 했고 그리고 교회가 백만회로 확산되는 부흥운동이 시작됐고 전개 됐습니다. 그때부터 그때 길선주 목사님께서 아주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큰 목사님이셨는데 그분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천년왕국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고난받고 나라가 망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런 핍박과 어려움이 후에 우리가 천년왕국, 주님의 통치 아래서 이 모든 고통을 씻고 그리고 왕노릇하게 되며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아서 이 고통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왕노릇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굶주리고 못먹고 할벗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것이 다 벗어나는 때가 올 것을 열렬하게 가르치고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1919년 3.1운동이 있었고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있었고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은 있었지만 정말 참담하며 어두움이 계속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 이광수 같은 글 그때 당시의 민족의 지도자들이고 선각자들이 더 이상 일본의 세력에 무슨 반항세력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것을 무너뜨리고 나라가 독립하겠는가? 절망에 빠졌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고 지조를 팔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와 같은 어두운 참담한 때에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의 강해를 통해서 주의 재림하시면 그때 우리가 이 고통을 벗어나고 그때는 왕노릇하며 악인들을 지배하고 또 세상이 저주를 거두심으로 생산이 풍성하게 넘치게 되고 그리고 동물들의 성질도 변해서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터이니까 소망을 갖게하고 교회로 하여금 핍박받는 중에 좌절하지 않고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면 그와 같은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친일파들이 되어서 다 일본과 일본을 봉사하고 편들며 그들의 앞잡이가 돼서 참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자들을 다 잡아주는데 앞잡이 노릇을 하고 그들이 교회의 모든 지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1937년으로 기억하는데 혹시 36년인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미션스쿨이 폐쇄되고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일본과 대한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현세적인 아부와 현세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해방을 겪고도 여순반란과 대구동란 반란, 그런 또 여수폭발, 제주도 폭동 사건 그와 같은 일이 많이 생기고 50-53년에 걸친 4년에 걸친 6.25, 휴전 후에도 계속된 불안한 정치정세, 이런 것들 그리고 4.19, 또 5.16 이와 같은 어려움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강해를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60년대 말까지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요한계시록 강해하는 것이 수요일밤 힐수 과제였고 대부분 부흥사들이 요한계시록 강해를 해서 주님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늘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든지 긴박하게 올 수 있다는 그와 같은 생각을 많이 갖고 그래서 학생들도 학교 보내는 것도 금지하고 많이 보내야 중학교, 그리고 더가면 성경학교나 해서 고등학교나 오고 대학교 가면은 다 세속화 되어 참 신앙의 길에서 떠나서 자유주의 신앙을 갖게 됨으로 더 많은 교육은 교회로 하여금 타락하고 배도하려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5.16이 나서 63년 민정으로 이양되기 까지 어둠의 시절을 지나고 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떡을 하고 명절을 맞을 준비를 별로 못하는 그와 같은 상황을 3년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경제 5개년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정부가 노력해서 자본과 기술들을 도입하고 열심히 부흥을 노력해서 70년대 기간산업들 처음에 1차 산업 기간산업들을 세워서 공업국으로 도약할 만큼 그와 같은 기초를 놓게 되고 수출입국으로 수출만이 사는 길로 해서 수출 2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믿게 되었고 4백억불을 달성하면 다 잘살게 될 걸로 그렇게 믿으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회가 크게 부흥하고 또 교회도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을 했습니다. 내 기억으로 70년대 부터는 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요한계시록 강해가 사라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는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마는 지금 대부분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는 목사님들이 별로 많지 않고 부흥사들도 저녁집회는 다 요한계시록, 낮집회 공부에는 요한계시록 강해로 성경공부를 계속했는데 그것이 다 사라지고 축복에 대한 강조가 요한계시록 강해를 대체하게 됐습니다. 그 교회가 번창하게 잘 살게 되고 특별히 농촌교회가 아직도 어렵고 농촌 교역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교회가 너무도 많지만 도시교회들은 너무나 부자들이 된 교회가 많아지게 되서 목사님들도 많은 여유를 갖게 되고 성도들도 여유를 갖게 돼서 웬만한 계획들은 다 집행하고 시행하지 못할 일이 없을 만한 수준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별로 종말에 대한 긴박한 생각도 없고 기대도 크지 않는데 한편에서는 이렇게 재림과 재림보다는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와 부풀음이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세기 중엽에 이레네우스라 하는 기독교 최초의 신학자가 소위 “이단들에 대하여”라는 책들을 썼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서 희랍어 원문은 대부분 소실되고 또 번역된 라전어 판이 남아있고 일부의 희랍어 원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 ) “이단들에 대하여”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특별히 영지주의자들, 그노시스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신관과 그들의 주장들을 논박하면서 마지막에 종말론에 관해서 천년기론을 잘 개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천년기를 세우실 때에 그때에 열심히 그때는 온 지구가 비옥한 생산을 하게 되어서 포도 한송이를 두 사람이 메도 멜 수 없는 그와 같은 풍성한 수확을 내게 되고 의와 평화가 이루어져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게 되고 질병이 다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갈 때에 천년기가 끝나는 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인도할 만큼 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3세기 들어올 때에 우리가 아직도 핍박이 무섭게 진행되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핍박에 의해서 순교를 받고 있는 그와 같은 때에 천년기에 대한 반대가 교회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천년기에 대한 강한 반대를 먼저 주장한 사람이 소위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 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천년기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시작하고 그것과 함께 육체의 부활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 그것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오리겐이 그와 같은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교회가 핍박아래 있으면서 많은 순교자를 내고 있는 그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함께 천년기를 배척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어거스틴이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 어거스틴이 4세기 중엽에 나서 5세기 초엽에 죽었습니다. 대 교부가 아주 강력하게 천년기론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를 배척할 때에 오리겐이 반대한 육체의 부활은 교회가 한사코 주장하고 굳게 붙들면서 배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큰 핍박과 환란을 맞고 있는 중에도 교회가 천년기를 배척해서 사도신경에 나와있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진 것이 325년 니케야신경인데 여기 보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이 보통 2세기 중엽에 형성된 걸로 봅니다. 2세기 중엽에 아직도 핍박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순교자를 많이 낼 때입니다. 2세기 중엽 저스틴 마터가 초대 변증가로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에 형성된 신앙고백이 “저리로 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때에 신앙에서도 신앙의 규범은 사도신경이 같은 내용이지만이보다 더 확실하고 정교하게 구분돼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 구속의 경륜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 돼 있습니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가 최초로 에큐메니칼 공회의로써 기독교 믿는 신앙의 내용을 말했습니다. 거기에도 사도신경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돼 있지만 근본은 사도신경의 내용과 같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여기 2조에 덧붙히기를 그의 만세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확정을 했습니다. 그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천년에 국한한 것이 그릇됐다고 하는 사상을 정식으로 배척을 했습니다. 천년기는 천년기론의 공통된 특색은 지금 하나님 나라는 현세에 있지 않고 주님이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울 때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가 공식으로 천년왕국을 배척을 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한 나라라고 하는 것을 확정했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24-28에 있는 “그 마지막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나라를 바칠 때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종결될 것 같은 이해를 갖도록 하는 성경 구정에 대해서 24절입니다. 그 다음 끝에 오는데 아버지 하나님께 나라를 바칠 것이라. 그래서 바울이 24절에서 제기한 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끝이 있을 것으로, 이에 대해서 천년기에 국한 할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을 정식으로 배척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천년기를 가장 크게 열렬하게 교회서 완전히 추방한 사람이 대교부인 어거스틴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신경들이 다 천년왕국이 다 이단으로 정죄되고 바른 교회의 믿음이 아니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수의 분파들에게 내려왔고 종교개혁 때 다시 신경을 확정할 때도 천년왕국이 전혀 무가치하고 가치가 없는 이단적인 설로 배척을 했습니다. 이것이 재세례파들에게 이 천년왕국이 수납되었다가 내려왔는데 그것이 다시 크게 일어났냐면 소위 19세기 중엽 혹은 초엽 ( ) 달비가 영국교회가 너무 의식화 되고 형식화 되어가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필리스마 형제단을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문자적인 해석을 성경해석의 가장 바른 원리로 볼 때 천년기론이 다시 크게 열렬하게 수납되고 그것이 그 후에 미국의 달비가 여러차례 6-7번인가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교회의 이 천년기론을 열심히 선전해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다 달비가 가르친 천년기론, 현대형의 미국 천년기라 그것이 세대론입니다. 세대론이 가장 바른 천년기론으로 받아들였고, 19세기에 미국교회가 그의 천년기론을 받아 들이게 됨으로 선교사로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천년기론 사상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천년기론이 그대로 전달돼 와서 가장 확실하고 바른 이론인 것처럼 이때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공교회에 로마교회가 정교회와 종교개혁교회들에 공교회들의 신앙고백서가 다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보편부활 보편 일반적인 부활, 그리고 보편적인 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도래, 이와 같은 종말도식을 가장 바르고 확실한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은 많이 많이 퍼졌고 추종자들이 많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통일된 진술된 형태로 나타난 적도 없고 교회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한번 더 수납되고 채택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난 받는 교회들에게는 천년기론이 그렇게 호소력을 갖게 되고 특히 세대론에 의하면 주님 재림전에 무슨 꼭 표징이 있어야 되는게 아닙니다. 주님은 문밖에 와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즉각 오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천년기론 특히 세대론의 가르침 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잘살게 되었어도 일부에서는 천년기론에 대한 세대론적인 선전이 크게 일고 있어서 한국교회가 이 세대론을 그의 확실하고 분명한 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미국에 가시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해서 설교만 나오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침예배하러 가기 전부터 계속해서 목사님들 설교가 나오는데 저녁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텔레비젼을 틀면 거기에 통상적인 예배 중계가 다 끝나고 이제 단독 혼자 나와서 성경을 풀이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철두철미한 세대론자로서 세대론의 도식을 그걸 가지고 열심히 연대를 그리며 해설을 해서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말하는 주의 재림이 곧 가까이 임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증인파, 안식일파만 주의 재림의 날을 확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당시에도 재세례파들이 그러했고 17세기에도 그러했고 18-19세기에도 그런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보면 주의 재림이 가까운건 확실하고 우리가 아직도 종말시대에 살고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제 주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의 재림하시는 것은 또 한번의 유예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의 재림의 역사는 종결하고 구원을 완성하며 그리고 심판을 이루므로 심판을 이루어서 완전히 새인류를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그와 같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끝이고 역사의 완결입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시간이 또 계속되고 진행되는게 아닙니다.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흐름이 그 자체로 종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사면에 불가한 질문입니다. 역사 자체는 역사 자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역사를 종결합니다. 그것은 역사 밖으로부터 역사가 종결돼요. 주님이 재림하시므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의 초림 때에 그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확실하게 구원해 내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죠. 그러면 주님의 오시는 것은 그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이고 마침내 악을 소제하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다 소제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대신 그 천국에 도달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재림은 종말이지 재림후에 반복되는 종말이 반복되는 재림이 또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0장을 어떻게 이해하던지 간에 교회가 한번의 재림과 한번의 보편부활, 한번의 보편심판으로 일이 종결되는 걸로 했지 계속적인 여러차례의 재림과 또 여러차례의 심판, 여러차례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 것이 성경 전체와 교회의 회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이 한번 오시면 또 한번 유예기간이 종말전에 끼인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의 오실 것을 맞을 것이 두렵고 내 생전에 오시면 어쩔까 두려운 생각이 많습니다. 종말론은 그냥 종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통적인 종말론이 대부분 기독론과 상관없이 진행됐습니다. 처음 초림으로 피흘려 사람들을 구속하셔서 처음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셔서 이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시기로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는데 그것이 실패되고 낭패됐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죄를 속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와 죽음 가운데서 살려 내셔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산해 내는 일을 시작하셨으므로 이 자기 백성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모으시는 일을 하셔야 합니다. 이 처음 재림은 초림 때 이룩하신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종말론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게 기독론의 연속이죠. 성육신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모든 처음 하나님의 경륜에 작정하셨던 모든 백성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으시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쎄거 초림 때에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시므로 구원을 이루셨는데 구원을 이루심 때문에 그 아버지에 의해서 주와 그리고 구주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재로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를 관할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역사가 도달할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완성이 그 역사의 목표입니다. 이 역사가 다른 것을 위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 완성해 내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이루십니다. 그것이 역사가 목표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이가 완결하기 위해서 오시는거죠. 그러니까 이 구원의 완성은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지금 통상, 지금 받은 구원은 구원이라. 지금은 우리가 예수 믿어서 우리의 영혼이 죄를 씻음받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영혼만 구원에 이르렀지 육체가 구원에 동참한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배척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성립합니다.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확신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과 함께 육체가 함께 구속되어야 되는 것이지 영혼만 구원에 이르고 육체와의 현상세계는 그대로 있는 상태, 그런 구원만 가져온 메시야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이 뿌리 깊은 확신, 지금도 예수를 못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가 진정 메시야이면 영혼 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완전히 구원해야 하는 것이 바른 일이라! 그러니까 언제 예수 믿느냐? 우리의 육체까지 구원을 가져올 때 그때 예수를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사고입니다. 우리도 지금 구원에 이르러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와 계시고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씨를 받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 건 아직 못됩니다. 우리가 완전히 구원되는 길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 구원에 동참하게 하고 우리의 거소인 이 현상세계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구원이 완성된 거죠. 구속이란 구원하고 구속이 별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게 큰 차이를 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냐 그런게 아닙니다. 육체가 이 땅을 거소로 하고 살고 우주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는데 우리의 땅은 우리의 육체는 부활해서 구원에 이르고 이 지구는 우리의 생존세계는 현상대로 있는 것도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그 때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때에 우리의 거소도 변화돼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요. 구원의 완성은 구속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대표로 해서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삶의 길을 작정해 놓으셨는데 그 삶의 길을 바르게 살 것인지 안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결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 역사는 종결돼야죠. 그래야 그 역사가 목표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인류의 역사가 불합리와 부조리의 연속으로 흘러가는 것 같애도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주재하고 계시므로 그렇게 부조리와 불합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참담한 전쟁과 질병과 재앙들이 연속되기 때문에 이 역사가 역사 자체로 무의미한 것 같애도 그 자체로 보면 무의미해도 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달을 목표로 하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무의미로 허무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실려고 작정하시고 역사를 진행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걸 방해하는 일 이 요소들 유혹자들과 그리고 죄악들을 제거해 내시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십니다. 
그 영광에 이르는 그것이 역사의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무의미가 무의미와 연속이 무의미의 연속이 부조리가 불합리가 역사를 지배하고 진행되는 것 같아도 이 역사 자체 내에서만 보면 그러해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역사의 주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진행됨으로 역사가 무의미 불합리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귀결됩니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역사의 주재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단지 심판만 하시기 위해서 오시는게 아니죠.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이셔도 지금 우리의 역사 진행 상황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심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이와 같은 전쟁과 질병과 참혹함이 있을 수 있느냐? 2차대전 때 나치 아래서 폭격을 받고 고생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면 도대체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느냐? 하나님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줄은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나라됨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고, 그 근원인 유혹자들 사탄과 죄악을 그로 인해서 도입된 죽음을 제거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 그 근본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라를 방해하고 훼방할려고 했던 악의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낼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간에서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살폈지만 역사 악이 진행되어서 악의 화신이 죄의 사람,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느냐 할 때에 그럴 수 있습니다. 죄가 그냥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적게 짓는 상황에서는 죄의 무서운 세력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떠한 죄악된 습관과 그리고 습관이라고 할지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갖고 있으면 웬만큼 해서 못 벗어납니다. 그 정말 팔을 찍어버리기 전에는 못 끊는거죠. 팔을 찍어내고 못 끊는거죠. 이 팔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명령이 다리를 끊어버려라 팔을 끊어버려랴 눈을 빼버리며 이 주의 명령이 코란경에 반영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도둑질한 사람들은 잡히면 팔을 자른다고요. 카이로의 어느 외교관 집에 애굽 여자를 하녀로 데리고 살았는데 손버릇이 나빠요. 그러니까 영국식으로 생각해서 너 경찰서에 갔다 오너라. 보냈어요. 그런데 갔다오더니 팔이 없어 오는거예요.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빠질 것 같은거죠. 그런다고 고쳐집니까? 한팔 잘라버렸으면 이 팔 갖고 도둑할려 그래도 이것 또 자를까봐 못하겠지마는 그러나 죄된 습관을 한번 형성해 놓으면 그 죄로 마지막 귀결에 도달하기 전에는 못 고치죠. 못 깨닫죠. 영으로 은혜로 그것을 깨치기 전에는 하기 어려운거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조금의 죄악된 습관과 풍습도 여러분들이 형성되기 전에 끊어야 합니다. 깊이 진행되기 전에! 손으로 죄를 짓거든 끊어버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마가복음인가...? 이것 가지고 안만질 것 자꾸 만지죠. 특히 그 계명을 하실 때에 남녀간에 관계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요. 안만질 데를 자꾸 만지니까 이게 문제죠. 끊어버리기 전에는 둘 다 끊어버리면 못만질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악이 심하게 진행되고 악화되죠. 어릴 적에 보던 습관들이 그 풍습들이 지금 다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지하철 타고 가다가 나도 앉을려고 하면 어린아이들이 와서 먼저 앉아버린다고요. 가만히 보면 저 어린아이가 나도 이렇게 머리가 허옇는데 저 어린아이가 제가 먼저 가서 앉는다. 내가 시골에 충청도에 부모님이 계셔서 가끔 버스타고 가보는데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앉아가지고 할머니가 와도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올라오실 때 “앉으십시오” 했더니 차장이 하는 말이 “어찌 일어나십니까?” “특별합니다” 한번도 일어나는걸 못 본거예요. 그 다음에 할머니 옆에 어린 딸이 손녀가 따라왔는데 그 애가 그 자리에 딱 앉아요. “애 네가 날 비켜줄 차례 아니냐?” “할머니가 자리 비켜 줬으니까” 그러나 끄떡도 안하고 앉아서 가요. 요새 아이들이 어디가서 앉느냐 하면 제일 뒤에 가서 앉아요. 앞에쯤 앉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 올라오면 안일어나면 괴롭고 하니 맨 뒤에 가서 앉아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고요. 악이 강할수록 진행되면 더 담대하고 큰 규모로 진행됩니다. 여러분도 많은 경우의 상상의 세계가 다 큰줄 알아도 실제의 세계가 항상 상상의 세계를 넘어간다. 감히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데 실제 세계의 일은 일어나거든요. 우리의 상상을 못미치는거죠. 중학생 열다섯 살 짜리 아이가 9,8살 되는 어린 여학생을 데려다 성폭행하고 마침내 찔러 죽이기까지 하지 안했어요? 그런데 한겨레 신문에 보니까 그렇게만 나와 있는데 중앙일보를 보았더니 집에 가봐야 어머니가 없어 매일 텔레비젼만 봤다. 텔레비젼만 봤겠어요? VTR만 봤죠. 그러니 공부도 못하고 그러니까 VTR만 보니까 모든 성영화들 그런 필름들 뿐이죠. VTR이! 그것만 보니까 부모님도 다 보니까 엄마 아빠 없으니 그것만 보는거죠. 어머니는 어디가고 무슨짓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아이를 살인자로...! 
미국에서 타임지에서 들었는데 미국에서 또 진행되는 악의 번창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죠. 열살 미만 아이가 어린 아이에게 들려있는 25전 동전을 안준다고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의 범죄가 얼마나 심한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현상이 진행되는 것 같애요. 인신매매단, 그것이 멀리 신문에만 있는 얘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집 옆에서 그와 같은 얘기를 해주더란 말입니다. 나는 우리 집 옆에 젊은 여자가 사는데 동생하고 신사동 가구 백화점 가서 가구를 보는데 한 젊은 청년이 나와서 한데 얼굴도 순진하게 생기고 얌전하게 생긴 남자가 나오더니 하는 말이 “싸면서 좋은 명가구가 있으니 오라”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 동생이 따라갈려고 하니까 그러니 딱 치면서 “얘 요즘 인신매매가 심한데 네가 따라갈려고 그러냐?” 그랬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달아나더라. 그 남자는 양심이 있는 것 같애요. 그런데 거기다 이야길 덧붙히는데 부끄럽고 흉해서 말하기가 어려운데, 또 한 여자가 인신매매단에 끌려갔는데 전부 다 요구르트를 줬다든가 하여튼 마시고 전부 다 마취상태에 있는데 자기는 안마시고 넣어 놓았는데 전부 다 쓰러져 있는 동안 옷을 벗겨버리고 자기들은 가서 음식먹고 희희낙낙 좋아하는데 그때 발가벗은 몸으로 튀어나와 손을 들고 차를 세우는데 누가 차를 세워 주겠어요. 다 미친여자로 생각하지! 그래서 차를 세워 자가용을 태워주는데 그래도 그분이 생각이 있는 분이어서 옷을 벗어줘서 몸을 가리고 “집이 어디냐?”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경찰서로 갑시다. 경찰서로 가서 경찰과 함께 그 장소로 갔더니 벌써 한사람이 탈출했기 때문에 전부 데리고 도망가 버렸더라. 도망가지 못하게 옷을 다 뺏어가지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행방불명 된 사람이 참으로 많다. 그러면 인신매매가 말로만 있던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진행되는 것을 볼 때에 보통 끔찍한 일이 아니예요. 조금 쉬었다가 그 다음 계속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천년기를 강의할 생각을 갖고 왔는데 오면서 좀 불안하고 무겁고 그래요. 어떻게 해야 바르고 잘 설명을 해서 확신있게 되도록 할까 그런걸 생각을 하니까 좀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주님이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시니까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속이죠. 기독론의 일부이고! 또 그가 구원을 완성하므로 인류역사를 종결하고 악을 심판하기 때문에 심판주로 오십니다. 악이 얼마나 크냐? 다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크고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이 됐느냐? 그것도 다 헤아리지 못하죠. 
이번에 7.7선언을 연구한 미국의 시카고 대학의 커밍스 교수의, 내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한겨레 신문에 요약된 것만 다 읽었습니다마는 미국무장관이 7.7선언을 했는데 7.7선언이 미국의 국력에 힘들고 또 너무 국력을 2차대전에 소모하기 힘들어서 보통 우리는 7.7.선언한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커밍스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사실 7.7선언을 해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하므로 북한과 소련으로 하여금 남침하게 할 때에 그들로 남침자라고 하는 낙인을 찍게 하므로 반공하게 하는 큰일을 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산업을 부흥시키게도 할 수 있기 때문에 7.7선언을 했다. 고도의 정책인 선언을 했다. 한 나라가 자기 나라 잘되기 위해서 한 나라를 전쟁의 불바다로 끌어 넣으면서, 한국을 구해준 은인인 것 처럼 나타났다고요. 정치라고 하는 것, 상상을 못할 일이죠. 베트남 전쟁도 사실은 미국 재벌들이 베트남 주변에 나는 유전이기 때문에 전쟁을 시발한 것이라 그런 이야기도 있고 그런 것 보면 인류 역사가 얼마나 악으로 진행됐는지 알 수 있는거죠.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서 어떻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까?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 어떻게 공평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악이 소제되지 않고야 이 땅에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거죠. 이건 잠정적인 평화이고 임시적인 평화이지 영속한 평화는 악의 제거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거죠. 그러니 구원의 완성이 악을 제거하고 심판하는 것은 구원의 완성의 다른 면이니까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가 육을 입으셨고 구원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역사의 주재자가 되시므로 그가 손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처리하는 일을 하시므로 그 영화에 크게 도달하게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손에 하나님께서 위탁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종말론도 다 그냥 역사가 진행되니까 끝에 가서 이렇게 종결된다. 그러니까 종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다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이룩하신 그 역사의 목표를 이루게 하시고 그리고 완성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이루기 위하여 악을 소제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올 수 밖에 없다. 사탄을 심판하는 일이 꼭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서 인류 역사에 진행되고 이루어졌던 그 큰 악들이 소제되고 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악이 얼마나 큰지는 우리는 다 알지는 못하는 거죠.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사는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보전의 역사로 그런거죠.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다 악의 용사들이 되서 다 한 몫을 단단히 할 수 있는 자들일 터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악이 마음껏 흥왕해서 땅과 역사를 민족을 멸망케 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재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역사가 진행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창조와 개발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구속된 백성만 포함되고 변화된 이 창조가 낙원의 표준에로 되돌아가는 그 수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신 이 창조의 개발, 창조, 요새 쉬운 말로 개발해서 나타나는 결과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선별되어 포함될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그때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이야 하나님이 우리는 계시는 줄 알지만,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시험이 들 때는 하나님이 계신가 하고 의심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담대히 악을 행해도 징벌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을 본다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 할 수 있는데, 종말에 가면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시고 악을 완전히 소제하셔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때 완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계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세대론에서는 주님의 재림 전에 특별한 징조들이 있는 것도 없다.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천년전기와 그리고 무천년의 교회 종말론에 의하면 주의 재림 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그후 이스라엘이 회심하는 일이 있고 큰 배도가 있고 전쟁과 환란이 있으며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라. 그와 같이 말하지마는 그러나 기근과 전쟁과 지진이 많이 생겨도 그것 가지고 바로 종말이다 말하기 어렵죠. 거대한 로마 나라가 4백 몇년에 망했을 때 정말 그 거대한 나라가 망할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라가 망하고 환란이 닥치면 곧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6.25,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자신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 자기 자신의 재림과를 이렇게 일치시킨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 종말의 시기를 계산해 낼 수 없다. 그것을 이시간에 확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는 알 수 있어도 징조는 분별할 수 있어도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유대주의의 묵시문학의 결론이지 그것이 성경적인 종말론은 아닙니다. 때를 계산하는 것, 유대주의 묵시문학의 일이예요.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결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주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돼서 마지막 피택자가 복음을 받을 때 그 때 주님이 오실 것이라. 그리고 주님 오실 때 쯤 해서 상당히 많은 창조의 가능성들이, 보화들이 개발될 것이라.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오시느냐? 그 날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밤에 도적이 온것처럼 오는 것 그 이상 저 분명하게 날짜를 계산할 수 없다. 주님이 오실 때에 그냥 보편적으로 오시지만 인격적으로 오시고 가시적으로 오시고 어느 일정한 시기에 오시고 그리고 장소에 오시고 그걸 모든 인류가 다 알게 돼죠. 그리고 예측할 수 없게 오실 것이라. 오실 때에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 그냥 오시지 않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라. 이 일을 심판주이시고 역사의 주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전에 반복해서 이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주님의 오심이 제일 처음에 성령강림 때 오셨습니다. 성령강림 때 인류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 때는 영으로 오셨고 영 안에서 인류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통치권 행사로 모든 인류에게 늘 오시고 지금도 가까이 오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역사적인 큰 사건들을 진행하시고 일을 이루실 때 인류에게 가까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넓게 더 편만해서 확실하게 주의 백성들이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이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심은 영적으로 오심이요 육체로! 초림 때 그 몸으로 오신게 아니죠. 이제 오시는 것은 영적으로 오시는게 아닙니다. 가견적으로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오심은 반복될 오심이 아니어서 한번 오심으로 모든 역사를 종결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이 마지막에 오시게 되면 육체로 인격적으로 가견적으로 만인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십니다. 성령강림 때 주님의 오심을 제자들은 성령 받은 분들은 다 알았습니다. 이미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주님이 인류 가까이 오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는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멸망 때 주님 친히 심판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셨던 것을 초대교회 교인들이 다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견적으로 육체로 인격적으로 오시는 예는 재림 때 오심이 마지막이고 이 재림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셔서 창조를 회복하시고 새인류를 완전히 만드셨어요. 구속을 완성하시고 그리고 악을 완전히 소제해 내시고 악의 근원자인 사탄을 완전히 인류세계에서 창조세계에서 제거해 내시고 그리고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셔서 새 창조를 만드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은 인류와 창조를 제시하시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새 인류에게 오셔서 풍만하게 완전하게 거하시고 그로 영광에 충만하게 돼서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에도 처음 낙원에서 2절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처음 낙원에 인류와 함께 계셨습니다. 낙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을 행사한 곳이 낙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하시고 거기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낙원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였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시 인류에게 오셨느냐? 완성하고 떠나신 건 아니지만 구약의 백성들에게 성전 성막에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백성들 가운데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쉐키나'라고 그러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계심은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한 곳에 부착해 계심이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심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계심이 임의로 철수할 수 있고 그리고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육신으로 한 육체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골로새서에 '플레로마'(πλήρωμα)로 표시했는데 하나님 자신이 혹은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그리스도의 육체안에 완전히 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성전으로 하나님의 충만을 완전히 가진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 있었고 그리고 그 몸에서 하나님의 죄사함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육체 나무와 돌로 지은 물리적인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성전을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 이후에 교회에 성령 강림 이루에 성령으로 인류에게 교회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계심은 보증으로 또 하나님의 종말에서 완전한 임재의 예배로 계심이었지 이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시는 방식으로 계심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하게 만유안에 만유가 되심은 종말에서 새인류에게, 그 때는 하나님이 우리중에 충만히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길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길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안에 완전히 전부가 되시는 그와 같은 때가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종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모든 질병가 고통과 죽음과 이런 것들이 다 소제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충만히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있게 됐습니다. 그 때는 죄가 완전히 제거됨으로 하나님의 거룩이 충만해져서 모든 곳이 다 하나님 임재의 처소입니다. 스가랴에 써있는 그대로 말발굽에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고 써붙히듯 완전히 모든 세상이 다 거룩한 세상이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 천년왕국,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 그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 재림하고 천년기하고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 재림, 부활, 심판, 전통적인 종말론에 의하면 주님의 한번 재림으로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부활하고 그리고 모든 인류가 선악간에 다 심판을 받고 그리고 정화가 이루어지고 새롭게 되는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신천신지가 도입된다. 그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론적인 도식입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천년기를 칼리아즘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킬리아가 천이니까 킬리아 킬리아즘에서 처년기론이 나왔습니다. 킬리아즘은 소위 전통적인 역사적 천년기라. 주님의 재림이 천년기와 어떻게 연관이 있느냐에 따라서 무천년론, 역사적인 천년기, 후천년론, 세대론, 그런데 그 전에는 킬리아즘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세대론이 성하고 부터는 밀레니아즘으로 용어가 바뀌었습니다. 밀레가 천 아닙니까? 전통적으로 킬레니아즘에 의하면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천년에 지상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가 시작된다. 그와 같은 나라가 세워진다.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년의 지복의 때가 시작된다. 천년재림 전에 일어나기 때문에 밀레니아즘, 프리 밀레니아리즘 천년기 전에 재림이 있다. 
