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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종말론 강해(1)

종말론 강해(1)
서철원 교수
제 1 강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서 6절 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비도 오고 한데 이렇게 많이 오신 것 감사하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할 것으로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작은 학교에서 작은 학생들 앞에서만 강의를 해서 그런지 학교 밖에서 강의를 해 주기를 바라는 그와 같은 요구가... 그래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하고 제가 마침내 한번 이 일에 봉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2월 부터서 강의하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았지만 장소 문제도 어렵고 해서 2월 부터 못하고 3월 부터도 못하고 이렇게 4월 중순에 와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저녁 비가 오고 해서 오시기도 불편했을 텐데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오신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환영합니다. 이 강의를 시작하도록 작정을 하고 이 일을 주관하시는 분들하고 의논을 할 때에 무슨 강의를 하면 좋겠는가? 조직 신학 전부를 다하고 현대 신학까지 하는 것이 좋겠다. 거기다가 변증학도 강의를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첫 학기는 종말론을 강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서 제가 이번 학기는 종말론을 강의하기로 생각을 하고 광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증상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나라들은 정말 그들의 생존을 지켜 내는 문제가 큰 문제여서 거기에만 정신이 다 팔려 있겠지만 그래도 좀 잘 사는 나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 현세에 있고 또 현세에서의 잘된 것들에 우선하고 모든 생각이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말하고 이를 위하여 교회가 준비해야 될 것을 아주 강하게 선전하고 호소하고 그런 현상을 우리 눈 앞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 보면 어떤 것들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회가 점점 부가 팽창하고 잘되어 가니까 사람들이 현세에서의 부요한 생활과 그리고 더 나은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종말의 세계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는 그와 같은 때에 한쪽에서는 주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준비하도록 외치는 것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의 종말에 대비해서 살도록 하는 그런 경종으로 우리가 받아야 되고 또 그것에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모든 삶이 종말에서 부터서 주님의 재림으로 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자기들의 지상의 생존기간 동안에 이루어질 걸로 믿고 또 그들이 매일 매일 삶을 살 때에 주님이 오셨을 때에 그 앞에 나타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준비하는 거룩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저녁에 잠을 자면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주님이 오시겠지 하는 그와 같은 막연한 기대와 소망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대와 소망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 자고나면 분명히 내일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는 다 사회가 변화되고 또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이 “소망의 신학”이란 책을 1964년에 출판했는데 그 1964년에 나온 “소망의 신학”의 서론 부분에 제가 했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개괄적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적인 정말로 그냥 생각으로만 아니고 자고만 일어나면 주님이 꼭 오실 것으로 믿는 그와 같은 확신 속에 살므로 죄악을 버리고 사회를 개선하며 언제든지 주님 앞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설 수 있는 그와 같은 마음가짐과 자세로 살았고 그리고 주님을 맞기에 참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주님의 재림을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기다리고 기다려 왔어도 주님의 재림이 초대교회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이루어지지 아니했고 지금 이천 년이 다 되어가도 주님의 재림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러나 언제든지 올 수 있을 것이고 또 언제든지 종말이 가능한 때에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 구속을 다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종말의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받을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미 받게 됐고 그리고 성령을 받아 가지므로 그 생명이 우리의 확실한 소유이고 우리의 것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 받은 생명은 종말에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생명인데 우리가 지금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종말의 생명이 현 세계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현 세계에 들어와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는 생명이 종말에서 살 영원한 생명이고 그렇게 살 보증으로 우리가 종말에 가면 다 영으로 살터인데 그 영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으므로 종말의 새 생명과 하나님의 통치가 현실세계에 이미 실제가 되었고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종말이 가장 현실적이고 지금 우리가 종말세대에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미 죄로, 사망으로 지배되어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도입되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으므로 실제로 종말의 세계가 우리에게 도입된 것으로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종말의 세대는 옛 세대가 다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워진 그와 같은 새 세계가 아니라, 옛 세대가 계속되고 있는데 새 세계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옛 세대는 옛 세대로 있으면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새 생명이 지배하는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는 옛 세대와 새 세대가 겹치는 교차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스위스의 신약학 학자인 오스카 쿨만이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 속에 도표로 표시를 했습니다. 오스카 쿨만의 책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이름으로 전통적인 우리의 신학의 입장에서 오스카 쿨만의 책에 전개되는 내용들을 다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되시고 모든 역사의 중심이 그리스도이고 거기에서 또 거기에로 모든 시간이 목표하여 오고 다시 거기에서 출발해서 다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잘 표현한 면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이해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이 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대가 지금까지 계속 되었다면, 종말의 세대에는 죄와 하나님의 저주가 다 벗어지고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는 그런 세상인데 그런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사는 이 옛세대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옛세대에 도입됐어도 엣세대를 다 대치하고 도입된 것이 아니라, 현 세대에 있는 대로 두고 하나님의 새 생명이 지배하는 새로운 종말의 세대가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 세대가 겹치는 세계에 교차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교차시대에 우리가 살 뿐만 아니라 특히 여기에 제일 중요한 점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이 무너지는 그와 같은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고 죄를 무너뜨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들이 완전히 청산되고 없어질 때는 종말의 때여서 그때는 죄와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온 인류에게 넘쳐나고 하나님의 지배가 완전해져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될터인데 그것이 지금 이 세대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미 우리가 종말 세대에 살고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주님이 재림을 약속하고 가실 때에 자기들의 생존 당시에 주님이 다시 오실 걸로 기다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나 2천년 후에 사는 우리들이나 주님의 종말이 곧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도식에 의해 합당하고 바른 이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종말은 지금 우리 세대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의 재림은 사건으로 그냥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것이 종말시대를 도입하게 되었느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경륜에서 살펴봄으로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가 종말이야기 보다는 조금 인류역사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으로 만드시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이루심으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사는 그와 같은 백성이 되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 체결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알고 사는 그와 같은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 섬김에서 또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김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도록 하는 그와 같은 작정을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므로 그와 같은 일을 진행하시고 경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서 인류역사의 시작 부터서 창조를 이루시므로 가지신 경륜은 자기 나라를 이루실려고 하는 그와 같은 경륜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악한 자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기는 자리에서 자기가 법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을 죽고 사는 생명의 법으로 하는 자리에 자기가 선악을 결정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와 같은 반역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처음에 했던 언약이 파괴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어렵고 또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사망을 결정하는 법이므로 그 말씀대로 살면 생명이려니와 그 말씀을 어기면 사망이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처음 하나님의 계명에 하신 말씀대로 그들의 사망을 선고하셨습니다. 거기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하고 살고 그 말씀 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표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그것이 선하고, 그것을 범하면 악이 되는 것을 분명히 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으면 선이어서 생명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그러뜨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갔기 때문에 악이 되어 사망에 이르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계명을 죽고 사는 절대적인 법으로 하고 쓰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하는 이 순종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므로 자원적으로 순종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는 그러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대하신 때는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적인 순종 그 길 외엔 다른 길이 없지마는 그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적인 필연적인 그와 같은 순종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굽히사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므로 약정을 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생명과 사망의 법으로 하는 데서 자기가 선악을 결정하는 데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이 계명을 파괴하므로 언약이 파괴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 언약 당사자인 인간에 의해서 파기 되었어도 그 언약의 파기를 인해서 그 언약을 그냥 파기시켜 버리고 말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도 언약의 체결로 그 언약의 조건들에 법적인 제약 속에 자기도 매셨기 때문에 이 언약이 성취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냥 인간에게만 언약을 맺으시므로 책임 사항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셔서 명령으로 하셨어도 일단 인간은 언약의 당사자로 삼으시고 자기도 인간에 대해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 언약의 약정들은 쌍방의 구속하는 그와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얽어매시는 그 약정 속에 자기도 얽어 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 요구된 그 순종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이루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일이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 언약의 약정, 법적인 제약들 속에 자기도 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언약이 다시 회복되고 성취되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단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저주와 사망의 선언 아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와 같은 언약을 회복하는 일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이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처음 언약에서 약정하신 인간에게 부여한 요구 조건들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그 순종의 요구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첫언약을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인류의 조상으로 해서 맺은 언약을 통상 행위언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행위언약을 다시 회복시키기로 하셨어요. 그 회복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해야 할 순종을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순종의 조건들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인간이 순종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순종의 요구를 이루시고 그 순종의 요구를 이루신 다음에 그 순종의 의의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 그것이 바로 우리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허락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다시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 순종하도록 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는 일을 이루셔서 인간에게 선물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義이고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의지입니다. 아담이 순종해서 이루어진 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義이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 1장에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을 위하여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는 그 요구를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그 의를 인간에게 선사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이루실려고 하는 그의 경륜을 성취하시므로 사탄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처음 가지신 창조의 경륜을 이룰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자리에서 순종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어 오셔야 만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죽음에 까지 이르는 순종을 요구하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죄 값으로 십자가에 죽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소명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소명이 하나님의 큰 구속 사건을 이루시는데 도구로, 봉사자로 선택 되었는지는 우리가 전혀 말할 수 없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체적인 구원의 계획을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하신 이가 계시 받은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때도 아담과 하와에게 저들을 구속하실 구속주가 오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자기들 당대에 실현될 것으로 소망과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있느냐? 성경에 있어요. 하와가 이제 첫아들 가인을 얻고서 가인을 낳고서 하와가 외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 가인의 스펠링이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인은 본래 “카나”라는 “얻다” “획득하다”라는 언어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드( )가 들었으니까 수동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얻은 것이 아니라, 얻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리라”고 하신 이 약속이 첫아들을 얻으므로 하와는 벌서 여기서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는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낳은 첫아들이 자기를 구원할 구세주로 믿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인”의 뜻도 “얻음”이란 뜻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 그 말은 결국 우리를 구원할 구속주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계속된 인류의 역사에서 늘 소망거리였고 그리고 자기들 당대에 이루어지는 줄 믿었습니다.
그 후에 가인이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 아벨이 났습니다. 아벨이 아담과 하와의 가르침을 좇아 하나님을 성실하게 정말 진실되이 섬길 때에 이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펴실 줄을 아담과 하와는 기대했어요.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비통함이란 말할 수 없었죠. 그럴 때 셋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저자가 아담이 자기 형상을 좇아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형상을 좇아 난 아들이므로 셋이 자기들을 구원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해준 메시야인줄 구속주인줄 그들은 기대했습니다.
이 약속은 계속해서 진행되어서 므두셀라가 노아를 낳았을 때에도 이 약속이 자기들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믿었습니다.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아들로 우리를 안위하려 하심이라고 므두셀라가 말하므로 노아가 자기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구세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부모들의 그 신앙과 그 기대는 노아에게 일면 성취되어서 노아가 제 2의 인류의 조상이 되고 인류를 다시 계승하는 그와 같은 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 약속했던 이 세상의 구속주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질 걸로 보편 인류의 역사에 기대되고 소망되며 그리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죄악이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여기에 바벨탑을 쌓는 역사가 나타나는데 바벨탑의 역사로 인해서 우리의 타락이 아주 급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 보편 인류 특히 그 중에서 셋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려고 하는 경륜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하나님께서 셋의 후손에게서 한 사람을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 그가 아브라함의 셋의 족보 데라의 족보를 길게 말한 이유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에 길게 아브라함의 족보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셋의 후손에게서 바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려고 하는 분명한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소명하기 전에 아브라함의 조상들의 족보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데라의 역사를 일부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역사를 말하고 12장에 이제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부르셔서 가나안으로 옮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통 3장에서 11장 까지를 “인류의 보편 역사”라 그렇게 말하지요. 거기에는 정말 보편역사인 것이 인류의 시작의 기원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해서 인류 사회에 죄가 들어오고 이렇게 저주가 생기고 고통이 생기며 그리고 사망이 들어오고 자연이 이렇게 황폐하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되고 전쟁이 있게 되며 그리고 이렇게 심판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3장 부터 11장 까지가 인류 역사를 가장 보편적으로 잘 다룬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류 역사 전체로써 자기의 구원경륜을 진행하셔서 이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다시 되돌리신 일이 어렵게 될 때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이전의 역사에 있어서 그 어떤 사람도 아브라함 만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계시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가장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경륜을 가지시고 세상을 구속하실려고 하는 경륜을 가지시고 진행하실 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경륜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기신 후에 참 많은 신앙의 훈련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데라의 아들들 중에 나홀과 아브라함과 하란이 있는데 나홀은 그냥 하란에서 살았고 그리고 하란은 데라와 함께 아브라함과 함께 지금의 하란 지역으로 왔는데 하란은 일찌기 롯을 낳고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무자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기시면서 하신 약속이 “네 친척 본토와 네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복을 내려서 네 후손으로 바닷가의 모래처럼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많게하며 그리고 네가 갈 그 땅을 네 후손에게 영구한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 나이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75세인데 옛날이니까 아직 건장할 때이지마는 그래도 75세가 되어도 아직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이전의 족보들을 보면 한 30세이나 25,6세가 되면 벌써 다 결혼해서 자녀들을 가졌는데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으니까 상당히 오래도록 자녀가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가 깨달은 것은 자기 아내 사라, 또 본인 자신도 자기가 불임인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부부에게서 자녀가 나올 수 없는 것이 확실하고 믿어지지 않는 약속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10년을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셨어요. “네 몸에서 아들이 낳으리라”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사라가 불임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와도 정상적인 법적인 부부인 자기들에게서 아들이 이루어 나올 수 없는 줄을 둘 다 알고 있는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서 이스마엘이 낳기 전에 “아니라. 사라에게서 나올 씨가 네 아들이라 하리라”고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면 참 간단하지요.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데 그때 당시에 지금도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우리나라 풍습에 나이가 많도록 본처가 아이를 못낳으면 그저 후처를 얻어서 본처도 같이 살면서 아들을 낳는 것이 바른 법은 아니어도 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묵인하는 그와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 옛날이야 본처가 애기를 못낳으면 후처를 얻는 것이 당연한 그와 같은 상황이었지요. 그러니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주므로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하갈을 통해서 낳았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1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이 얼만큼 커서 이제 아브라함의 이름과 재산을 상속할 수 있을 만큼 되니까 하나님께서 또 간섭하셨어요. “내가 네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 “아니 이미 아들이 있는데요.” “그 아들 말고 사라를 통해서 나온 그 아들이 네 아들이라 하리라” 그러나 이제 나이가 99세가 되고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자기는 남자로서 모든 기력이 다 끝나고 정말 사라도 본래 불임인데다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생리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끝이 났는데 아들을 낳아주리라 하니까 이게 보통 시험과 시련이 아니라. 아니 주 앞에서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보통 해서는 자기들에게서는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이렇게 하시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고 큰 시련인 줄을 금방 아브라함의 고백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주 앞에서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무슨 아들을 또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이미 주신 아들 이것도 내 아들인데...” 그래도 아니라고 사라에게서 날 아들이 네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러한 때에 사라에게서 날 네 아들과 네 씨와 언약을 맺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99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낳는다.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낳는다. 본래가 불임인 것이 분명한데다가 90이 되었으니까 여자로서의 모든 기능을 행사할 수 있을 때가 끝이 났는데 아들을 낳으리라. 이 보통 시련이 아니지요. 가정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어 사라도 어쩔 수 없이 하갈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데리고 그래도 같이 살려고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얻어서 같이 사는 것이 익숙해졌는데 다시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이게 보통 시련과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복이고 큰 축복인 것 같아도 아브라함에게는 보통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가정의 불화가 어떻게 될지 아브라함은 이미 벌써 알고 있었어요. 두 부부간에 싸우는 싸움을 계속 보고 왔기 때문에 이제 이것이 보통 큰 시련이 아닌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또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번 약속해서 안되니까 자주 나타나셔서 반복적으로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못 믿는거죠. 내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아들을 낳는다. 그 웃을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부부관계를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 버렸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네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이 낳으리라” 그러니까 순종하는 길 밖에 없어요. 다 죽은 마른 막대기와 같이 된 부부가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부부관계를 시작을 해요. 이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이 끝났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도저히 아들을 얻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안될 때에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아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이지 자기들의 정상적인 육체의 힘으로 낳을 수 없는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들의 약속에서 세상의 구속주를 함께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시고 그 아들에다가 세상 구속주를 함께 묶으셨어요. 그러니까 이 아들의 약속을 받고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아들은 자기들의 육체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아들이지요. 그러니까 이 아들은 일면은 자기 아들이지만 일면은 자기 아들이 아니지요. 자기들의 육체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고 우리가 아들과 딸을 낳는 방식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 아들은 자기들의 몸으로 부터 왔으니까 자기들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왔기 때문에 자기들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속하실 구속주가 인간의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임을 아브라함으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출생한 이 아들이 바로 자기들의 이름과 재산과 종들을 이어 받을 그와 같은 상속자 만이 아니라 세상을 구속하실 구속자를 낳게 할 아들임을 아브라함이 이삭의 약속에서 분명히 안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그거예요. 이 아들은 세상 구속주를 출생하기 위해 은혜로 주신 아들이라. 그것이 이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역사임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한 10여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삭의 나이가 13,4세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기 전에 신약에 비추어서 보면, 한 말씀 더 해야 될 것은 이삭이 출생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의 출생에서 자기들의 육체적인 생명을 계승할 그와 같은 계승자이고 그리고 자기들의 이름을 이어갈 그런 계승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본 그 아들의 출생에서 세상을 구속한 구속주의 출생을 본 것이죠. 그러니까 신약의 요한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이 내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 하였노라고 했는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졌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출생했을 때 그 출생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출생에서 자기 아들로 뿐만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구속주의 출생을 넘어다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생 후에 하나님은 계속하여 아브라함을 신앙으로 단련하시고 기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이삭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허락하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 때에 가나안의 중심부에 살지 아니했습니다. 저 변방 지금 네게브 사막 이스라엘 남부에 사막이 있는 지역 그러니까, 이스라엘 가나안이 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지역이 끝이나고 사막이 진행되는 지역 소위 브엘세바에 내려와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백성들이 마음대로 번창할 수 있게 잘 살 수 있는 그 가나안 중부지역에 그 기름진 지역에 살았던 것이 아니고 지금의 네게브 제일 이스라엘 남쪽 지역 살기 힘든 지역, 그러니까 정상적인 인간적인 생활, 생존 생업이 가능한 지역하고 사막이 있는 경계에 와서 많이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셨어도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었기 때문에 늘 위협이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과 같이 섞여 산 것이 아니라 일면 떨어져 살았어요. 떨어져 살므로 가나안 족속과 전혀 교제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죠. 아브라함도 왕 같은 족장이어서 318명의 군인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방어할 군대를 가졌으니까 군인이 318명이며는 종들이 얼만큼 많았는지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존과 아브라함의 아들을 그리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318명의 군사가 필요했으면 아브라함에게 붙어서 일하는 종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리기 어렵죠. 318명에 다섯 사람의 가족만 붙는다 해도 1,500명 약 2,000명이 됩니다. 아마 그들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종살이 하며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는 족장이었어요. 아브라함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텐트 몇개 쳐놓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니예요. 그 수천 명을 거느리는 왕 같은 족장이기 때문에 이 재산과 자기들의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왕들하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음에도 아론이 저 땅 끝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리고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한평의 땅도 자기의 소유로 인정된 곳도 없고 소유된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삭이 나서 한 14,5세 될 때까지 훈련을 시켜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이를 통해서 지금 구원의 경륜을 펴시고 계신 줄 깨달았습니다. 구원하실려 하는 구속 경륜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에 봉사해 드리는 것이 그의 생애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어떤 분이 설교하듯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가지고 그를 안전하게 하시고 또 그렇게 금은 보화도 많이 갖게 하시고 또 좋은 음식도 먹게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제가 성경을 보고 이해한대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많은 재산을 주신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것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하고 살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재산이 없었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만을 전부로 하고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허락하셨느냐?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많은 재산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이심으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를 위하여 봉사하고 수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자집에 가 보십시요. 부자들만 밥 먹는데가 없습니다. 지금 도시에서 부자들의 생활은 다른지 몰라도 옛날 시골을 보면은 조금 부잣집에는 식솔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계속해서 손님들이 와가지고 밥을 먹고 살아요. 제가 한번 대학교 때에 저 구례에 갔는데 친구가 의과 대학을 다니는데 옛날에 진사를 했던 집인데 그러니까 뭐 일제 때를 거치고 다 했는데 그 진사라는 것이 그 전에 했던 일 아닙니까? 나라가 망하기 전에... 그런데 그때 진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데도 집에 사람이 바글바글 합니다. 식솔들이 끊이지를 안해요. 그래서 참 기이하다고 대학 때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맡기심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봉사하게 함으로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으면 쉽게 아브라함의 생명을 해할 수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위해 일하고 그걸 지키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아브라함에게 접근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많은 재산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안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죠.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는 사라가 너무 미인이라 그 옛날부터 말이 있죠. “미인은 만인이 것이지 개인의 소유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미녀를 데리고 사니까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죽여 버리면 다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자구책으로 “너는 내 누이라고 해라. 나는 너의 오빠고” 그래 가지고 서로 오누이라고 산다. 그러니까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왕이 사라를 데려갔어요.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간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누이를 데려가는거야 뭐 좋은거죠. 처남이 되니까 그 바로 왕실의 처남이 되니 얼마나 큰 세력을 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때도 개입하셨어요. 아브라함의 많은 종들과 군대 가지고는 그때 당시의 세계 최대의 제국의 왕의 권세를 어떻게 해결하겠어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에게로 다시 사라를 돌리시게 하셨죠.