다음 후천년기론은 정확하게는 최근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교회 천년기라 그럽니다. 말이 좀 생소한 모양인데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동로마제국 막센치우스를 쳐부수고 로마의 통일된 황제가,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을 했습니다. 313년에! 그 때부터 핍박받던 교회가 공인됐습니다. 313년이 기독교 공인 해 아닙니까? 그리고 콘스탄틴이 서방에서 자기 아버지와 군대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됐습니다. 선언됐습니다. 동방에 다스리는 황제가 막센치우스 입니다. 막센치우스가 너무 핍박을 많이 하니까 콘스탄탄에게 청원을 했어요. 이걸 좀 해방시켜 달라. 군대를 몰고 막센치우스를 펴부수러 왔습니다. 티벨강가에서 3번 싸웠는데 마지막 싸우기 직전에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았는데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네가 십자가의 기호로 대적을 쳐부수라”하는 환상을 보고 모든 칼과 방패에다 십자가 기호를 붙이고 막센치우스와 싸워서 쳐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막센치우스를 티벨강에다 수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된 황제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이제 핍박과 압제와 순교의 교회가 지하에 있던 교회가 드러나서 옛날에 이방종교가 왕노릇하던 자리에 교회가 올라섰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고 그리고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교회가 사람들을 칼의 권세로라도 다 교회에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 말을 어거스틴도 강력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 나가는 자들은 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도나스티스트가 분립해서 나갈 때도 어거스틴이 그렇게 극력 반대하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칼의 권세를 동원해서라도 모두를 다 교회 안으로 들여야 된다. 그 때부터서 보통 13세기까지를 소위 교회의 천년기라 그럽니다. 이 기간에 교회가 평화를 누리고 복음이 널리 번창해 나갔기 때문에 이 때가 요한계시록이 말한 천년기 기간이라. 어거스틴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기 말년에는 벌써 반달족에 의해서 히포성이 유린당하고 그러니까 무장을 하고 그들과 싸웠지요. 이 천년기간에도 교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속의 권세가 성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한가지 유익한 것은 이 험악한 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선포됐다. 화란의 유명한 우빙크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조그마한 책을 하나 썼어요. “기독교 세계와 정치”라. 거기에서 이 기간에 천년기라고 할 수 있지만 평화의 때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때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느냐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보다 더 늘여서 1789년 불란서 혁명으로 교회가 완전히 배척당한 그 때까지가 천년기라 그렇게 주장을 하기도 해 왔습니다. 이 기간이 천년기라. 그래서 이 전통이 남아가지고 천년후기에 의하면 복음의 권세가 넓게 퍼지므로 그 복음이 모든 민족들 국가의 생활에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세력에 대해서 복음의 도가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악이 완전히 극도로 쇠퇴해져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재림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들의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므로 그 때에 의와 평화의 번영의 때가 천년간 있을 것이라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것이 천년후기이지요. 그런데, 천년후기가 맞아들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 다시 중공이 복음을 전할 수 있을만큼 조금씩 문을 개방을 하고 그렇기는 하지마는 그냥 그것 때문에 우리 너무 성급하게 해서 이젠 다 복음이 완전히 다 열릴만큼 전달될 만큼 전달되고 그렇게 되면 중공과 소련이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면 이제는 다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불행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인구가 해년마다 줍니다. 아프리카 지역은 거의가 기독교 세력에서 식민지된 나라여서 지금 매년 기독교 세력 영역들이 줄어들고 회교도 세력들이 늘어납니다. 중동지역도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 남미와 북미 구라파 이 지역들이 기독교가 많이 늘어나는 것 같아도 실질적으로는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명맥이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데는 카나다와 미국 정도이고 구라파도 복음의 권세에서 거의 대부분이 이탈해 있다 해야 맞을 것입니다. 내가 암스텔담에서 영국에서 온 옥스포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암스텔담에 온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도 영국 국교에 속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카톨릭과 개신교는 성한데 영국 국교는 되질 않는다 그래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전에 영국의 기독교 인구가 10% 이하로 떨어지니까 영국의 복음화... 
구라파가 학문이 발달할 수 있도록 횃불을 옮겨준 곳이고 그리고 복음을 대륙으로 전달하는데 큰 몫을 한 영국인데 이 영국의 개신교 인구가 5백만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한국의 인구보다 적어요. 그것도 잘 믿는 크리스챤이라 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독일도 마찬가지! 정말 개신교 복음주의로 설교하는 데를 제외하고는 황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낮예배는 그렇게 천 명씩 모이는 데가 저녁예배는 5백명이 모이면 많이 모이고 한 2,3천 명 형태로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국이 1세대를 한 삼십년 지나면 지금처럼 많이 모일까? 그 때는 분명히 복지정책이 많이 도입되어서 보편화 될터인데 잘먹고 잘사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 부르짖으러 갑니까? 목사님들도 어렵고 개척교회 시작할 때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교회가 어느정도 부흥해서 한 5백명 정도 되면 뭐 산기도 잘 가시던가요? 설교 지으러 가지요. 기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 지으러 가요. 산에는 가지만 그전처럼 그냥 붙들고 울며 기도하기 보다는 설교 지으러 조용한 자리 찾아 가지요. 
그런데, 천년후기론에 의하면 이제 이것이 진화론과 연결된 부분이 있습니다만은 복음이 주님 재림 전에 편만해져서 온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다. 그때 그 기간이 한 천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 천년 하지만은 전통적으로 천년이 일치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천년기가 4백년에서 7백년 혹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천년, 벵겔은 심지어 천년의 두 배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천년전기론의 이야기입니다만은! 자, 이렇게 갈수록 악이 성해지고 배도가 심해지는데 주님 재림 전에 천년기간에 복음이 온 세상을 뒤덮어서 이렇게 될 때 미국교회는 그렇게 될 줄 믿고 사회복음주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모든 생활 영역이 다 복음화 되었는데 정치와 경제 영역만 복음화 되면 완전히 복음화 되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윌터 라이센부시가 이 사회복음주의를 열심히 부르짖었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세상이 어려워지고 복음의 도가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 앞으로 천년기에 복음의 역사가 크게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죠. 차라리 교회 종말론, 교회 천년기론, 중세를 지나서 13세기까지가 그런 때라 한다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가면은 역사적 천년기(세대론), 저도 말씀 드렸습니다만은 역사적 천년전기론하고 세대론하고 몇가지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제외하고는 내 눈에 둘 간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여졌어요. 그런데 역사적 천년전기 하고 세대론은 미국에 가서 미국판 천년기론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습니다.그것이 이제 달비에 의해서 미국에 심기워지고 그 다음에 불랙스톤, 또 그전에 브룩스, 또 불랙스톤, 그 다음에 게벨라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게벨라인, 그 다음에 스페리취퍼, 이런 사람들이 천년기론의 세대론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그것을 널리 보편화 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은 스코필드의 관주성경, 그 책이 미국으로 하여금 천년기론에 있어서 세대론이 되게한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천년기는 한가지 면에 뚜렷한 차이를 낸다면 세대론하고, 한 두가지 역사적 천년기론은 세대론과의 뚜렷한 차이는 7세대로 나누는 것을 하지 않는 면에서 역사적 천년기론하고 다르고 그 다음에 7년 환난을 세대론은 교회가 통과하지 않고 7년 환난 되기 전에 주님이 오셔서 휴거해서 하늘로 가고 교회가 지상에 없을 때 7년 환난이 이 땅에 임한다. 그런데 비해서 역사적 천년기는 교회가 환난기를 통과한 후에 주님이 오신다.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차이가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다윗 왕국을 세우십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이 다윗 왕국, 메시야 왕국은 예수님 초림 때 세울려고 하셨는데 이들이 메시야의 왕국에 이 호의의 제공을 거부하므로 할 수 없이 그 때에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재림 때로 연기했다가 재림 때 오셔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왕노릇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그와 같은 다윗 왕국을 세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점은 세대론에 의하면은 교회는 휴거되어서 영원히 천국에 있고 지상에는 영원히 이스라엘이 다스려요. 이것도 문제지요. 그러니까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어린양의 제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약속은 메시야의 왕국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 왕국을 백성들이 배척하므로 메시야 왕국을 세울 수 없고 재림 때로 연기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섭리를 이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해방해서 왕되게 하는 세상적인 지상적인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때까지 모든 인류역사에 역사하신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을 불러가지고 민족을 삼으시고 이렇게 인도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다스리게 하실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하게 하고 그 백성에게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가 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했는데 이 백성을 두었는데 세대론이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왕국의 설립을 위해서 처음에 오시니 것입니다. 그러니 천년기론 특별히 세대론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그 근본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데 첫째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어요. 아직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 세워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세우십니다. 지금 현상에는 역사적인 천년전기하고 세대론이 공통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복음은 왜 선포하느냐? 복음의 선포는 그들로 하여금 다 구원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려는 목적 보다는 복음을 증거하므로, 복음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게 하는 구실을 준다. 그리고 이 복음을 통해서 이미 택한 자들을 불러 들여요. 그것이지 목음 자체가 이들을 구원해 내는 역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기론에 의하면 대대적인 인류의 구원과 회심은 천년기 때 이루어진다. 천년기 때! 그것도 하나님의 경륜에 배척되는 것이 바울이 로마서 1:16,17절에서 말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이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에 권세인데 복음이 유대인과 첫째는 유대이이고 헬라인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전체 믿는 자에게 여기에 보면 판티(παντι)를 썼어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그런데 복음 선포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민족들에게 심판에 이르게 하는 증거로 제시되어 저도 어렸을 적에 이런 것들만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저 시골에서 장로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가서 하루 저녁 하라고 해서 수요일날 설교를 했어요. 들어온 것이 심판 뿐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라는 것은 잘 몰라요. 그래서 열심히 심판만 선전을 했습니다. 심판, 심판... 그러니까 젊은 청년들이 듣다가 획 나가버려요. 그리고 점점 더 갈수록 세상이 완악해지고 악이 성하고 배도가 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불신앙이 성해져서 배도가 심해져요. 배도가 심해지고 그럴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오셔서 어떻게 하시느냐? 메시야 왕국을 세워요. 초림 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을 세워요.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갖고 모든 민족들을 이스라엘을 섬기는 종주국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에 있게 되고 여기에도 견해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직접 다스리는 경우가 있고 메시야 왕국만 세워놓고 다시 하늘로 가셔요.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때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세웠을 때에 구약의 제사와 절기와 법도들이 다시 회복되어요. 그래서 희생의 제사를 다시 드립니다. 이것은 세대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천년전기도 마찬가지로 주장해요.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제사가 집행된다. 이것도 근본적으로 끝에는 수정을 해서 좋은 것 같아도 이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한 유일한 희생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어요.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이 완전한 제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몽학선생 역할을 한 것이예요. 율법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윤리적인 율법만 아니라 의식법도 다 백성들의 눈을 들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완전하게 희생을 이룬 이 희생을 가르치기 위한 훈련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가 구약의 제사들을 그림자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제사를 실체라고 했어요. 실체가 와서 완전히 구원이 성취되었는데 그림자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인데 이 구원으로 인해서 이 십자가 희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훼파하셨는데 다시 피제사로 복귀해요. 피제사를!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제사들을 이것을 다시 다 복귀해요. 그래서 제사를 드려요. 그렇게 되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양들과 소들을 골라서 예루살렘으로 로켓트에 실어서 보내게 될 것이고 제일 좋은 건포도와 건무화과들을 그리고 또 한국에서도 나는 농약에 의해서 기르지 않은 좋은 소, 한국 소 맛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예루살렘에 가서 잡으면 예루살렘에 힌놈의 골짜기와 같은 더러운 것이 생길 것이니까 여기서 다 잡아가지고 등심 부분, 안심 부분을 로케트에 실어서 즉각 쏘아 올려서 예루살렘에 보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고기 많이 먹으면 입가심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커피 많이 마시는데 그 커피도 좋지만은 그 수박, 수박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 나라의 모든 수박이 많지만은 즉 서리 내릴 때 난다는 무등산 수박 얼마나 좋아요. 다 썰어버리고 속만 해가지고 잘 포장을 해서 로케트에 실어서 예루살렘으로 쏘아 보내면 거기서 내려가지고 다 분배를 해서 우리는 가면 그 맛있는 양고기와 쇠고기 잘 익힌 것, 그리고 건포도, 건무화과, 수박 한점씩 받아 먹게 되고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대론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년전기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해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나라가 세워졌을 때 치제사가 다시 복귀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그 수상이 누가 됩니까? 국무총리! 바울 사도가 수상이 돼요. 수상까지 다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관이 되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천년전기를 마치기를 바랍니다. 
제 8 강 
(살전 4:13-5:2)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 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지난 시간에 천년전기 중에서 세대론과 역사적 천년전기와 공통점을 이야기 하다가 다 못하고 중단을 했습니다. 이제 제일 주의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는 분들이 소위 천년전기의 종말론을 취한 분들이고 또 그중에도 특히 미국의 천년전기인 세대론을 주창하는 분들이 가장 열심히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에 대해 비판을 하기 전에 우선 천년기 내용을 이야기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천년전기론에 의하면 전에는 후천년설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천년기론으로 역사적인 천년기론을 지시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후천년설이 또 있기 때문에 천년전기란 말이 확실하게 지목이 되었습니다. 천년전기는 혹은 역사적 천년기 혹은 그냥 천년기론은 이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는 초대교회 특히 2세기 때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제일 유명한 2세기 중엽의 변증가인 저스틴, 저스틴이 천년기 비슷한 이야기를 주장을 했고 또, 파피아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가장 발달된 체계로 천년기를 주창한 사람은 2세기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 였습니다. 이레니우스 였고 그 후에 터툴리안도 천년기를 주장한 사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 천년기를 주장한 사람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기부터 주장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천년기론자들은 천년기가 가장 오래된 교회의 종말론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 때는 아직 정식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확정되지 못할 때입니다. 그리고 온갖 이론이 참으로 많았을 때죠. 아직 교회가 천년기에 관해서 까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내용들을 숙고해서 신조형식으로 믿음의 고백으로 믿음의 조목으로 결정할 만큼은 아직 못됐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천년기를 가장 비판하기 시작한 사람이 3세기의 오리게네스였고 그리고 천년기론을 교회에서 완전히 추방한 사람이 4세기 중엽서부터 5세기 초엽까지 살았던 소위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중에 교부라고 할 아우구스티누스 였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천년기론을 주창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 천년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단지 소수의 보수파들에게 가령 도나티스트라든지 몬타누스주의파, 몬타누스주의자 오래 못갔지만 이런 파들에게 두 파들에게 조금씩 남아 있었고 16세기에 들어와서 재세례파에 의해서 이 천년기가 다시 수납되기 시작했습니다마는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아 이것들을 이단으로 배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소위 달비에 의해서 이 이론이 체계화 되기 시작한 후로 전세계의 복음주의 교회에 세대론이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바른 견해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고 한국교회도 백년동안 세대론적 천년종말도식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 아니면 다른 것들은 이단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히도 공교히가 종말론에 관해서 도식을 신앙고백 신경으로 결정할 때에 다 전통적인 주의 재림, 한번의 재림, 한번의 부활,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며 이 종말도식이 교회의 표준적인 종말도식으로 정식 수납 채택되었고 종교개혁 때도 이 종말도식이 교회의 가장 바른 신앙으로 수납되고 채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렇게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성경에 드러나있는 여러가지 계시록에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천년전기 특히 세대론이 성하게 되었습니다. 
달비가 이 천년전기를 세우고 또 어빙파도 세우고 그리고 또 재림제칠일안식교도 이것을 열렬히 받아들여서 특히 그 교단의 교파에서 여선지자라고 할 실질적인 창시자 엘렌 G 화이트 여사가 아주 이 이론을 강력하게 주창을 해서 안식교회 퍼짐과 함께 세대론의 퍼짐도 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달비 이후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블랙스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블랙스톤 그전엔 브룩스 또 지금도 생존해 있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성서사전의 편집자로 있는 게벨라인 있지만 또 스페리체이프 또 우리나라에 설교논문으로 소개했는데 윌우드 또 ( )신학교 교장으로 메킨타이어, 미국에서도 소위 ( )신학교 메킨타이어가 지금 교장인데 메킨타이어가 그 교단 긜고 달라스 신학교와 그 계통 또 많은 침례교회들이 다 세대론을 주창하고 가장 바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계속해서 아, 그리고 최근에 제일 영향력있게 전세계적으로 세대론을 많이 번창시킨 사람은 홀린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특히 예루살렘의 정복 이후에 더욱 크세 이 세대론적인 도식을 널리널리 주창하고 퍼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구라파만 아니라 동아시아, 구라파의 복음주의 교인들에게도 상당히 홀린세이의 세대론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천년전기와 현대 천년기론인 세대론, 역사적인 천년전기는 아마 대변인이 이레니우스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천년기론에 의하면 세대론이든지 역사적인 천년전기든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 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는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냐면 왕 없이 나라는 성립하지 않는다. No Kingdom without king. 지금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을 왕으로 다스리지 않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니까 현 역사 진행상 왕 없이 하나님 나라는 성립하지도 않고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 그러냐? 주님 오셔서 메시야 왕국을 세울 때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 그러면 복음은 뭣하는거냐? 복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믿게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파될 그와 같은 역사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도 증거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증거하라 그래서 모든 민족들에게 이와 같은 복음의 도가 있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의 수단이 이제 꼭 모든 사람들을 다 예수 믿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 백성이 되게하는 그와 같은 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복음선포라 그러면 증거만 되고 예수 믿게 하는 일은 없느냐? 택한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역할은 한다. 대부분의 천년기론자들 세대론자들의 설교에는 그러니까 이 복음의 도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때 이것이 심판의 구실을 하는 정죄꺼리로만 항상 선포되는 일을 해요. 
그 다음, 복음이 실질적으로 증거놀음만 하기 때문에 사람의 일부 택한 백성만 모아 들이는 일을 하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주님이 오셔서 천년기간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 이방인들이 대거 하나님 나라에 편입할 것이니까 지금 꼭 구태여 선교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거죠. 그러니 이 복음의 도가 가서 개인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도 변화시키고 애쓸 필요가 없는거죠. 지금 우리 한국사회도 예수 믿는 교회는 많이 늘어나도 이 사회를 바꾸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별 필요가 없는거죠. 우리야 천국갈 사람들이니, 교회안에 방주 안에만 들어오면 되고, 또 밖에야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가 수천명씩, 수만명씩 늘어나는 교회가 많아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 의해서 그가 사는 사회가 복음의 권세에 변화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이 세대론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한국교회에 아직도 많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의 도가 전파는 되고 증거의 목적으로 전파는 되고 또 그 증거를 통해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 전체를 변화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갈수록 세상이 악해진다. 그건 인정하고 그리고 그 면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도식인 무천년론과 마찬가지죠. 악이 점점 무성해진다. 주님 재림전에! 그런데 이 악이 극단화 되어서 환란이 임한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그것에 대해서 역사적 천년전기하고 세대론하고 구분됩니다. 거기까지만 하구요, 그 다음에 악이 점점 배도의 때가 온다고 합니다. 마침내 악이 점점 성해지고 그래서 마침내 전반적인 보편적인 배고가 이루어질 것이라. 그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종말도식에 의해서도 이 일이 바른 것으로 인정이 되고 고백되어 왔습니다. 점점 더 역사의 악이 심해질수록 심해지기 때문에 저 악이 성해지고 또 우리가 계산불능으로 항상 더 심한 악들이 진행되는거죠. 또 항상 정치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마성이 들어있어요. 마성! 사탄적인 세력이 들어 있다고요. 권세는! 그러니까 이 권세 가진 자들이 못하는게 없는거죠. 그리고 현대에 와서 갈수록 민주화 되니까 권력들이 더 약화될 것 같아도 민주화는 되면서도 권력은 더 강해지고 어느 나라든지 강력해졌습니다. 그래 레이건이 8년간 집권하면서 루즈벨트, 프랭크 루즈밸트 이전에 연방정부 형태로 가능한 축소시켜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할려고 하는 그와 같은 시도로 그가 정권을 잡고 일을 했지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권력이 선과 악을 결정하고 또 진실과 허위도 결정하는 때가 됐기 때문에 이 악이 권력을 잡고 못할게 없습니다. 그러니 요새 전두환씨 국회 와서 청문회 증언하다고 그러니까 전두환씨가! 그러고 보니 지금도 전두환씨가 머리가 좋은 것 같애요. 그렇게 어려움 당하고 있으면서도 6.29선언 네가 했다고 네가 왕노릇하고 날 골탕먹일려고 그러는데 그건 내가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네가 대통령 된 것 다 내가 정치자금 얻어가지고 해서 했지 뭐 네가 했느냐? 한번 해봐라. 신문에 퍼트리니까 전대통령 전전대통령, 국회 청문회에 나가지 않도록 지시를 내리지 않았어요? 지금 조용하게 별일 없이 진행된 것 같아도 권력을 잡으면 못할 것이 없어집니다. 지지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좀 곁길로 갔습니다만 이 정치권력에 의한 악의 진행! 이건 보통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항상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음에 악이 이렇게 배도가 심해질 때에 주님이 오신다. 그런데 언제 오시느냐? 오시는 것은 항상 임박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어떤 징조들이 진행되고서 주님이 오신다고 하는 그와 같은 징조를 전혀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문밖에 서 계셔서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도록 그와 같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주님 재림전에 이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서 이미 재림이 가까이 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언제든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 있다. 그 다음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을 그것은 주님이 오시되 공중에 오시고 공중까지만 오시고, 또 비밀리에 오시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걸 아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성도들과 그리고 이미 죽은 성도들 뿐이라. 그래서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에 공중재림 그때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서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뵙는다. 그것이 휴거입니다. 이때 오심을, 오심은 비밀리에 오심이어서 여기 파루시아를 붙여요. 천년기론에 의하면 주님이 공중에 오심이 파루시아다. 파루시아란 말은 웃시아, 계심, 파라 옆에,파루시아란 마른 성경에 재림이라 쓰여지지 않고 파루시아로 되어 있는데 이 본래 파루시아의 뜻이 오셔서 함께 계심을 말해요. 본래 파루시아의 뜻은 하나님의 도래에 파루시아를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써 하나님으로 이렇게 단번에 오실 때 파루시아로 씁니다. 비밀리에 오시죠. 휴거라! 그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해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맞으러 하늘로 올라가는데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그걸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찾고 다니는거죠. 남편은 아내를 찾고 다니고 아들들은 어머니를 찾고 다니고 찾고 다니는 일이 많아요. 
다음 공중휴거가 끝나면 세대론에 가면 7년동안 혼인잔치가 있죠. 저도 어려서 주일학교 다닐 적에 이 세대론의 종말도식을 노래로 해가지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노래를 그치게 되냐면 특히 이성봉 목사님이 전국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하시고 말라빠진 교리만 붙들고 있고 예수 생명 없다고 하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고요. 그런데 조동진 목사님의 부친되시는 조현성 장로님이 옛날에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이제 장로가 되신 후에 전도사가 되어가지고 열심히 시골로 다니시며 전도를 하셨는데 저희 모교회에도 오셔서 전도사님으로 일을 하셨어요. 그때 들어보니까 성결교 노래 말라빠진 교리만 붙들고 예수님 없는 노래 부르니까 주일학교 다닐 때 당장 돌아다니며 이 노래 부르면 안된다. 부르지 마라. 딱 엄명을 내리시니까 그때부터 저희들은 안부르게 됐고 그전에는 하여튼 7년환란이 오기전에 나는 간다라든지 그런 노래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제 휴거후에 주님이 땅에 재림하셨을 때가 진짜 재림인데 그때 7년환란이 닥치는데 환란전이나 환란기간에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옵니다. 이 천년기론에 의하면 환란전이나 환란기간에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 그후에 재림, 여기에 휴거 때 첫번 휴거 있지요. 주님 이 땅에 내려 오실 때 그 때에 내려오시게 되면 불신자나 신자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고 그때에 주님 재림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의 메시야를 보고 전체적으로 회심을 해서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이 오실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서 부터서 수백년동안 그렇게도 간절히 그 메시야가 그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자기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민족적 회심기,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이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 환란기간에 살해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 때는 주로 부활에 이를 자들은 불신 이방인들 중에서 뽑아온 자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유대 백성들 중에서 이 환란 기간동안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재림과 동시에 또 적그리스도가 그의 세력을 아마겟돈 전쟁에서 쳐부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건국자들 특히 벤구리온 같은 사람도 아마겟돈 전쟁이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만만이라고 돼있잖아요? 이만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 수 있는 나라는 어디냐? 11억이 되는 중공일 것이다. 오늘 그렇게 얘기하죠. 2억의 군대를 몰고와서 아마겟돈에서 전쟁을 한다. 이 아마겟돈이 어딥니까? 그러니까 소위 요시아왕이 애굽의 느보가 바벨론을 치기 위해서 갈그미스로 올라왔을 때 요시아가 와서 막았다. 그 자리가 아마겟돈 입니다. 그 땅에 2억이 모여서 전쟁을 한다. 밴구리온과 초대 이스라엘의 건국자들도 합당하지 못할 걸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대적을 쳐부순다. 주의 재림 때! 그리고 메시야 왕국을 이때 설립을 합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그리고 여기서 추상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워서 전세계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때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내각에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바울사도가 일부 세대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사도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특별한 위치를 갖고 특권적인 자리에 처하며 이방족속들은 종속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라. 물론 이전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휴거 때! 성도들에게 심판이 행해지는데 이때는 이미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상급에 이를 자들이므로 이들은 상급을 받죠. 휴거 때! 그리고 재림하시므로 적그리스도를 멸할 뿐만 아니라 이방족속들을 심판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메시야 왕국을 세우면 전체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의와 평화와 번영의 때가 전세계적으로 진행됩니다. 완전히 악이 제거된 건 아니지만 그러나 의가 지배를 하고 죄와 죽음이 역사해도 전세계적으로 생명이 지배를 해서 백살에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로 죽는 것 같은 일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제도와 경절들과 절기들 이러한 것들이 다시 회복됩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져서 거기서 양과 소로 드리는 피제사가 복귀됩니다. 제단에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중단됐던 제사가 다시 복귀되서 피제사가 있게 되고 이때 다시 이 피제사는 단지 옛날의 제사만 지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제사로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피제사가 복귀된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유대인을 위한 이스라엘 나라죠. 메시야 왕국이기 때문에 옛날 다윗 왕 때 진행됐던 그와 같은 나라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때 오실 메시야는 다시 살아온 메시야라. 다윗이 다시 다스리는거죠. 다윗의 왕권이 정식으로 시작돼서 천년간 진행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와 같이 저주가 자연에서 제거되니까 말할 수 없이 풍성한 생산을 넘치게 해서 풍요가 넘치게 되어 굶주림과 고통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짐승들도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그 악한 성질이 생겼기 때문에 짐승의 악한 성질들이 맹수들에서 탈취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어린아이가 독사 구멍에... 
오늘 세대론의 도식을 다 비판한 것을 다음에 다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천년기가 특히 세대론이 기독교에, 기독교 신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유대주의, 다 비판할 때 다 이 면을 말씀드리려 합니다마는 유대주의가 교회에 들어온 것이지 기독교 신학에 성경에 관한 귀결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신 것이 전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정치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경륜에 있어서 마련하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세계를 구원하심이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한 민족으로 존속하게 하심은 바로 이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게 하는 준비로 그 모태로 태반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 존재의 목적이 있게 하신 것이지 세상적인 영화를 보는 그 나라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헤드린 공회로 부터 심문받아서 배척받은 근본이유도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이 성립할려면 이 유대교의 산고방식이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메시야 왕국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강력한 철권정치아래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을 가져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메시야 주장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헤드린 공회에 보면 예수가 죽은 죄목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참람죄 때문에 죽은 걸로 돼있는데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죄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 예수 일대기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보셨겠죠. 왕중 왕 그 영화는 아니고 내가 고난주간에 본 그 영화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의가 예수를 심문할 때에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하는 죄목 갖고도 성립하지 않으니까 마침내 대제사장이 일어났다. 그때 안소니 퀸이 대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안소니 퀸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 찬송받을 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니까 ‘내가 그라’ 그러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제사장의 옷을 찢으면서 참람하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살려줄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죄목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죄목이지만 그 말 했다고 예수가 죽은게 아닙니다. 그 말 했어도 그 말과 함께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서 메시야 왕국만 선포했으면 죽지 않습니다. 메시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에 해방이 없는 것을 유대교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메시야가 오면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메시야이든지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써 메시야이든지 메시야가 오면은 이스라엘이 그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메시야 왕국을 세우고 전세계를 지배하는 그와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있어서 로마나 유대나라나 동일하게 추구하는 것은 정책이 목표였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 이 속죄를 선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배척받고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될 것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기 위한 모태로써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소명되고 조성됐고 유지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해서 메시야 사역을 다 이루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는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물론 정치적인 단위는 아니었지만 민족적 단위로 존속할 이유가 더이상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디도 장군의 손을 통해서 예루살렘성을 다 헐고 그 이후에 또 135년 바 코크바 전쟁 때 바 코크바가 메시야로 추대됐습니다. 그때 한낱 랍비로 그 마지막 봉기를 한게 아니예요. 메시야로 추대돼 가지고 로마에 대해서 항쟁을 한 것입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서 전부 다 쓸어내 버리게 하셨습니다. 특히 더이상 민족적 단위로도 존속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조성하시고 유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에게서 메시야가 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피흘려 모든 세상을 구속하시게 됐기 때문에 더이상 이스라엘이 존속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척받아 죽으시게 되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그렇다고 그냥 가실 수 없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는 간주곡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세대론에 이하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알지 못하는 그런 실체였습니다. 구약에 교회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도 대부분까지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가 율법시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까지가 율법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교회가 세워지기 이후부터가 은혜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이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왕국이 해당되는 책부분이고 실질적으로 복음서 중에서 일부분만이 교회에 타당합니다. 그런데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것과 같은 간주곡입니다. 그냥 가실 수 없으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을 대신 세워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표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목표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이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목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시대는 완전히 율법으로만 구원에 이르고 은혜시대만이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나오는 산상수훈의 그 법도들도 지금 신약의 교회에 타당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 왕국 때에 타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간은 은혜의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만 완전히 은혜의 도로 구원에 이르고 율법은 성도들의 신자들의 생활규범으로 아무런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에 이르지만 율법은 구원얻은 백성의 생활규범인 세대론에 의하면 전적으로 율법은 구원얻은 백성의 생활규범인 세대론에 의하면 전적으로 율법은 지금 신약, 은혜의 시대에는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승천하셨죠. 이 교회기간에는 하나님의 그 소위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주가 중단됩니다. 계산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메시야가 지상에 없기 때문에 승천 때 부터서 재림 휴거하는 비밀리에 오시는 그때까지 그 기간이 70주 계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휴거 때 부터 다시 70주가 시작돼요. 그 기간에는 메시야가 안계시니까 시간계산이 안된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뉴욕에서 콜로라도 덴보까지 가는데 오새 그 한동안 달라스가 성할 때는 텍사스가 유명했는데 지금은 다이제스트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다이제스트에 나옵니까? AFKN에! 다이제스트에는 콜로라도 덴보가 주 활동무대 아닙니까? 뉴욕에서 덴보까지 가는데 길이가 얼마냐? 70마일이라. 70마일을 다가도 덴보가 안나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된 것이냐? 그런게 아니고 앞으로 2,000마일을 더 가야 되는데 70마일은 덴보에서 ( )산에서 70마일을 말하는 것이고 그 선에는 2,000마일이 더 들어있다. 그런식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이 계산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주가 주님이 승천해 가시고 난 후에는 메시야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연대계산이 시간의 달력에 70주가 중단해요. 그러다가 하늘 휴거 때 그때 다시 70주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대론에 의하면 전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세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기 위해서 왔다. 그때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양으로 오셨고 속죄의 죽음을 말하고 은혜로 구원얻음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대에 배치된다. 그러니까 그를 죽도록 하죠. 
율법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의 세력이 영위될 때만 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는 그 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데 은혜의 복음으로 백성을 자기에게로 돌이키면 자기들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가야바의 장인, 한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모든 백성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배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간주곡이라 삽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함께 포함한 이 보편한 인류 새인류를 목표하셨지 이스라엘만 목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특권층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방인과 꼭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러 갈 자들이지 별다른 특권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오시는데 몰래 오셔요. 몰래오시기 때문에 아는 자들이 신자들, 살아있는 신자들하고, 공중에 오시면은 비밀리에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알 자들이 없어요. 그래서 신자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신도들이 변형돼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때부터 어린양과 신부와의 혼인잔치가 시작됩니다. 이 시간이 7년기간입니다. 이건 공중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때에 대환란이 시작됩니다. 왜 환란이 시작되느냐? 세대론자의 설명에 의하면 로케트를 운전하던 운전사도 주님 맞으러 공중으로 가버리고, 비행기를 내버리고, 운전하던 운전사도 운전하다가는 변화되어 하늘로 가버리고, 지하철 운전사도 운전하다 말고 다 공중으로 가니까 그냥 북경에서 이루어지는 혼란 정도가 아니고 대회적인 혼란이 진행되는거죠. 그래서 그냥 비행기가 떨어지고 로케트가 떨어지고 그러니까 세상이 뒤죽박죽 시작하는게 그때 이때부터 환란이 시작되는데 이 환란전에 혹은 환란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이 전세계에서 자기의 본토로 돌아오는데 이때에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이 연합을 맺습니다. 그래가지고 잘 지내다가 그것이 3년 반입니다. 지나다가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미혹하게 됨으로 대환란이 시작됩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환란을 당해서 환란 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환란기간에 이것도 왔다갔다 말이 많은데 이 환란기간에 유대인들이 144,000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복음을 선포합니다. 빠졌는데 이때 교회가 하늘로 휴거하면 성령도, 교회안에 계신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늘로 가시기 때문에 지상에는 성령이 완전히 철수해 버립니다. 그런데 144,000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복음을 선포해요. 그런데 이 왕국복음을 받아들인다. 성령이 계시지 않아도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왕국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령의 역사 없이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신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이 십자가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의 왕국복음을 선포해요. 메시야 왕국! 그래 두 복음이 있다고요. 십자가의 피의 복음, 은혜의 복음하고 그리고 왕국복음 두 복음이 있어요. 여기도 어쨌든 문제가 있는 것이 이제 이것도 의견이 나뉘는데 교회는 하늘로 가서 영구히 하늘에 있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지상에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둘이 별개의 두 백성으로 남아요. 이 7년 환란후에 대대적인 살해와 어려움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7년 환란후에 주님이 지상으로 내려 오시는데 그 중에는 계시라. 왜? 주님이 오심을 다 알게 되기 때문이죠. 이 7년 기간동안에 두 여인이 맷돌을 갈다가 한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고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고 그러니까 참 생각해보면 구구절절 맞는데가 많아요. 안그렇습니까? 그러니 휴거 후에 교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경건한 교회는 대다수의 성도들이 안보이는데 일부만 있다. 경건하지 못한 교회는 몇몇 사람들만 자리가 비고 대부분 그대로 모여 있어요. 목사님도 나아가서 그 사람들을 찾습니다. 사방으로 찾으러 다녀요. 아버지도 가서 자기 아내를 찾으러 다녀요. 아이들도 어머니를 찾으러 다닙니다. 누나를 찾으러 다닙니다. 오빠를 찾으로 다닙니다. 그래도 만나지를 못하는거죠. 그래 대소동이 나는거죠. 그러다 얼마만큼 지나서는 다시 채워져요. 그 자리가 다시 도로 채워지고 없는대로 살까? 잘한 사람은 혹시 그 기간에 재혼할 수도 있지마는 그대로 또 사는거죠. 그리고 오실 때에 천사들과 함께 오시고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오시고 천사장의 나팔로 오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때 오신 메시야를 바라보고 자기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입니다. 메시야를 보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메시야가 오신 것을 보고 그 영광에 의해 압도돼서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법은 꼭 십자가의 피의 복음만이 아니죠. 세대론은 7세대 나누고 8번 언약으로 해가지고 언약으로 해서 나누기 때문에 그 세대마다 다 구원얻는 길이 다른데 굳이 예수믿어야 구원얻는게 아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영광을 바라보고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개종을 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길로가 아니고 물리적인 세력에 의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맞는 발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땅에 오실 때 그때에 7년 환란에 환란 때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들에 의해서 살해받은 유대인 성도들이 부활합니다. 두번째 부활이죠. 주님이 내려오시면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들을 아마겟돈 전쟁에서 다 쳐부숩니다. 전쟁을 통해서! 그런데 이것도 내 눈에는 이게 안맞는 것이 주님이 신적인 권세로 직접 그의 신적인 권세로 창조주로 심판주로 오시는데 육을 가진 군대와 주님이 세상적인 전쟁을 해가지고 싸워 이긴다. 전혀 안맞는 얘기죠. 하나님이 직접적인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오시는데 그 적그리스도와 그의 대적들을 멸하기 위해서 세상에 그들이 하는 꼭같은 무기를 동원해서 싸운다. 그래 에스겔서에 보면 7개월동안 거기서 싸운 그 무기들을 회수해서 불을 땐다고 돼있지 않습니까? 7개월동안! 그때에는 핵무기가 없어지고 재래식 무기로 싸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핵이 얼마나 많아요. 내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지구를 50번인가 이상 파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가 지구상에 저장돼 있다. 그런데 마지막 대전쟁이 터지는데 재래식 소총과 자동화기로 싸울지요? 그리고 주님이 신적권세로써 하나님으로써 지금 통치권을 행사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재래적인 방식으로 적대세력을 쳐부신다. 이게 안맞는 이야기죠. 이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것 같애도 인간의 사변과 인간의 픽션을 가장 많이 집어넣은 책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고방식이지 이게 성경적인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나라가 세워진 후에 얼마나 고통의 연속입니까? 이스라엘 민족만큼 이제까지 살아남은 민족들 중에서 고통을 가장 많이 어려움 당한 백성이 어디 있어요.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에게 호의호식을 해주고 영광을 보게 해주는 그런 일이 필요할 것 같긴 하죠. 인간적인 동정심을 발동을 하면은 저도 한동안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통의 연속이고 수난받는 백성입니까? 한번 원을 씻어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한번 세상에 이런 찬란한 왕국을 세워가지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에 왕노릇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 한번씩 생각도 해봐요. 이때부터 예루살렘을 수도로 해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집니다. 그 천년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12제자들이 그외 내각 캐빈을 들고 그리고 12제자에 들지못한 바울사도가 수상이 되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시 여기서도 의견이 두 가지입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이렇게 왕국을 세워놓으시고 다시 하늘로 다시 가신다고 그래요. 그렇게 하고 또 땅에서 직접 다스린다. 그래 두 가지예요. 의견이 어느 것이 진짜라고 해야 좋을지... 땅에서 직접 다스리는 것이 바른 형태 아니겠어요? 그때는 다 예루살렘으로 여행가기 이해서, 지금 많이 가지만 그땐 나도 비행기표를 사는 사람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의 모든 크리스챤과 불신자들이 다 주님 왕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순례에 오기 때문에 예수님 하고 악수하고 얼굴을 뵈올 때 일초씩 배분해줄지 이초씩 배분해줄지... 그래서 메시야 왕국을 세우게 되면 이때는 유대인들의 왕국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주 특권을 갖는 특별한 위치에 세워지고 이방인들은 종속된 위치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보다 높은 위치에 이르지 못하고 낮은 위치에 속하게 되죠. 
그리고 천년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진행됐던 치제사가 복귀되고 절기가 복귀되고 그리고 경절이 복귀되고 그렇게 되는데 이 피제사의 복귀는 단지 옛날 있었던 제사의 개념만이 아니라 이 피제사로 화해와 속죄가 이루어진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유일한 제사여서 히브리서는 그 이전의 제사를 다 이 실체에 대해서 다 그림자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세상이 속죄되어 구원에 이르지 않고 옛날 피제사가 복귀되어서 다시 그 피제사로 죄가 용서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헛되이 흘려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일한 구원의 길로 십자가를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구약 전체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구원에 이르지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지혜로 마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의 어리석은 것이 십자가인데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지혜로 이룩하신 세상구원의 유일한 길이 십자가의 구원인데 이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헌다. 그런 면에서 이 세대론의 천년도식이 사탄적이라 해야 맞습니다. 피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거부, 그것은 사탄이 궁극적으로 없앨려고 하는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상을 구원한 유일한 제사로 삼으셨고 유일한 속죄의 길로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제사 더 큰 구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원이 종말론적이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구원이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어디서 그런 소리를 알고 하는지 구약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신약성경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 그말은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을 근본에서 허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주의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사람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허는 것 아닙니까? 불트만도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죄를 씻느냐?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위해서 마지막 하신 말이라 회개하고 돌아오면은 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마지막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피 자체로 죄가 용서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트만을 신학자가 아니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불트만을 신학자라 한다고요. 이제까지 그같이 과격한 비평한 신학자가 아직 없지마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라. 이 길로만이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죄과를 소멸하시고 죄와 사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해 내서 하나님께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다른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제사를 다시 복귀해요. 
그리고 성도들과 부활해서 영체가 된 사람들도, 육체를 가진 사람들하고 죄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요. 억제되어 잠재되어 있는 것 뿐이지 죄가 소멸되고 악이 없어진게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느냐? 한쪽은 영체가 돼 있는데 한쪽은 먹고자고 결혼하고 그리고 자녀를 생산한다. 천년기간에 결혼해서 자녀를 생산하는 일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녀를 생산하고 그때 살아있는 자들은 자녀를 생산하는데 이에 죽었던 자들 부활한 성도들은 자녀를 생산하는 일을 못해요. 마치 여기서 영혼 결혼이라는게 더러 있죠. 박보위 딸하고 문선명이 죽은 아들하고 영혼결혼을 하지 않아요! 마치 부활한 영체하고 죄악이 아직도 있는데 죄악이 있는 세상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통치를 하실 때 같이 섞여 사는 것이나 마치 영혼하고 함께 하는 그런 형태죠.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는거죠. 
요한계시록 20장을 다룰려고 그럽니다마는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와 이런 것들이 상징적인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확실하게 연구를 못해서 그렇습니다마는 에스겔서를 보고 해결못하는 것은 에스겔이 환상중에 예루살렘에 진행된 일을 다 봤는지 아니면 그의 영혼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봤는지 내가 아직 판명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인 언어로 돼있는데 과도히 상징적인 언어로 문자화하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영해해 가지고 갖다 붙인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세대론적인 도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환란기가 빠졌는데 세대론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4-19장까지가 7년 환란기간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까지가 교회기간에 해당하고 거기서부터 19장까지가 7년환란에 해당되는 내용이예요. 그러니까 미래의 사건은 한번도 이루어진게 아닙니다. 여기에 ( )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7년 환란기간에 다 이루어진 일들이예요. 4-19장까지가 그래 20장부터가 천년왕국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천년기간에 완전히 죄가 다 없어지고 악이 소멸된게 아니고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철권정치 때문에 그들이 반항을 못하는거죠.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할 이 땅도 이 창조도 함께 변화돼서 영체가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세대론에 의하면 이건 형상은 그대로 두고 동결된 상태죠. 동결된 상태내에서 천년왕국은 진행됩니다. 그 기간에 아직도 죄와 죽음이 역사해서 죽는 자가 있게 됩니다. 신자들도 죽게 됩니다. 천년기론을 하면서 요한계시록 20장을 다룰려고 합니다마는 여기 20장은 문자대로 해석을 하면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천사가 하늘로부터 가지고 내려오는데 제일 강한 쇠를 가지고 오겠죠. 문자대로 본다면! 무슨 쇠가 제일 강합니까? 녜? 첫 해에 와서 83년도에 와서 종말론을 가르칠 때 반에서 얘기를 시켜보니까 스텐이 제일 강하다고 얘기하더군요. 스텐이 불에 제일 강하다. 그러면 숫자만 문자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여기 나온걸 다 문자대로 해석을 해야죠. 그러면 물론 천사들이 있으니까 그냥 없이도 만들 수 있지만 거기도 제철소가 있어야죠. 하늘에도! 포항제철소 보다는 더 좋은 제철소가 하늘에 있죠. 그리고 이렇게 쇠사슬 쇠자물쇠를 가지고 영물을 묶을 수 있느냐? 영물을 묶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귀신은 아직 사람몸을 입고 있어도 쇠사슬로! 그때야 지금보다 약했겠지마는 그땐 아직 쇠사 많이 발달하지 않을 때니까, 귀신은 육체를 입고 있어도 쇠로 묶어놔도 두드둑 하면 다 떨어져 버리는데 사탄은 왕이 이 영물들 중에 왕 아니예요? 그런 영체를 쇠사슬로 묶을 수 있습니까? 또 무저갱이면 이 끝에도 구덩이, 끝이, 굴 坑자 끝이 밑바닥이 없는 굴 아닙니까? 지궁상 어디에 그런 굴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직 다 탐사를 못해서 굴이 없는데가 있을지 모르지마는 직격이 6,400K 뿐이 안됩니다. 6,800인가... 물론 옛날사람 눈으로는 몇백 미터를 내려다 봐도 끝이 아물아물 하는데 6,700Km 위에 올라가서 보면 끝이 보이겠어요? 무저갱이라 할 수 있죠. 어떻게 무저갱이 있을 수 있느냐? 우선 거기까지 하고요 비판을 최종적으로 하기 전에 왜 이와 같은 도식이 생길 수 있었느냐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년기 세대론 뿐만 아니라 천년전기도 다 유대주의 사고지 기독교 사고가 아닙니다. 왜 이와 같은 사고가 생겼느냐?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묵시문학에서 비롯합니다. 유대교 사상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의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허락 받았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들하고도 언약을 맺지 않으셨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하고만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리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특별하게 뺀 백성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이들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약속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결국 모든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들과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세계 지배의 약속도 하셨기 때문에 이들의 끝에 가면은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세계를 만드셨다는 귀결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때 해방해 내시고 유월절을 제정하시므로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큰 구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가장 강력한 로마, 세계제국인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는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이었는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 들려서 해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구원해 내시므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더 큰 구원으로 이루어 가도록 하는 약속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것은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그래 유월절 경축을 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 과거에 왔던 그 큰 구원을 이루신 이가 언젠가는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유월절 경축을 할 때마다 그들은 문은 항상 열려져 있었습니다. 다시 구원자가 오셔서 이미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에 늘 문을 열어놓고 이 유월절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실 구원자가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 그 구원자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400년 동안 사사시대에 있으면서 압제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후에 그 압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왕을 요구해서 사울을 세웠습니다. 40년, 다윗에 의해서 대적들을 다 복수시켰습니다. 40-80, 솔로몬에 의해서 평화가 계속됐습니다. 120년이 정상적인 나라로서 평화를 유지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40년의 평화기간이 우리가 보기에는 황홀하고 찬란한 것만 같애도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 솔로몬이 그렇게 호화를 극하며 살기 때문에 물론 금은보화가 외국에서 많이 왔지만 그것 가지고 다 안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백성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착취를 중세의 극을 진행했습니다. 외국에서 물물교환으로 해서 들어오는 그것가지고도 솔로몬의 그 영화와 넘치는 생활을 사치의 생활을 다 담당할 수 없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12지파를 지파별로 했는데 열왕기 읽어보십시오. 거기 보면, 왕실의 식량을 부담하기 위해서 지역별로 재편성을 했습니다. 전체를 그렇다고 해서 12지파가 없어진건 아니지만 지역별로 재편성을 해가지고 왕실의 생활을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솔로몬의 압제 아래 얼마나 고통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황홀하고 찬란해도 그것은 외적인 것이요 오죽 감당하기 힘들면 세금을 감해달라 하는 요구가 르호보암이 왕이 되느냐 안되느냐 결정되는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 허리보다 굵을 것이고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다스렸으면 나는 전갈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 그래 솔로몬의 그 압제를 이기지 못해서 르호보암에게 세금과 부역을 감해 달라는 요구가 응해지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는데 그 요구가 응해지기는 커녕 솔로몬보다 극심한 압제를 가하게 되니까 그러면 내 집이나 지켜라 하고 우리는 더이상 분깃이 없다 하고 쪼개가지고 이스라엘을 열 지파를 세웠다. 그때부터 어려움이 시작된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772년 앗수르에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으로 흩어져가지고 넓은 지역으로 완전히 흩어졌습니다. 다 흩어버렸습니다. 그래서 772년 이스라엘의 북 지파의 10 지파는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소산되어 사라지고 없어질 민족이 되었습니다. 10 지파가 다시 회생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남은 것이 유다 지파하고 조그마한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야 유다 지파 위에 있죠. 그러니까 베냐민 지파는 실은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가야 할 지파인 베냐민 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유다에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586년 바벨론이 와서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로 완전히 흩어져서 자취가 없어져 버렸죠. 바벨론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몰라도 이들은 겟토에 모여 살게 했다. 그들의 민족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시 돌아갈 귀환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70년이 지나서 귀한되고 5세기 후엽 4세기 초엽에 귀환운동이 대대적으로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귀환 백성이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돌아간 수는 내가 계산한 4만 정도 밖에 안됩니다. 아주 극히 일부만이 돌아왔습니다. 늘 그러고도 평화가 계속된게 아니죠. 아직도 돌아와도 페르시아 왕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의 제사를 다 복귀하게 하고 포로로 잡아왔던 그들을 본토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이스라엘만 돌아온게 아니죠. 다 다른나라들은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종교를 다시 부활해서 지키게 했습니다. 유화정책을 함으로 페르시아가 고대 중동에 나타난 나라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였고 가장 오래 지탱한 나라였다. 300년을 지탱한 나라였다. 그러다가 4세기 말엽 322년경에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정복을 당해서 페르시아가 멸망합니다. 그것이 동양인이 건설한 마지막 세계대제국입니다. 세계의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옵니다. 알렉산더에 의해서 희랍인들에게로 희랍인들에게 가서 로마인들에게로 그 후에는 유럽인들에게로! 그렇게 돌아와서도 페르시아 밑에서 계속해서 압제로 있죠. 페르시아 압제가 끝나고 헬라가 왔습니다. 
헬라제국이 세워졌는데 유대인들은 불행하게 소위 시리아의 본부를 두는 셀류키드 왕조에 편입되었습니다. 그 결국 알렉산더가 죽을 때 4개의 나라로 쪼개졌는데 시리아 셀류키드 왕조에 가나안이 편입되었습니다. 셀류키드 왕조는 아주 헬라화를 완전히 전력을 다해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의 흔적을 완전히 없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콜롯세움을 짓고 큰 운동장을 짓고 그리고 희랍의 대부분의 스포츠를 도입했습니다. 지금은 별로 안 그러겠지만 그때는 남녀간에 대부분 옷을 벗고 경기를 하는 그와 같은 완전히 옷을 벗고 하는 경기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제사를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에 대한 항쟁으로 일어난 것이 마카비 왕 가문의 20세기 초엽의 항쟁, 그것이 게릴라 전쟁을 통해서 결국은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소위 마카비 유대왕국을 세웠습니다. B.C 160년경에! 그래가지고 내려오다가 로마가 등장하고 내분이 생겼습니다. 무엇때문에? 그때 마카비 왕가가 왕권만 잡은 것이 아니라 제사장직도 함께 잡았습니다. 왕권과 제사권을 함께 겸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솔로몬 시대 때서부터 사독계 제사장인 후손들만이 제사장을 계속해 왔는데 사독계 후손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 제사장인고 사독계 제사장은 불구하고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제사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항쟁으로 일어난 것이 소위 시몬 선생을 중심한 쿰란학파, ( )파가 소위 세속화돼 완전히 돈으로 매수해 가지고 하죠. 제사장직을! 그래 보통 시몬 2세를 ( )선생이라 그럽니다. B.C 200년경에 나타난, 그래가지고 마카비 왕가가 100여년을 지배했는데 내분이 생겼습니다. 헬라화를 반대해 가지고 제우스신을 예루살렘 성전 내부에 지성소에 달고 신상을 달고 독수리상을 달고 그래서 제사를 지낸 것을 돼지피를 섞어가지고 오염화 시킨 것을 다 소제하고 다시 예루살렘 피제사를 복귀해 가지고 마카비 왕가를 세웠는데 헬라화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정책으로 마카비가 생겼는데 마지막에는 정권이 위태하게 되니까 마카비가 다시 헬라화 정책을 도입했더랬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왕권이 이어지는 것 때문에 내분이 생겼어요. 그때 서로 로마에 가서 B.C 64년경 서로 왕자리를 차지할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진주해가지고 원로원이 소위 마카비 가문의 후손의 왕좌를 인정하면서 에돔의 후손인 헤롯에게 세금을 걷는 징세권을 주어 버렸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마카비 가문이 왕은 가졌는데 세금 징세권이 없는데 무슨 권력을 행사합니까? 헤롯이 왕가문, 로마의 원로원하고 황실하고 잘해가지고 뒤바꾸어 가서 왕까지 다 되어버렸습니다. 로마의 지배아래 들어간거죠. 그때부터 이렇게 수난의 역사 이런 것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건 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리시면 우리가 다시 다윗의 영화를 회복하고 그 영광을 맛보리라! 그것이 소위 후기 묵시문학들이 갖는 근본사상이었습니다. 그때 왕이 와서 다스리신다. 메시야만 오시면은 우리가 해방되고 전세계를 지배하는 전세계 지배민족이 되고 다윗 때의 그 영화를 재판하게 될 것이라. 
바로 이것이 교회에 들어와서 어떤 천년기론과 세대론이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 본래가 기독교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비판은 천년기가 합당하지 않느냐는 대부분 했지만 그래도 다시 다음 시간에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마카비 왕가 하면서 신약에 보면 사두개파가 있는데 사두개파가 바로 사독 가문 아닌 자들이 대제사장 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파가 사두개파입니다. 신약에 있는... 그런데 마카비 가문 때문만 아니라 그후 다 돈주고 대제사장직을 샀죠. 여기는 소위 문서적인 증서가 있습니까? 소위 후기 유대교 외경들 중에 후기 문헌들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성경에 실린 그 이후에, 지금 우리는 구약에서 외경을 갖고 있지 않지만 로마교회는 외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교회사적인 것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그 외경 구약 70인경에 외경이 들어있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함께 외경을 성경으로 갖고 있는데 거기도 그런게 나타나 있지마는 그 이후에 진행된 많은 묵시문학책들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어대조로 되어있는 70인경에도 다 실려 있습니다. 참고해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책들이라고 말하기 어려워도... 다른 질문 없으면 기도하고 마칩시다. 
제 9 강 
(행 15:12-21)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오늘은 먼저 천년기에 대한 천년왕국에 대한 그것이 타당한지 살펴 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천년기에 대한 좋은 답을 하고 있어요. 여기보면 13절,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6절까지. 15장이 사도들의 공회인데 율법과 복음의 관계 문제 때문에 이방인의 구원얻는 것을 위해서 사도들이 처음으로 공식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미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장로들과 교회들이 율법을 아주 잘 지키고 율법대로 살고 있었지만 이 율법에 대한 지킴의 요구를 이방인에게 까지 하게 될 때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의 권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지만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15장 보면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예수 믿음과 동시에 조상 대대로 믿어 왔던 열심히 지키게 되었고 그렇게 지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믿음에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을 예루살렘 교회 만이 아니라 이방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지켜야 된다고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누구냐 그럴 때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렇게 통상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열심히 믿음으로 만이 구원에 이르고 도저히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데 어째서 이방인들에게 우리 조상들이 못하는 그와 같은 율법의 멍에를 다시 멜려 하냐고 해도 해결이 못났는데 그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전체를 지도하고 있었던 야고보가 일어나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밝히고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그러나 이방인들 사이에 많이 진행되고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금해야 할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아모스서를 인용하고 또 예례미야서도 인용을 해서 여기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움이 즉, 메시야 왕국을 다시 회복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메시야 왕국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유대주의의 묵시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천년왕국과 같은 그런 말은 아니고 지금 천년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별도의 천년이 아니라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하므로 또 14절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와 같은 말씀으로 메시야 왕국이 별도로 진행될 것이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메시야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야고보가 해석을 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복음과 율법의 책에서 다뤘으니까 좀더 자세한 것은 거기를 참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엠마오. 1987년 재판. 
지금까지 천년기에 대해서 특히 천년전기 세대론적인 천년기 주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천년전기하고 세대론적 천년기하고 사이에 차이가 많이 있는 것 같아도 실은 우리 한국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해 보면 자기는 분명히 역사적 천년전기라고 하지만 갖고 있는 내용은 다 세대론이예요. 그리고 천년전기가 세대론하고 차이를 내는 것이 몇가지 있지만 그러나 그런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닌 것 같고 결국 천년전기를 위하게 되면 세대론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비판을 할려고 하는 것은 주로 천년전기 중에 세대론을 마음에 두는 것이지만 그러나 역사적 천년전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로 천년기가 맞지 않는 것은 천년기의 공통적인 특색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역사에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와 같은 주장을 했는데 그 주장에 근거해서 천년기론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왕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다스리는 그런 통치 만이 메시야 왕국이라는 그와 같은 관념이 아주 깊이 뿌리 박혀 있는데 첫째로 여기에 우리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천년에 국한한 것이 타당하다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천년에 국한하는 그런 지상적인 임시적인 나라가 아니고 영원한 나라인데, 천년에 국한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의 증언에 전적으로 맞지 않다고 해야 옳습니다. 칼빈이 천년기를 반대하면서 제시한 가장 강력한 반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인데 천년에 제한하는 것은 전적으로 바르지 않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만일에 이 천년기를 길게 논한다면 혹시 논할만한 가치라도 있기 때문에 라고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천년기는 자체가 합당하지 않다. 영원한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천년기에 국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천년기가 갖는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 이방인들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편입되는데 한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죠. 복음의 道로가 아니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방인이 대거 구원을 이루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칼빈이 분명하게는 안하지만 하나님의 엄위와 연관해서 거부하고 배척하기를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훼손하는 것은 적은 것이고 개인의 영혼의 안녕을 위한 그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것으로 아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므로 천년기에 국한한 것이 그릇될 뿐만 아니라, 천년기간에도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만이 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역사상에 가장 철두철미하게 배척을 한 사람이 교부중의 교부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교회들이 함께 강력하게 천년기를 배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에도 종말도식에 관한한 천년기를 배척을 하고 희랍정교회도 천년기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생긴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도 천년기를 전적으로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박형룡 박사께서 레이놀즈라고 하는 미국 선교사에게서 신학을 공부를 하셨어요. 레이놀즈는 구레인, 내가 말 듣기로는 구레인 박사는 종말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레이놀스는 철두철미하게 천년전기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께서 이 레이놀스의 이율서 목사에게서 천년기를 열심히 배우고 이것이 바른 것으로 생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이분이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으셨는데 보통 이 보수주의 남침례교 계통에도 천년기에 관한한은 대부분이 다 종말론에서는 천년기이지요. 그런 것들이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천년기론을 바른 것으로 가르치도록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 보통 조직신학이라고 하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는 신학이라고 합니다. 박형룡 목사께서 처음 조직신학을 가르치실 때는 그냥 조직신학이라고 해서 가르치셨는데 이제 책을 내실 때에만 교의신학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내었어요. 교의학이라고 할 때는 보통 이런 방식으로 조직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구원진리를 조직하고 논리화하는 작업을 하되 교회의 교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조직신학을 하는 것이 교의학의 바른 방식입니다. 처음부터서 허공에서 조직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수백번 수천번 성경을 읽어서 성경을 꿰어 밪추면 조직신학이 되는 것이 아닌데 교회의 가르치는 근본교리에 의해서 조직신학을 전개해야 맞습니다. 그러면 전통적으로 니케아 공회의 부터서 콘스탄티노플, 칼세돈, 에베소 공회의, 에베소 공회의는 정식으로 확정된 공회의의 교리를 남기지 못한 공회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 진행된 재 니케아 공회의까지 일곱번의 공회의에 의해서 나타난 교리들을 참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위 장로교가 바르고 합당하다고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도 참조를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종말론의 도식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회가 믿어온 종말론의 도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거기에 표시를 하고 있어요. 한번의 재림과 한번의 보편부활, 그리고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하는 것과 신천신지의 도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종말론에 있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같은 것을 살펴 보셨더라도 그렇게 천년전기가 가장 바른 것으로 채택을 안하실 수 있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그분이 광주에서 계실 때에 제가 번역을 했는데 지금 번역도 많이 잘못된 번역이었어요. 그래도 그분이 감수를 하셔서 내 이름을 내지 않고 그냥 박형룡 박사 감수로만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60년대 말경에 총회교육뷰에서 출간을 했어요. 그것도 다 읽어 보셨을 터인데 거기에 보면 교회들이 어떻게 개혁교회와 마찬가지로 의와 구원문제에 대해서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별로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롱 교의 신학에 들어있는 유아는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유아구원설을 저희 조직신학에 옮겨놓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여러분이 대부분 가지신 박형룡 박사의 전집에는 박형룡 박사의 글이 많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에 합당하게 그분의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교의신학으로 한질이 나왔을 때는 조직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을 빼고는 종말론 중에서 이 천년기를 빼고는 소위 루이스벌콮프의 조직신학을 그대로 번역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문에도 박형룡 박사께서 루이스 벌콮프를 찾아가서 당신의 교과서를 우리나라 교과서로 쓰게 되었다고 하니까 양도립을 하게 되어서 둘 다가 함께 넘어지고 일어서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다는 말을 서문에 적어 놓았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박형룡 박사님께서 독자적으로 조직신학을 저술하신 것이 아니고 벌콮프의 조직신학을 그대로 번역을 하셔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종말론 부분에만 와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자기가 배운대로 그렇게 천년전기가 가장 올바른 것으로 채택을 함으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대론에 다 빠지에 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소위 현재 미국에서 천년후기설의 가장 대표자가 로뢰인 뵈트너로 알려져 있지요. 로뢰인 뵈트너의 말대로 천년전기를 택하면 세대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냥 정해진 귀결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말대로! 그런데 신학교에서 천년기를 가르치면 일반 평신도들은 다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론이 되는 것이 바른 귀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거니와 종말론에 관한한은 공교회가 한사코 천년기론을 배척을 하고 무천년기, 무천년이라는 말이 없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 보편 일반부활, 한번의 보편심판, 그리고 신천신지의 도입,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무천년이라는 말이 전혀 없지요. 그러나 그 종말 도식이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도식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무천년 도식입니다.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결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이 천년기론을 두고 하기 보다는 특히 마르셀루스의 그리스도의 나라의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이 완결된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신 것이 아니고 다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재 복귀되신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인격적인 존재를 부인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종말을 분명히 했어요. 역사적인 연관을 못 살펴 보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마르셀루스가 고린도전서 15:24에서 전개되어 있는 27-28절에 보면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 28절에 근거해서 아들 자신도 그때 만물을 복종하셨다. 그리고 나라를 바친다. “나라를 바치며”라고 나와 있어요. 그래서 이것에 근거해서 마르셀루스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할 수 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 공회의가 정식으로 니케아 신경에서 결정했던 제 2조에다가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 영원하다고 규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천년기가 교회의 공회의에 의해서 배척이 되었고 그 이후에 모든 공회의들이 다 천년기론에 관한한은 천년기론을 배척하고 무천년을 가장 바르고 합당한 것으로 주장을 하고 믿어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그렇게만 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결정을 하고서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저주가 맨 마지막에 붙어있지 않고 정죄한 전 항목에 다가 붙어 있지만 이렇게 믿는 것이 카톨릭 사도적 교회의 신앙이라고 하므로 아마 이렇게 믿는 길 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분명히 하고 다른 길로 구원을 얻는 길은 정죄받을 것으로 그렇게 확정을 했습니다. 하여튼 공교회가 한번도 천년기론을 교회의 바른 신앙으로 채택하지 안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오늘 할려고 하지만, 20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문제가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초대교회 부터서 천년기론에 대한 요구하 강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천년기론을 한사코 비성경적이고 맞지 않는 것으로 그것이 유대적인 사상의 도입, 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왕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천년에 국한해서 진행될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메시야 왕국을 주의 형제 야고보 사도의 해석대로 이방인이 주의 교회에 편입된 것이 메시야 왕국의 설립입니다. 메시야 왕국의 설립을 여기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우리말 번역이 그래도 제대로 잘 번역이 되었어요. 본문하고 별 차이없이!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운다는 것이 메시야 나라의 설립인데 그리스도께서 피흘려서 이스라엘을 구속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을 구속하므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이방인이 동참하는 것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므로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세움입니다. 천년왕국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의 교회들을 이방인들을 교회에 통합하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미 세운 것이고 그것이 메시야 왕국이 다윗의 장막의 세움이지 별도의 메시야 왕국을 세움이 아니라! 