그 다음에 다시 돌아와 가지고 다음에 아비멜렉에게 살 때 불레셋 군대의 아비멜렉에게 가서 살 때 그때도 하나님께서 거기 가서 살 때도 또 오누이라 하니까 그곳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또 아내를 오누이라 하니까 빼앗아 가서 자기 아내를 삼을려고 했죠.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브라함의 생에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을 없게 하셨지마는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아브라함 혼자 살며는 그저 목숨 빼앗기는 일이 쉬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종, 재산을 그에게 붙이므로 많은 재산을 관리하려니 많은 사람이 필요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맡기시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므로 아브라함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래도 아브라함이 위험하니까 신변의 위협이 있어 아비멜렉에게 뭐라고 답했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라” 그러기 때문에 저 가나안 남쪽 끝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는데 그것이 인제 정말 자기 아들을 바칠 수 있도록 까지 하나님이 훈련시키셨어요.
창세기 22장에 보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 독자 사랑하는 아들을 내가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 키에르케고르 그의 유명한 책 “공포와 떨림”이라는 책에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참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적게 사랑했기 때문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정말 그 이상 더 사랑할 수 없도록 사랑했기 대문에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편적 윤리 가지고는 이 특수한 상황, 이 신앙의 영웅의 일을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윤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되이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윤리 아닙니까?
임마누엘 칸트가 보편성을 아주 정립을 잘했는데 이런 보편적 윤리의 법으로 도저히 이 특수한 신앙의 영웅의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부모나 처자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줏어 들을 때에 대부분 미워한다는 말이 나보다 더 적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까지 주석가가 주석해 왔는데 키에르케골은 바로 그 주석을 들어가지고 말해요. 도대체가 성경의 법에 맞지 않다. 조금 더 적게 사랑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느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그 이상 더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고 그것이 가능했다.
그 미워한다는 말을 부모와 처자와 자기 목숨을 주님보다는 조금 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결코 바르지 못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제 그 동안 신앙으로 많이 자랐기 때문에 좀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 드릴 때에 아무런 고통과 어려움 없이 제사를 드리는 걸로 우리가 이해하고 그렇게 읽어갑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보면 아브라함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 그래요.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인류의 역사상 아담의 후손으로 아브라함 만큼 큰 고통과 고뇌를 겪은 사람은 없다. 자기의 친아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되니까 그 고통과 고뇌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차라리 늙은 나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또 그것도 종들이 데려다가 이삭을 자기가 안보는데서 번제로 드린다면 얼마나 그래도 조금 낫죠. 친히 자기가 자기의 아들을 양을 이제까지 제사 지낼 때처럼 잡아가지고 목을 따서 묶어놓고 그리고 나무를 해서 장작을 피워놓고 불을 피우고 제단을 쌓은 후에 그 위에 이삭을 묶어놓고 피를 쏟은 다음에 그 얼마나 아파서 뒤척거리며 정말 신음하고 그럴 때에 그걸 지켜보고 서서 “아들아 거룩한 순종을 하라” 그러면서 제사를 지내야 되니까 이런 고통을 누가 견디어 내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랬는지 탈무드에 보면 이삭을 제사지내고 산을 내려올 때에는 눈이 멀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눈이 멀었다 그래요. 그것은 탈무드의 랍비들의 해석이기 때문에 그걸 맞다고 진의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랍비들이 아브라함을 이해할 때에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를 이해하는 눈이라 그런 말이예요.
이제는 이삭이 얼만큼 상속받을 만 하니까 이삭을 약속을 하셨는데 이삭이 이제 상속을 받을 만 하니까 이스마엘을 내쫓아 버리고 집에 없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에도 이스마엘에게 아브라함이 재산을 상속해서 내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물 한부대 떡 몇 덩어리 고기 몇 점 내주어서 보냈어요. 그리고 사막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네게브가 사막이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곳으로는 갈 수 없고 사막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그렇게 내보내면은 죽으라고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그 이후에는 이스마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아브라함의 관심사가 못되도록 하나님이 하신 다음에 이삭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했으니 보통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순종을 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하나님이 그를 훈련시키셔서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죠. 바로 이 아들이 지금 제사 지내는 이 아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이 되게 될 자손들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아들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일면은 일치되었는데 이 아들을 번제로 불태워 죽이면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가느냐?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것을 해석을 하기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걸로 아브라함이 믿었다. 부활을 믿었다고 했어요.
그러나 하여튼 자기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 아들 저 모리아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제물 드릴 때에 종들은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왜? 종들이 올라와 버리면은 제사 지낼 때에 가만히 있겠어요? 이 노인이 노망을 했느냐고 얼마나 방해를 놓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제사가 못돼요. 그러면 마음이 찢어지고 또 상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바른 제사가 못되는 거예요. 그래서 종들은 못 오게 한거예요. 그럼 옛날 그때에 나귀에다가 짐을 실어가지고 올라가면 이삭이 덜 고생할 것 아닙니까? 나귀도 자기 집에서 키운 동물인데 주인이 아들을 가지고 지금 제물을 잡고 그러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그것도 튀기고 광음을 울리고 보통이 아닐거요. 그러며는 이 또 마음이 상하고 찢어져서 거룩한 제사를 온전한 제사를 못하게 하기 때문에 나귀도 밑에다 내려 놓았습니다. 둘이만 간거지요. 칼을 들고 그리고 횃불을 들고 그리고 나무를 지우고 그리고 올라가서 모리아산 꼭대기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이지요. 여기까지 오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란의 17세기 유명한 화가가 램브란트 입니다. 램브란트. 종교개혁으로 종교개혁이 산출한 2대 예술가를 화란의 램브란트 하고 독일의 요한 세바스챤 바하를 꼽습니다. 르네상스 때 로마교회가 산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 미켈란젤로, 이런 등에 대응할 만한 큰 예술가가 요한 세바스챤 바하이고 램브란트인데 램브란트가 성경도를 그림으로 그린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성경에 보면 옷을 다 벗기고 밑만 가리우고 뒤로 묶으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턱을 잡아올리고 우리처럼 부엌에 쓰는 그런 칼이 아니고 아주 뾰족한 칼로 이렇게 칠려고 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자기 아들을 자기가 목을 쳐서 피를 흘리고 그리고 그 아들이 다 재가 되도록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일로 무엇을 계시하셨냐 하며는 “바로 네 아들이지만 네 아들이 아니고 내 아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구속의 법이 속죄의 제사가 희생의 제물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길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10분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첫시간이 너무 오랜 시간 강의가 되어서 지루하시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이 소명할 때에 그 경륜이 어디에 있는줄을 알게 됐으므로 참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봉사해 드리는 것을 그의 일생에 전부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우리 한국교회에서 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많이 성경이 본래 말하고 가르치는 것 하고 이탈되어서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속경륜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거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이 번제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많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번제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속죄 문제들을 다 이미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마지막에 자기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바쳐 드리게 되었으니 참 이 아들에게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또 그들이 살 땅으로 지금 아브라함이 들어와 있는 가나안을 약속하신 그런 귀한 아들인데 번제로 바치게 함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실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구속의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중에서 나올 구속주를 바로 아브라함이 번제드린 그 방식으로 죽게 함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이 제사장으로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그 순간 제물이 된 이삭의 자리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양이 대신했습니다. 아까 까지는 아버지는 제사장이고 아들은 제물이었는데 이제 둘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삭으로 대변 되면서도 이삭과 구분되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어린양으로 세상이 구원될 것임을 하나님이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읽어보나 그 다음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한가지 일로 끝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속경륜을 다 계시하셨어요. 참 은혜로운 아들 그 방식으로 세상에 구속주가 오실 것이고 그리고 모리아산에서 번제가 되신 그 방식으로 세상이 구속될 것임을 하나님이 분명히 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 분명하고 확실한 구속경륜을 계시 받고 가르침 받은 아브라함이 할일은 그 바로 이삭으로 장가들어 이제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이어지게 함으로 구속주가 오시는 것을 에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24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들게 하는 그 일로 아브라함의 일이 다 끝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한 6,70년 더 살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 나홀의 자기의 형제의 후손중에서 정말 신앙 좋은 리브가를 택해서 결혼시키므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구약이 50장까지 갈려며는 한참 진행되는데도 아브라함의 일이 다 끝난 것처럼 성경이 끝나고 맙니다. 물론 그 이후에 그두라를 첩으로 얻은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은 이야기를 했지마는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있어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미 할일을 다 했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므로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는데 이것도 세상적인 관점으로 세상적인 자녀의 번창 그래서 아브라함이 재미를 보는 그와 같은 그런 의도가 결코 아니고 구속주가 오실 수 있도록 마련하는 길 그거지요. 그 일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책임이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서는 신앙 족장들의 신앙 영웅들의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도 전부가 다 이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지 그 신앙의 조상들 족장들의 일이 아닌 걸로 성경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셔서 다시 구약을 읽어 보십시요.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하고 야곱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 고리 역활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저 평화로운 사람으로 하고 별로 많은 기사가 없어요. 그러나 야곱에 와서는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일을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정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12자녀를 얻게 하시고 그러니까 참 얼마나 괴롭습니까? 한 남자가 자기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어서 아내로 삼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외삼촌이면서도 장인 어른의 이 자꾸 장난질로 인해서 아내가 넷이 되었으니까 네 아내 사이에 얼마나 싸움이 많이 벌어집니까? 참 괴로운 생을 야곱이 계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야곱이 꾀가 많아서 자기 삼촌의 재산을 다 자기에게로 끌고 올려고 했지만 성경을 조금 다시 읽어 보며는 야곱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라반도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재물에 탐욕이 너무 많고 또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이 야곱을 데릴사위로 해서 자기의 대를 이어가게 할 사람이게 하고도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나오니까는 이제 계속해서 자기 재산 야곱에게 못 가도록 계속해서 술수를 쓴다. 그래서 열번이나 내 삯을 바꿨다고 야곱이 자기 아내들에게도 말하고 라반에게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라반이 그와 같은 행사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산이 야곱에게로 대폭 옮아 오도록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 야곱이 꾀를 부려가지고 양들이 물 먹으러 올 때에 서로 올라타고 그럴 때에 이 버드나무를 세우고 껍질을 벗겨가지고 그 물 먹을 때 그렇게 올라타게 함으로 양들이 나오게 했다 하지마는 간혹 감응유전이라고 하는 것이 있긴 있습니다. 감응유전, 그것도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령 한 남자가 아내를 둘 얻었는데 전혀 아내의 생김 모양이 달라도 두번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많은 경우에 감응유전에서 큰 엄마를 닮아 나온다. 첫 아내를! 그런 감응 유전이 있지요. 그러나 지금 이와 같은 꾀를 야곱이 부린다고 해서 감응유전으로 지금 이렇게 얼룩무늬 있는 것이 생겨나온 것이 아니지요. 분명히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로 재산이 옮아 가도록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야곱이 자기 자손을 기를만한 재산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또 재산이 많아지므로 야곱에게도 많은 종들이 일하게 했지요.
그리고 이제 야곱이 가나안으로 옮겨온 후에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간섭하시기로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야곱이 제일 사랑하는 자기 아내 라헬에게서 나온 요셉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꿈을 꾸게 했어요. 17살 된 소년에게 전에는 밀단들이 요셉의 단에 무릎 꿇게 한다. 괘씸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버지의 밑에만 있고 자기들은 좋은 옷도 안입고 누더기 옷만 입고 양을 치느라고 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사람 노릇도 못하고 사는데 요셉은 때때옷 입히고 좋은 음식만 먹이고 아버지가 사랑만 하는데 그런 꿈 이야기 하니 얼마나 밉습니까? 또 그래도 야곱이 못 알아 들으니까 하나님이 꿈을 다시 만드셨다. 하늘의 열 한 별과 태양과 달이 자기 별을 향해서 무릎 꿇고 절을 하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 무슨 일이 진행될 것인가를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을 기르시고 구원하실 것을 미리 보이신 것이예요. 아직 야곱이 눈치 못채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형제간들의 미움과 증오를 하나님이 이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셨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은 형제간들의 미움 때문인 것 같애도 하나님의 경륜으로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이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할려면 그만한 백성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땅을 차지할 만한 백성이 되어야 땅을 차지하지요. 그저 소수 몇명 안되는데 광야같은 그 넓은 땅을 맡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기를 자리를 애굽으로 정하신 것이예요. 왜 가나안에서 안하시고 애굽을 정하셨느냐? 가나안은 그렇게 비옥한 땅은 못됩니다. 애굽에 비해서!
그리고 가나안 7족속이 다 살고 있고 이미 불레셋이 상륙해서 와서 살고있기 때문에 이렇게 잡족속 속에서는 온전한 백성으로 자라나기가 어렵다. 그리고 백성이 마음껏 자랄려면 곡식이 풍부하고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항상 저 메소포타미아 지역하고 이 애굽 지역이 늘 교차지역이고 세력이 맞닿는 지역에서 늘 이 강대국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입니다. 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잡족이 섞여 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르며는 이방 족속들 하고 결혼하게 되므로 혼합과 혼잡이 생겨서 순수한 아브라함의 후손을 양육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백성이 기르기 제일 좋은 장소가 애굽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일강의 풍성한 그 생산력에 의해서 애굽이 그때 중동세계 전체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 였습니다. 그건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2천년 지나서 시이저가 로마를 세우고 로마를 통일할 때도 애굽이 로마세계를 먹여 살린 곡창지였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파스칼의 이야기를 듣고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인치만 낮았어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파스칼의 팡세에 있는 말 때문에 그 안토니우스도 애굽에 내려가고 시이저도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지마는 물론 안토니우스는 그랬을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시이저가 애굽에 내려간 것은 결코 클레오파트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 까지도 애굽이 로마세계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창지 였습니다. 그 곡창지역을 확보해야 로마의 평화가 성립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이저가 군대를 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지요. 물론 시이저 같은 사람이 다 정복만 하고 평정만 해놓고 온 것이 아니고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와의 일도 생기고 해서 여러분이 영화를 보아서 다 아시는 대로 그런 일도 있지마는 또 시이저가 권력으로 나아가는데 인류 역사상 시이저 만큼 여자를 많이 이용하고 활용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자매님들이 계셔서 미안합니다마는 그러니까 그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훌륭한 곡창이어서 그 대 제국들을 이룰 수 있었고 애굽이 그렇게 풍성한 곡창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제국을 2천년 이상 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가장 강력한 고대국가로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도 물론 외적의 침입이 많이 있지마는 군대로 그렇게 방어하므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함이 가나안처럼 빈번하지 않으므로 애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양육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을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한 백성을 기르기 위한 장소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내려 보내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느냐? 그냥 들어가면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이 오니까 간첩이라고 하듯이 정탐이라고 간첩이라고 하듯이 그냥 들어가면 이 이방 민족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항상 적대감을 갖고 배척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보내 가지고 요셉을 총리대신 되게 하고 흉년이 들게 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명분을 허락하신 거지요. 그리고 애굽을 흉년으로 멸망해 갈 흉년에서 구출해 내는 의인의 가족으로 그들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400년 이상 마음 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창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장 풍성한 곡창지대,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백성의 양육에 어려움이 없는 대국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요셉을 미리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이 꾀부리고 역사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고 형제들이 미워서 그랬던 것 같아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택한 백성을 만드시게 한 역사이지요. 430년 동안 기르시니까 남자가 60만이었다. 그때 인구 계산이 남자 20세에서 60세가 60만이니까 이 보다도 밑에도 있고 이 보다 나이 위에도 있습니다. 이게 지금 장정들만 계산한 것 아닙니까? 이 60만에다 최소한 다섯명 가족만 붙이면 300만 입니다. 그때는 생산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훨씬 더 300만 400만 이보다 더 많이 됐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출하셨어요. 그때 당시에 애굽이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고 그리고 가장 강력한 고대 세계 제국인데 그들을 그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구원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을 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그만한 강력한 군대가 아니며는 어떻게 싸워서 그 많은 수를 구출해 내겠습니까? 300만 해도 보통 인구입니까? 지금 인구가 하도 많아서 서울 인구가 천만이 넘으니까 뭐 이거 300만이 많은 것 같지 안해도 보통 많은 것이 아니죠. 300만이 더 된다고 보아야 맞을 것입니다. 한 400만 이상... 이런 많은 수를 어떻게 애굽의 군대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기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전혀 인간의 손이 불가능한데 모세 한사람 지팡이 들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출하려 보냈을 때에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하는 것 보니까 불가능해요. 그래서 모세는 정신병자와 같은 사람으로 이스라엘 눈에 보인거죠. 불가능을 시도하니까! 그 강력한 군대에 어떻게 대항해서 구해 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모세를 통해서 하신 것 같아도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봉사자일 뿐이지요.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신 것입니다. 기적으로, 큰 권능으로 구출해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하심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시므로 율법을 허락하시고 속죄 제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구원 얻는 길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속죄제사를 통해서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과 구원 얻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 죄과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 문제를 통해서지요. 이 둘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신 길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 율법을 통해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된 순종과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리고, 속죄제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시행하게 하므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해결, 속죄 문제의 해결, 죄과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사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에게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교육하시고 교훈하셔요. 그것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를 얻어서 살 수 있는데 율법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거죠.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이 깨닫는 바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 엄위로운 율법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진행될수록 갈수록 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넘어지기 쉬워요. 그렇다고 제사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예요. 제사제도도 마찬가지로 힘있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제도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알게하신 것이 무엇이냐? 이 속죄제사가 지금 짐승으로 드리는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가지만은 이 속죄제사가 이스라엘의 죄과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가 진행될수록 악이 더 심하고 아주 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것들을 위하여 속죄제사가 열심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래도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그 속죄제사로 이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법이 가르친 바는 이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길로만이 죄과가 해결되는데 속죄제사로도 이스라엘의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속죄제사에도 불구하고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분명히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실 완성자를 고대하고 바라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계속 재촉하므로 우리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데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율법을 완전히 지켜줄 율법의 완성자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속죄제사가 계속되는데 이 길로만이 분명히 하나님과 화해되고 백성으로 바로 서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는데도 속죄제사가 그렇게 많이 진행되도 이스라엘의 운명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드리는 속죄제사는 아브라함이 드렸던 제사가 표현하는 완전한 제사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모든 죄과와 인류의 모든 죄과를 해결할 속죄제사가 오도록 하는 것, 재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이 속죄제사로도 마찬가지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이 율법의 순종과 속죄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율법은 못지킨다. 율법을 지켜야 사는데 못지킨다. 또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과 문제가 해결되는 데도 이스라엘이 드리는 이 희생제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속죄제사를 바라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끝에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역사에서 짐승의 제사로 사람의 죄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법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던 구원의 경륜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던 그 구원의 경륜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반복되고 실현되고 실행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완전한 순종, 지킴과 그리고 죄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바로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이스라엘 자신과 세계 만방에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세계 만방에 어떻게 알게 했느냐? 우리가 보기엔 알게 한 것 같지 않지요. 그래도 이스라엘이 서 있는 자리가 항상 중동의 양대 문명의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언제든지 애굽 백성이 메소포타미아로 메소포타미아 백성이 애굽으로 갈려면 가나안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통의 통로, 요새인 것입니다. 이 통로 아니면 갈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서울로 정하기 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애굽으로 통하는 통로와 요단강변을 통해서 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서울로 올리고 부터는 그 신지인 예루살렘이 이제는 예루살렘을 통하지 않고는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이 통로를 가질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제사장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는 것이지요. 그들이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의 포로되어서 586년 B.C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을 때에도 이들이 중동지역에 흩어지면서 이 구속경륜을 전파하고 알린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장 백성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중동의 고대 문명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들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바로 이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구세주를 보내시기 위한 그저 모태, 어머니, 어머니의 태반, 이걸 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출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는 더이상 특별한 보호를 받는 특권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받아야 할 구속의 대상으로 있는 것이지 특별한 호의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구속으로 그들의 존재 의의를 존재 목적을 사명을 다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조성하시고 만드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지 이스라엘을 세계 만방에 높여서 이스라엘의 육체적인 이해대로 세계의 왕이 되고 메시야가 오시면 전세계를 통치하는 세상적인 다윗의 왕국을 재현하는 것을 결코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의 구속사건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70년에 디도장군을 통해서 로마에서 예루살렘 성을 헐었어요. 그때 죽은 사람이 110만 입니다. 지금은 인구가 많아 110만이 적은 것 같지요. 그때 예루살렘 성에서 죽은 사람이 110만 입니다. 보통 많은 수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끝나게 하시고 그들을 고토에서 내 쫓으셨습니다.