세번째로, 이 천년기론의 도식에 의하면 천년기가 마쳐갈 때에 사탄이 놓여나고 그렇게 되면 사탄과 그의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해서 천년기를 종식을 시킵니다. 그런데 천년기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은 지금처럼 하늘에서 말씀과 은혜로 다스리는 그와 같은 간접적인 통치가 아니고 직접적인 신적인 통치인데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직접적인 통치를 하시는데 통치가 피조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종결된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봅니다. 흔히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제가 주변에서 많이 있지 못해서 단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읽은대로는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 진리가 바르다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0장에 잠깐 놓여나는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예루살렘 성과 그의 백성들을 두루므로 천년기가 끝나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제 천년기가 그들을 태우므로 천년기가 끝나는데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인 통치를 하는 일이 피조물의 공격에 의해서 종결된다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다스리심은 큰 의미의 통치여서 그의 통치를 훼방하고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다스리시지 않고 천년왕국을 세워 놓으시고 하늘에 가셨다면 하늘에 다시 올라 가셨다면 그와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지요. 하늘에 다시 가심으로써 하시는 통치는 지금의 통치하고 뭐 그리 다를 것인지 나로서는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찰스 핫지가 주장한 것인데 부활체들과 부활하지 않는 전통적인 재래의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함께 살 수 없다. 또 천년간 사는데 이미 부활한 성도들 변형된 성도들은 완전히 영체가 되었는데 나머지 불신자들은 부활하지 않고 전통적인 육체를 입고 있으면서 죄악된 생각을 그대로 갖고 악한 생각을 그대로 품고 그리고 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생산하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부활체가 영체인데 부활체가 변형되지 못한 새롭게 된 창조세계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맞습니다. 만일에 변형되지 못한 세상에 변형된 부활체를 가진 성도들이 함께 섞여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귀신들이 지금도 우리들의 세계에 와서 같이 살 때 상황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그 완전하신 신적인 영광과 엄위를 드러내실 때에 비록 사도요한이 환산으로 그 그리스도를 봤어도 죽은 자까지 그처럼 엎드러질 수 밖에 없었고 또 사울도 아직 바울 되기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눈이 멀게 되어 그 충격으로 며칠동안 고생하며 지나고 그리고 이제 세계받고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고 식사함으로 정상으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완전한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 앞에 불신자들이 육체를 믿고 살 수 있느냐? 부활체들이 부활하지 못한 육체하고 접촉해서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가지고 오셔서 영광을 친히 드러내실 때에 그 영광 앞에 불신자와 죄인들이 설 수 있느냐?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사기에도, 야고보 야곱도 내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 남은 것이 늘 기이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은 존재가 없죠. 그런데 어떻게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죄인들이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섯번째로 전통적으로 이 교의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되지 못했는데 그 구속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좁은 창조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만 구원에 이르고 이 세상 이런 것은 다 내버려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심과 함께 우리의 육체도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사는 2차문제도 하나님이 내버리시는게 아닙니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입니다. 
화란 20세기 전후에 5대 신학자 중에 하나라고 하는 신학자 중에 판 룰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판 룰러가 있는데 이분은 구속이 철두철미하게 회복이라는데 아주 강조를 두고 역점을 둔 분입니다. 그래서 참 구속은 완전히 처음 창조 때로 되돌아 갑니다. (그린스투터)하는 것이라. 이런 것을 아주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어떠한 것도 하나도 구속된 세계의 상실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강조를 많이 했어요.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을 더욱 첨예하게 더욱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혁신학에 의하면 구속은 창조의 회복입니다. 새것을 갖다가 덧붙히고 새로운 창조물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내버리지 않고 회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구속입니다. 
그러데 천년기론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천년동안 이곳에 살다가 마침내는 천년기가 끝날 때는 이것을 내버리고 딴데로 가요. 물론 천년기론은 세대론 중에 일부론, 일부의 주장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영원히 땅에 남고 교회는 영원히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죠. 하나님은 종말에 가서 만유안에 만유가 되시기 때문에 두백성을 따로 남겨 전혀 별개의 백성으로 남겨 놓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백성이 남는 것이 아니예요. 한 백성만 남죠. 한 하나님의 백성!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서에 보면 둘로 그의 육체로 에베소서가 가장 잘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둘을 허시사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3절 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여기서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과 육에 속한 계명과 율법을 자기 육체로 파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이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실감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이방인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장벽이 철폐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심각한 얘기가 아니지만 유대인에게는 이게 보통 심각한 얘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함께 구원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사건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이제 뒤로 되돌아 갑니다 마는 사마리아 사건, 그것을 보통 많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전도로 회개하고 예수믿고 그 다음 사도들이 와서 성령을 주고 했으니까 항상 두 단계로 성령을 받는 것이 맞는 줄로 알지마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해보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슴에 닿도록 얘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사마리아인들은 언제 유대교와 완전히 분류됐냐면 주전 3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의 교회가 예루살렘 유대교에서 완전히 분류한 것으로 봅니다. 왜 그렇냐면 주전 300년경에 소위 사마리아 오경이 완성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때에 사마리아 교회하고 예루살렘 교회, 유대교하고 사마리아 교회하고 완전히 분리한 때라고 봅니다. 이때 더욱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 대한 적개심과 그리고 반감,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이 강해졌지만 이 포로 교환 때부터 일이 생긴거죠. 물론 이보다 그 전에 생긴거지만 사마리아 열 지파를 다 앗수르가 잡아가고 잡아다가는 한곳에 모여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앗수르의 정책은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서 없애버리는 거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열지파를 잡아다가 완전히 광대한 앗수르 지역에 흩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만 모여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도록 완전히 흩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마리아인에게도 자기 앗수르 지역의 사람들을 가져다가 그들과 혼혈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유대인이 이스라엘의 종족으로 남아있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정책이 성공을 해서 사마리아인들이 완전히 이방인들과 결합해서 혼혈종이 되었습니다. 그 혼혈종이 된데다가 그래서 여호와의 종교에다 이방인의 종교를 그대로, 그리고 이방인 풍속과 법도를 그대로 갖고 있죠. 그러면서 여호와의 종교는 섬겨요. 그러니까 혼합종교죠. 그래도 그들이 정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야곱의 우물들이 거기에 있고 야곱이 특히 자기의 장자를 지목한 요셉에게 준 땅들이 거기에 있다. 그 바로 수가성이 야곱의 우물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곱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이들이 이렇게 혼혈했고 종교가 혼합주의가 되고 윤리에 있어서도 법도에 있어서도 혼합주의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들을 개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소위 예루살렘의 교회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거예요. 빌립의 전도로 만이 예수 믿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했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히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개같은 그들이 택한 백성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거룩하게 지켜가지고 그 예수의 피를 받아들이므로 더욱 깨끗해져서 성령을 받았는데 개같은 그들이 성령을 그냥 받는다? 그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의 모세의 법도대로 두 증인이 그리고 예루살렘 교히의 설립자들인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수사도 둘을 보내서 그들로하여금 예수 믿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므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올려면 그들이 일단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그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그리한 다음에 예수믿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온갖 죄악을 다 범하고 험악한 우상숭배를 하고 그 돼지고기를 그렇게 먹는자들 그들이 그냥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다?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다? 그렇게 골똘히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 그렇게 돼지고기를 아무렇게나 잘먹는 그들이 그냥 성령을 받는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예요. 바로 그 때문에 사도행전 15장에 바리새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도저히 이방인들이 그냥 율법을 지킴없이 예수만 믿는 것 하나로 유대교회에 가입한다.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공회의 결정을 베드로와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사도 야고보가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할 것 같은데도, 제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잘 설명을 했어요. 이번에 조금 더 깊이보고 싶은 분은 「하나님 나라의 구속경륜」을 참조하셔요. 베드로의 긴 이야기도 믿음으로 만이 구원에 이르고 이스라엘을 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만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역사하신다는 것을 실례를 통해서 이방인들 중에서 어떻게 역하시는 지를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결정했어요. 야고보가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믿음으로 율법을 지킨, 그런데 어느정도 타협은 했죠.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15장에 나와있는 우상을 멀리하는 것, 피 먹지 않는 것, 음행하는 것, 이와 같이 네 가지를 정했어요. 그래서 이방인들 사이에 극심하게 진행되는 이와 같은 죄악을 그리스도인들은 못하게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 뿐이라고 야고보가 결정을 했습니다. 수사도인 베드로도 못하고 또 사도 바울도 못했는데 야고보만이 그것을 결정했습니다. 야고보가 결정해야 그 안이 거기서 통과되고 수납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야고보를 따르는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문제고 자기들의 영수가 이렇게 결정하기 전에는 이거 수납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권위로 될리가 없고 바울의 권위로도 수납될 리가 없습니다. 야고보의 권위로만이 수납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율법을 지킴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그때 당시 가장 의인 칭함을 받던 야고보가 공인해준 그 공회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예루살렘의 의인이고 예루살렘을 지킨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야고보가 돌에 의해서 쳐죽임을 받았을 때 예루살렘의 그 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즉 의인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킨 거룩한 사도인 야고보가 구원이 율법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뿐이라고 결정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기독교에 준 큰 공, 「복음과 율법」에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온갖 우상숭배와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먹는 자들 음행을 행하고 목매어 죽이는 죽임을 예사로 살인하고 죽고 그 가증한 죄악들을 범하고 우상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돼지고기를 마음껏 먹고 이런 자들이 그냥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장벽을 예수 그리스도가 깼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깰 수 있었고 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신 이가 성령으로 하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 8장에 사마리아인들의 개종사건에 빌립으로만 교회가 인정되게 한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냄으로 교회가 교회된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보는 입장으로는 이 문맥을 보고 글을 봐서도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예수 믿었다고 난 그렇게 봅니다. 이 시간에 길게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마는 창조가 구속의 회복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길게 갔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아무도 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만이 그 일을 하셨어요. 그리고 두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한 것이 아니고 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몸을 이루었어요. 한몸을! 
그러니까 세대론을 주장하는 식의 이스라엘은 영구히 땅에 남고 교회는 영원히 하늘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하나님의 백성 밖에 없습니다. 종말에 가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백성, 하나님의 인류 밖에 없어요. 그때는 교회 형태로 인류가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러지 않는데 하물며 종말세계에 그런게 있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창조가 함께 구속에 이르기 때문에 이 종말이 종말 때에 이 창조가 완전히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자들에 의하면 이거 내버리고 저 하늘나라 저 어디로 가요. 하늘로! 그것은 구속이 창조의 회복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쓰신 말씀이 한군데 나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만물을 새롭게 해요. 새창조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창조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재창조지 새창조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지 새창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어느 하나라도 탈락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서에 나오는 땅이 이렇게 종이쪽처럼 말리고 간데없고 그런 것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창조를 새롭게 하심을 표현하시는 것이예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만드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려면 구속하실 필요가 없어요. 싹 쓸어 버리고 새로 만드시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완성의 창조하신 것이 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소가 어디냐? 종말에서 마지막에 천년기 다음에 이것이 마지막 부분에 나올 것입니다마는 우리의 거소는 이 땅이 우리의 영원한 거소라.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지금 계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그러면 종말에 하나님 계신데로 가지 않고 우리가 이 땅에 살게 되면 지금 현재 하나님의 처소하고 우리의 거소가 구분되지 않느냐? 그것을 요한계시록이 답을 다 대요. 21장 보면 2-3절,“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야기를 잘못하면 오해되고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하나님이 종말의 거소를 새인류의 거소로 삼았습니다. 새인류가 하나님의 거소예요. 여기 새예루살렘이 단장을 해가지고 하늘에서 하나님으로 부터서 땅으로 내려온다. 새예루살렘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처소인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새인류가 종말의 하나님의 처소라! 85년도엔가 우리 교단의 신문인 총회회보에 “낙원 성전 성육신”이라고 하는 글을 제가 썼습니다. 그 글에서 하나님의 거소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했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처음 낙원이 아니면 성전의 기능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나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계셨고 또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낙원이 성전의 기능을 갖죠. 성전이었습니다. 아담이 제사장이었으니까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낙원에서 추방하시고 그리고 이걸 소산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의 기능이 후에 성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에 의해서 계승되었습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께서 와서 거하셨습니다. 거소로 삼으셨죠. 물론 그 거소는 이스라엘을 생각하듯 그때 당시 이방인들이 생각하듯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와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셨기 때문에그 성전 자체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윤리적으로 바로 서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성전을 임의로 떠나셨어요. 주권적으로! 그 성전은 임시적인 하나님의 거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 자신이 전체로 성육신 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으로 하고 삼으시고 살으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 성전을 청결할 때에 제사장들이 와서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고 할 때에 이 성전을 헐라 그러셨어요. 성전안에서 성전을 보고서 성전을 헐라고 함으로 성전을 말함과 동시에 또 역으로 자기 몸으로 성전을 옮겨 오셨어요. 그리스도께서 전통적인 성전을 성전으로 인정하시면서 참 성전이 자기 몸인 것으로 분명하게 하심으로 자기 몸이 성전인 것을 분명히 했어요. 제자들도 아직 그걸 다 깨닫지 못했죠. 언제 깨달았죠? 부활 후에사 완전히 깨달았죠. 하나님께서 그의 전체를 골로새서에 보면 “플레로마 οληρ μα”를 썼어요. 1장 보면 19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돌로 만든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하나님이 와 계시므로 더이상 나무와 돌로 된 성전이 더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헐라고 함으로 자기 몸을 성전으로 가르치시면서 내가 3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 자기 몸이 성전인 것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또 자기 몸을 헐므로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헐릴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예루살렘 교회가 분명히 헐릴 것을 예언하셨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나무와 돌로 된 성전이 더이상 서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도장군의 손을 빌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체안에 충만히 거하신 후에 예수의 부활 후에는 예수 안에 있었던 성령으로 모든 새사람들에게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성전, 그의 거소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가서는 이 완전히 새인류들을 자기의 처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위 화란의 스킬더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캄펜 신학교를 설립하신 분인데 이분이 “하늘은 무엇인가?”하는 책 속에 종말에 가면 지금의 하나님의 거소하고 인류에서의 거소하고 합친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인류에게 거소를 정하고 사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번째로 결정적으로 반대를 해야할 것은 피제사의 복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마지막 구원의 길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이 피로 모든 죄를 씻으시고 새 백성들을 만드시지 다른 어떠한 길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자들에 의하면 종말에 가면 천년기 때 다시 피제사가 복귀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피제사가 복귀되고 모든 절기들이 세워져 다시 집행되고 그리고 그 피제사를 통해서 속죄가 이루어져요. 이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허는 것인데도 어찌해서 교회에 이러한 것들이 반성과 비평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끔찍한 일이죠. 피제사의 복귀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근원적으로 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배척하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고 그리고 실물교훈하시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민족이 되게 하시고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유지되게 하시고 그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고 그 민족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이상 그들이 더이상 민족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서 그들을 다 민족적인 단위로존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제사가 이게 실체고 이게 몸이고 다른 것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몸이 없으면 소산되는 거죠. 그런데 이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피제사가 복귀한단 말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한 구원의 길이 이 길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입니다. 
앞으로 내가 세대론을 비판하면서 들어갈려고 합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그의 오심의 영광을 보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고 하는 이것도 전적으로 성경에 말하는 구원에 배치된다. 또 천년기 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때문에 이방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 교회로 돌아온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바로 이 피흘림의 피제사로! 다른 길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피제사가 복귀된다?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신학자들이 천년전기를 지지해도 그래도 공교회가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천년기를 다 배척했습니다. 죠지 래드 같은 사람도 신학적으로 종말론을 천년전기를 맞다고 주장을 해요. 박영호 목사하고 편지 통신하면서 그 답을 번역해서 조직신학에 실어놨는데 이 사람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물론 미국에서 신약학자로써 구라파 학자들이 인정해 주는 학자가 죠지 래드예요.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진행됐다고 강조하죠. 그리고 미래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천년기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맞지 않는거죠. 이 성경학자들의 약점이 여기에 바로 나타나요. 여러분 혹히 신문광고 보셔서 아실지 모르지마는 위트레이트 대학에 지금 조직신학 교수가 하란프란트입니다. 이번에 그 기독교 학생의 초청으로 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최근에 “확고한 언약”이란 책을 써가지고 우리가 천년기론을 받아들여야 맞지 않느냐 식으로 결론을 맺어요. 그러면서도 문제점이 있다 이거예요. 이스라엘은 영구히 지상에 살고, 교회는 영원히 하늘에 사는, 이것이 문제점은 있지마는 받아 들여야 된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다 읽고 내가 당장 편지를 쓸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도대체가 어떻게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느냐? 그런데 이분이 내 논문의 서평을 한 분이예요. 그래서 괜히 마음만 상해주는 이 하란 프란트가 전통적으로 위트레이트 신학부가 전통의 아성이라 그럽니다. 전통의 아성인데 그 하란 프란트가 이 조직신학 교수예요. 그런데 그분이 언약,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입장에서 봐서 천년기론을 받아들여야 옳을 것 같다. 그런식으로 전개를 했어요. 확실하게는 안해도! 그래서 어떻게 신학자가 이런 정도로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편지를 쓸려고 했는데 광고에 보니까 오신다고 그래서 강의는 가서 못듣더라도 한번 만나볼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한번 할려고 해요. 피제사의 복귀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적으로 부인하고서만 가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국적인 하나님이 내신 유일하신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부인하고서만이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 피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것을 지시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제사가 와서 구속을 완성한 이후에는 그 피제사가 계속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종말에 가서 하나님이 로마장군의 손으로 헐어버리신 그 제사제도를 가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때에 회복을 하신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전적으로 유대주의 사상의 재현이고 복귀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그 역사로 오신 것이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계에 높이기 위해서 오신게 아닙니다. 천년왕국은 전적으로 전체적인 메시야 왕국입니다. 그것은 예수 당시에 살아있던 유대인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구했던 그것, 로마가 해결하는 세계문제의 해결의 길은 정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가 되고 몇년에 걸쳐서 평화의 세대가 도래했다고 온 로마천지가 새로워진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예요.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가 됨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정치였습니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 였어요. 이거 좋은 책을 썼어요. ( )신학자가 “예루살렘으로 오너라”하는 책을 써서 ( ) 잘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정치적인 메시야와 정치적인 해결이었습니다. 고난의 종은 전혀 생각할 겨를, 틈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이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을 종말 때로 연결해서 확대한 거예요. 이러기 때문에 천년기가 현재까지 내가 이해한 대로는 바르지 않다.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천년전기에서 세대론의 문제점들을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마는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왜냐하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든 역사를 주재하셔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하여 보내신 것도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회복해서 이스라엘에게 세상적인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보내셨어요.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세상을 구원하실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왕국을 다윗왕국을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윗왕국의 회복은 야고보 사도의 해석대로 이방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된 것이고 별도의 메시야 왕국을 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할 때에 메시야 나라를 전할 때 받지 않으므로 할 수 없디 연기했다고 그러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려고 하는 이 메시야 구세주의 출생을 구세주가 태어나는 통로가 되게 할려고 어머니가 되게 할려고 모태가 되고 태반이 되게 하는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두신 것이지 이스라엘 자체를 택해 가지고 세상의 영광 보게 해 주실려고 이스라엘을 택한 것이 아닌데도 세대론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셨지 메시야 나라를 짓겠다고 유대인들한테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은혜의 복음, 구원의 길에 이르는 길능 은혜라고 하는 것, 자기의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에 의존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니까 율법하고 배치돼서 이들이 배척했지 메시야 나라를 세울려고 제시했는데도 메시야 나라를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메시야 나라 정치적인 메시야 나라를 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메시야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고난의 종으로 어린양으로 오셔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들과 서기관들이 너희들 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공로를 의지할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선포할 때에 은혜의 복음을 말할 때 그냥 빨리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섞이면 물들기 때문에 섞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오셔가지고 창녀들, 세관원들 이 사람들하고만 어울리고 합친다.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를 못한거죠. 어째서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 그런데 뭐라고 답했습니까? 너희들은 의인이어서 필요가 없지만 없을 것 생각하지만 나는 의사니까 이 병든 사람을 고칠려 하니 같이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이 의인인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배척한 말씀이 아니죠. 그들도 함께 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받아 들여요. 자기들은 장자죠. 큰아들이죠. 그런데 둘째 아들은 가사를 탕진했다 돌아오니까 기쁘지 않죠. 이런 죄인이 창기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이런 죄인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좋다고 뭐가 좋다고 말예요. 집에 있는 아들은 염소 새끼 하나라도 고아먹지 않고 잘 섬긴 이 아들은 염소 새끼 한마리 줘서 친구들과 재미보게도 안 하시더니 이런 아들이 오니까 뭣이 좋다고 열심히 받아 들이느냐? 그러니 이방인들이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걸 이 유대인들이 용납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 아들로 일한게 아니고 삯군으로 일했죠. 내것이 다 네것이고 다 네것 아니냐고 무슨 소리냐고 해도 아버지는 나한테 염소새끼 한마리 줘갖고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봉양을 해도 잘했다고 친구들과 함께 잔치하라고 하지도 않더니 아버지의 모든 재산들을 반이야 안받아 갔겠지만, 작은 아들 몫이니까,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거러지가 되어 아들이 올아오니까 소 잡고 양 잡고 온동네 잔치가 다 났다. 그럴 수가 있냐 그말예요. 그럴 뿐만 아니라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가지고 마침내 무화과 나무의 비유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어요. 열매맺는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을 하셨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더 이상 존속 못할 것을 무화과 나무 저주에서 분명히 하셨어요. 거기서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시장해서 가셔서 무화과를 따 먹을려고 갔는데 보니까 무화과는 아무것도 없고, 잎만 무성하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입성 후의 일 아닙니까?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생긴 일 아닙니까? 단지 그것 만이 아니예요. 여러분들, 바로 그것은 그때 당시의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구히 내게서 열매를 받을 자가 없으리라. 먹을 자가 없으리라. 그렇게 저주하시므로 그 무화과 나무가 즉각에서 말랐지마는 그것은 아무 열매도 맺지않고 잎만 무성한 그때 당시 이스라엘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보다 더 열매맺는 너희들에게 빼앗아서 열매 잘맺는 다른 족속에게 주리라. 그렇게 하므로 이스라엘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가지고 세상적인 정치적인 메시야 나라를 세울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 것이죠. 바로 구원의 길은 믿음으로 은혜로 되는 길임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니까 율법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이 배척한 것입니다. 율법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도 좋은 것 같애도, 은혜의 길을 교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가르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복음을 가르치면 반대하고 욕을 하고 훼방을 하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율법의 길로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루실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가 목적이예요. 이스라엘이 목표가 아니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그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죠.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에게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예요. 이걸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민족적인 단위로 존속할 필요가 없게 하신거예요. 
그 다음, 비판할게 참 많던데,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에 재림하셔서 그 종말론적인 것을 왜 반복하셔야 될지 모르겠어요. 임시적인 것을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죠. 그리고 그들이 주님이 땅에 내려 오시면 이스라엘이 주님을 보고 회개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해 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그러는데 그런게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뿐이지 이와 같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구원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별도의 방식으로 이렇게 영광을 보고 구원하시게 하는게 아니죠. 그리고 천년왕국 때에 그 철권정치에서 악을 행사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잘되고 믿는 신자들이 잘되기 때문에 믿는 신자가 왜 잘되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다 부활해서 영체를 가지고 있는데 세상적으로 무얼 더 부활체들이 바라겠어요. 세상적으로! 그런데 그런 것을 보고 대거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온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이와 같이 물리적인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복음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복음이고 충족한 것이지 다른 방식으로 대치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천년동안 메시야 왕국에서 다스린다고 하면은 이스라엘이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가지고 고난을 많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보상을 주시는 면이 있겠지마는 실제로 고난당한 백성들은 그때 이스라엘이 아니잖아요. 그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그들은 다 죽고 없어진 후의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조상들의 고통을 그들에게 영광으로 갚아 주심으로 그들이 당한 고난이 글쎄요. 상쇄되고 충족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찰스 핫지가 좋은 말을 지적했는데 초림 때에도 이스라엘의 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에도 천년기론자들의 기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찰스 핫지, 프린스톤의 조직신학자! 보통 개혁파의 3대 조직신학자를 들라면 찰스 핫지, 바빙크, 아브라함 카위퍼를 듭니다. 찰스 핫지가 19세기 중엽 지금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와있는 조직신학 책 3권으로 된 책을 썼어요. 
그 다음 이제 천년기 동안에도 일부는 죽고 결혼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그러는데 한쪽에서는 자손들이 자꾸 늘어가는데 부활하고 변형된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늘지 않죠. 보면 손해 아니예요? 불신자들만 덕보는거지! 세대론은 성경을 글자대로만 해석하도록 하는데 너무 과도히 집착하므로 구약의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와 같은 예언과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글자대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므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적으로 놓치고 이렇게 왜곡합니다.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하면 근본주의죠. 성경에 기록돼 있는대로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 그러면 여기 휴거란 말도 안맞고, 성경에 휴거도 없잖습니까? 삼위일체도 맞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문제도 문제가 되고 문제가 많습니다. 
세대론과 천년기는 유대주의 사상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지 헤르만 ( ) 말하기를 오히려 처음부터 유대주의 ( ) 페르시아의 사고가 들어온 것이라. 이는 종말론에 있어 천년왕국의 주장은 유대주의에서 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 파사의 사상이 유대주의로 들어오고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면 부활 후에 심판이 끝나면 이스라엘은 이 땅에 거하고 새인류는 저 하늘나라로 간다고 그러는데 제가 말씀 드린대로 맞지 않습니다. 그 부활이 여러차례 있는 것이 아니고 한번의 보편부활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렇게 천년기론을 비판을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되는 부분이 요한계시록 20장입니다.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시작만 하고 다음시간에 하도록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1-8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만일에 우리 한국 교회가 익숙해 있는 글자적인 문자적인 해석을 고집한다면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했는데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이 쇠로 만든 쇠사슬이어야지요. 쇠로 만든 쇠사슬 아닙니까?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쇠로 만든 쇠사슬로 영물을 더구나 악물들의 왕을 묶을 수 없다. 그래서 귀신도 못 묶었는데 어찌 사탄을 쇠사슬로 묶어요. 내가 이미 말씀을 했겠지만 내가 함부르카에 한번 갔을 때에 성 미가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당 입구에 위에 큰 조각이 하나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에 미가엘이 큰 방패를 들고 큰 창을 들고 시커먼 사탄을 발로 밟고 칼로 찔러요. 그런데 그 옆에는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벌벌 떠는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사탄은 아주 새카만데, 그런데 거기 그 방패에 뭐가 그려져 있냐면 십자가가 그려져 있어요. 그 칼이 글쎄 바로 십자가 였어요. 미가엘 천사가 사탄을 제거하는 것은 물리적인 물질적인 쇠사슬과 방패와 칼로 사탄을 결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권세로 결박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우리가 글자대로 보는 의미의 쇠사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요. 그 피의 권세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피의 권세를 말해요. 사탄을 의거하고 압제하는 것이 이렇게 물리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권세로만 그래요. 골로새서에 보면 그것이 나와 있는데 그 장에도 1:17-18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보다도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사탄의 권세가 대폭 제약되고 일면에 무장 해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주석가는 이걸 주석해서 뭐라고 했느냐?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 이후에 더 선해졌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의 권세로 그의 권세가 대폭 제약되고 약화되었으므로 그 전에 악대로 다 행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는 분명히 무장 해제된거죠. 그런 의미로 사탄이 훨씬 더 악령들이 선해졌다. 우리만 구속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권세가 악령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제재한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권세는 다 없어질 것들이지만 십자가의 권세로 만이 사탄을 제어해요. 복음의 권능으로 그 권능으로 만이 사탄의 권세가 약화되고 제재돼요. 복음이 오기 전에는 한국에도 가는데마다 귀신 나는데가 많았습니다. 예수 이름을 듣고부터 귀신들이 물러가요. 
내가 군에가서 82년도에 겨울에 귀국하던 해에 옛날부터 아는 권사님 집에 가서 한 일주일 머물렀습니다. 거기가 아주 가파른 산비탈에 집이 서 있었는데 그 뒤에 능선을 올라가서 보면 옛날 좋은 집터들이 있어라고요. 이 권사님이 무슨 말을 하느냐면 자기가 이 집에 들어와서 사니까 그곳에 사는 악령들이 전부 다 불을 켜고 휙 사라져 가는 것을 봤다. 그 권사님 아들이 목사예요. 어머니 별 말씀도 다 하십니다. 하고 하니까 아니라고 분명히 내가 그렇게 기도할 때 봤노라고 그러니까 나도 올라가 보니까 완전히 옛날의 집터들이예요. 다 좋은 집터들인데! 다 폐허가 되고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곳이 귀신들의 처소죠. 그런데 예수 잘믿는 권사님 부부가 와서 사니까 예수 이름의 권세에 의해서 그들이 다 물러갔다 말예요. 
지금 그런데 기독교 복음의 권세가 아주 약화된 구라파, 소위 미국의 루터교회 신학자가 그 구라파를 돌고와서 글을 하나 썼는데 그 글에 명언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렇게 높이 찬양받던 곳들이 지금은 다 폐허가 되어 있다. 폐허가 되어 있기 때문에 폐허로만 남아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서 다 떠나니까 귀신들이 들어오는 것이죠. 지금, 이 사탄이 천년간 이렇게 무저갱에 감금당한 것은 물리적인 무저갱의 쇠사슬에 매여 결박당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에 의하여 그들이 결박당해 있고 그들의 권세를 마음껏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천년간이냐? 만국을 미혹하게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적으로 박멸하려고 하는 노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실 때까지 만국을 미혹하게 못하게 한거죠. 천년간 결박되어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의 권세 기간동안 사탄이 복음에 의해서 그 활동이 제약되고 만국을 미혹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방식으로 쇠사슬에 매여서 꿈틀꿈틀 해도 못나오고 그런게 아니죠. 여기보니까 그냥 옛뱀이라고 그랬습니다. 용을 잡으니까 옛뱀이 마귀요 사탄이더라. 여기 왜 용이라고 했습니까? 낙원에서 생긴 첫 사건에 뱀의 역할을 지시하기 위하여 그런거라고요. 뱀이 사탄이 뱀을 도구로 해가지고 인류를 타락하게 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뱀이 바로 사탄과 일치된거죠. 구분되면서도! 그러니까 여기 옛뱀이 나왔죠. 용이라고도 하고 옛뱀이라고도 하고! 풀어 놨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에서 아는 용, 비가오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쇠소리를 내며 울며 다니는 그런 용, 삼국지에 잘 나오죠. 용, 그러고 과학이 현재 가르쳐주는 공룡들, 그런 용을 말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곧 옛뱀이요. 여기 뱀이라고 말한 것은 낙원의 사건을 지시합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다시 풀었는데 사탄이라. 이런 물체적인 피조물 중에, 동물 중에 하나인 뱀이 용이 아니라 사탄을 말합니다. 그 영물을 쇠사슬로 어떻게 묶느냐? 다음 시간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제 10 강 
요한계시록 20:1-6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종말론은 실은 종말론이지만 종말론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종말론이 어떤 종말론을 택하느냐는 결국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성경의 해석의 문제하고 함께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다 동일한 종류의 문장들로 구성되지 않고 산문으로 된 성경이 대부분이지만 운문 즉 시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성경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면 전통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초대 교회서 부터 정해 놓은 원칙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해석되어야 하고 불명료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성경 해석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천년기론이 성해지게 되면서 더욱 그러한 성경 부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성향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언어로 쓰였고 해석이 필요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 그대로를 받아야 맞는 것으로 이제까지 내려오는 경향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루터를 성경 번역에 프린스라, 왕자라고 그러면 칼빈은 주석에 있어서 왕자라 또 불려 왔어도 칼빈이 모든 주석을 다 성경을 주석하면서 요한계시록과 구약의 아가서만은 이걸 자기의 주석에서 제외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타고난 주석가로서의 역량을 다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어려운 상징적인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아마 그가 주석을 성경 두 부문에서 안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1-6절까지 천년이란 말이 여섯번 나옵니다. 그래서 또 이 성경에 근거해서 천년을 문자적인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천년기론자들의 문자적인 주장에 대해서도 연대가 다 일치하지 않습니다. 400년, 700년, 천년 혹은 그것의 배인, 뱅겔 같은 사람은 2천년, 그런데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으면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결국은 허는데 도달한다고 봐야 합니다. 