상황에서 그런거지요. 디도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로마 사람의 손에 의해 죽은 사람 보다 자기들끼리 죽인 것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있을 것으로 다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대비를 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므로 자기를 구해내시고 로마군대를 다 물리칠 줄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식량을 비축하는 일이라든지, 뭐 전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심지어 주님 말하신대로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들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먹을 것만 감추어 놓으면 사람들이 와가지고 완전히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먹고...
제가 아침에 읽은바에 의하면 어느 교양있는 훌륭한 부인이 먹는 것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다 빼앗아 가버린 거예요.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요. 있는거라고 자기 손 안에 있는 갓난아기 뿐이었어요. 너무도 견디다 못해서 반으로 아기를 짤라 가지고 구웠어요. 그래서 냄새가 나니까 다들 몰려 왔어요. 너무 희한한 냄새가 나니까 “내 놓아라. 네가 무엇을 먹었느냐?” 너무 기가 막혀서 그래도 할 수 없어서 내 놓았어요. “내가 내 아이를 이렇게 해서 반을 먹고 반을 남겨 두었다. 너희도 먹을려면 먹어보아라” 그래도 차마 못먹고 다 물러간 거지요. 그렇게 하고 자기들 패를 조직해 가지고 자기 패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은 막 죽였어요. 말할 수 없이 많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사람들을 디도 장군의 병사들이 잡아가지고 십자가에다 못을 다 박았습니다. 도망간 사람들이 많아 십자가의 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이 박아 죽였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포위망이 이제 방어망이 뚫렸습니다. 디도 장군이 가서 불을 놓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예루살렘 성이 다 금으로 입혀져 있지 않습니까? 불을 놓으니까 금이 녹아 내린다 말이예요. 병사들이 그 금을 줍기 위해서 돌을 밀어뜨리고 금이 녹아서 돌 사이로 들어가니까 돌 하나 위에 돌이 하나라도 남지 않게 다 밀어뜨린 거예요. 그것이 A.D 70년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건 이루 성취된 후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제사가 더이상 계속되지 못하게 할려고 예루살렘 성을 헐어 버리셨어요. 완전하게! 그리고 135년 바 코크바 전쟁이라고 이 마지막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로마의 황제가 더이상에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완전히 다 내어 쫓았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래서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하셨어요. 그때 부터서 가나안 땅이 팔레스타인, 불레셋의 땅이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이 불레셋에서 왔어요. 팔레스타인, 그 필리스타인이 팔레스타인이 된 것입니다. 그 필리스타인의 땅 임자 불레셋의 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1948년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는 완전히 여기가 이스라엘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근 1900년 기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예요. 호의 보이신 것이 없어요. 가는 곳마다 핍박과 그리고 추방, 어려움 당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예요. 그래도 그 모진 인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유대인으로 흔적을 남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약 1200만이 전세계에 산다고 그래요. 이제 팔레스타인에 약 300만, 러시아에 약 300만, 미국에 약 600만 그래서 약 1200만 해서 그 중에 600만이 2차대전 때 히틀러의 손에 죽었지요. 그러니까 2차대전 당시에는 약 1800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이루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구속의 사건으로 그 사명과 본분을 다 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다시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피제사를 회복하고 그리고 다시 다윗 왕 같은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이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성취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 버리셨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섭리가 어떤 섭리일 것이냐?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자, 하나님께서 1500년의 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완전한 순종을 위하여 여건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후속으로 하나님이 인류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화해하시며 성령을 부으시므로 하나님이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인류 역사에 직접적으로 시행하시고 개입하셨습니다. 성령을 부으심으로 지금 우리가 받아가진 생명이 종말의 새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있고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시대에 산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모든 인류의 역사가 다 종말의 역사이고 종말의 때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번의 재림 보편부활 그 다음에 보편심판 그리고 정화 후에 영원한 신천신지에 도입, 이것이 공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인데 우리가 이것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 덮어두고, 교파 나눌 때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니까 혀도 잘 돌아가지 않는 웨스트민스터란 말이 나오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하지요.
제 2 강 
마태복음 24장 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란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14)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 이렇게 많이 오신 것 감사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의 그 구원을 위한 준비의 과정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역대 하나님께서 준비된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마지막 구원이라. 그래 종말론적이란 말 하고 종말이란 말 하고 우리가 구분해야 하는데 종말은 시작, 창조의 시작에 대칭되는 말로 우리가 종말이라고 뜻하는 역사의 끝을,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역사의 끝을 종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역사의 끝이, 역사가 시간이 시작되어서 진행되어 끝에 도달했을 때를 종말이라. 그 시작이 보통 그런데,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작의 끝에 발생하지는 않았어도 그 보다 앞으로 더 큰 사건이 생기지 않아서 이것이 궁극적이고 또 마지막 사건,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을 종말론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사건은 역사가 다 끝나도 다시 반복되지 않는 사건을 종말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말론적 사건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유일한 구원이고 또 궁극적인 구원이어서 이 보다 더 큰 구원의 사건이 앞으로도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복될 수 없다 할 때 그것을 종말론적이라. 종말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현상에서의 일이 반복되고 진행되는 일이 없지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더 이상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을 때를 위시해서 종말인데 종말론적은 역사의 시간 내에서 발생했어도 이것이 종말에서 이루어질 큰 사건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큰 구원이나 또 더 크거나 더 결정적인 사건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마련하신 세상 구원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방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최소한 이스라엘 역사의 1,500년에서 가르치시고 준비해 오셨으며 그리고 아브라함 부터 시작한다면 최소한 한 2,000년 기간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계시하시고 그리고 가르치시고 준비하셔서 마침내 이루신 사건입니다. 보통 족장 아브라함의 시기가 언제냐, 이에 대해서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많지만 보통 주전 19세기에서 20세기 어간이 족장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기로 봅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내에서 계시되고 분명히 가르쳐지고 준비되기는 아브라함 때 부터이고 우리가 성경에 있는대로 보면, 인류 역사의 맨 초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타락한 그 때 부터 치면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서, 그리고 마련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속죄의 죽음과 그의 부활입니다.
그래 이 구원은 역사의 중간에 발생했어도 이보다 더 큰 구원은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다른 구원의 길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까지 어떤 때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이 구원이 마지막 종말론적인 구원이므로 이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전파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과를 도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시사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시고 또 성령을 보내시므로 우리의 옛사람, 죄악을 다 벗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충만하게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셨지만 또 성령의 오심, 혹은 성령으로 교회가 기름부음 받은 것에는 선교의 사명이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은 초대 교회 만이 아니고 그 후손되는 모든 교회들이 다 성령의 내주함을 받은 교회이기 때문에 다 능력을 입은 교회지요. 그러니까 이 구원의 도가 계속해서 교회가 존속하는 날 전파되게 하시고 또 이 교회의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이 전파되면, 전파되고 있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자기의 모든 백성을 다 부르시고 또 자기가 회복시키시기 때문에 이것이 종말에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종말의 시대의 사건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세상을 구속하신 이 구속의 길이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이고 또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결정적인 구원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한 두어 가지 반대 이론이 있습니다. 첫번째 이론이 소위 종말론 중에 천년기로서 그 중에 특별히 현대 미국의 천년전기론이라고 할 세대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하고 그리고 궁극적인 사건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성경과는 다른 가르침을 몇 가지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면 현재 미국의 천년전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한 것으로서는 천년전기 중에 세대론을 말합니다마는 천년전기 중에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천년전기 중에는 마지막 주님의 재림 때 부분과 연관해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고 인류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는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데 세대론은 이 주장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전적으로 배치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대론은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그 구원을 이루실 방책, 그 원리를 시대마다 달리 내셨다 그와 같이 주장을 합니다. 무흠시대 때는 선악과 계명으로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선악과 계명에 순종만 하면 인간은 바로 영생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흠시대 때 선악과 계명으로 인류가 구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 2의 시대에 제 2의 구원의 방편을 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시대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 안에 하나님의 도덕의 법을 마음에 다 심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 후에도 양심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내신 도덕법에 의해서 살고 활동하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무흠시대 다음 양심시대에는 모든 인류가 양심의 법을 좇아서 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이루에 그들에게 죄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서 처럼 크진 않아서 어느 정도 양심을 지키고 살 수 있었다고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에덴의 동쪽에서 살 때부터 아브라함을 소명할 때까지 노아홍수 전까지 양심시대는 무난히 마음판에 새겨진 도덕율을 좇아서 지키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우리가 또 얼른 보기에도 바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에덴의 동쪽에서 인류가 범죄한 생을 살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세주의 약속이 인류 역사가 어느 정도 흘러간 다음 인류가 번창해진 다음에 일부 족속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 시작 때부터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에덴의 동쪽에서 노아홍수 전까지 인류가 살 때에 양심의 법을 좇아서 그 양심이 가르친 대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실 때에 계시하신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지 이 인류의 마음판에 새겨진 양심의 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록 죄의 역사가 우리 때 만큼 강력하고 힘있게 작용하지 못해서 그 때에 비록 죄 아래 살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많은 면에 선한 생활을 했을 것이 사실이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와 죄의 법칙 아래 있는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이 양심의 법을 바르고 온전하게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그냥 쉽게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가인과 아벨이 아담의 가정에서 난 첫번째 아들이라고 하면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는 사건, 그래 인류의 역사의 맨 초기에 벌써 살인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법칙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살인 사건이 그것도 형제를 죽인 사건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 생겼던 것을 보면 처음 인류 역사 시작 때 부터 죄의 역사가 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창세기에 나타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느냐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아벨은 양으로 피제사를 바쳐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는 받으시고 피제사가 아닌 곡식제사, 소제는 소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인의 죄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어요. 창세기 4: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뇨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 보면 분명히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소제 때문에 곡식으로 피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고 그가 그의 죄 때문에 그의 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는 것이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제가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안 가지고 왔는데 그 히브리 원문에 보면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 죄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인이 죄의 욕망대로 살면 안되고 그 죄의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행하고 싶은 욕망이 사람들에게 다 있지요. 그러나 그 죄의 욕망대로 살면 안되고 죄를 다스려야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피제사가 아니라 곡식 제사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고 가인이 하나님 앞에 죄와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자기 동생의 제사는 받으시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받으신 걸로 인해서 가인이 분노하고 분해서 쳐 죽였습니다. 아벨만 없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 없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을 죽게까지 한 걸 보면 그때 죄악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의 삶의 길이 선을 행하는 길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길이었습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동일하게 자기 아버지로 부터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사법, 하나님께 속죄 드리는 속죄법을 이미 가르침 받았습니다. 자, 벌써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일 정도였으면 그 때에 죄의 역사가 얼마나 과격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 죄의 역사대로 행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었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여호와 앞에서 낯을 들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이 사실이예요.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제사받지 않았다고 분내었기 때문에 왜 제사 받지 않은 이유를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인은 벌써 죄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대로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담 이후에 사람들이 양심의 법을 좇아서 하나님의 법을 바로 지키며 살 수 있는 존재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의 과격한 역사 때문에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싶어도 선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6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홍수로 파멸하지 않으면 안될 근본 원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람들의 딸들을 취해서 결혼해 가지고 완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6장에 와서 성경을 해석할 때 참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는 말은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을 지시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창세기 6장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십시오. 6: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으니라”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전통적인 구약 성경의 영역 속에 이방의 신화가 여기 들어왔다 말합니다. 자유주의 학자들이… 왜냐하면 희랍신화에도 신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특히 희랍신화에 교제 관계가 많이 나와서 거기서 그렇게 특별한 영웅들, 바알 신들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는 신화가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여기 창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 )은 천사를 예시하기 때문에 천사들이 사람들하고 교제해서 영웅들을 낳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견해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반박할 수 있는 위치를 생각해 봐도 우리가 쉽게 ( )이 꼭 천사들만 지시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일단 덮어 두고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우리가 추리할 수 있어요.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도… 왜냐? 천사가 사람들하고 성적인 교제 관계를 갖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그것은 이방 신화들에만 있는 거지요. 실질적으로 영물하고 육체를 가진 존재하고 성적인 교제 관계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에는 전적으로 생소하고 그리고 성경이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보면 그때에 종말 때에 가면 우리들이 다 부활해서, 변화되어서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되므로 그때는 결혼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같이 될 때에는 결혼할 수도 없단 말이예요. 그런데 여기 지금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 ),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지시하기 때문에 천사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성적인 교제 관계를 가져서 그와 같은 영웅들을 산출해 냈다.
자, 영적인 존재하고 육체를 가진 존재가 이렇게 성적인 교제관계를 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에 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이고 그리고 영적인 존재고, 육체적인 존재이고 간에 관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성적인 기관이 전혀 없다. 인류는 출생에 의해서 피를 계속 이어져 가지만 천사들은 종이 개별화 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육으로써 연결되어 가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는 이미 창조된 그대로 존재하지 이렇게 인간처럼 출생을 통해서 수가 불어나는 것이 결코 없지요. 그러니까 이와 같은 주장이 전혀 맞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통적인 교회 해석을 거쳐서 소위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백성들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이 여기서 네피림이 나오고 용사가 나왔습니다. 용사들( ) 용사들이 나오고, 네피림이 나왔는데 반 신, 반 인과 같은 희랍의 대장수들과 같은 경우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고 전통적인 교회 해석을 거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족속들의 딸을 취하여 결혼한 것으로 보아야 맞습니다. 6: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모두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다음 거기서 끝난 후에 말씀한 것을 보면 “사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할 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8:21절 마지막에 보면,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 뿐임이라” 자, 이렇게 오랜 역사가 흘러가서 소위 역사학이라고 그러는데 역사가 진행됨으로 악이 더 강화되고 더 규모가 커지고 그리고 담대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초기에도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멸하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죄악이 크게 강성했고 흥했기 때문에 소위 에덴의 동쪽에서 소위 노아홍수 이전까지가 인류가 양심의 법을 좇아서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이고 사변이지 성경의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양심시대도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낙원에서 인류의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구속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이 이루어진 이후에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기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느 일부의 종교계에만 국한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인류의 공통자산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류의 종족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구속주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출생 이전에 구원 얻는 자들은 다 약속하신 구속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곳에 길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이루어진 후에만 이 길로 이르고 그 전에는 이렇게 세대론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 한국 교회에 굉장히 많이 퍼져 있고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에 율법이 오기 이전에는 이와 같은 양심의 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이제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흔히들 생각하고 있어요. 키신저 챨스 핫지 같은 사람도 그의 조직신학 책 종말론 부분에 인류가 마지막에 무슨 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느냐 할 적에 복음을 선포받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진 이 도덕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결코 그것이 맞지 않다고, 종말에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법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법으로 심판받지 않습니다. 양심시대라고 해서, 양심에 새겨진 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덴에서 약속하신 이 구세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증거가 있느냐 하고 물으실 거예요. 증거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서 이렇게 성소의 구분을 완전히 헐어버리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영을 인류에게서 철수시켰다고 할 수 있어요. 6:3절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칼빈이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낙원에서 성령이 인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6:3절 보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체가 됨이니라” 영원히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을 ( )라는 동사를 썼을 거예요. 내가 히브리 성경을 안 가지고 왔는데 ( )라는 말은 “다투다”라는 말이예요. 근본적인 뜻이 “다투다”라는 말인데 그 말은 그 말이 뜻하는 말은 성령께서 인류가 계속해서 죄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하는 뜻이지요. 이 구원의 약속 때문에! 그런데 6:8절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리고 7:1절에 가면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둘을 연결해서 해석을 하면, 둘을 떼어서 해석을 하면 세대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둘을 연결해서 해석해야 맞아요. 분명히 7:1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다고 보셨어요. 하나님 앞에서 노아가 하나님 법대로 산 의인이었어요. 그런데 6: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의인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 그래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고 하나님 법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양심의 법을 좇아서 된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의인으로서 의인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자연적인 도덕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심의 법으로 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양심의 법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은 전혀 성경에 맞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거짓 이론입니다. 양심시대에도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다음 시대, 양심시대 다음의 시대가 약속시대, 인류가 죄악으로 막 줄달음쳐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아홍수를 통해서 이 양심시대를 심판하셨습니다. 약속시대 전에 시민 정부 시대라, 세번째가 인간 정부 시대 혹은 통치시대, 자, 양심의 법으로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없으므로 세대론에 의하면 노아 때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고 양심의 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법을 폐하셨다. 이것이 세대론의 주장이예요. 그 다음에 다른 법을 세우셨는데 양심의 법으로는 안되니까 이제 인간의 통치의 법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길을 마련하셨다.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 정부가 성경의 기록대로 보면 나타난 게 사실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10:8-12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아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여기 나라란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인류가 양심의 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를 세우시고 이제 이 인간 정부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므로 그 법에 잘 순응할 때에 그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세번째 인간 통치시대, 혹은 정부시대라.
그런데 여기서 세대론의 이 주장이 또 전적으로 맞지 않지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전혀 배치되어 하나님께서 인류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죄가 그냥 그대로 억제되고 통제되지 않으면 이 죄의 과격한 역사가 크게 발휘를 해서 온 인류를 다 망하게 하고 결국은 이 세상을 다 끝내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죄의 법대로 세상에 굴러가게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사 죄에도 불구하고 이 창조가 해체되지 아니하고 인류가 멸절되지 않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 첫번째 역사가 죄의 과격한 역사를 막는 역사, 이것이 일반은총이라, 일반은총은 죄와 악을 그 근본 뿌리에서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악을 억제하고 다스려서 죄가 그 과격한 본성대로 자기 일을 다 못하게 하는 역사가 일반은총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창조가 본래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궤도를 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반은총의 역사가 인류역사의 초기 때 부터 역사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위퍼는 언제부터 일반은총의 역사가 시작되었느냐, 바로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심판하시려고 부르셨을 때 부터 일반은총이 역사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바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려 나와 가지고 책임을 물을 때에 변명만 했다. 변명한 것이 벌써 죄의 과격한 역사가 다스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죄의 그 과격한 역사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죄의 본성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섰다면 하나님 앞에 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것이 죄의 역사의 바른 귀결로 나타났을 터인데 그래도 변명은 많이 했어도 변명한 것이 벌써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의 역사로 그들의 죄악을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 그 때부터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하나님은 죄와 싸우시고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와 연관해서 인류 역사는 바로 하나님께서 지와 투쟁하신 역사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이 일반은총의 역사와 함께 이 때문에 양심의 법으로 어느 정도 사람들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반은총의 역사로 악을 제재하셨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인류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을 제재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시민 정부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시민 정부는 로마서 9장부터 이게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찾으시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롬 13:1-4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 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시민정부, 인간의 정부가 들어서게 역사 하셨습니다. 그것은 악을 억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의 방식이었습니다. 정부를 세우심으로 그 정부로 하여금 악을 억제하고 선을 포상해서 그 시민들의 생활에 질서가 있음으로 삶을 정상적으로 살고 그러므로 멸족되지 않고 족속이 이어져 가게 하시고 그리고 멸절되지 않고 족속이 이어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계발하고 탐구하는 역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민 정부를 세우심으로 그 시민 정부에다 칼의 권세를 맡기심으로 인류 사회에 악이 마음대로 창궐하고 번창해서 인류 사회가 멸망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시민 정부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까 시민 정부는 악을 억제하고 선을 포상해서 시민 생활에 질서가 있어서, 질서가 있게 하므로 인류의 역사가 가능하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조치입니다. 이 시민정부를 세우시므로 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악을 제재하고 선을 포상해서 인류 사회에 죄가 들어오면, 악이 들어오면 혼돈과 무질서와 무법이 성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을 억제함으로 법이 세워져서 시민 생활이 가능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창조가 계발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구원에 이르게 할 인류를 보존하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시민 정부를 세우셨습니다. 시민 정부는 하나님께서 이 인륜, 도덕사회를 통치하시는 그의 통치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시민 정부가 세워지면 악이 제재됩니다. 정부가 세워지지 않는 곳은 다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이 번창해서 도저히 정부가 세워지지 않으면 시민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리워야단”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민 내지 교회 정부에 관한 철학적인 논술입니다. 이 17세기니까 영국에서 청교도가 크게 반발할 때 입니다. 그런데 이 토마스 홉스가 “리워야단”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인간의 본성의 그렇게 예리한 통찰을 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에 플라톤에 버금할 만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토마스 홉스가 17세기 중엽에 이 리워야단이란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시민 내지 교회 정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간 본성이 어떠했느냐, 인간 본성이 마치 이리떼가 서로를 향해 마주 선 것과 같은 형편이다. 단지 인간이 이리떼와 다른 것은 옷을 입은 것 뿐이다. 그래서 그 때는 다 인간이 자기의 본성대로 자기의 욕망대로 행하기 때문에 다 자기의 욕망에 거스리는 자는 적이라. 그래 시민 정부가 세워지기 전의 상태는 이와 같은 완전한 자유의 상태라, 인간이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요. 자기 욕망이 원하는 대로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자는 다 제거하지요. 그러니까 자기 욕망대로, 자유대로 하고 싶은 이 상태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인데 이것이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적으로 서는 그와 같은 상태라. 그러니까 이 상태가 자유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상태인데 이 때는 다 전쟁의 상태라, 서로가 서로 자기의 욕망을 위해 싸우는 상태이기 때문에 도저히 법이 설 수가 없는 거지요. 해만 지면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거지요. 방화와 약탈과 살인과 강간이 밤마다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낮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는 공권력이 칼의 권세가 법을 세워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두려움과 공포 뿐이라, 낮에는 좀 덜하지요. 광명한 태양이 비치니까... 이럴 때는 다 전율에, 두려움에 공포에, 이 사람이 싸이게 되면 인간의 지각과 정상적인 재능들이 자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게 이렇게 침을 받아서 이렇게 정말 멍해지는 그와 같은 상태가 되어 자기의 재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도저히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없는 상태는 살 수가 없는 상태지요. 지금 내가 토마스 홉스 이야기만 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그러기 때문에 토마스 홉스는 다 각자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해서 정부를 세우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정부가 세워졌다. 정부가 세워진 것은 자기가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자유를 일부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한 군주나, 사브린이나 공동체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일면은 맞지만 이것도 바른 설명은 못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다스려가는 과정에, 물론 원시 종족들 사회는 정부가 정식으로 세워지지 않은 데도 아직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사는 사회치고 정부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정부를 세우시면 인류가 멸절되지 아니하고 악을 다스리게 합니다. 악이 번창하면 다 멸망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 이 악을 억제하고 제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민 정부를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이 시민 정부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봉사의 도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민 정부가 없는 사회보다는 있는 사회가, 그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무정부 상태 보다는 악한 정부가 있는 그런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 인간 본성대로만 한다면 무정부 상태는 전혀 안되는 거지요. 무정부 상태가 되면 그냥 악이 창궐해서 그냥 죄의 결과대로 과격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땅을 멸망하게 하려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11장 18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정부가 세워지지 않으면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10분 쉬었다가 다시 하겠습니다. 