제가 금요일날 켈리 미국 리폼드 개혁신학교에서 오신 켈리 박사와 식사하도록 초대받아서 가는 길에 그의 숙고에 들렸다가 화란 리트레히트 신학 교수로 수고하시는 하란프란트 교수를 만났어요. 만나서 한 30분 얘기하면서 당신이 개혁파 정통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당신의 “확고한 언약”이라는 책에서 말하듯이 천년기론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당신이 천년기론의 문제점도 지적을 하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은 땅위에 살고 교회는 영구히 하늘에 산다. 그런 문제점도 지적을 하면서 어떻게 천년기로 돌아갈 수 있느냐? 천년기론을 주창을 하면 세대론으로 가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우리 한국 교단도 그 박형룡 박사가 저희 신학에 있어서 천년기를 가르쳤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다 세대론이 됐다. 그러니까 자지가 주장해서 하는 말이 나는 ‘허마타하' 영어로 ‘모드레이트' 우리말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고 이렇게 중도적인 위치에 있는 종말론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개혁파 전통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렇게 하니까 부인도 옆에 앉아 있어요. 우리가, 이번에 오셔서 강의하셨는데 강의 제목 중에 그것이 들었던데 소위 (드레폼어 아치) 16세기, 종교개혁이 끝나고 17세기 18세기 사이에 화란에서 그 이후에 진행된 종교개혁에 퓨리탄의 영향이 많았다. 그 영향 때문에 우리가 그와 같은 천년기론 입장을 취한다. 아니 천년기론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에 한군데도 채택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 정통파 교단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하니까 우리는 다 칼빈을 따르지 않는다. 칼빈을 따르게 되면 모든 부분을 영해해 가기 때문에 영해하게 되면 (약속이? ) 성취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야고보가 사도인 사도공회에서 한 해석이 있지 않느냐. 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는 것은 이방을 그리스도 교회에 편입하는 것으로 분명히 받아들인 것으로 야고보가 해석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당신 어떻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게 하니까 너무 칼빈을 다 따르면 전부 영해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다. 당신 만일 성경을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계시록을 전부 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 그저, 의견이 완전히 팽팽히 맞서도 많이 깔깔 웃으면서 그저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러면서 마지막 강조가 우리가 17세기, 18세기 후속 종교개혁 때 퓨리탄의 영향을 많이 입게 되어서 그렇게 됐다. 그렇게 주장을 하고 나도 천년기가 맞는 줄 알고 그렇게 열심히 주장을 했는데 암스텔담 가 가지고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를 했노라고, 그런데 당신은 개혁파 전통에서 자라났으면서도 그러냐 그랬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선임자인 판룰러는 완전히 회복을 강조하기 때문에 내가 종말론을 확실히 모르지만 자기도 그래요. 거기에 종말론이 없다. 그분이 종말론을 혹시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하고는 영 반대일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얘길 하면서 참 얘기를 나눴어요. 전통적으로 위트레이트가 전통 신학의 아성으로 그렇게 여겨왔는데 최근에 자유대학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던 빠르다 교수가 위트레이트로 옮겼어요. 그리고 또 하란 프란트도 주장을 그렇게 하고 그래서 이제 위트레이트도 그렇게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을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 계시록에 나와 있는 여러 지적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자체가 기록된 내용을 다시 반복해서 해석을 하고 있지요. 지목을 하지요. 여기 보면 20:1절 여기 첫절에도 보면 천사가 하늘로 부터서 내려오는데 한 천사가 그의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고 손에, 그 손위에 큰 쇠사슬을 가졌다. 여기서도 볼 때에 이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에 말씀 드렸듯이 무저갱의 열쇠하고 이 쇠사슬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제가 전에도 몇번 말씀 드렸듯이 아마 지상에 있는 제철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급 제철소겠지마는 포항제철소 보다는 월등하게 좋은 제철소가 하늘에 있어서 쇠사슬과 열쇠를 가지고 내려온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여기소 무저갱의 열쇠하고 쇠사슬이 우리가 글자가 지목하는 대로 문자적인 의미의 쇠사슬, 쇠로 만든 열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라. 그렇게 해야 맞을 것입니다. 이 사탄의 권세가 제어되고 억제되고 그리고 감금된 것은 십자가의 권세로 된 것이지 다른 이 쇠사슬로 영물을 묶을 수 없는 것이죠. 전에도 몇번 말씀 드렸듯이 거라사귀신 정도, 물론 군대귀신이 들어 있어서 수가 많았죠. 많았기 때문에 2천마리나 되는 돼지를 한꺼번에 몰살해 버리는 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귀신 하나라 해도 2천마리의 돼지를 물에다 몰살시킬 수 있지마는 여러 귀신들이 그 거라사인에게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라사는 유대 지역이 아니고 이방 지역 그러니까 갈릴리해 호수 동,서남쪽에 위치한 소위 텐스테리트 10개로 된 희랍화 때 방식으로 건설된 도시가 데카폴리스인데 이방 지역에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귀신들린 사람도 쇠사슬로 묶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악령세계의 왕이 사탄을 쇠사슬로 묶는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용을 잡았고, 첫뱀이요 옛뱀이라고 해도 되지만 알카이오스는 옛 고대의 뜻도 있지요. 그러나 첫뱀이라고 하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더 맞을 것 같아요. 첫뱀, 용이 바로 첫뱀이고 악마이고 사탄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도 용이 옛뱀이고 그 옛뱀은 악마이고 사탄이라. 이 옛뱀, 용을 잡았는데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용, 또 서양 사람에게 알려진 공룡, 그런 의미의 용이 아니라, 옛뱀인데 용이고 악마고 사탄이라. 그렇게 말함으로 첫뱀이 인류 역사에서 사탄의 도구가 되어 가지고 그런 의미의 사탄과 일치되지요. 그러면서 또 사탄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니까 용 자체도 옛뱀도 인류 역사상 생긴 큰 사건이 지금 일어났는데 그 용이 바로 악마고 사탄이라. 그 용을 잡았어요. 크라텐센, 잡았다는 말은 완전한 멸절은 아니지만 창세기 3:15절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지시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거죠. 창세기 3:15절에 옛뱀에 네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네 씨는 여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한 것에 그 약속이 성취돼서 잡히는걸 뜻합니다. 그리고 천년동안, 여기 비로소 천년이 나옵니다. 천년동안 결박했다. 그리고 무저갱에 던져넣고, 잠그고, 그 위에다 인봉을 하고 천년이 차기까지는 이방인들을 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자 그러면 여기 천년이란 수가 나오는데 천년이란 수가 6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면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이렇게 했는데 벌써 이 천년이란 말이 2절에 나오고 그리고 3절에 나옵니다. 천년이 차기까지 이방인들을 멸하지 못하게 할려고 그 위에다 인봉을 했다.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면 천년이 차기까지 만국을 이방을 멸하지 못하게 한다. 족속들을 멸하지 못하게 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 지금 결박을 하고 무저갱에 가두는 거죠. 자, 그러면 천년이란 수를 글자대로 지적한대로 볼 것이냐, 전번에도 말씀 드린대로 숫자도 특별히 문자도 상징적이지만 숫자에 있어서 제일 상징적으로 쓰인게 요한계시록 입니다. 여기 킬리아란 말이 2번 나옵니다. 천년동안을 결박하고 그 다음에 무저갱에 넣고 또 천년이 차기까지 만국을 멸하지 못하도록 그 위에다 자물쇠를 잠그고 인봉을 했다.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천년, 이 천년이란 말은 킬리아, 근래에 와서는 천년이란 말이 여기서 16세기 까지는 킬리아즘이라고 했는데 그후에 19세기 부터서 천년 나변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만약에 이 천년을 성경이 분명히 반복해서 천년이기 때문에 이 숫자를 글자대로 받아야 된다면 소위 144,000에... 처음에는 144,000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총수로 이해를 하고 가르쳤습니다. 너무 적죠. 한국인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그러는데 한국인 기독교인 중에도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이렇게 적어 가지고야 목사님 일하신 것 다 헛수고 아닙니까? 144,000 이게 너무 적으니까 유대인에게로 바꿨어요. 왜냐하면 계시록에 보면 7장에 보면 지파마다 12,000명 했다고요. 그러니까 지파마다 12,000명씩 했으니까 144,000명이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유대인의 총수를 144,000명이라 그렇게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주장도 안맞는 것이 이 천년기론에서도 무천론기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가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고 그러는데 그때 생존해 있는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고 주장을 하는데, 글자 그대로 받으면 지금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수도 약 3백만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기껏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 부터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만 며칠 못되서 만명이 넘었는데 며칠 못되가지고, 첫날 예수 믿은 사람이 3천명이죠. 며칠 후 앉은뱅이를 고치고서 남자만 5천명이라 그랬어요. 그래 보통 여자들이 언제든지 종교심 강하고 잘 믿으니까 3배를 계산하면 5천명 남자에 15,000명 여자가 함께 믿었다고요. 그 사이에 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죠. 그러면 초대교회에 벌써 베드로와 요한이 수사도로써 지도할 때 교회가 2만이 넘었어요. 최소한 그들은 정확하고 확실하게 안전하게 구원 얻는 사람들이란 말이예요. 우리는 세례 받고 예수 믿어도 믿는지 안 믿는지 잘 모르고 요새 목사님들이 운전하다가 다른 사람을 치고는 달아났다고 해서 전국에 화제거리가 있지요. 그래서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울 지경이어서 우리 한국 교회가 우리 목사님들도 예수 믿고 중생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마는 초대교회만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중생한 사람들 아닙니까? 성령을 어김없이 받은 사람들이죠. 왜요? 사도행전 2:38절 봅니다. 거기 보면 분명히 말을 했어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분명히 이 약속을 받고서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이 3천명이 하나도 예외없이 성령을 다 받았다고요. 그리고 이제 4장에 가면 4절에 남자의 수가 약 5천명이나 되더라. 남자만 5천명이예요. 여자까지 합치면 여자를 빼놓고라도 3천명에 5천명이면 8천명이죠. 남자가 5천명이면 여기 세 배 해서 24,000명, 만일에 여기다 8천을 더하면 3만이 넘어요. 초대교회 며칠 사이에 예수 믿어 중생하고 성령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은 사람들이 3만이 넘는다고요. 그런데 바울이 가면서 전도할 때 바울이 가면서 꼭 회당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했어요. 회당을! 물론 많이 안믿죠. 그렇지만 그 믿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회당을 꼭 찾아갔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내가 너희의 이방인의 빛으로 세우셨다고 회당을 세워가지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종을 시켜놨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를! 바울이 가서 복음 전도해 가지고 그 사람들을 싹 기독교로, 그러니까 죽일놈이죠. 바울이 한마디로! 간데마다 회당마다 찾아가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데 이스라엘만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애를 써 가지고 개종해 놓은 이방인 유대인들을, 그러니까 하여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전부다 기독교로 싹싹 몰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스치고 지나간 곳은 이제까지 수고해 놓은 그 프로스타이트, 이 개종자들을 제다 기독교로 몰아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이 가슴에 분이나고 치솟냐구요.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죽일놈이고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외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자기들만 예수 믿으라고 권고한 것이 아니라 이 자기들이 수십년 애써갖고 개종시켜 논 이방인들을 전부 다 기독교로 돌려 버렸다고요. 바울이 보통 고도한 전략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할 때에 그 개종한 이방인들만 기독교로 돌아오고 배척을 대부분 했지만 왜 예수를 안 믿었어요. 그리고 지금 지파마다 12,000, 그렇게 하지만 지금 12지파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 하나님께서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중동 제국에 흩어 버리신 이후에 최소한 열 지파에 관한 한은 지파의 연결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완전히 흩어버리셨다고요. 남은 건 유다 지파 하나예요. 그리고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바로 그 베냐민 지파가 예루살렘 수도가 있는 그 지역 아닙니까? 제일 작은 지역 인구도 제일 작고 그 배반을 하면 이 지파가 제일 먼저 배반을 해야 했는데, 왜요? 사울, 자기의 지파에서 나온 사울을 죽이고 또 사울의 후손들을 다윗이 임금이 되어 은근히 자리가 잡히니까 혹시 반역이 날까 전부 다 데려다 죽여 버렸잖아요. 다윗이 보통 정략가가 아니예요. 그리고 절름발이 므비보셋 하나만 남겨 두었다고요. 절름발이 므비보셋을 누가 옹위를 해서 반란을 해서 금위의 왕으로 세울려고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없죠. 못하는거죠. 다윗이 사울의 후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 열 지파에서 한번의 반란이 또 날 수 있을 것을 염려해서 또 죽여버렸다. 그리고 또 보십시오. 압살롬의 전쟁을 피해가지고 요단 나루를 건너올 때에 소위 베냐민 지파 시므이가 발설 저주하고 건너갈 때 그러고 했는데 그 때에 열 지파가 나와서 임금님을 다시 모셔들였다 말예요. 왜냐하면 열 지파가 압살롬을 앞세우고 반란에 크게 가담을 했으니까 남은건 유다 지파 하나 뿐이라고요. 그 때에 유다 지파는 자기 골육이니까 더 가까이 꽉 잡아 논 후 가라. 소위 삼국지에 유비를 중심으로 해서 장비하고 관우 그 후에 가담한 조자룡이가 유비를 꽉잡아 다른 사람이 접근 못하도록 하듯이 자기 지파니까 꽉 짜는데 끼어 주질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팔 불면서 “가라 너는 너희 집이나 지켜라. 우리 지파는 이스라엘은 상관이 없다” 그러지 안했어요? 나팔을 불고 그렇게 외친 자가 누굽니까? 이름이...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는 뭐라고 그랬어요? 저 요압을 보내서 잡아 죽이라고 했지요. 압살롬의 반란 보다 더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압살롬은 자기 아들이지만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대표로 선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반란 할 수 있는 것을 뜻하거든요. 그러니까 반란을 하면 베냐민 지파가 제일 먼저 반란을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유다에 붙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유다화 해 버렸어요. 베냐민 지파로 남지 않습니다. 없어요. 베냐민 지파가 남지 않았다고요. 남은 건 유다 지파 하나 뿐이어요. 혹시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생각에 혼동이 올까 봐서 내가 좀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여기 자유주의자들이 창세기에 요셉의 앞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서 담보하면서 호소하지 안해요? 그걸 뭐라고 해석을 했느냐 하면, “후일에 유다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자기집 속에 병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후에 써놓은 것이다” 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다 제치고 마지막에 베냐민을 담보하는 사람이 유다잖아요. 요셉의 앞에서! 그럴 때 이 부분을 해석을 하기를 몇 장입니까? 44:18-34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 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나로 그를 목도하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하기를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말째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고하였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비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말째 아우가 함께 하면 내려 가려니와 말째 아우가 우리와 함께함이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자, 눈물 없이 못볼 성경부분이 이 부분인데 이게 유다가 완전히 베냐민을 담보한다고요. 자기 생명과 바꿔요. 이 성경부분을 자유주의자들이 해석을 하기를, 후에 이스라엘이 두 왕조로 나뉠 때에 유다가 이스라엘을 차지한 것에 대한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여기 이 부분을, 베냐민 지파가 유다에 병합되어 가지고 다 유다인으로 화해 버렸고 실제로 약 4만여 명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유다 지파 속에 베냐민 지파도 있었겠지만 몇명이나 있었는지도 의문이 아니라 그래서 남은건 유다 지파 하나 뿐입니다. 그래서 이 없어진 열 지파가 어디로 갔느냐? 해변 기구한 마을들이 많아요. 그래서 영국을 뭐라고 말합니까? “브리튼”이라고 그래요. 바로 열 지파의 족속들이 브리튼 여기에 와서 살고 영국을 세웠다. 히브루가 세운 나라 그래서 브리튼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 단 지파가 없어졌잖아요. 중간에 단 지파가 없어졌는데 이 지파가 한국 족속의 조상이라. 우리는 택한 백성이예요. 하하하... 야곱은 저주에서 끝냈는데 남은건 12지파가 아니라 한 지파 뿐이예요. 지금! 그러니까 유대인 아닙니까? 어디든지 이스라엘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세울 때에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논쟁을 많이 했어요. 그때 결국 옛날의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해서 이스라엘로 택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나라 이름 말이예요. 자기들이 유대인 뿐인데 이스라엘이다. 이름 붙이는 명분이 없잖아요. 유대라고 해야 맞는데 옛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고 붙인거예요. 건국의 아버지 벤구리온과 그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그리고 기는 다윗의 기를 상징해서 그것을 정했지요. 남은 지파가 12지파가 아니라 한 지파 뿐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지파가! 그런데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나머지 11지파가 살아 부활해서 나올 것입니까? 그래가지고 예수 믿을 것입니까? 하하하... 어때요. 144,000이 이스라엘에서 믿는 지파라고 할 때면 주님 재림 전에 부활한 그들이 믿는다고 보아야 맞지요. 자, 144,000이! 
그러면 24장로는 어떠해요? 이것도 전에 말씀드린 대로 144,000은 구약의 대표 12지파와 신약의 12교회의 사도로 대표되는 신약교회에 몇을 해야 144,000이 되지요? 1,000을 곱해야 되지요. 왜 1,000입니까? 고대 세계에 항상 고대 세계의 수의 개념에 있어서 수에는 항상 힘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0은 항상 완전수입니다. 희랍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완전수인 10에 3제곱한 것이예요. 그래가지고 구원얻는 총수를 말한 것이지요. 자, 최소한 바울 사도 때의 신약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십만은 넘어야 되지요. 그것 못되겠어요. 아무렴! 지금도 몇 수천 명씩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개종해서 기독교로 돌아오는데! 그러니까 144,000은 신구약 교회의 구원얻는 총수의 대표로 보아야 됩니다. 글자대로 이스라엘에서의 12지파의 144,000이 아니고! 12지파가 분명히 없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베냐민 지파도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유다인에게 통합되어 가지고 없어요. 지금 남은건 유다 지파 하나 뿐이라고요. 
오스카 쿨만이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처음 택하셨어요. 많은 인류 중에 하나를 택하셨어요. 족속을 분립하셨어요. 12지파로 큰 민족을 이루었어요. 10지파를 헐어버리셨어요. 한지파 남았지요. 베냐민 지파는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수가 워낙 적으니까! 본래부터서도 본래부터 작은 지파인데 그 베냐민 지파가 첩의 어느 제사장의 첩을 가지고 첩이 음행을 했기 때문에 전국으로 자기 아내를 12토막을 내어가지고 전국으로 자기 아내를 보내었더니 와서 싸움을 했는데 다 쳐죽여 가지고 600명 밖에 안남았잖아요? 다 몰살해 버리고! 세상에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베냐민 지파가 600명 밖에 안남았습니다. 여자까지 다 죽여버렸어요. 싸움판에 마지막 싸우다가 600명만 남았다고요. 근데 아무도 베냐민 지파에게 여자를 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를 했단 말이예요. 그러니 어떡해요. 여기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지파가 누군가?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사람들이 와서 춤추게 해 가지고 거기에 몰래 숨었다가 납치해다가 아내를 삼게 해 가지고 베냐민 지파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살아나도 얼마나 수가 많았겠어요? 수가 몇명 안되는거지! 그리고 남은건 유다 지파 하나 뿐이라. 여기에 글자대로 무슨 지파에서 12,000명 무슨 지파에서 천명, 그러니까 이것을 글자대로 해석을 하면은 저런 면에 봉착을 해요. 여기 보십시요. 유다 지파가 첫번에 나왔지요. 그런데 단 지파는 안나오거든요. 여기도 단 지파는 안나와요. 단 지파 나옵니까? 그러니까, 자 그러면 12장로, 보좌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시고 12장로가 24보좌가 있는데 거기에 장로들이 앉아 있다 말이예요. 하나님께도 찬양을 올렸지만 어린 양에게도 같은 경배를 드렸어요. 면류관을 벗어 던지며 경배 했습니다. 이 24장로 24명 밖에 안되지요. 구약의 12장로인데 왜 24장로입니까? 신약에는 장로 제도가 없잖아요? 물론 후에 와서 생기긴 했지마는 신약교회에 12장로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구약 교회의 12지파를 표시하는 대표에다가 족장은 한두명씩이지요. 그 다음에 신약교회의 대표가 되는 12사도, 그래서 24장로, 구원얻는 자의 총수의 대표를 말해요. 
성경 자체가 자기가 영해라고 하는데 이것은 꼭 문자대로만 보게되면 문제가 많지요. 그리고 천국에 갔을 때 지금 여기가 이 24장로를 표현하는 그 성경 부분이 또 천상 세계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라고 하면 영들이 가서 앉아 있는 보좌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 의자에 앉듯 그렇게 앉을 솔로몬이 앉는 그 보좌와 같은 그 보좌가 천국에 24개 있어요? 어떻습니까? 우리가 너무 세대론의 思考에 의해서 백년 동안 내려오면서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 익어가지고 여러분이 얼른 이해하고 납득되기가 어렵지요. 생각해 보세요. 이게 지금 천상의 장면을 말하는데 거기에 12개의 보좌가 있어요. 우리가 이런 의자는 아니겠지만 솔로몬이 앉은 의자와 같은 그런 보좌와 같은 일곱 층계에다가 양쪽에 층층계마다 사자가 하나씩 있고 손걸이에 사자가 있고 그냥 우리나라 비원과 같이 있는 궁,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궁, 거기에 가보면 임금이 앉는 보좌는 서너층 올라가서 앉는데 솔로몬은 일곱층이나 되지요. 거기다 상아로 금을 입히고 그럴 때 중동세계에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한다고요. 그런 보좌가 저기 위에 24개 있어요. 육체니까 의지가 필요하지요. 영의 세계에 왜 의자가 필요해요. 하하하... 그렇다고 난 결코 영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24장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24장로가 아니라 신약교회와 구약교회의 대표들로써 표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장에 나와 있습니까? 4장입니까? 네. 자 여기에 6절에 있는 보좌가 어디를 말하느냐 그러면은 하나님의 보좌를 뜻하겠지만은, 보면 이 보좌 주위에 보좌 안에 보좌 가운데 네 생물이 있는데 여기 보면, 이 보좌가 24장로들의 보좌가 오히려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스킬더가 해석했던 대로 종말에 가서 우리가 구원 얻을 때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치가 천사 보다 더 높아요. 자,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24장로를 그런 식으로 문자적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다음 666 한번 더 해 보십시다. 그동안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고 그러던데 그동안 크레디트 카드에 이렇게 크레디트 카드의 넘버가 긴 지는 모르겠지만은 이렇게 해 가지고 저렇게 일련번호를 쓰고 이름이 나왔어요. 크레디트 카드에! 그래가지고 요새는 또 세대론에서 여기다가 손등에다 번호만 있으면 문이 열리고 돈이 나오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계가 일을 좀 많이 하겠지요. 여기다 탁 해놓으면 전파를 받아가지고 계산을 해서 문을 열어주고 돈까지 내어주면 기계가 일을 좀 많이 하고 수고를 하고...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한 5세대 컴퓨터가 나오면 그럴 수도 있지요. 지금 우리가 3세대 컴퓨터가 있지 않습니까? 5세대 컴퓨터가 나오면 지금 미국과 일본의 컴퓨터 전문 연구가들이 지금 애쓰고 있는 것이 사람처럼 키펀치에다가 이렇게 넣어주지 않고도 컴퓨터 스스로 정보를 수집해 가지고 판단 내릴 수 있도록 그러니까 완전히 인공지능하고 사람지능하고 같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 단계를 지금 연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은 컴퓨터가 지금 ( )수준에 와 있지만 이것을 넘어서서 진공관에서 이제는 10세대 가이젤 10세대... 얼마나 작은 칩을 만들고 만드냐가 이제 승패를 좌우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왜냐하면 속도가 빨라야 되니까 용량을 많이 집어넣고 그 세대에서 5세대에 가면 이제는 컴퓨터에다가 자료를 입력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컴퓨터 자체가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때는 윤리적인 것도 컴퓨터가 해 준다고요.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윗마을로 갈까 아랫마을로 갈까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일이 두 개 있을 때? 친구가 끄는데로 가지요? 술한잔에 강남까지 따라간다는 말도 있는데, 친구가 끄는데로 가요. 우리가 사실은 도덕적인 결정을 정확하게 해서 결정하는 일이 드물다고요. 그런데, 이때는 5세대 컴퓨터가 나오면 사람이 해야 할 도덕적인 선악의 결정도 컴퓨터가 해 가지고 지시를 내려 줄 때가 오지요. 자가 판단하기 힘드니까! 가령, 결혼하기 위해서 A와 B라고 하는 둘이 동등하게 가치가 있고 좋은 사람이 둘이 나타나서 선을 보았는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요. 어떻게 택하지요? 정말로 이쪽을 보면 이쪽이 정말로 좋고 저쪽을 보면 이게 참 좋은데 어느것을 택해야지요? 정말로 힘들 때는 자기가 하기 보다는 부모나 중매쟁이 말이 영향이 클 수 있지요. 그러기 힘들 때는 컴퓨터에다 넣고 물어보는 수 밖에 없어요. 기계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기계가! 죠지 오웰의 소설에 이르는 데로 사람들이 기계에 종이 되어서 기계 아니면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곧 와요. 제가 과천으로 이사를 가서, 여러분 앞에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방안에 거실에 밥먹고 있는데 광고가 나와요. 관리실에서! 오싹해요. 오싹! 광고가 나오는데! 그런데,죠지 오웰의 소설에 보면 광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수신도 하지 않아요? 조금 기계가 발달하면 수신을 못합니까? 그래가지고 주인공 집이 벽의 거울이 안비칠 수 있는 저쪽 벽에 가서 일을 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안비칠려고. 정보가 안들어가게 할려고! 그런데 완전히 기계가 정해준 대로 한다 말이예요. 모든걸 기계한테 물어본단 말이예요. 그런 세대가 곧 오는 것이지요. 思考하기 싫고 귀찮고, 혹시 내가 잘못 선택해 가지고 일이 뻥 떨어지면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높은자리에 자꾸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 경쟁사회에서 최후의 결정을 맨 마지막에 중역회의가 열려도 마지막에 힘들 때에는 두 개 선택안을 두어 가지고는 마지막 회장에게 넘깁니다. 그러면 회장이 결정해야 하거든요. 어느것을 결정하느냐가 그 회사가 살아남느냐를 결정한다고요. 그러니까 보통 결정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요. 괜히 잘못 선택해 가지고 밀어가지고 나중에 뻥 해 버리면 회사는 망하거든요. 한국에는 아직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은 높은 자리 때문에 다 행세를 할려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잘 안할려고 해요. 자, 666, 666이 짐승의 수이기 때문에 이제는 은행의 거래도 심지어 안해야 되고 그런다고 말하지요. 여기 보면 계시록에 뭐라고 했어요. 이마에 표받지 않는 자는 장사를 못하게 한다고 하잖아요? 장사를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이거든요. 이제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요 금융시스템이 완전 전산화로 통일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 통신망을 미국에게 개방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개방을 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금융정보,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던 미국의 중요한 항공회사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 항공회사를 통해서 모든 중요한 정보들이 거의 다 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고객들의 은행구좌가 전부 다 들어가 입력되거든요. 그러니까 전부 다 그게 해외로 나간다고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다 은행 전산망에 다 통일되지요. 그럴 날이 곧 와요. 지금 우리 현대 문명이 가고 있는 방향이 적그리스도가 올 수 있도록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 오느냐? 뭐 1학년 반에서 그러는데 이장림 목사가 1999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답했느냐 하면 몬타누스도 그렇게 예언을 했고, 16세기에도 그렇게 많이 예언을 했고, 17,18, 19세기에도 예언을 했고, 그런 예언을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염려할 것 없다 그랬어요. 그러면서 내가 한마디 더 했어요. 이초석 하고 이장림 하고 다른 사람입니까? 나는 같은 사람인 줄 알고 이해를 했는데 다른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예언을 1992년에 한국 정치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 까지 예언을 다 했다고 하기에 한마디 더 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영이 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영 없이는 결코 그렇게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자, 666이 적그리스도의 수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666을 적용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이레니우스의 말대로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앞당겨서 말할 수가 없지요. 이것은 크레이다누스가 해석했던 대로 6은 천지창조의 6인데 6일에 창조된 창조를 말하고, 60은 창조가 역사의 과정을 다 마침을 말하고, 600은 이 과정의 완성에 이름을 말한다. 그래서 이 인류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나타날 악의 화신, 그것이 666으로 표시된다. 자, 그러면 수, 영물을 사람으로 우리가 아는 그와 같을 것으로 묶을 수 없다. 복음의 권세다. 복음의 권세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권세 아니고는 악령을 제재할 길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악령들이 그전에 악함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들로 그들이 무장 해제되었고 어떤 면으로는 선히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세상을 다 동원해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박멸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이것이 천년간 감금됩니다. 쉬었다가 하지요. 
그런데 여기 20장에 보면 왜 사탄을 결박하느냐 하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여기 1,000년이 차기까지 이렇게 감금되는 것은 이방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할려는 목적으로 인봉을 한 것이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사람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악령들과 사탄의 권세들을 죄악에서 다 악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인류를 다 망하지 못하게 했고 그리고, 또 교회를 박멸하도록 하는 일을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천년간 감금됨이라. 천년이 무엇이냐? 문자적으로 천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고 교회가 지상에서 존속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멸할려고 하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의 사탄의 역사의 제약됨, 그것이 천년간이라고 이해해야 맞습니다. 문자대로 이해를 하면 여기만 문자대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해를 해야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만이 봉착하게 되고 그리고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이 진행되는 해석이 계속 연속되지요. 호기심, 호기심, 호기심... 자꾸 그런 것을 충족하기 위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게 될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4절에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Καί εΐδον θρόνους καί έκαθισαν έπʾ αύτούς καί κρίμα έδόθη αύτοΐς, 그리고, 보좌들을 보고 그 위에 앉은 자들을 보았는데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고 καί τάς ψυχάς τών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목베임을 받은자들의 영혼이 있었다. 짐승을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 그 짐승의 상을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 
자, 거기다가 짐승의 수를 안 받는 자들, 받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번 천년이 나옵니다. 천년이! 그들이 살아서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했다. 자,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했다. 
그들이 살아서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했다.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받지 않는다면, 여기도 보좌에 앉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라. 그들이 살아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함이 이 부분을 해석을 하기를 순교자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함을 말합니다.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 부활한 영체가 아니고,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 보좌에 앉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다스렸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도 그렇게 번역했겠지만 여기 보면 목베임 받은 자들의 영혼이 보좌에 앉았고 또 주어졌고 천년간 다스렸는데 전부 다 단순과거로 되어 있어요. 단어들이 단순과거 그러니까 그들이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의 통치에 동참한 것을 천년간 왕노릇 함이라. 여기서 분명히 부활한 성도들이 아니고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 아직 천상의 일이지, 지상 천년왕국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짐승을 경배하지 안했다. 그리고 짐승의 상을 경배하지 안했다. 이렇게 이 부분을 가지고 이 부분의 강조점을 놓고 해석을 하면 세대론자들 처럼 해야 맞아요. 왜? 짐승이 무엇이지요? 그리스도죠.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그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그들이 목베임을 받은 자들이고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상을 경배하지 않은 자들이고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다가 표를 받지 아니했다. 그리고 손에도 표를 받지 안했다. 그들이 살아서 천년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했다. 그리고 천년동안 차기까지 나머지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더라. 자, 여기 천년이 차기까지로 했으니까 천년전에 부활을 해 가지고 천년동안 왕노릇한 것이 이것이고 그 이후에 천년이 차기까지 나머지 죽은 자들이 부활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이라. 첫째부활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제 첫째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하늘에서 동참한 것이고 둘째는 중생으로 봐요. 왜? 요한복음에 예수 믿는 것을 중생한 것을 부활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첫번째 부활이다. 그리고 이 첫번째 부활에 동참한 자들이 복되고 거룩하도다. 그 두번째 사망이 그들 위에 권세를 갖추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서 천년동안 그와 함께 다스리실 것이라. 
자, 그러면 보통 세대론자들로 부터 제일 무천년이 공격을 받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무슨 부분이냐 하면, 바로 첫번째 부활은 중생으로 치고 두번째 부활은 사실대로 부활로 치면 첫번째 부활을 영해한다고 하는 면에 대해서 답을 잘 못해요. 자, 통치가 통치로 순교자들이 가서 기도, 성도들이 기도하지요. 우리가 보통 궁하면 기도한다 그러지요. 아쉬운 사람이 샘 판다는 식으로! 다급해야 기도가 나오지요. 급해야! 어때요? 목사님들도 개척할 때에 기도많이 했지요? 하지만 봉급도 제대로 나오고 할 때는 기도가 빨리 나옵니까? 산에 가던 걸음도 좀 뜸해지고 산에 가도 기도 열심히 하는 일보다 설교 짓는 일이 더 급하지요. 물론, 가서 기도 많이 하시겠지만 다 어려우면 기도하거든요. 어려우면! 생활이 여유있고 봉고라도 굴리시다가 자가용쯤 굴리시게 되면 또 상황이 달라지지요. 좀 덜 급하니까 기도가 덜 간절하거든요. 사람이 그래요. 사람의 본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지요. 어렵고 괴롭고 그래야 기도가 나오지... 저도 그랬습니다. 83년에 우리 아이가 3층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지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첫날밤 잠도 못자고 하루 저녁 종일 부르짖었어요. 다음 두번째 수술했습니다. 의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자 흔들고 있지요. 그런데 살아났어요. 의식이 회복되었습니다. 기도가 그전보다 강하지 안해요. 하하하... 
자, 어떻든지 간에 우리가 어려워서 기도를 했든지 어떻든지 간에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다 작정해 놓았다고 믿지만은 기도함으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구요. 하나님의 작정하고 어떻게 연관되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고 또 그것도 헤아려 볼 일이지요. 선택교리하고 늘 따지듯이 그것도 한번 따져 보실 일이예요. 하나님이 일을 다 작정해 놓으시고 예정해 놓았으면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 되요? 안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힘 다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의해서 세상을 역사하시고 다스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지요. 그리고 이 부분을 크레이다누스가 주석을 해서 말하기를 왜 서구사회가 잘되냐? 요한계시록을 크레이다누스가 쓸 때가 1931년인가 그래요. 그 분이 소위 자유대학에서 헤르만 바빙크 밑에서 헤르만 바빙크가 자유대학으로 와서 학위를 준 첫번째 사람이 크레이다누스 입니다. 소위 “성육신과 비하”란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썼어요. 그 이후에 목회하면서 크레이다누스가 주석을 많이 했고 가장 우리말로 하면 극보수로서 주석을 했어요. 그분은 주석에다 말하기를 서구가 잘되는 것은 먼저간 신앙의 조상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잘된다. 지금은 다 기독교 밖으로 벗어나고 서구가 저렇게 잘못되어 가고 미국도 자꾸 망해가고 그러니까 이제 사탄의 놀음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자, 다음에 이제 만국을 미혹함이 사탄이 풀려난 다음 만국을 미혹하는데 이제 전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도록 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때가 사탄이 놓여나는 것이지요. 그때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날 때에 적그리스도 때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서 사탄이 이제 완전히 놓여나서 악이 이제 제재됨 없이 완전히 풀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교회를 극렬하게 박해하게 될 것입니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계 20:7-9) 여기 마침내 마지막 종말에 가면 이제 전 기독교를 박멸하도록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기간의 끝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난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신적인 통치를 하시는데 피조물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종말내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죠. 만국을 미혹함은 전 이방을 다 모아서 그리스도를 믿는 마지막 남은 자들을 다 쳐부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아직도 닫힌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연구를 많이 하셔가지고 잘 조금 바르게 하실 수 있는 주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석가가 못되고 그래서 깊은 주석들은 제가 못합니다. 저도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서 정말 바른 주석을 요한계시록을 바로 설명할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천년전기는 이대로 마치고 간단하게 남은 시간에 천년후기 하고 나머지 순서대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오늘 남은 시간에 하고 다음 한시간 더하고 마치도록 할까요? 원래는 7월 첫주까지 하기로 했는데 언제까지 하느냐고 물으시는 속에는 6월 말에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나타내시는 걸로 제가 이해를 합니다. 
이제 천년후기는 별로 크게 성하지 못하지만 우리 한국에서 잘 알려진 로뢰인 뵈트너가 가장 대표적인 천년후기론자라고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 천년후기론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개인들의 영혼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의 권세가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 복음의 권세로 사회를 재조직하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 전세계적으로 의와 화평이 지배하는 천년의 때가 주님재림 전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후천년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단지 개인들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자리에서 나아가서 사회제도와 조직들을 다 바꾸므로 전세계적으로 의와 화평이 지배하는 세계가 천년동안 있을 것이라 하는 주장이 천년기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람이지요. 복음이 전파되면 복음의 권세로 사회가 변화되고 새사람들이 되므로 사회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 되길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다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적은 수로 예수 믿을 때는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모범이 되고 기둥 노릇들을 했는데 지금 천만 인구가 되니까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또 함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많은 훌륭한 백성들이 우리 한국 백성들이 줄을 지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수가 늘어간 만큼 한국교회가 변화되지 못했고 그리고 한국사회가 변화되는 일을 못했어요. 그것은 우리 교역자들이 잘못해서 생긴 병이지요. 그러나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콘스탄틴 대제가 국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 다음에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전부 다 정치 세력이 그러했기 때문에 교회로 많이 들어왔어도 그들이 다 어떻든 강제로 칼의 힘으로라도 모든 백성들을 다 교회로 들어오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거스틴 까지도 그것을 찬동해서 모든 이방인들이 다 강제로 교회안으로 들어오게 했다고요. 그러니까 다 들어와 놓으니까 이제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일이 없는거죠. 교회로 들어오는데 문을 철폐해 버리고 나니까 교회안과 밖에 구분이 아무것도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출생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등록되고 그렇게 됨으로 별로 우리가 이상적으로 중세사회가 진행되었을 것 같아도 매일 어두운 시대였고 참 죄악이 성한 시대였죠. 우리같이 이렇게 복음이 많이 전파되는 것도 이렇게 사회를 변화시켜서 기독교적인 나라가 되기가 어렵죠. 그리고 아브라함 카위퍼가 19세기 1837년에 출생을 했어요. 1987년이 그의 탄생 150주년으로 책을 모집한다고 그랬어요. 아브라함 카위퍼 책이 번역되거나 연구되었으면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전혀 돕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카위퍼가 화란이 기독교 국가 개혁파 나라가 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노력했고 또 그것을 잘 정리한 헤르만 바빙크가 보다 한 15년 후에 출생해서 아브라함 카위퍼 보다 한해 후에 1921년에 죽었습니다. 1920년에 카위퍼가 죽고 바빙크가 21년에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고서 한 반세기가 지났을 때 쯤 내가 76년에 화란에 갔으니까 화란에 갔을 때에 아직도 아브라함 카위퍼가 화란 사회를 만들어 놓은 흔적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화란 사람들은 항상 큰 유리창을 앞에다 다는데 그 사람들은 2중 커텐을 해요. 그런데 그들은 잠자기 전에 커텐을 다 닫지를 않습니다. 큰 커텐을 항상 열어 놓아요. 그러니까 항상 가느다란 커텐을 치는데 그러니까 밖에서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빤히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실에 앉아서 부부가 일을 하는데 밖에서 들여다 보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도록 다 정장하고 자기 일을 다 하고 있어요. 그리고 암스텔담 시내가 도시이기 때문에 세속화되고 탈교회화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크지만 변두리에 아직도 시골에 가보니까 거의 다 교회에 나가요. 그렇지만 화란의 도시들이 세속화 된 것 이런 큰 신학자들이 나서 크게 활동한 나라들이 50년이 지나고 난 후에 내가 가보니까 너무 탈교회화 세속화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손님들이 왔을 때 제가 그 말을 했어요. 정말 50년이 지난 이후에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는가? 그런데 복음이 많이 선포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지만은 그러나 갈수록 악이 성행해지므로 교회가 전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 사회의 영역을 지배하는 영역에서 자꾸 후퇴하지요.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배도가 심하게 일어났는데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가지고 전세계적으로 기독교화된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어려운 것이죠. 배도가 갈수록 보편화 됩니다. 그리고 암스텔담에 가보면 혼델파크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공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화란의 민족적인 혼델시를 기념으로 만든 아주 큰 공원이 있습니다. 완전히 인조공원이죠. 화란은 산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인조 숲을 만들어 놓은 공원이예요. 그런데 가보면은 별별 짓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욕하는 사람도 많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여름에 가보면 이제 우리는 이해를 해야지요. 햇빛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 돈이 많아서 전부 다 여행 갈 수 없는 일이고 그냥 공원에 누워가지고 여자들이 전부 다 완전히 해수욕 차림으로 앉아서 일광욕 한다고 누워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그런데 또 그런 옆에서 요가를 하는 사람... 별별 짓 하는 사람 많거든요. 그리고 교회에 가보면 참 적은 수가 모여요. 모여도 복음은 별로 없고 세상 이야기만 주로 해요. 이렇게 많이 황폐화 되는데 복음이 앞으로 선포된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화 되고 주께로 돌아오는 그와 같은 천년기간이 앞으로 온다? 언제부터 천년인지도 모르죠. 왜? 주님이 오실지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언제부터서 지상 천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배교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고 그리고, 또 로마교회 지역들이 거의 다 탈교회화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 낳자마자 세례 받아서 로마교인으로 입적을 하지마는 교회는 나가지 않죠. 결혼할 때 나가고 크리스마스 때 한번 나가고 혹은 부활절 때 한번 나가고 그런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죄악이 많지요. 우리처럼 죄악이 많고 우리처럼 돈이면 다 되는 사회는 아니지만은 그러나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나라들 너무 죄악이 엄청납니다. 거룩한 도시라고 하는 로마가 한국 사람들이 다녀보고 제일 살벌한 도시라고 워낙 관광객들이 많이 오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은 그리고 1789년 불란서의 혁명으로 교회를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리고 100년 후에 다시 공산주의가 볼쉐비키 혁명으로 세계 인구의 1/3 이상을 혹은 반 정도를 공산주의 손아래 넣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들이 계속해서 지금 현재 열리고 있는 것 보면 계속해서 열리겠지만은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데 그들이 대대적으로 기독교로 돌아와서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옛날 1789년 불란서 혁명 이전까지 교회가 태평을 누리던 그 시대는 지지하는 교회... 
천년기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환란이 많이 넘치는데 이와 같은 환란이 심하고 악이 흉흉하고 배교가 보편화 되어 갔던 상황에 기독교로 되돌아 온 일이 있겠느냐? 나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심지어 화란 신문에 만평이 났어요. 교회가 모이다가 안 모이니까 이제 초생달을 그려 놓았어요. 그 다음에 부엉이가 울어요. 그리고 교회는 문 닫습니다. 그 건물들을 회교들이 사 가지고 회교사당으로 합니다. 그리고 회교 예배당으로! 회교는 굉장히 성한데 기독교는 말로 할 수 없이 쇠퇴해 가거든요. 내가 켈리를 만나가지고 그 사람이 부인은 영국 사람인데 자기는 부모 때 영국에서 이민을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미국 개혁파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데 영국의 신자가 지금 어느 정도냐 물었어요. 크리스챤 신자가 얼마냐? 10% 미만이다. 그러니까 5천만이면 5백만이 못된다는 말이예요.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개신교가 5백만이 못된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부인이 연속해서 그 다음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노동자들 편에서 전혀 일하지 못했다. 전혀 영향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 갭을 누가 메웠느냐 하면 웨슬리와 그의 부흥운동이 그 영적인 요구를 메웠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교회가 그렇게는 심하게 안되었지만은 독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도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그렇게 어려움 당할 때 교회가 전혀 눈감아 버리고 노동자들 편에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도 탈교회화가 너무 심한 것 같아요. 가끔 TV에 독일예배가 방송이 됩니다. 참 너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수가 모여서 예배를 한다고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 그와 같은 상황에 있는 구라파가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또 남미같은 나라 가정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나라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나라들이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형식은 다 기독교지요? 이태리가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스페인, 포루투갈이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세속화된 영국이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불란서가 기독교로 돌아간다? 화란도 45% 이상이 자기는 무종교라고 쓴다는데 그들이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어렵죠. 이방 잡종은 성해가는데 앞으로 천년동안 복음이 전세계를 지배할 때가 다시 온다.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전통적으로 그들은 받지 않습니다. 환난이 온다든지 하는 것을 거의 경미하게 배도같은 것도 아주 경미하게 쳐요. 전 세계적으로 배도가 말할 수 없이 진행된 것이 사실인데... 
그 다음에 격변, 그래서 큰 환란과 큰 어려움이 경미하게 있다가 영원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렇게 말하는데 환란이 크게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환란이 없는듯 하다가 영원의 세계로 넘어갈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와 같이 복음의 능력으로 사회를 전부 다 바꾼다고 하기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까지 사회복음주의가 미국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월터 라우센부시 같은 사람이 복음으로 모든 것을 기독교화 한다. 최소한 1950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할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그래도 기독교 국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착각하고 있는데 결코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미국만큼 범죄가 심한 나라가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 총을 갖고 있습니다. 경찰력 가지고 안되거든요. 우리도 경찰력 가지고 안되니까 전경을 쓰지 않습니까? 경찰력 가지고 안되니까 거의 다 총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경찰력 가지고 안되니까 우리 한국의 공장들은 잘 모르지만 공장들도 전부 다 시크리트 가드라고 해서 무장까지 시켜가지고 그 회사들로 하여금 무장을 해가지고 경비하게 합니다. 경찰력이 안되니까요. 마약, 매음, 살인, 강간, 그런 것들이 미국의 빈민가에서는 말할 수 없이 매일 일어납니다. 미국의 범죄에 대한 것은 내가 어떻게 말로도 할 수 없어요. 흑인가에서는 대낮에도 마음놓고 걸어다니지도 못해요. 한국도 지금 그런 비슷한 상황이 될려고 그러지요. 그것이 50년대까지는 괜찮았다는데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요. 학생들도 왜 이렇게 되었느냐?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런데 솔직하게 그들이 고백하는데 학교에서 예배와 말씀 배우는 것을 폐지하고 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임영우 목사라고 LA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와서 그러는데 그 일을 일본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그러드라구요. 종교라고 하는 것은 너희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종교는 기독교만이 아니다. 그래가지고 그 법을 없앴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일을 하는데 제일 앞장 선 사람이 내가 알기로는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친 사람! 이 사람이 폴 틸리히를 미국으로 초청한 장본인 입니다. 그런데 라인홀드 니버가 제일 앞장서서 국가가 종교에서 부터 중립해야 된다 해가지고 공립학교에서 하나님 말씀 배우고 기도하는 것을 다 철폐시켰습니다. 레이건이 다시 할려다 못했지요. 한번 떠나면 되돌아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복음의 능력으로 이렇게 한다는 주장 외에 이 교육과 그리고 문화와 과학을 이와 같이 천년의 때를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후천년기에! 그렇게 때문에 천년후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화론적인 경향으로 제일 빨리 넘어갑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도입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손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가져오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도 그것은 토르쏘예요. 토르쏘! 조각품의 몸, 다리, 팔, 다 없어지고 몸둥아리만 남는 것, 그러니까 인간의 죄성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 어떠한 형태로 아무리 기도굑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도 그것은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것이고 그리고 파편적이고 토르쏘이지, 결코 우리 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회개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간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는 것이고 복음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재림까지고 이만큼 했어요. 그 다음에 부활, 재림 전후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로 이때까지 오래 했는데 재림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는 모든 인류와 함께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고 또 이제까지 공교회가 신앙고백으로 동일하게 가르쳐 온 주장입니다. 믿는 자가 먼저 부활하고 불신자가 천년 후에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동시에 부활하고 변화됩니다. 그것이 부활이예요. 보편 부활, 그리고 일회 부활이다. 모든 인류가 아담부터서 마지막 죽은 자까지 다 부활에 이르고 다 변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번으로 이루어진다. 
그럼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이냐? 1999년 있을 것이냐? 내가 신앙이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재림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빨리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몰라요. 언제가 종말일지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빨리 오지 않습니다. 난 그렇게 봅니다. 물론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너무 급격하지만, 인류의 진보의 속도를 보면 아직도 초보단계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제까지 역사를 쭉 살펴보면 새롭게 전개되는 학문의 영역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리고 자연에 대한 탐구가 많아서 이용이 커져도 아직도 탐구해야 될 영역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89년입니까? 10년 후에 부활이 온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이장림 목사가 나는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2,000년 주전 4,000년, 주후 2,000년, 6,000년 그친다. 결코 그렇게 될 것으로 난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제 긴박한 종말 의식으로 사는 것은 바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 카위퍼가 말했던 대로 종말을 강조하면서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사명을 회피하기 위하여 종말을 강조하는 것은 전혀 바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했던 말을 괴테가 받아 했는데 “나는 내일 세계가 내일 종말을 종언을 고한다 할찌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러니까 주님이 내일 오시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주님이 100년 후에 올 것처럼 하고 열심히 해야지요. 지금 이제까지 부흥사들이 신세 망쳐놓은 경우들이 많아요. 부흥사들이 와서 곧 주님이 재림 하실 것인데 학교 보내면 뭐하느냐고 해 가지고 중학교도 안 보내고 고등학교에도 못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지금이야 부흥사 말을 누가 듣습니까마는! 그런 경우가 많아요. 신세를 망친 것 아닙니까? 물론 내가 옛날에 아는 김현봉 목사님 대학을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대학을 동양지제들이 가는 것이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갈 자격도 없는데 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물론 제가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은 사람 인격이 대학에 가고 공부를 더하므로 성숙에 이르고 많이 진보하는 것이지 물론 우리 말에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런 말이 있지마는 사람이 변하거든요. 진보해요. 여러분이 안되는 것, 여러분이 못 고치는 것 있습니까? 여러분 고칠려고 고칠려고 해도 못 고치는 것 있습니까? 내가 비법을 하나 가르쳐 드릴께요. 나도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남의 책을 보고 배운 것인데요. 생각은 변한다. 생각은 변해요. 정말로 이것 만은 못 놓고 안될 것 같아도 생각은 변합니다. 그럼 사람이 변화돼요. 생각이 변화되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냥 당장 재림이 곧 올 것 처럼 물론, 그렇게 긴박하게 하고 살아야지요. 그렇지만 날은 정하고 세는 것은 묵시문학의 일이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일이고 세대론의 일이지 성경에는 허락되지 안했어요. 한번 부활이고! 그런데 세대론에 가면 천년기 전에 주님 재림 때 한번 부활, 땅에 내려오실 때 성도 부활, 땅에 내려오실 때 죽은 사람 부활, 그 다음에 천년중간에 또 죽었던 사람이 부활할 수 있고, 그것은 무시하더라도 마지막에 천년 후에 부활하고 최소한 서너 번의 부활이 있어요. 한번 부활입니다. 한번 부활! 데살로니가서에 보면 그런데 한번 부활에 데살로니가서에 보면 순서를 말한 것이 있는데 그러면 천년기론자들은 그리스도 먼저 부활했고 그 다음 천년기 전에 성도도 부활하고 그 다음 7년 환란 때 유대인이 부활하고 후에 천년기 끝에 불신자 부활하고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하는 순서지요. 상급을 받을 사람 먼저 말한거예요. 바울 사도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 우리 살아남은 자도 이미 죽은 자들 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우리의 신앙이! 그런 것을 볼 때에 그것은 상받을 논리적인 순서를 말한 것이지 시간의 사이에 천년이 끼어 있다는 말이 안됩니다. 부활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죽었던 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닙니까? 없던 것에서 새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있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우리의 육체만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도 함께 부활합니다. 우리의 육체만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도 함께 부활합니다. 변화돼요. 신천신지로! 바빙크는 그 사이에 상당한 시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요. 난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왜? 주님의 창조의 권능을 생각하면 부활하고 상당한 몇년이 걸려서 심판이 이루어질 것으로 말해요. 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주님이 벌써 부활시키실 때 상급과 형벌이 다 정해져서 부활한다고요. 부활할 때 다 끝나 버려요. 몇년의 세월을 두고 부활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책 갖다 놓고 펴고 주님의 창조적인 
권능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새창조, 재창조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그 구속의 완성이 언제냐면 부활 때 이루어져요. 우리의 몸이 새로워지지만 땅도 전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러면, 왜 부활이 확실하냐?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 부활의 약속, 이레네우스는 부활할 것에 대해 여러 조목을 책에 열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복잡하고 힘들고 딱 두 가지 주님 자신이 부활하셨고 부활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약속에 의해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부활에 이를 보증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그 영으로 너희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시리라. 우리가 부활될 보증으로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그의 영이 우리 안에 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활에 이를 것을 확실하게 보증한다. 지금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살면 우리가 부활에 이를 것이라는 보증이라. 성령을 우리 안에 두심으로 우리가 부활에 이를 것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연습이 아니라 마지막 부활이고 완전한 부활이죠. 세대론에 의하면 연습 부활이 많아요. 중간에! 
그러면 우리가 부활에 이르는데 보증이 있느냐? 바울 사도가 부활의 보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첫열매라고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을 알라본(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열매이고 그리고 성령이 부활의 보증이라고 알라본은 원래 희랍어가 아니고 히브리어에서 빌려간 단어이지요. 보증금 또는 보장이 알라본 입니다. 난 항상 집 계약 이야기를 하는데 이 짐을 보통 천만원 요즘 어디 천만원짜리 입이 있나요? 1억짜리 집을, 1억짜리도 싼 집이죠 지금! 1억짜리 집을 사면 2천 5백만원을 계약금을 걸지요. 2천 5백만원 계약금을 거는 것은 앞으로 7천 5백만원을 다하고 저 집을 내것으로 삼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남은 7천 5백만원이 크기 때문에 2천 5백만원 포기합니까? 어렵다고? 7천 5백만원 마련하기 힘드니까 2천 5백만원 포기합니까? 여러분들 중에는 포기하실 분 있지요? 물론 연습게임이 아니니까 포기는 안하지요. 2천 5백만원을 보증금으로 지불했다고 하는 것은 나머지 7천 5백만원을 내고 1억원짜리 집을 내것으로 삼겠다는 담보지요. 완전하게! 우리를 부활케 하겠다는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안에 보내셨다. 언제? 성령세례 받을 때 입니까? 예수 믿어가지고? 바로 예수 믿을 때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셨어요. 그 영은 보통 중생케 하는 영으로만 생각하는데 부활의 보증이예요. 그러니까 부활의 보증은 그리스도께서 첫열매라고 했는데 첫열매가 무엇이냐? 여러분이 리델보스의 “바울신학”이란 책을 통해서 이해를 하셨겠지만 한번 읽어보십시오. 읽어보면 지금이야 이 첫열매라고 하는 것이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 그러나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저 보릿고개 넘기고 인제 농사를 지었는데 쌀이 다 나기 힘들다고요. 지금이야 쌀이 넘치니까 그 놈의 올볍쌀 심지 않지만 그때는 항상 올볍쌀을 귀퉁이에다 심어요. 벌겋게 키도 많이 크고 빨리 크지요. 그럼 다 익어가지고 하나요? 익기 전에 반만 익어도 낫을 베어다가 홀테에다가 훑어 가지고 솥에다 삶습니다. 삶아가지고 말려요. 볕에다 말려가지고 찧지요. 절구에다 찧어요. 찧어도 다 덜 말라도 찧어요. 배가 고프니까! 다 말라서 찧는 것이 아닙니다. 덜 말라도 찧어요. 찧어가지고 그 올볍쌀을 가지고 밥을 해요. 그러면 그 기름기 그 맛있는 것 추수해 가지고 먹을 때 하고 비교해 보면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름지고 맛이 있다구요. 그것을 익혀가지고 조그마한 통에다 익혀놓으면 학교갈 때도 먹고 간다구요. 지금이야 먹을 것이 많지만 그때는 쌀 외에는 뭐 있었나요? 올볍쌀을 익혀 놓았으니 얼마나 맛있어요. 그 고소한 맛! 그렇게 올볍쌀 베어 먹을 동안에 다른 벼들이 다 펴서 익습니다. 그 올볍쌀이 첫 열매입니다. 그러면 논 한모퉁이에 베어다 먹을 때 벌써 추수가 때가 온 것이예요. 올볍쌀 베어다 먹을 때에 전체 자기 논이 다 익어서 낫을 대어 추수할 때가 온 것을 말해요. 그 농부의 눈에 올볍쌀 베어다 먹을 때 벌써 논이 다 익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은 모든 인류가 부활할 것을 다 익어가지고 부활할 것을 그 올볍쌀 베어다 먹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것이 첫열매 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첫열매! 
그런데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개인으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머리로 부활했어요. 머리의 부활이 몸 부활 없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지금 완성된 부활이라고 할 수 없어요. 머리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줍니다. 이렇게 보증이라고 했지요. 첫열매라고 바울은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인류의 머리로 부활했기 때문에 몸의 부활이 없는 머리의 부활은 불완전해요. 그런데 완전하게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머리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가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이 우리안에 온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부활의 보증금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오신 성령은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다시 오시고 가셨다가 또 오시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오순절파 신학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이 성령을 주심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거두어 가시는 법이 없어요. 상속을 했다가 어렸을 때 상속했다가 도로 뺏어갑니까? 내가 최근에 알았는데 장모님한테 갔는데 우리 처남들이 세 명인데 딸은 둘이고 딸들한테는 상속이 없었어요. 내가 따졌지요. 왜 딸들한테는 상속 안주느냐고! 딸들한테는 상속이 없고 아들들한테만 상속을 했는데 어렸을 때 상속을 했어요. 그래서 상속세를 물고서 재산을 상속했다는 거예요. 내가 이제까지 알기로 어렸을 적에 상속한 그 재산을 내 장인이 만 88세에 돌아가셨는데 회수해 갔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받을 상속, 하늘에 가서 받을 성령을 이미 이렇게 받아 놓았어요.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의 영생의 보장으로! 그런데 왜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까? 거두어 가시지 안해요. 종말론적인 선물이예요. 이게 상속이예요. 상속! 그런데 왜 거두어 가요? 가셨다가 기도하면 또 오시고 그런 법이 없어요. 종말론적인 선물이고 성령을 파송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보혜사를 보내리니 내가 너희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한번 받은 성령이 왔다 갔다 한 적이 없어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 11 강 
다음 시간으로 강의가 끝날 걸로... 지난 시간에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다하지 못하고 중단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에 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고 그 다음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제 그리스도 재림 때 부활을 할 것입니다. 언제 부활이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실 때에 모든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때문에 죽은 자가 그냥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심판주께서 혹은 구속주께서 신적인 권능으로 사람들을 부활케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산다는 말이니까 우리가 스스로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부활이 이를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데 그런게 아니고 구속주께서 심판주로 오시면서 그의 신적인 권세로 다 부활에 이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신자 뿐만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 아담부터 재림 직전까지 죽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이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부활에 이르고 그리고 그래서 종말세게가 이루어지도록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인격의 동일성으로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던 자들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이 역사 내에 살았던 사람들이 부활에 이르므로 보통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다 알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모든 인류가 부활에 이르지만 성경에서는 신자들의 부활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합당하게 부활에 이를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고 그리고 그의 영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연합된 자들이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광에로의 부활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합당하게 부활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영광에로의 부활이기 때문에 합당하게 부활에 이르는데 우리가 부활을 보증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인류의 머리로, 혹은 교회의 머리로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의 확실한 증표고 보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의 부활은 몸의 부활 없이 온전해지지 못하고 또 그로 인해서 부활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을 때 그 부활이 바로 우리들의 부활의 보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하는 농군의 눈에 이미 첫 이삭을 베는 것이 나머지 자기의 모든 농토에서 익은 곡식을 추수해 들이는 것이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그가 첫 이삭을 베므로 모든 추수가 다 완전해지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부활의 보증,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다 부활에 이르되 특별히 그를 머리로 하고 그의 몸으로 결합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이를 것이 보증되었습니다. 
사실은 그것으로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는 부활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소망 중에 기다리고 확실히 의심 없이 살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님은 육체로는 멀리 계시고 우리는 땅에 사니까 정말 우리가 부활에 이를 것인지를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참으로 없지요. 무덤 건너편을 누가 보장해 줍니까? 무던 건너편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그냥 우리의 죽음 이후에 어찌되고 또 뿐만 아니라 부활에 확실하게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심으로 그 성령이 부활자의 영이므로 그 부활자의 영이 우리 안에 와 계신 한에는 우리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부활에 이를 것임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한은 우리가 부활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이 부활의 사실을 증명해 주지만 그러나 그것을 믿게 해주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늘 우리 영에 증거하시고 또 부활의 표로, 부활의 시작으로 영혼을 새롭게 하셨어요. 이것이 마지막 부활의 시작이지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과 육이 다 부활에 이를 터인데 그 부활을 완전하게 하실 표로 우리 영혼을 중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첫째번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광에의 상급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체, 첫째로 몸과 인격의 동일성으로 우리가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 몸이 부활에 이른다. 그러면 우리 몸이 동일한 몸으로 부활에 이를 것을 보증할 수 있느냐? 그것도 종교적 권능에 속하는 일이어서 믿음의 항목이지요. 그것이 확실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고 그 안에 계신 영을 우리 안에 보내심으로 우리가 몸이 부활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몸의 동일이라고 할 때에 지금 우리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동일한 원소들로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되느냐? 그렇게는 말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지금은 의학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7년이면 우리 몸의 모든 원소들이 세포까지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동일한 지금 그 분자들, 그 원소들이 아니라도 우리의 몸이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몸이 부활에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영혼의 부활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부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들 속에 기독교만이 육체의 부활을 확답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가장 분명한 진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다 내세를 말해도 그들에게는 몸으 부활이 없습니다. 제일 먼저 불교적인 영향이 어느정도 있어서 희랍 사람들에게 윤회사상과 신들의 세계로 가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은 이 몸에서의 탈출이지요. 그래서 희랍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 쏘마, 몸은 세마라. 무덤이라. 쏘마가 세마예요. 희랍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이 지성을 강조하는 희랍인들에게 몸은 바로 합리적인 영혼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지양하는 무덤이지요. 탈출하는 것, 해탈, 육체를 벗어나는 것, 해탈 그것이 모든 생의 과정의 목표지요. 몸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모든 이교가 추구하는 것이고 그래 영혼의 존재는 인정하는 거지요. 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느냐? 그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분해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맨 마지막 부분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직전에 제자들이 찾아와서 탈출도 권고하고 그러면서 정말 선생님, 죽으면 영혼이 영구히 산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제자들을 설득하고 위로하는데, 영혼이 영구히 살수 있는 기본 요건 중의 하나가 영혼은 단순하기 때문에 해체되고 분해되지 않아서 영구히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영혼은 그 이데아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짐으로 이데아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 이데아에 동참하는 영혼도 영원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다 가변적이고 다 소산되지만 이데아는 영원하고 소산되지 않는다. 그래 영구히 존재해요. 그러기 때문에 이데아에의 동참, 이데아의 지식을 갖는 영혼도 죽지 않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 가르쳐요. 제자들에게! 왜 영혼이 죽지 않느냐?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개념, 그때 말로는 이데아, 이것이 확실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 이데아에 동참하는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세계혼인 브라만에게 개별 영혼이 다 흡수되어서 원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불교는 열반으로 되돌아간다. 그게 입적이지요. 입적은 무로 돌아가는 거지요. 사실 본래 불교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흐름만이 있는데 이게 의식의 흐름이 해탈하면 이게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고 멈춰선다. 그래 소산되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열반의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한국에서는 원효대사가 토착 민속 종교하고 합쳐가지고 저 극락 세계에 가서 영구히 사는 걸로 말했지만 본래 불교는 그런 것이 없지요. 
자, 우리 몸이 동일하다. 지금 구성하고 있는 이 동일한 세포와 그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철, 지금 여기에 들어있는 A라고 하는 철, B라고 하는 여러가지 인, 화학적인 요소들, 철분들, 이런 것들은 그게 아니더라도 동일한 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 다음 인격의 동일성으로 우리가 부활을 합니다. 자, 우리가 인격의 동일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물론 그러지는 못하지만 우리 지상에서도 유비로 해가지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게 되면 소위 18세기 영국의 감독 죠셉 버틀러식의 유비의 추종이 되니까 그게 아니고 단지 설명하기 위한 예로 드는 것 뿐이지요. 우리가 보통 인격의 동일성을 기억에 스쳤습니다. 자, 우리 사람이 어릴 적부터 여러가지 신체적인 변화를 겪고 지식의 변화도 얻고 큰 사건들 만나면 인격 자체도 변화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도 기억은 동일하다고요. 그러니까 신비한 것은 기억을 담고 있는 이 두뇌의 조직들이 7년마다 다 바뀌어도 물질에만 기억이 들어있다면 물질이 다 빠져 나가면 이 기억이 다 없어져야 할 터인에 기억이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물질 자체에 기억이 소장되어 있지 않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인격에로 부활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영과 육이 합치는 거지요. 자,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합칠 것이다. 그러면 육체가 주님이 오실 때는 다 소상되어 버릴 터인데 어떻게 다시 육체가 영혼에 합칠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지요. 이것은 창조주 권능으로 재개되어질 수 있는 거니까 신적인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우리가 더 말할 것은 없지만 그러기 때문에 스웨덴부르크라는 스칸디나비아의 19세기 신비가에 의하면 우리 몸이 이렇게 육체적으로 보이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육체적인 몸이 있지만 우리 몸 안에 또 별도의 몸, 영적인 몸이 있어서 죽으면 그 육체의 몸은 벗어버리고 영의 몸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죽는 것이 바로 부활이라. 그렇게 스웨덴부르크는 주장하고 가르치는데, 그런데 이제 영혼에게 육체를 다시 구성하는, 육체를 재구성하는 힘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하지요. 다시 재창조적인 역사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으로 다 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몸에로 부활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동일한 몸으로 회복될 수 있느냐? 이것을 이야기 할 때에 영혼에, 혹은 육체는 죽어도 그 육체를 구성하는 근본 힘, 그런 조직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그렇게 설명도 해요. 