양심시대 다음에 인간 통치시대, 인간 정부시대라고 그러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양심으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전혀 그릇된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노아만 은혜로 의인이고 구원받을 자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외에도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고 낙원에서 계시하신 그 구원의 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성경에 보면 가장 훌륭한 고대의 신앙인으로서 나타나 있어도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방에 사는 의인이었지요. 추측을 많이 해요. 이 동방이 어디를 지시하느냐? 보통 나오는 지명들과 이름들을 봐서 혹 세일산, 에돔 지역에 살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에돔의 후손이라고 보기가 어렵지요. 그렇게 보면 욥이 그와 같이 이방인으로서 보통 경건한 유대인이 따라갈 수 없을 만한 아주 높은 수준의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따라가지 못할 수준이 아니고 지금 예수 믿는 우리들도 감히 따라가기 어려운 의인 중의 의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 그럴 뿐만 아니라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처녀에게도 눈을 두지 않았고 이웃 여인에게도 생각을 결코 두지 않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 보면 보통 사람이 도저히 의를 행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기록된 대로 그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보면 얼마나 성결하게 그리고 또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다수대로 명수 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보면 욥이 이방인으로서 이와 같이 정말 의인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내려온 인류 공통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구속주를 약속하신 그 믿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던 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창세기에 보면 거기에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어요.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세기 14장에 나오는데 멜기세덱이 아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동시대 사람으로 가나안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와 같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이 오기 전에 소위 세대론에서 말하는 양심에 의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율법이 오기 전에 그들이 이렇게 메시야를 믿는 신앙으로 의인으로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또 출애굽기 때 보면 소위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아직 그들이 그 종족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받기 전 부터 하나님을 섬겼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긴 그런 종족이었습니다. 이드로만이 아니라 그의 종족 그의 후손들도 혹자는 모세가 이드로에게 가서 살면서 여호와의 종교를 배웠다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러나 전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자신을 언약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족속들이 인류 종족들 중에 많이 퍼져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여호와라는 야훼가 나오는데 야훼는 1장은 엘로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오고 2장은 야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문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각각 다른 문서들에 기초해서 창세기를 편찬했기 때문에 야훼 엘로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을 지시하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을 사용했고 그 다음 2장에는 언약의 체결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 이 야훼란 칭호가 로마교회하고 또 장신대 쪽의 가르침에 의해서 전부 다 야훼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야훼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는 이 야훼가 지금 맛소라 텍스트는 아도나이를 갖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들, 모음을 갖다 붙여서 여호와가 되었습니다. 최근의 발음으로는 야웨인데 발음법에 의하면 지금 두번째 문자인 ( )가 지금 침묵기호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이 음절이 여기서 끝난 다음의 표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음화해서 여기 갖다 붙여서 야훼로 읽으면 안되고 야웨로 읽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전부 다 야훼로 이것이 표준 발음법인 것처럼 이렇게 통용되고 있는데 이게 좀 잘못된 발음 같습니다. 야웨, 혹은 여호와, 야웨라고 하는 것은 언약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언약의 체결이 창세기 2장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로 한 것이지 문서설 주장자들의 주장대로 야웨 문서, 엘로힘 문서, 이런 문서들에 의해서 창세기를 편찬했기 때문에 1장에는 엘로힘이 나오고 2장에는 야웨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런데 벌써 여기 멜기세덱을 이야기 하면서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물론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지만 여기 그냥 야웨가 나오는 걸 보면 벌써 언약을 체결하신 그 언약주 하나님을 멜기세덱도 알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멜기세덱, 욥, 그리고 이드로의 종족들을 보면 그들이 낙원에서 언약 체결에 주셨던 언약 체결의 말씀, 타락 후에 약속하신 구세주의 약속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살았지 양심의 법으로 살은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이전에도 다 이렇게 양심의 법이나 인간 통치의 법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인류 역사 초기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어떠냐?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 사상이 전파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많은 민족들에게 차라리 고대 사상으로 갈수록 그들 민족들이 갖고 있는 神신앙은 유일신교였다고 하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나타난 그 시절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어떠냐? 그 이후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중동지역에 교차로로 두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의 방법을 이스라엘로 계속해서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1,500년 동안 존속하는 동안에 또 하나님께서 이 낙원에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을 그들을 통해서 선포하게 하셨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시민 정부로 넘어가서, 창세기에 보면 이렇게 니므롯 때 홍수가 끝나고 홍수로 멸망받은 후에 처음으로 정부를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통치 시대는 이와 같이 시민 정부를 세워가지고 정부가 선악을 판단해 주는 그 법에 의해서 살고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도 구원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인간 정부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결코 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정부를 세우고서 한 그들이 바로 바벨탑 쌓는 일을 했습니다. 정부가 세워지기 전에는 강대한 힘을 모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벨탑을 쌓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이 정부가 세워지면 많은 종족을 모아서 하나의 통치권 아래 두므로 강력한 정부가 세워지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므로 바벨탑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세워지고서 한 일이 바로 바벨탑을 세워 하나님을 저항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홍수 이전에는 시민 정부에 의해서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니므롯이 처음으로 영걸이 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사냥군이라는 데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노아홍수 이후에 이 땅이 황폐해져서 이 땅이 별로 번창해가는 백성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짐승을 식물처럼 잡아 먹을 수 있도록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단지 식량의 부족만이 아니고 내가 이해한 대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육식을 하게 한 데는 식량 생산의 부족으로 인해서 오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배려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악을 제재하시기 위한 큰 역사로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물론 고기를 먹으면 힘이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기를 먹으면 수명이 단축됩니다. 아주 빨리 단축되지요. 그래서 120까지 낮추셨는데 그것을 60까지 낮추실 수 있었다. 지금은 다시 수명이 늘어나는 경향이지만, 우리나라가 그렇지요. 조금 잘 살고 문명화가 되면 이렇게 나이가 늘어나지만 지금도 40, 50억 인구가 아직도 반은 영양실조하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영양실조 상태에 살고 있고 지금도 5억-10억은 완전 기아선상 이하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젊은 나이에 죽지요. 그러니까 이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봐서는 아직도 수명이 아주 단축된 상태에서 산다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육식을 허락하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아 가지고 자기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날릴 뿐만 아니라 흩어짐도 막고 그래서 강력한 하나의 세계 정부를 구축함으로 하나님에게 까지 대항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함으로 그들의 수명을 대폭 감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특한 사냥군이라”고 했는데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동물의 번창의 속도를 빨리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럴 경우에 악한 짐승들이 크게 번창하니까 동물들이 사람을 해하는 것이 많게 했습니다. 그것을 바로 니므롯이 영특한 사냥군이 되어 그것을 막아주므로 그 생명의 위협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니므롯을 왕으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여튼 이 시민정부가, 인간의 통치가 세워짐으로 하나님께서 인류 종족의 죄악을 억제하시고 악이 제재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민 정부, 인간 통치 시대 대로, 그 법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므로 세대론자들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을 심판하셨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를 심판했다. 그것은 시민정부의 법대로 인류가 살지 못하므로 바벨탑에서 심판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의 강력한 언어와, 한 언어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강력한 정부를 구축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항할 만큼 강한 민족들이 되고 담대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신 것이지 인간 통치의 정부가 정해진 법도대로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므로 이들이 한군데만 모여서 살게 되어 있는데 언어를 혼잡케 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든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면에 충만하라고 하신 처음 명령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혼잡케 해서 여러 종족으로 나뉘게 되므로 그들이 강력한 힘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신 거지요. 언어가 나눠지면, 이렇게 종족마다 언어가 나눠지면 강력한 정부가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제 약속의 시대라. 보면 11장 바벨탑 사건이 끝나고 거기에 마지막 부분, 11장 끝부분 중간에 가면 벌써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해서 셈계의 족속들이 어떻게 자손을 이어가는지를 말합니다. 셈계 족속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가 인류의 보편 역사인데 거기 보편역사에 노아의 후손들을 다 말한 것이 아니고 셈의 후예만 말하면서 나중에 나홀이 데라를 낳고 그 다음 데라가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이제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지금 셈계에서 계속되다가 그 셈계에서 한 족속에게로 옮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12장에서 아브라함의 소명의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소명부터 소위 애굽의 출애굽까지가 소위 약속시대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것도 전혀 맞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소명하심은 셈계 전체를 통해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섭리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써 나홀을 지목을 하셔요. 나홀은 데라를 낳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더라.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자, 나홀을 지목하고 나홀에게서 데라가 나온 후에 아브라함이 나온 역사를 말함으로 11장을 마칩니다. 보편역사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한 개인을 통해서, 한 족속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서 약속은 시작되고 있으므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시이고 그 구원의 방식을 가르치시기 위한 섭리입니다. 