자,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설명을 하기 위한 인간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고 창조주께서 우리의 동일한 몸에로, 동일한 인격에로 부활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그때에 서로 다시 부활자리에 만났을 때에 다 쉽게 약속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도 소개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는 영체가 되지요. 영체가 되어서 더 이상 죽음에 종속되지 아니할 영체,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은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에 종속하고... 부패와 허무한 거지요. 바울 사도가 로마서 8:28에서 말한 대로 허무한 것입니다. 그것이 썩어짐과 부패인데 부패와 해체를 허무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종속되지 아니할 영체로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하늘의 영광 앞에 살 수 있는 아주 고등한 수준으로 우리의 영혼도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수준보다도 월등하게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두번째 항목으로 정했던 동일한 몸과 동일한 인격이 되게 하므로 처음 창조의 회복이 되게 하는 것이지 전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그러면 부활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화로운 몸과 영혼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자유롭게 운동을 하고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어서 공간의 제약을 대폭 벗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오리게네스가 불행하게 3세기 교부인데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긴 했지만 종말 상태에 대해서 최근에 이야기해요. 그것은 오리겐 자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플라톤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때는 별들의 세계를 자유로이 운행하며 별들의 존재와 신비를 탐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지금의 과학적인 기계로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 달나라까지 갔습니다. 인간이 타고서 갈 수 있는 것은 달나라까지 였고 무인 우주선, 인공위성 같은 것을 띄워서 지금 목성, 해왕성, 그런 곳까지 지금 탐색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람의 몸이 그런데 까지 나가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요. 땅에 붙어만 살도록, 우리는 땅에 부착해서 사는 존재들이지요. 그래 이 땅을 떠나면 무섭단 말이예요. 높은 데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 봐도 가물가물해서 무섭고, 제가 한동안 국내선 타고 서울서 광주로 다닐 때에 지금은 그렇지 않던데 그때는 비행기가 서쪽으로 떠가지고 일단 서해로 나아가서 밑으로 내려가더라고요. 그래서 목포쪽에서 거슬러서 비행기가 올라오는데 내가 타고 밑을 내려다 보면 사고가 나면 내가 저 밑에 떨어져 살 것인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땅에 붙어 사는 존재가 되어서 이 땅을 벗어나면 불안하고 사실 사고는 자동차와 기차에서 많이 나지만 그렇지만 사실 비행기 타면 더 불안한 거지요. 우리가 항상 땅에 부착되어 살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는 공간의 제약을 대폭 건너뛰는 형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아주 영화로운 변화된 영화까지 갈 것이므로 우리의 지식이 말할 수 없이 넓어져서 그때는 거의 직관적인 형태로 모든 사물들의 비밀들을 본질들을 다 파악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하여 갖는 지식에 지금과는 아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으로 상승되어서 우리의 지식이 완성에 이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는 하나님의 지식이 완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부활의 목적, 왜 부활할 것이냐? 첫째로, 우리가 분명히 해야될 것은 구원을 완성하시고 창조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부활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을! 우리에게, 예수 믿는 자들에게 다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영생을 주신, 구원을 완성하시고 그리고 창조를 완성하시는 거지요. 완성하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이루시리라고 우리 백성들을 영생할 수 있는 존재들로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니까 영원하지만 그러나 시간과 함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다 소산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영원한 신령한 나라를 이루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부활이 언제 있느냐? 부활의 목적을 저는 그렇게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심판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하느냐?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탈락되는 노폐물들, 폐기물들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을 중심으로 부활을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기를 적은 수가 부활에 이르고 하여튼 그 선택 기준 때문에 대다수는 다 멸절될 걸로 생각되는데 아브라함 카위퍼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인류를 큰 나무에다 비교했습니다. 저런 점들이 소위 그리스도에 부착되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무에게서 말라진 가지들이 제함을 받는 것이라. 그렇게 아브라함 카위퍼가 설명을 해요. 그러니까 인류전체가 구원에 이르고 구원에 못 이를 자들이 탈락하는 것이지 소수만 구원에 이른다는 이와 같은 사고가 아니예요. 주님께서 그런데 구원에 이를 자들이 적겠습니까?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요? 그렇지만 그런 경우도 있지만 구원에 이르기가 하도 값진 귀한 구원이기 때문에 적은 구원이 아니고 그리고 아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인류가 몇십억 몇백억이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한 500억 살았다고 그래 봅시다. 500억쯤 살았는데 한 200억이나 300억쯤 멸절하고 200억이나 250억쯤 구원에 이르러도 그 인류가 함께 산다면 이건 거창한 인류지요. 
자, 다음 부활의 종류, 부활의 종류라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영화로운 부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이들이 진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상급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기 때문에 부활한 목적이 합당한 거지요. 그런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자들이, 의인들의 부활을 합당한 부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불신자들의 부활, 악인들의 부활은 그들도 영체로 부활하고 영육이 변화되지만 그러나 형벌에 이르러 영벌로, 그리고 저주로 부활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부활은 부끄러운 부활이고 참 고난의 부활이어서 바로 부활이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자, 부활의 시기에 대해서는 한번 더 강조를 한다면, 처음에 말했습니다만, 그리고 여러 차례에 나누어서 부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주님 재림 하실 때에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에 이르고 그들이 주님을 맞으로 가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부활은 그 다음에 따른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천년의 간격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아니고, 결코 그것이 아니고요! 
자, 그러면 부활이 이루어졌으면 심판이 그 다음 차례입니다. 심판, 이런 영광스로운 부활을 우리가 바라고 있는데 사실 솔직하게 내 느낌도 그幝 니와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의 느낌도 다 그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영광스러운 부활은 기다리고 있는데 주님 재림은 별로 바라고 있지 않다고요. 열렬히 기다리지 않아요. 단지 세대론자들만 주님 재림만 강조하지요. 그리고는 이런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기 때문에 그렇다기 보다는 또 한번 재미있는 세상이 천년동안 재개되기 때문에 그런거지요. 지상적인 삶이 또한번 천년동안 재개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니까 열심히 주님 재림을 강조는 해도 실질적으로 그들도 주님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이 초대 성도들은 사도들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어나면 불트만이 인용했듯이 초대 성도들의 신앙에 그가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오시리라. 그것이 가상적으로 그렇게 믿고 추상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럴 것으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은 그러지 못하지요. 우리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세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자, 부활에 이르면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심판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만, 신천신지가 언제 되느냐를 설명할 때에 헤르만 바빙크는 심판이 끝나고서 창조가 새롭게 될 것이라 설명을 하고 전통적으로 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부활한다는 것 부터가 우리의 소위 변화를 물리적인 귀결고 함께 포함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해요. 어떻습니까? 하여튼 심판을 끝내놓고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요. 
자, 그러면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느냐? 왜 심판을 하나님 앞에 해야 하느냐? 선과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그러면 부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아니면 종말 세계가 도입되기 때문에 심판을 해야 하느냐? 그 심판의 근거는 내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처음 인류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세상에 보낼 때에 그냥 밥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내보내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는 언약을 체결하셨어요. 언약체결!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역사가 마쳐지면 바로 이 심판으로 역사가 마쳐지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살았던 생의 보고서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체결로 주어진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에 그 보고서를 하나님 앞에 내는 것이 바르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심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하고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생을 어떻게 살 것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에 그 보고를 하나님 앞에서 해야지요. 모든 인류가 갖는 근본 확신 중에 하나는 역사가 마쳐지면 하나님 앞에서, 창조주 앞에서 심판의 보고서를 내야 할 것입니다. 그 깊은 확신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그것은 언약체결 때문에 그러해요. 그것이 비록 아담 한 사람과 하와와 맺은 언약이지만 그것이 인류 공통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가슴 속에 다 그와 같은 확신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의 보고서를 내는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섭니다. 신자, 불신자 할 것 없이 다 우리 인생의 보고서를 내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만 얻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보고서를 낼 수 있는 인생을 살도록 해야지요. 그러니까 그렇지 않고서 구원만 목표로 하고 생을 사는 것은 부끄러운 구원이예요. 바울이 고린도서에 말한대로 불에서 건짐받는 그런 식의 부끄러운 구원, 그러니까 보고서 낼게 없다고요. 은혜로 구원받은 것 외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생을 바르게 살아야지요. 
자, 하나님이 지금 인류 역사상에서 심판을 집행하시지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인륜의 세계로서 다스리고 지배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벼락 맞아 죽은 사람 틀림 없이 죄 있어서 그랬다. 목사님 중에서도 벼락 맞아 죽은 분이 있었어요. 목사님이라고 벼락 안맞을 줄 알면 큰 오산이지요. 벼락 맞아 죽은 후에 말이 많았어요. 왜 벼락 맞아 죽었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현 역사상에서는 어거스틴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말했듯이 심판을 다 집행하시지 않으셔요. 왜 다 집행하시기 않느냐? 다 여기서 집행하면 심판날에 집행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다 심판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참 세상에 억울하고 분한 경우가 많지요. 예, 지금 5공 청산 떨들어대다가 이젠 뭐 끝나 버리지 않았어요? 중간평가 결코 안한다. 정호용이 정치적으로 책임져서 밀어낼 수 없다. 그렇게 분명히 선언하므로 5공청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확실히 선언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무자비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자들이 벌 받지 않고 잘 산다고요. 많은 돈을 지금도 모아가지고 있고 백담사에 앉아 가지고도 청와대를 혼자 다 움직이고 있지 않아요? 그럴 때 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영창에 들어가고 살 길이 없는데 권력있고 돈 많은 사람들은 평안하고 정말 잘 산단 말이예요. 우리가 사는 아파트 옆에 다른 아파트에 사는 분이 있는데 거기에 끔찍한 일이 생겼어요. 아파트가 불이 났습니다. 그의 아내가 떨어져 죽었어요. 그런데 그 남자가 자기 본처를 불을 낸 것처럼 해가지고 떨어져 죽은 걸로 했는데 밀쳐 죽은 것으로 보고, 술집에서 만난 여자인지를 데려다가 살았는데 본처와 같이 살았다. 그래 잡아가고 그랬는데 몇달 후 아내가 그러는데 그 사람이 돈 많은 고위층의 아들이어서 그냥 나왔다. 그래 얼마 전에 제가 들었거든요. 돈이 얼마나 많고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자제이면 자기 아내를 죽여놓고도 감옥에 가 얼마 안있다 아무 책임도 없이 그냥 나와 버렸다.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심판을 해야 될 것 아니예요? 어떻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래도 목사님들은 아무리 세상에 욕을 많이 해도 목사님들은 정직하고 선을 행하고 바르게 하자는 데는 반대를 못하지요. 조금만 죄 지어도 괴로와 하고 그런데 그렇게 큰 죄 지은 사람들은 문제없이 잘 살거든요. 세상이 이렇게만 끝나 버리면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게 어디 있어요? 예? 그래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 정신과 의사 말대로! 세상이 이렇게 억울하고 분할 수가 없어요. 그래 시인 아삽도 자기는 늘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느라고 정말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못먹고 어렵게 살고 그러는데 악인들은 눈이 튀어나오고 턱이 없을 만큼 살이 찌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면 도대체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는가? 이해를 못하겠거든요. 도저히! 이제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씨는 아마 계속해서 5공 청산하라고 소리 지를거예요. 그런데 현재 지금 돌아가는 것을 보면 공화당, 민주당, 민정당이 합당할 가능성도 많지요. 합당까지는 안하겠지만! 그러니까 여기만 혼자 빼돌림을 받으면 혼자 우스운 사람 되는 거지요. 
예, 플라통의 후기편 중에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도 공화국 편에서 만큼 철두철미하게 이상적인 것은 아니고 현실에 가까이 해 놓은 것이어서 거기서 아주 그렇게 설명해 놓은 것이 있어요. 사람들이 조그마하게 죄를 지으면 도적으로 걸리고 죄인으로 걸리고, 바다에서 약탈을 하면 해적으로 잡혀도 잡혀도 함대를 가지고 대대적으로 해서 이기면 사령관이 되고 영웅이 되고 그런 대대적으로 악을 행하는 일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면 나라를 건설한 건국의 조상이 되고 영웅이 된다. 그것이 지금 2,400년 전에 플라톤이 기술한 말이예요. 이렇게 인류역사가 악으로 계속되는데 이것 뿐이라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류 역사만큼 무의미하고 정말 허무한게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 때문에 출세하는 것들 때문에 이게 다 가리워져서 그런 것 뿐이지 그러나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 생각으로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파기자이기 때문에 이 기본 사상이 없어질 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은 누가 할 것이냐? 심판주는 예수 그리스도, 즉 구속의 중보자가, 그가 세상을 구원해 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완결하시기 위하여 인류 역사를 심판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가 인자됨을 인하여 내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가 구속 중보자로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므로 역사를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 목표하신 대로 도달하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구속주가 심판의 권세를 갖습니다. 결국 역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지요.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고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그 백성들 안에 와서 거하시는 것이 처음 창조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일을 완성하신 이가, 그 일을 이루신 이가 그 구원을 완성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심판을 맡으셨다고 그렇게 합당하게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심판이 그러므로 순교의 일부지요. 이것도 조금은 반동적으로 생긴 것 같애요. 내가 보기에는! 왜냐하면 터툴리안이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로할 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지옥의 불을 예비하신다고 했어요. 보복심리가 있지 않아요? 복수! 이 터툴리안이 2세기에서 3세기 초까지의 사람인데 얼마나 핍박을 받을 때 괴롭고 어렵느냐? 그러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옥의 불을 지금 마련하고 계신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핍박을 받으시고, 또 모욕을 받으시고 마침내 악인들의 손에 의해서 죽으셨으니까 그 악인들을 심판하시므로 그 권세를 행사하니까 순교에 이른다고 말하는데 물론 이도 순교의 일부지요. 구속주로서 볼 때, 인성을 입으신 분으로... 
그리고 이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일면에서 볼 것입니다. 좀 쉬었다 하겠습니다. 
자, 그럼 다음 심판은 결국 구원의 완성으로, 역사의 종결로 봐야 맞을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형벌을 받지요. 그러나 단지 형벌을 받는 뜻으로만 심판을 생각하면 바르지 못하고 심판은 형벌 받을 자와 축복 받을 자로 나누고 그리고 상급을 정하는 것이지요. 이미 범죄자들은 형벌을 받기로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형벌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에 대해서 시비를 안고 등급을 정하는 것이 문제가 좀 그러긴 하겠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부활 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미 영광에 이를 자들이 영광을, 상급을 정해 받아서 부활에 이르고 또 형벌 받을 자들이 형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이미 등급을 다 정해서 부활한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이루어지는데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중생해서 의롭다고 하는 칭의를 받을 때에 이미 의롭다는 칭의를 받았으니까 이제 새롭게 칭의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의를 공적으로 선언하므로 그 의에 합당한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중생으로 칭의에 이른 것은 이미 종말에서 받을 칭의, 의롭다 함을 선서하던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바로 최후의 칭의선언이 되는 거지요. 이를 종말론적 칭의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이 최후의 칭의가 선언되므로 영생이 선사됩니다. 의가 바로, 의의 선언이 종말론적으로,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므로 그때에 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에 우리의 행위가 다 보고되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도 다 공표되지만 또 다 용서되고 그리고 의롭다고 하는 선언이 주어지므로 우리가 영생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최후에 악의 선언의 이루어지므로 그들이 그 악에 합당하게 벌을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영들도 천사들까지, 타락하지 않는 천사들까지 심판을 받을 것이냐에 대해서 시비할 수 있지만 모든 영들도 다 심판을 받아서 그들의 악에 합당하게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뒤에 형벌의 기간이 최후의 상태에서 나오지만 이 형벌이 영원할 것이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성경과 신학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정말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길은 짧고 죄악도 미미한데 우리가 그 죄악 때문에 인류의 일부가 영원한 형벌에 이를 것이냐? 그런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반감이 있어서 신학 역사상에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도 말하기를 우리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과거에만 집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결코 바르지 못하다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훼손함이 영원한 형벌에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세에 와서는 현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바르트가 만인구원을 가르친 이후에 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인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셨으니까 지옥에 가있는 자들도 다 구원에 이르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도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 그들의 죄에 합당하게 형벌을 받았으므로 종말에 가서는 그 지옥이 본래의 의무를 다했으므로 소실된다.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래 이 주장을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고 오리게네스가 벌써 그렇게 주장했어요. 3세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유를 회복하실 때에 그때 사탄까지도 정화되어서 본래 천사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지옥이 있을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러면 이것이 인류역사가 일정하게 드라마로 끝나고 말아요. 그래서 맨 마지막에 어떻게 살았든지 다 원상회복 되니까 죄짓고 살아도 무방한 거지요.자,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훼방하고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악을 행했으므로 영벌에 이른다고 해야 합당합니다. 
다음에 부활의 시기와 기간, 보통 전 인류와 전 역사가 심판받기 때문에 세상의 종말에 함께, 부활 직후에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에 개인만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종족별로도 심판을 받는다고 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왕들이, 그 민족들이 그 영화를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온다고 한 것을 보면 민족적인 단위로 역사에서 행한 모든 공적들이 함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개인만의 심판이 아니라 종족들로도 심판을 받고 그리고 구분된 두 인류, 전체, 한쪽에는 영원한 의가, 한쪽에는 영원한 악이 선언되어서 심판에 이르고 영생과 영벌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시기가 천년기론자, 세대론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상당히 길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몇 년, 몇 십년,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전능의 교리를 생각해보면, 심판이 끝나면, 심판은 재림 직후이고 심판이 끝나면 바로 신천신지가 도입될 것이기 때문에 그심판을 위해서 오래도록 시일을 경과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고 부활할 때에 다 그들의 영생과 영벌에로 다 정해져서 부활하기 때문에 장구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제 심판의 표준인데, 분명히 심판의 표준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 특히 복음입니다. 보통 우리는 아직도 세대론적인 생각이 편만해 있어서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으로, 처음 인류에게 있어서는 도덕법으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으로, 또 복음선포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이렇게 표준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가 모든 사람들의 심판받을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이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디모데전서 3:16에 보면 이것이 아주 중요한 바울 이전의 찬양송입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의 선재가 전제되어 있고, 자, 16절, 경건의 비밀이 크다고 고백되어 있습니다. 그는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육체 안에’가 이미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하고 있지요. 영으로 의롭다고 하시고, 영들에게 보이시고, 그 영들에게 보인 것이 누구냐 하면 이 해석에 여러가지 의견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어떤 분들은 옥에 갇혀 있는 악령들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선포된 것을 말해요. 그들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알려졌. 그래 (헬 )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지요. 보면 이미 옥에 갇혀 있는 영혼에게 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되고 이 구속 사건이 선포되어서 알려졌기 때문에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일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다 알려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혹 또 빠진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 이제 그러면 최후의 상태, 심판까지 끝났으면 그 다음 어찌 되느냐? 자, 의인들은 영생에로 부활했고 심판받았으며,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 의롭다고 선언되었어요. 악인들은 영벌에 이르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고 그리고 악에 의해서 악한 자들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대문에 악한 자들로 선포되고, 악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거지요. 낙원에서 선악과로 하나님께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시고 이 인류로 하여금 이 선악과를 먹지못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통상 우리는 이 선악과 과일을 먹음으로 먹음 자체로 선과 악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이 선악과에 선악을 알게하는 그런 지식의 요소가 있는 걸로 알지만 그렇게 이해할 일이 못됩니다. 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고,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선이고,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법으로 알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을 때에 그 선이어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를 이루는 거지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뜨림이 악이어서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을 거부함으로 악이 되었으니까 서악과가 바로 먹는 것 자체로 선악을 결정한다기 보다도, 먹지 않고 순종함이 선이고 먹고 범함이 이게 악이어서, 순종하면 이게 선이어서 영생에 이르는 것이고 범하면 이게 악이어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이미 낙원에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된 거지요. 
자, 그러면 악인들은 영벌에로 심판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곳은 분명히 불로, 불못으로 또 불구덩이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분명히 장소적인 용어들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지목을 했습니다. 그들의 형벌의 장소는 지옥입니다. 그러면 그 지옥도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금 그것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지요. 지금 천국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냐? 지금 영들이 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확증지을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의 세계니까요. 어디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벌 주시리라고 작정하신 자들을 영원히 벌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셨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있느냐, 다른 곳에 있느냐? 영의 세계니까 확실하게 어디라고 지목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령들로 하여금 영원한 고난을 받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난의 처소가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보면 거기에 지옥을 많이 설명하면서 우리가 정말 불 속에 들어가서도 벌을 받고 영구히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예로 불에 사는 벌레를, 어거스틴 당시에 불에 사는 벌레가 있었던 것 같애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하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 지역이 불에 의해서 고난 받는 곳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지옥에서 불로 고난받는 것은 의식이 다 있지요. 아까 말한 대로 동일한 인격에로, 그리고 영혼으로 이 부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식을 분명히 다 갖고 있지요. 그런데 불에 사는 벌레들이 있다. 그래 불이면 다 타버려야 할텐데 타징낳고 사는 벌레들이 있다는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요. 그런데 영체들이 되어 있으니까 불에 타지 않고 고통은 영구히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악인들이 이렇게 지옥에 가서 영원히 벌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가 괴로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들 중에 안믿고 죽으신 분들도 있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친척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그들이 있는데 더구나 한번도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죽은 그들이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몇달 전에 내가 김준곤 목사님을 만났더니 그 질문을 제기를 하세요. 바로 이 질문, 바로 자기 부모님들이 예수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그러면 그들이 가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래야 합당하느냐? 뭐라고 답을 하고 위로를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때는 물론 육신적으로는 부모들을 형제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상실감을 느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 상실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형제들 만난 것으로 보충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는 그 혈육, 본래 부정모육으로 이어진 이 혈육이 다 끝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피에 의해서연결된 사람들로형제 자매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부모들로 연결되는, 혈육으로 연결되는 것은 다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실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 자매를 이룬 그것으로 보충받음으로 상실감이 완전히 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기억을 갖고 있고 저 세계를 다 기억하게 될 것 아니냐?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더 이상 그런 기억을 필요로 할 수 없도록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완전히 그런 세계에 대한 연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끊어져 버렸다. 부모라고 하는 그런 혈육에 대한 연관이 완전히 끝나서 거기서 상실한 것을 회상하고 슬퍼하는 것이 전혀 없어지는 거지요.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 자, 지금은 우리가 육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지만 부활되어 가지고는 이제 피에 의한 연결이 완전히 끝난단 말이예요. 영체가 되고 영화로운 영혼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 핏줄로 연결되는, 육체로 연결되는 이것이 완전히 끝나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속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인류를 이룬 사람들이 거기서 다 형제 자매들로 만나는 거지요. 가셔서 잘 설명을 하시고, 이런 것들 때문에 사변이 나서 자꾸 괴로와 하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악인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 그러면 지옥이라는 말이 희랍어로 게헨나인데 지금 글자 그대로는 힌놈의 땅이예요. 힌놈의 골짜기,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우리말의 힌자와 놈자가 붙어서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히브리어 글자니까요. 힌놈의 골짜기, 거기는 아주 바알과 아세라 신들을 많이 섬길 때에 예루살렘 밑에 있는 계곡에다가 거기다가 단을 쌓고 자녀들을 불에 살라서 제사를 드렸다고요. 그런데 요시야 왕이 그것을 완전히 훼파한 후에는 거기다가 어떻게 했습니까? 노폐물들, 찌꺼기들, 저 난지도 같은 쓰레기장 그런 곳이어서 거기에 그런 것들, 예루살렘 시에서 나오는 노폐물들을 계속 태우는 불의 곳이었어요. 그것을 희랍어 형으로 고친 것이 게헨나 입니다. 그래 이제 지옥이지요. 우리말은 땅에 있는 옥이라는 불교적인 용어를 가져온 것인데 이런 어원 가지고, 발생 어원 가지고 우리의 전통적인 이해 가지고 이것을 이해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만이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지옥을 말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 그랬어요. 그곳에는 왜 영원한 고통이 있느냐? 하나님의 낯을 비추심이 전적으로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호의가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철수됩니다. 지금은 악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쾌락을 많이 누리고 범죄를 많이 해도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래도 아직 낯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낯을, 호의의 낯을 전적으로 거두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심이 전적으로 배제되니까 고통 뿐이예요.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배제되기 때문에 참 생명이 없고 기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통과 번민과 그리고 탄식과 후회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한탄과 저주가 계속되지요. 분명히의식을 가지고서 고통을 받으며 삽니다. 
그런데 지옥에 간 자들은 그들도 다 등급에 의해서 형벌을 받을 터인데 그 은혜의 빛을,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악을 행한 것에 배례해서 그들이 그와 같이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고통의 기간이 어느 순간만이 아니라 영구히 계속된다. 형벌의 기간이 얼마일 것인가? 그것이 영원한 형벌이다. 
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는 자들, 그를 섬긴 자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그를 배반하고 거부한 자들을 하나님이 벌 주시기로 작정하셨고 그의 낯을 철수하심이 완전하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형벌이 영원하다고 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시고 은혜를 베푸심이 영원하면 지옥에 간 자들이 벌을 받는 것이 영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훼방한 것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해야 맞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것이 별로 안 맞지만 한참 인현왕후 할 때에 그 숙종 대왕이 장희빈을 죽일 때에 장희빈을 죽이면서 법을 뭐라고 했어요? 왕법에 의해서 내가 너희들의 어머니를 죽였노라. 왕의 법에 어긋나는 짓을 했을 때 살려 둘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음에 닿은 거지요. 하나님의 영원한 법에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의 절대적인 범위에 거슬렸기 때문에그런 영원한 성격을 갖는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심판 가지고 협박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영원한 형벌에이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도를 전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자, 아무리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는 육체를 입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이 천사하고 인간하고 다른 점입니다. 아무리 극악한 악을 행했어도 아직도 육체를 입고 있는 한은 가능성이 있지요.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아브라함 카위퍼가 그렇게 설명을 했어요. 천하는 버리지만 인간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가능성 상태에 있다. 그러니까 극악한 사람 중에서, 우리 저 최근에 박철한, 고재봉, 또 있습니까? 박철한이 세 사람을 죽인 사람이지요? 은방 주인과 아내와 그의 운전사까지를 죽여가지고 장독 밑에다가 파묻고 시멘트 포장까지 하고 그냥 장독을... 이렇게 대담무쌍한 사람이란 말예요. 그런데 죽을 때는 그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척하고 갔는지는 몰라도 어떻든간에 예수 믿고 눈도 기증하고 갔다고요. 그렇지요? 고재봉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재봉이는 차남진 목사님이, 여기 잘 아시는 분 세 분이 앉아 계십니다. 그 스토리를 잘 아시는 분이, 그 목사님이 전도해서 이사람이 회개했는데 자, 그것도 분풀이로 잘못한 이중령 집에 가서 그 일곱명을 다 도끼로 찍어 죽였는데 그런끔찍한 사람도 죽을 때는 회개하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인다고 하고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회개하고 죽지 않았어요? 내가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죄를 저질렀다. 그렇게 하고 감방마다 쫓아다니면서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다고요. 
... 마지막까지 거부하고 니이체나 히틀러처럼 마지막까지 적그리스도로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자로 죽을 수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마지막까지, 죽는 순간까지는 아직도 예수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있지요.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선택의 교리가 있어 가지고 뭐 내가 전도 안해도 하나님이 선택할 사람은 다 선택할 터인데 그러게 참 방해물이예요. 그러니까 될 수 있는대로 그런 생각은 빼놓는 게 좋지요. 그래서 심지어미국 칼빈 신학교에서는 하도 선택교리를 많이 강요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이 선교사 보낼 필요 없다. 하나님이 선교사 안보내도 주권적인 권능으로 일을 하실 터인데 선교사 뭐하러 보내느냐? 인간의 사변으로! 그래서 참 그런 웃지 못할 일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선택교리가 성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화란이 그렇게 선교사를 열심히 미국이나 영국처럼 많이 보내는 나라 같지는 않아요. 그것도 참 아이러니 같애요. 제일 열심히 선교해야 할 나라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고요. 수리남도 3,4백년 지배했고 인도네시아도 3,4백년 지배했는데 물론 그 부스러기로 인도네시아에 한 5백만의 크리스챤이 있다고 그래요. 그렇지만 1억이 넘는 인구들에게 예수 믿게 한 것이 얼마 안되지요. 대다수가 그 반동으로 회교도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너무 선택교리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이 복음을 듣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그럼 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를 하기 전에 심판 다음에 숙정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서 새 인류가 살기에 합당한 거소로 만들 것입니다. 완전한 새 창조인 것처럼 이미 있는 창조를 가지고 그 형태와 질을 완전히 변화시키므로 새로운 새 창조인 것처럼 완전한 새 인류가 살기에 합당한 거소로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불로 정화한다고 했는데 ( )의 말대로 이 창조 전체를 완전히 변형시켜서 그 재료를 가지고 해롭게 만드시되 새 인류의 거소, 영적인 인류가 살 수 있는 그와 같은 새로운 영광의 세계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까지, 육체까지도 불로 정화해서 더 이상 우리 안에 악의 요소가 전혀 있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지옥에 있는 악령들과 사탄과 악력이 다시 새 창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악을 소제하시고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안에 악이 없어지므로 악을 행하고 싶어도 못하도록 하시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더 이상 타락은 불가능한 우리의 존재로 완전히 변화됩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새롭게 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악이 소제되고 정화되어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악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하므로 우리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는 데서 벗어나요. 왜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 오리겐이 그런 이야기가 너무 깊어져서, 오리겐이 그런 주장을 했어요. 그렇게 모든 창조가 다시 원상 회복되어서 사탄까지도 본래 선한 창조로 되돌아가면 인류 역사와 같은 드라마가 다시 시작돼요. 오리겐에게 가면! 그러니까 순환이지요. 이희랍 철학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그런 것 같애요. 타락하려고 해도 타락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신천신지, 이 창조를 새롭게 함이지 이 창조의 일부를 없애 버리고 다른 곳에 새 인류가 사는 거소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회복이고 완성이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창조가 변화되고 진보할 영역이 없는 완전한 상태로 도달합니다. 이 창조의 회복, 그러나 처음 창조의 표준에 부착하여 그것을, 이 창조가 완전히 새롭게 되기 때문에 전혀 완전히 새롭게 지은 것 같아도 이것이 창조의 회복이고 완성이기 때문에 처음 창조의 표준에 처음 창조의 낙원에 부착한다. 처음 창조가 변형된 형태로 존속한다. 그런 것이지 전혀 새롭게 이것을 없애 버리고 이게 악의 처소니까 없애 버리고 딴 곳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창조 관념이 완전히 변화되되 옛 창조의 변화이고 완성입니다. 
그러면 자, 이 지구와 태양계의 일부만 변화될 것이냐? 다른 우주는 가만이 있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어떻습니까? 여기는 죄악의 고장이고 문제가 많은 곳이니까 여기는 완전히 변화해도 이 거대한 우주까지 다 변화되게 할 것이냐? 어떻습니까? 의견 한번 제출해 보세요. 이 거대한 우주가, 우리가 사는 우주에 천 억개의 별이 있다. 세지 못했지만 추정으로요. 세어본 사람도 없고 세어볼 기계도 없어요. 다 추정이지요. 그리고 이 우주내에 수만, 수십만, 혹은 수백만 개의 또 은하계가 있다. 그런데 이거대한 엄청난 우주들이 다 변화될 것이냐? 우리가 아는 우주는 얼마 안되는데 지금 현재!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뉴톤의 역학에 의해서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란 개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타당한 중력의 법칙 같은 것이 저 멀리 우주 공간에 그대로 타당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의 절대 공간, 절대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실은! 그리고 그래서 이 우주 밖에는 아주 평안한 것 같아도, 내가 대학교 때 읽은 기억들에 의하면 이 지구가 굉장하게 보호막으로 싸여 있다 그런 것을 알 수 있어요. 첫째 수증기가 있고, 대기권, 대기권을 한 10Km, 50Km까지 할까요? 그 위에또 오존층, 오존층은 대기권 밖으로 할까요? 화학에 대해 좀 아는 분..., 성층권, 구름이 형성되는 성층권, 그런데 이 지구의 중심에서 한 300Km 수준을 반알렌대라고 하는데 반알렌대는 중성자들로 이루어진 강한 순전히 또 하나의 층을 형성하고 있어요. 중성자들로!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물질의 유입이 강력하게 제지되고 있다. 그러니까 수증기에서도 막아지고 저 위에 있는 오존층, 또 질소층들에 의해서 항상 산소와 탄산가스의 비율을 일정하게 하고, 예, 그런 층이 있고 또 300Km 지점에 반알렌대가 있다. 그래서 굉장히 여러가지 보호막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는 그냥 조용하게 별들만 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이 많은 물질들, 먼지들, 파편들이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나갈 수 있는 완전히 빈 공간들이 아니예요. 저 밖을 벗어나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순전히 빈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란 말예요. 물질들이 말할 수 없이 많이 흘러 다닌다 그래요. 그래 보면 우리의 태양계만 아니라 다른 데도 마찬가지라. 보면 전체로 다 연합해 봐야 한다는 것이 제가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의 몸도 변화해서 완전하게 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영광의 세계에 동참할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되느냐? 현재 추측의 영역이고 그것 가지고 시비하고 따질 건 못될 걸로 봅니다. 그때는 우리가 완전히 영화된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와 변동이 없지요. 그러나 의식은 있기 때문에 인격은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 그런 존재가 인격이지요. 
그 다음 그때는 시간이 영원에 통합될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간과 함께 살았고 시간을 빼놓고는 우리의 존재를 도무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하이네가 말한대로 시간이 바로 우리의 존재 방식이 아닙니까? 이 시간이 없어져 버릴 때 우리가 어떨 것이냐? 의식이 있다는 것부터가 시간이 있다는 것인데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워도 영원에 시간이 통합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천신지는 처음 인류의 시작이 낙원이었지만 요한계시록에 말하는 것을 보면 에덴 동산에서 도달할 목표의 점이 새 예루살렘 성이지요. 그러니까 도시, 여기에는 인류의 역사가 다 무시되어 버리고 처음 낙원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순 회복이지만 인간이 이룩한 문화의 업적들이 편입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갔을때에 처음 낙원에서의 조용함과 그때 그런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룩한 문화의 인류의 업적이 그 나라에 소실되지 않고 편입될 것이다. 그러니까 불로 정화하셔서 새롭게 만드시는데 인류의 업적이 그 나라에 소실되지 않고 편입될 것이다. 그러니까 불로 정화하셔서 새롭게 만드시는데 인류의 업적이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느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그의 창조의 경륜을 다 이루셨는데 그 이루신 경륜들의 결과들은 다 내버리고 그냥 거소만 새롭게 하고 새 인류만 만드시므로 낙원에서와 같이처음 창조에서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를 다음 마지막 시간에 마치고 여러분들의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제 12 강 
안녕하십니까? 더운데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절까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 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강의가 두달 반 전에 시작될 때는 여러분들이 좀 주저하며 어떤 면으로는 머뭇거리며 오셨는데 오늘로 12번 강의가 다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잘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새 창조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을 이야기하므로 강의를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새 창조가 이루어지면 새로 다시 짓는다는 의미의 새 창조가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재료들을 형태와 질서를, 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창조하시면 그 창조를 그리스도께서, 구속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새 인류가 신천신지에 살게 되는데 새 인류는 창조되고 구속된 백성입니다. 새롭게 되어진 인류가, 처음 창조에서 처럼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구속받은 백성들로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전 인류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들어감과 나가심이 사람의 들어감과 나감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인간하고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인류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찬양을 하는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개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전 인류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들을 다 계발하고 발전시켜서 풍성하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그와 같은 인류로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타락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런 인류가 되어서 타락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 혹은 불변성, 은혜언약의 불변성은 특히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더 이상의 타락이나 범죄가 있을 수 없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소가 어디가 되느냐? 하나님의 거소는 바로 일체의 인류가 하나님의 거소가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합쳐져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는 새 인류입니다. ( ) 라고 하는 신학자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책에서 그런 것을 전개합니다.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거소하고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거소하고 종말에서의 거소가 합쳐져요. 그러면 결국 지금 계신 곳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새 인류에게서 거하실 처소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지금 계신 하나님의 처소가 새 인류를 거소로 하는 그 마지막 궁극적인 거소에 비하면 임시적이라, 임시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처소에 대해서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소를 새 인류로 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과 같지 않느냐 하고 그런 이의를 많이 제기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때 부터 죽지 않고 그냥 영생하게 됩니다. 이 현 세상에서! 그렇게 되면 종말에서 하나님이 새 인류에게 와서 거하실 때 그 다음 이야기를 해야 되지만 그 차이가 어디 있느냐 하고 반문을 하고 회의를 많이 해요. 그래서 그것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세대론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가지고 인각되었기 때문에 이 죄 많은 이 세상, 온갖 더러워진 것으로 많이 부패된 세상이 새 인류의 거소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단 데로 가야된다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는데... 
자, 그런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거소인데 그 거소가 땅으로 내려옵니다. 인류에게로! 하나님이 영원히 새 인류를 거소로 하고 사십니다. 
그러면 새 인류의 거소, 하나님의 거소, 새 인류의 거소는 변화된 신천신지, 정확하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완전히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서 새 인류가 살려고 하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이 자기의 창조를 내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딴 곳에서 새 거소를 마련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질문하시기를 베드로후서 3장에 있는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0-13절 까지에 보면 현재의 땅이 풀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를 전혀 새롭게, 새로운 창조처럼 다시 만드시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지 이 창조를 다 없애버리고 또 우리가 살던 이 지구만은 이 죄악의 근본 고장이니까 이건 다 없애 버리고 저 멀리 새 곳에 딴 곳으로 우리의 처소를 옮겨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냥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모든 인류가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러요.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지요.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모든 인류에게 예외없이 받아들일 날이 오지 않는다고요.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그렇게 믿고 그 소망으로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내가 암스텔담에 살 때에 여름 휴가를 화란 사람들은 남구쪽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아프리카 북부로 그런 데로, 또 카리브 해안 쪽으로 가는데 주로 불란서 남부로 많이 가지요. 스페인 그런 데로! 그래 집을 봐주러 시골 동네로 갔습니다. 가서 하룬가 있으니까 맨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요. 아무도 우리를 반겨주지 않는데 벌써 자기 동네에 새로운 사람이 왔다고 해서 전도하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안식교도들이었습니다. 감사했어요. 아무도 맞아주지 않고 반겨주지 않는데 그 뒤에야 이웃집에 사는 분들이 아주 친절하게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서 그 주변 지역들을 다 구경시켜 주고 한참은 또 먹는 음식도 많이 주고 그렇게 했지만, 처음에 찾아 오신 손님은 여자 한분하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린 아들 여기다가 뭘 써 갖고 붙여서 왔어요. 그리고 열심히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모든 인류가 다 받아들이면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른다.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그래 어떻게 얘기가 잘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나도 그 일이 되돌아가는데 동참할 수 있느냐? 제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못해요. 그러면서 전도하는 열심은 좋지만 저 어린 아이를 저렇게 저런 식으로 전도에 활용하는 것은 그 아이의 앞날에 장래를 보아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말을 돌려가지고 당신 어떻게 그렇게 화란 말을 잘 하느냐고...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그 때 부터 죽지 않고 모든 인류가 그 때 부터 영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지요. 그래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열심있고 절도있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우리들과 전적으로 배치되고 맞지 않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면 모든 인류가 그때 50억의 인구가 예외없이 여호와의 증인의 도를 받아들이게 될지 몰라요. 그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심판이 없어요.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천지를 새롭게 하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없어요. 
그래 보면 요한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전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아주 새 창조와 같은 의미의 재 창조의 역사가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없습니다. 그래 현상 그대로 동결하고 영생에 이르러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심판을 다 겪고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한 다음에 그 다음 새 인류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땅이 우리 영혼의 거소지요. 
그런데 세대론, 천년기론에 의하면 이 땅은 죄악의 도성이고 죄악의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다 헐어버리고 천년왕국이 끝난 다음에는 딴 곳으로 가지요. 우주의 딴 곳으로! 거기에는 구속이 창조의 회복이라고 하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읽어 보십시오. 창세기부터가 이게 전적으로 회복의 역사예요. 창세기 3장 타락 이후의 모든 역사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구속의 회복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화란 교회는 아주 좋은 기원이 있습니다. ( )이라고! 화란 예배 모범은 우리하고 다른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날 당번 장로가 목사하고 같이 강단으로 가서, 목사가 올라서면 같이 악수를 해요. 장로하고! 하나님 말씀만 잘 전해 주십시오 하는 부탁으로 악수를 합니다. 목사가 올라섭니다. 올라서면 교인들이 함께 다 일어나요. 자, 우리 묵도하고 예배합시다 하고 일어서라고 해서 일어서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딱 단 위에 서면 모든 교인들이 다 일어섭니다. 그러면 목사가 기원을 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시고 영원까지 신실하사 그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하나도 낭패케 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이름에 있도다 하는 기원을 합니다. 그것이 화란 교회가 하는 첫 예배의 시작입니다. 화란 개혁교회! 그게 끝나면 손을 들어서 은혜와 평강이 이제고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의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우리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 가운데 머리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편을 불러요. 
여기서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기원 속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시고 영원까지 신실하사, 우리는 제일 끝으로 가니까 화란 말은 ( ),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도다. 그런데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시냐, 천지를 지으시고 신실하시되 영원까지 신실하셔서 그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하나도 낭패케 하지 아니하시는, 화란 말로 하면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이름에 있도다. 개혁신학의 요약이예요. 그것이! 그 기원이! 주님이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하나도 낭패케 하지 않으십니다. 떨어져 나가게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이 창조를 완전히 새롭게 하실 때에 이 창조 중에 하나도 떨어져 나가 상실되지 않게 하십니다. ( )라고 하는 1963년,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 )라고 하는 신학자가 소위 화란의 5대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판 룰러가 있습니다. 1963년에 죽었는데, 이 사람이 종말론에 있어서는 완전한 회복, 철두철미한 회복, 복원을 강조해요. 그래서 종말에 가서는 아무 것도 상실되지 않는데 연합된 것만 상실되게 한다는 주장을 해요. 그러면서 종말에 가서 창조가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 주장을 하는 것은 성육신이 끝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왜냐하면 성육신은 인성과 신성, 하나님과 사람의 합일, 연합이므로 그것이 종말에 가면 해소된다고 주장을 하지만, 하여튼 완전 복원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아무 것도 창조에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신학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이예요. 구속! 
자, 새 인류의 거소는 전적으로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인데 바로 이 땅이 하나님의 거소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 새 성,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거소가 아니예요. 그런데 이게 땅으로 내려온다. 사람들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구한 그의 거소로 하고 사시게 되는 거지요. 
자, 그러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로마교회는 새 인류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을 직관한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돼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때에 우리의 영혼이 신화한다 그래요. 神化! 그냥 신화하는게 아니고 특별한 은혜의 빛을 받아서, 그것을 영광의 빛이라 그래요. 영광의 빛을 받아서 신화한다 그래요. 특수한 빛을 받아서 인간의 합리적인 영혼의 부분이 신화한다 그래요. 모든 로마 교회의 구원과정이 신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이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을 직관한다 그럽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신비지요. 삼위일체 신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그때 영혼도 신처럼 되지요. 그때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향연이 전개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얼굴을 뵈어요. 그리고 우리의 신 지식이 완성에 이릅니다. 얼굴과 얼굴을 친히 대하여서 보니까 지금처럼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신 지식이 완성에 이르러요.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살지만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 남는다 그럽니다. 아까 말한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5대 신학자 중 한사람이 ( )입니다. 그 사람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 )라고 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논문에 그분도 한 쳅타로 다루었기 때문에 한번 물었어요. 당신 보면 이렇게 인간의 영화를 말하지만 신화되는 것까지는 당신 주장하지 않지요? 아니 거기까지 주장 안하느냐? 하니까 당신 책에 이제까지 나온 것을 보면 당신 그러지 않는데 신화되는 것까지 주장하느냐? 물었어요. 그러니까 요사이 내 사고에 의하면 내가 그 수준을 넘어서 신화되는 것까지 생각한다. 
그러면 즉 바르트하고 이야기가 같거든요. 바르트도 종말에 가면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성을 넘어선다 그래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나 오늘 바르트의 시학이 옛날과 같은 19세기 같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신정통이라고 그러는데 신학이나 로마교회나 같애요. 같은 데 도달해요. 신화하는 데 도달한다. 
그런데 개혁신학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만 그래도 우리의 수준이 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으로 향상을 하지만 그러나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앙양 신화를 강조하는 신학에 의하면 신학에서 제일 고전적인 교부가 이레니우스 입니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그가 이단들에 대항해 가는 아주 좋은 책을 썼습니다. 그 부분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은 우리를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아지셨다. 그런 문장이 나와요. 「이단들에 대항하여」란 책에! 그리스도께서, 로고스께서, 말씀이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우리를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되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런 문장이 있어요. 그 문장 때문에 현대 앙양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고전적인 교부로 인정돼요. 
그런데 나는 이레네우스를 앙양 신학자에 넣지 않고 회복의 신학자에 넣는데, 또 그 주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포용할 만큼 잘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까지 포용하게 된다 그런 식의 문장이 또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이 앙양신학에서 이레네우스를 크게 높이 살 만한 학자라고 교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신학은 결코 피조물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영화하더라도 그것은 신화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는 모든 구원의 과정의 종국을 신화되는 것,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에 둡니다. 창세기 3장이 죄로 지목한 것을 근본 죄로 지목한 것을 로마교회는, 그리고 현대신학은 다 구원의 종국으로, 구원으로 말해요. 하나님과 같이 됨, 하나님이 됨, 하나님이 신화되는 것! 
그러나 회복신학에서는 신화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지만 피조물로 남는다. 그래 내가 ( )하고 토론을 한번 해봤어요. 벌코프는 영화수준에 신화까지 이야기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 그러니까 아주 그 부분에서 단호하고 확고해요. 확실하게 인간이 영화되어도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고 피조물로 남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창조 중보자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구속 중보자로서 모든 구속을 이루셨는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그 구원이 완성됐지요. 그래서 새 인류에다 이야기 할 때 은혜가 자연의 질서에 통합됩니다. 더 이상 구속되는 은혜가 계속되는게 아닙니다.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로 계신 것이 아니라 그때는 구속의 사역을 완성해요. 마감하세요.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구속의 중보자로 서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할 일이 없어지는가? 아무것도 안하시는가? 구속, 중보사역을 완성해요. 연합의 중보를 이루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연합하시는데 그 바로 연합의 중보로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십니다. 제 논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자, 그리스도께서 연합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섰습니다. 연합의 중보사역을 계속하십니다. 그때는 구속을 위한 구속 중보자가 아니라 연합의 중보자로서 역사하십니다. 새 일에다가 은혜가 자연의 질서에 통합된다. 자연의 원리, 지금은 자연의 순환의 법에 의해서 삽니다. 우리의 삶이 별개 아니지요. 다 태양 에너지의 변형들을 흡수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또 태양 에너지의 변형 형태들로 옷을 입고 있지요. 그래서 순환기로 받아들여서 배설하고 배설하면 또 그것이 다시 분해해서 재합성을 통해서 인간에게 들어오고, 그러니까 우리는 순수 소비자지요. 그 분해하는 중간 물체들, 미생물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재생산하는 식물들, 재연합하는 동물들도 일종의 생산자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의 음식을 공급해주는 의미로는 일차적인 생산자는 아니지만 2차적인 생산자지요. 다 식물에 의해서 생산된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서 먹고 살고, 자연의 순환과정에 의해서 우리가 살지요. 그것을 조금 더 많이 먹고 좋은 질의 것을 먹느냐는 그 차이 뿐이지 다 꼭 같애요. 고기 먹는 것 좋아하고 고급 케이크 좋아하고 고급 요리 좋아하는데 실은 고급 요리라고 좋은 요리가 아닙니다. 좋은 요리입니까? 한국에 한참 고기가 한참 나다가 고기가 많아지니까 일식을 했는데 일식도 많이 먹어보니까 별게 없지요? 그래 도로 어디로 갑니까? 자연식으로 갑니까? 일식도 별게 ㅇ벗어요. 2백만원짜리, 5백만원짜리 아직 구경도 못 해봐서! 어떻게 생겼습니까?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보신 분, 없어요? 다 가난한 사람들만 와 계시네. 뜯어 고쳐야지요. 이 제도를! 그래서 우리도 다 2백만원, 5백만원짜리 구경할 수 있는 세상이 오도록 해야지, 돈 있는 사람들 자기들만 구경하려고 몽둥이로 꽉 잡고 두드려 치는 것 아니예요? 
지금은 그런 순환법에 의해서 사는데 그때는 영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가 없게 돼요. 영에 의해서 완전히 사니까! 우리의 생명의 원리가 영이예요. 그래서 육으로 살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환법에 의해서 살지 않고 영의 역사로 살아요. 
자, 그러면 생명의 문제, 요한계시록에서 22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게 나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 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열 두 실과가 있어요. 얼마나 좋습니까? 과일이 얼마나 좋아요? 농약이 좀 많아서 문제지, 농약만 없다면 과일이 정말 생명이예요. 신성 과일이 생명과와 다른게 아니고 과일이라고요. 수박도 농약 많이 줍니까? 어떻게 보면 빨간 물이 많이 들어 있는 걸 보면 주사를 주는지, 하여튼 요새 그 자몽이 알라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냥 부리나케 플로리다에서 농업국장인지 생산국장이 뛰어와서 기자회견도 하고 했다는데 미국 사람들이 크게 나빠요. 자기 나라에서는 DDT라든지 농약들을 사용할 수 없게 금지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농약들을 미국에서 생산해서 제 3국에 수출하거나 아니면 제 3국에 공장을 세워서 대농원들에 대량 살포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고요. 그래서 제 3국에 수출을 해요. 자기드른 안먹느냐? 자기들도 수입을 해요. 자기들도 수입을 안할 수 있어요? 자기들도 수입을 하는 거지요. 남미에서 수입하고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수입해서! 그런데 암스텔담에 가니까 하나 부러운게 있는데 사과를 길가면서 씻어가지고 싹싹 베어 먹고 다녀요. 거기는 사과도 안심할 수 있는가 봐요. 우리는 사과도 안심 못해서 그냥 오래 씻고 담그고 깊이 깎아서 먹는데... 
그런데 천국 가도 생명과가 있다고요.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 열 두 과일이 있어 가지고 달마다 매달 실과를 맺지요. 그래서 천국 가면 그 과일들을 다 따먹을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소망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생명과는 우리가 사과를 따먹듯 배를 따먹듯 자두를 따먹듯 하는 방식의 과실을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과는 낙원에서 약속한 생명과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말해요. 그 신천신지에 과일들이, 12 과일들이 달마다 열매 맺는 그런 식이 아니고! 그런데 과일이 물론 우리 한국에는 겨울에는 과일이 없고, 겨울에 과일 없는 나라가 많이 있지만! 열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세어보니까 대강만 세어도 열 두 가지가 훨씬 넘더라고요. 한국에서 나는 과일만 해도! 그런 식의 사과, 배, 자두, 그레이프, 도 요새 제주에서 많이 나는 귤, 오렌지, 또 열대성 과일이 많지요. 우리나라는 별로 수입이 많이 안되지만 바나나, 하여튼 열대성 과일이 참 많이 있어요. 그런 과일이 달마다 주렁주렁 열리는 그런 생명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류에게 약속한 그 생명의 약속이 실현된 걸 뜻해요. 
그리고 생명수도 마찬가지예요. “생명수의 강을 보이니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이것도 실제로 생명수의 강이 흘러서 넘치기 때문에 표주박으로 떠서 마시고 다시 젊어지고... 예? 고집쟁이 영감이 너무 물을 많이 마시고 젊어져 가지고 애기가 되어서 다시 사는 그런 의미의 생명수가 아니고 이것도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약속하신, 이미 주신 생명의 약속의 실현입니다. 그 낙원에 보면 낙원에서 부터 몇 개의 강이 흐릅니까? 4개의 강입니다. 그 낙원에서 강이 흘러나서 물이 생명의 근원 아닙니까? 흘러나서 온 지구를 적십니다. 낙원을 돌며 적시면서 온 지구를 적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낙원에서 약속하신 그 생명수가 종말에서 완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런 것이지 우리가 지금 먹는 의미의 생수, 그런 것을 떠서 먹는 방식으로 생수의 약속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은 아무리 나일 강물을 마시지 말라고 해도 지금은 생수를 먹어야 된다고 나일강 물을 떠서 마십니다. 그게 진짜 물이기 때문에! 진짜 좋은 물이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강 물 마음대로 떠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정수기가 없습니다만 서울이든지 시골이든지 한국의 수도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가 없는 것 같애요. 그 다방에서 주는 생수 정수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느냐? 어떻게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요? 한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요? 나는 한 잔도 안마십니다. 다방에서 주는 물은... 
자, 그런데 이 생수가 어디로 흐릅니까? 가운데로 흘러요. 이 가운데로! 하나님의 보좌의 어린 양 앞으로 길 가운데로 흐른단 말이예요. 길 가운데가 무슨 의미입니까? 길은 사람이 통행하는 곳 아니예요? 인류의 거소라고요. 삶의 터전을 말해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모든 인류의 생명이 편만함을 말해요. 만일에 실제로 한강 같은 거대한 그보다 더 큰 아마존 강 같은 것이 길 가운데로 흐르면 다 몰살해 죽을 것 아닙니까? 익사사고가 여기서만 아니라 천국 신천신지에서도 있게 생겼다고요. 길 가운데로 흐르면다 몰살해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로 생수가 한강처럼 길에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부터 흐르는 생명이 모든 이류에게 편만함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원천이 어디냐?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라고 말했어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예요.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지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영생하는 생명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거기는 죽음이 없어요. 죽음이 없습니다. 
그 다음, 여기 보면 한마디 더 해야 되는데, 여기 보면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자, 지금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의 보좌가 사람들 가운데 와 있어요. 하나님의 거소가! 그런데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리라.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살아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더 이상 이와 같이 자연의 빛으로 사는게 아니라, 이 자연의 빛도 신비지만, 자연의 빛의 신비를 다 해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아직도! 그걸 입자라고 그러지요? 이 빛이 파동입니까? 입자입니까? 뉴톤 때는 입자라고 생각했어요. 그 뒤에 아주 오랜 동안 파동으로 이야기 했어요. 양자역학에 와서 상보성에 의해서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로 그렇게 둘이 결합되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빛이 입자이면서 어떻게 파동일 수 있냐고요. 아인슈타인은 적극적으로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 )는 입자이면서 그것이 실험하는 사람에 따라서파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 ( )하고 아인슈타인은 아주 격론을 벌였어요. 코펜하겐에서 물리학자 대회를 열었을 때에!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물리학이냐, 심리학이지! 실험하는 사람에 따라 입자로도 나오고 파동으로도 나오면 그게 어찌 되겠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의 빛도 신비지요. 지금 빛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 없다고요. 그래 이것이 절대 속도지요. 30만 kM, 1초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빛의 속도에 근가고 있어요. 빛의 속도에 넘어가는 것이 있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무너지는 거지요. 
자, 지금 이 자연의 빛도 신비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삽니다. 자연의 빛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그래 이 별들의 빛도 현 창조까지만 유효한 거지요. 조금 쉬었다가 그 다음 조금 더 하고 모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 )가 좋은 참조가 될 것 같으니까 책을 많이 주는데 자기는 읽지 않는데 한 권을 꼭 주면서 읽으라고 하는데 「김일성 그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런데 여기 성경에 있는 내용들, 그가 생수의 원천이시고...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더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도 이렇게 이종민 집사님,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해 갖고 와서 이렇게 박았어요? 무료가 아니고 5,000원 받아요? 나는 무료로 주는 줄 알았지! 
자, 그 다음,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여러분 질문 받고 토론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다 끝을 냈어요. 여기 요한계시록 22장에 분명하게 써 있는 글들도 이것을 그냥 글자대로 해석하면 문제가 많지요. 자, 보십시오. 22:1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자, 이걸 만일 글자대로 꼭 받아야 되면 생수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흘러내리는데, 글자대로 해석해야 된다면 보좌에 앉으신 이 옷자락부터 젖어서 앉기가 어렵지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과도한 문자주의,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그런 산문에 있어서는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이렇게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에 와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요. 우리 한국교회가! 또 미국의 복음주의 보수 교회들이! 그래 이걸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그렇게 이걸 글자대로 해석하면 보좌에 계신 이의 옷자락이 다 젖어서 앉아 계시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라! 모든 생명이! 그러니까 낙원에서 약속하신 생명과는 실제로 그것이 생명과의 생명이 있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왜냐하면 그것도 약속을 하셨으니까! 그래 ( ), 그걸 넘어가요. 그래서 그 자신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지만 그걸 또 넘어가서 참 생명의 근원을 이루신다. 그래 생명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있음을 말해요. 그것이 그 약속이 실현되어서 생수와 생명과가 지금 낙원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넘치는 것을 말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거기에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어려움과 곤고가 다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21:3절,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는데 왜 장막이라 했느냐? 구약의 약속의 성취예요. 이게 지금! 구약에서 하나님이 구약 백성들에게 와서 계시하실 때에 장막에 계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와 계신 것을 ‘쉐키나’라, 장막이라고 했어요. 천막을 치고, 장막, 성막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말에! 성막을 치시고 하나님이 거기 와서 계셨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와서 계실 때에는 장막에, 그 성전 때는 시은소에, 그러니까 법궤 위에 와 계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계심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듯 기계적으로, 마력적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권적으로 와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날 때 언제든지 철수하셨어요. 그의 임재를! 그러니까 그때 쉐키나는 임시적인 것이었지요. 하나님의 영광의 장막이!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중간기 시대 때에 마지막 선지자가 전통적으로 말라기 선지자 후에는 구약의 랍비들이 이해하기를 성령이 그들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구약 교회를 떠났다고 가르쳤어요. 그래 성령이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역사하시지 않는 걸로 랍비들이 가르치고 이해를 했습니다. 중간기 기간에는! 그런데 언제 성령이 다시 나타납니까? 마가복음에 의하면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 때 성령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 외에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성령 오심의 궁극적인 목표가 능력을 행하고 여러가지 은사를 나타내는 그와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에 의하면, 경륜에 의해서 보면, 성령의 오심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처소, 하나님의 거소 만드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드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내주가 가장 큰 사역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제일 큰 사역이 내주예요. 성령의 내주, 그것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거소가 되게 만드시는 일이예요. 그 약속이! 
그런데 구약에서의 임재가 하나님의 임재가 저들 백성을 자기들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 중에 거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때요? 화장실도, 진이 진행하는 동안에 화장실도 만들어 썼습니까? 광야에서, 화장실도 못 만들어 썼어요. 쓰고는 그냥 덮지요. 그냥 덮어요. 냄새 나는 일이 계속해서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셨다고요. 그러니까 구약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주가 장막에 와서 거하셨지만 임시적이었어요. 그것이 종말에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저희와 함께 거하시니,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 그때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완전하게! 그것이 모든 구원 사역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됨, 거룩한 백성됨,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거하세요. 하나님이 친히 와서 거하시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떠나 계심으로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근원에서 씻기십니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세요. 이 눈물을 씻기십니다. 여기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모든 고통과 수고를 제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마지막 목표가 여기예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과 그들과 함께 사시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예요. 그것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예요.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것, 그것이 새 인류에게 와서 그의 거처를 정하시고 영구히 함께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남으로 있었던 그 모든 문제가 완전히 다 해소되어요. 우리가 생명수 샘물을 마음껏 마시듯이 생명으로 가득차니까! 그래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자,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에, 하나님의 상속에, 하나님의 모든 거소에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요. 하나님이 친히 와서 거하세요. 그것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심이고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창조의 목표였어요.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와서 영원히 거하시며 사실려고 창조를 이루셨어요. 
자, 그 다음에 10-11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러면 인류의 생은 어찌 되느냐? 인류의 생은! 이렇게 하나님 모시고 살기 때문에 예배와 묵상만 진행되느냐?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카위퍼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를 그때는 예배와 묵상의 생활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진행될 것이다. 그래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무엇일 것인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게 참 말하기 어렵지만 예배와 묵상만이 아니라, 예배와 묵상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지요. 아담의 생활의 방식이 만물을 탐구할 때에 아담이 낙원에서 만물을 탐구할 때에 탐구 따로 있고 예배 따로 있고, 지금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탐구 따로 하고 예배 따로 하듯이 주일에 그런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다 밑 탐구하면 그 탐구에서 신비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해 영광에 대해 감사와 감탄으로 연속되었어요. 그래 아담이 삼중직을 진행할 때는 모든 것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제사장직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21장 22절,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요. 왜? 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함께 거하시므로 성전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때에 하나님이 임시적으로 한곳을 구별하여 거하시니까 성전이 필요하였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편만히 거하시니까 성전이 왜 필요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요. 그래서 말방울에 까지 여호와께 거룩이라. 스가랴서에! 거룩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니까! 그러니까 성전이 따로 필요하지 않지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그 다음 26절에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그때 그 영광의 처소들이 인류가 아담부터 마지막까지 인류가 이룩한 문화업적들이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편입되었지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지금 같은 칼부림 권세 그것 가지고 들어오는 것 아니지요. 지금 여기 세상에서 다스리는 그런 영광과 존귀가 아니예요. 모든 민족이 이룩한 문화 업적들을 그때 가지고 와요. 
마지막으로 이제 상급 이야기가 있는데, 상급, 자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고 그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요. 우리는 그곳에 가면 영원한 안식, 생명과, 생명수, 안식만을 늘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지요. 사람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을 섬김이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영생에 이르러요. 거기 가서 하나님을 섬겨요.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상급문제인데, 참 요만큼 말했는데 또 상급 이야기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또 그 상급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아침에 나로서는 생각해 보았는데 궁리가 안나요. 그 영원한 세계의 상급이 어떤 것이냐? 바울이 위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고, 베드로도 위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란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떤 상급을 받을 것이냐? 제일 큰 상급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보고 사는 삶이지요. 모든 인류의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플라톤의 「대화론」에서 신들을 보는 것, 그것을 마지막 영광으로 삼아요. 내가 플라톤 전집을 화란에서 화란어판으로 한 질을 샀습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철학회 발표회 하는데 가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이 신학부분만 종교서적 부분만 해적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철학 부분에도 해적판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보니까 영어하고 화란어하고 이렇게 해적판이 많이 파네요. 자기들 말로는 영인본이라고 하면서. 그래 내가 또 하나 샀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전집도 하나 사고, 플라토니스도 하나 사고 샀는데, 플라톤이 이렇게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제일 높은 철학자로 인정을 받아요.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 ), 이런 플라톤이 아주 플라톤 쌍티스무스, 아주 거룩 거룩한 플라토니스, 하늘의 문이 절로 열린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서, 그런데 플라톤이 신들의 낯을 보는 것, 이것을 제일 큰 영광으로 삼았어요. 
그런데 우리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한 삶으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상급이라. 그런데 우리는 등급이 있을 것이냐? 바울이 받는 상급하고 제가 받는 상급하고 같아서야 이게 말이 안되지요. 예, 내가 뭐 이루어 놓은게 있어야지요. 내가 상을 받을지 천국 가서! 여러분은 상 받을 것을 많이 기대하시지요? 어떻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받는 상하고 내가 받는 상이 같다? 그야 말이 안되는 거지요. 도대체가! 자, 그에 대해서는 내가 그 이상 더 말씀 드릴 수가 없고 하여튼 가서 만나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사 영원한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영광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바쳐 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 이렇게 해서 열 두번의 강의를 모두 마칩니다. 그동안 열 두번 꾸준히 나오시고 많이 나오시고, 형편 때문에 할 수 없이 못나오신 분들을 제외하고는 꾸준이 잘 나오심으로 인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시고 더운데 애 많이 쓰셨는데 그동안의 열 두번의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의 강단이 좀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고 바르게 우리 복음의 선포가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