첫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자기 구원의 경륜을 다 계시하시고 몸으로 친히 실물교육을 하게 하심으로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을 가장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게 가장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경륜이 여기서 시작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으로 구원 얻고 아담의 후손으로 구원 얻을 별도의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세상을 구속하실 구속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가장 구체적인 은혜언약이 표현된 것이 아브라함에게서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별도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정말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번창하게 하시고 그 번창의 장소로 애굽을 택하시고 그 번창하게 하신 후에 가나안을 그들의 거주지로 허락하시고 그곳에서 이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자손이 번창해 가며 나라를 이루고 구세주가 오시기까지 그들이 한 종족으로 한 민족으로 한 국가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자, 애굽에서 그 약속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 이 벌써 맞지 않는 것이 이때는 전세계의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아니고 한 가족의 한 종족에로 축소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전 인류를 상대해서 이렇게 세대마다 별도의 구원의 길과 시취 원리를 내신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이것이 전적으로 그릇된 자기들의 사변이 표현된 것이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시내산까지 약속시대가 이루어지고 그 시내산에서 율법을 허락하셨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허락하셔서 이때는 완전히 구원의 길이 율법 뿐이라! 이 율법에 의해서만 구원의 길이 있고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이 율법은 사실 그리스도를 오시게 하기 위한 재촉의 법으로 내셨는데 율법 자체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지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살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고 또 속죄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다시 되고 하지만 이 율법시대의 율법과 제사제도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주신 율법의 길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율법의 순종과 완전한 속죄제사를 바라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율법을 주셨으니까 구원의 길은 율법이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제일 잘 지켜진다고 하는 다윗의 때에도 벌써 불법을 가림받고 죄악을 사함받는 그들은 복 있다 하고 다윗이 선언했습니다. 물론 하박국 선지자는 말기 선지자이지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래 율법시대 때에도 그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길은 은혜의 길이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가 율법시대 입니다. 소위 세대론에 가면!
그런데 이때는 전혀 은혜로가 아니고 전적으로 율법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는 거지요. 가장 그 대표적인 예가 바울 아닙니까? 바울은 정말 자기대로는 율법에 의해서 유전에 의해서 만은 흠도 없이 점도 없이 자기들의 동년배 바리새인보다 몇 갑절 더 열심을 내서 율법을 지켜서 정말 율법으로 말하면 흠도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 할 수 있었어도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울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다시 바울이 절규합니다. 율법은 도저히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완전해서 완전한 준수를 요구해도 죄인인 인간이 아무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면 더 넘어지지요. 
그것은 옛날 율법시대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은혜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하나님의 법을 내 힘으로 잘 지키려고 해보세요. 더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안하려고 하는 것은 더하도록 합니다. 그것이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 만들어 놓은 메카니즘 입니다. 죄는 한번 지어 놓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과거지사가 아닙니다. 그 사건이야 과거지사지만은 죄를 죄를 한번 지어 놓으면 죄성하고 결합해서 우리 속에서 죄의 천성을 만듭니다. 죄의 메카니즘이 딱 형성되어 가지고 그 죄를 계속해서 반복하도록 만듭니다. 계속해서 그 죄의 욕구를 충족하도록 끌고 갑니다. 그것을 내 힘으로 부숴뜨리려 하면 할수록 더 강화됩니다. 그것이 육 아래 육으로 살 때 인간이고 율법으로 살 때 인간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죄를 안 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죄를 짓기 강요하고 더 넘어뜨린다 이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이 오히려 죄를 증가한다고 하는 것이 곧 바울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금하는데도 율법이 와가지고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도 일단 넘어뜨리게 되면, 한번 범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 안에 완전한 사이클을 형성해 가지고 그것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한번 지은 죄를 계속해서 거기 돌아가지요. 계속해서 더 강화해요. 그것이 여러 요인들에 의해서 밖으로 행동 못하면 속으로 혼자 심리적으로만 계속해서 그 사이클을 반복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죄가 늘 증폭되는 겁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율법이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한은 죄가 자꾸 증폭되고 증가되지 끊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메카니즘이, 그 사실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언제 끊어지냐? 영이 와야 끊어집니다. 은혜가 와야 끊어집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오히려 죄를 금하면서도 죄를 더 짓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로마서에서 가르치고 절규한 내용입니다. 그래 인간의 힘으로 이 죄의 사슬을, 이 죄를 짓도록 하는 메카니즘을 끊으려 해도 도저히 못 끊는 것이지요. 인간의 힘으로는, 힘센 장사도 못해요. 네피림도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은혜만이 합니다. 영이 왔을 때만!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실패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요시야 시대 때 정말 얼마나 하나님의 법을 멀리 했으면 언약의 책이 그 쓰레기, 쓰레기인 것은 아니지만, 정말 성전에서 다른 잡물들에 끼여 잃어버릴 정도로, 모를 정도가 됐습니다. 언약의 책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로, 모를 정도가 됐습니다. 언약의 책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언약의 책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그때 요시야 나이 열 여섯 살 때입니다. 여덟살 때 왕이 되어서 열 여섯 살 때 일이 생겼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요. 제가 틀렸는지… 예, “31년을 치리하니라” 예, 18년, 십년을 통치하였군요? 자, 8살에 왕이 되어 10년을 통치하고 18살이 되었을 때 율법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때 율법서에 의해서 요시야가 대폭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시야가 다스린 작은 남방 쪼그라든 유다 남방에만 이 종교개혁을 대폭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고 옛날 이스라엘 영역 사마리아 지역에까지 이 종교개혁이 확대되도록 하였습니다. 이 종교개혁이 아주 철두철미하게 철저하였습니다. 더 이상 우상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철두철미하게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언약의 법이 가르친 대로, 바로 이 언약의 법이 가르친 대로 종교개혁을 했을 때 예례미야 31장 31-33절 새 언약을 공포한 것입니다. 새 언약의 약속, 요시야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종교개혁을 했어도 그 개혁은 죄의 사슬을 끊지 못할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종교개혁을 했어도 이 개혁은 외적인 개혁이어서 그들을 죄 짓는데서 그만 두게 못했습니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종교개혁이라 하더라도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이스라엘 멸망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외적 개혁이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심겨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종교개혁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예례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무엇입니까? 자, 예례미야 31장 31절 다 찾으십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니”, 33절 후반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운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제 언약 책에 또 돌비에 기록해 놓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판에 새깁니다. 육으로 하는 것을 영으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안되는 법을 영으로 지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는 안되는 거지요. 영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마음판에다가 하나님의 법을 새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자, 이렇게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아하스 왕이 성전뜰에다가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아직 아하스는 므낫세 만큼 담대하지 못해서 성전 안에다가는 우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제사가 일부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성전 제사들이 이스라엘 죄를 다 속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야가 다시 완전히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성전을 완전히 개수하고 완전하게 모세의 법대로 성전제사를 복구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아들 므낫세는 성전 문을 완전히 닫고 뜰 안에다가 바알과 아세라 상들을 성전 안에다가 세웠습니다. 아하스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갔는데 므낫세는 더욱 담대해서 성전 안에까지 세웠습니다. 요시야가 성전개혁을 일으킨 후에 바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이스라엘의 범죄를 죄악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살았던 자들이 율법이 지시하는 바로 율법 전에 약속받은 그 약속이 지시하는 구원자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 이 세대론자들에 의하면 이 율법으로 만이 율법시대에는 구원에 이른다.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도 율법시대 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까지가 율법시대라. 그때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율법을 통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가복음 1장을 보면, 마가복음 1장만 대립되고 반대되는 것이 없고 2장부터는 전부 다 반대와 훼방받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율법의 길과는 반대되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은혜의 길을 가르쳤기 때문에, 구원받는 길은 율법이 아니고 바로 은혜 받는 길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길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율법만이 구원의 길인데 예수가 나타나서 율법과 정반대의 길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범하는 일이 예사로 예수에게서 진행되었단 말입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죽일려고, 2장부터 7장에 가면 벌써 너무 박해가 심하기 때문에 이방 지역으로 피신했어요. 9장 후반에 가서 다시 유대 땅에 나타나셨어요. 그 10장에 보면 벌써 예루살렘을 향해요. 예수께서 그 마지막 부분에 가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가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예요. 처음부터 율법의 길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이 지시하는 길이 바로 그 길인데도 그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시대에도 율법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른다. 그리고 율법시대 까지는 율법이 살아오다 은혜시대인데 은혜시대는 교회시대, 그때만 구원에 이르고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가 타당한 시기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진 이 교회 시대 뿐이라, 그렇게 주장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진행으로 보면 이게 어느 정도 맞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이 생긴, 십자가 사건이 생긴 이후에는 이 복음으로 전파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전부 다 이 복음의 길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로는 전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다른 이름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주신 바가 없다고 베드로가 사도행전 4장에, 4:12절, 제사장들에게 잡혀가서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런데 세대론자에 의하면 이 은혜로, 지금은 은혜시대여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이 은혜 뿐이고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다. 율법은 지금 은혜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생활의 규범이지요. 전혀 율법은 지금 교회시대에는 상관이 없고 단지 은혜로, 예수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게 끝나고 좋은데 그 다음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신 이 마지막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 일곱 시대 마지막 시대 가기 전에 왕국 시대라는 것이 있는데 이 왕국시대에도 무너져요. 세대론자에 의하면 왕국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선포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전혀 끝나고 이 왕국 시대 때는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들이 다시 복귀되고 그 때는 왕국 복음이 선포된다. 이 왕국복음은 지금의 우리가 아는 복음하고 전혀 별도의 복음이라. 그래 이 때 천년 왕국 시대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특히 유대인들에 의해서 개종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왕국 복음이 선포되는데 이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과는 별도의 왕국 복음이 선포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인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 외에 다른 길이 아니게 하셨는데 이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세대론은 혹은 천년전기도 포함해서 유대주의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 가지고 기독교적으로 각색된 것 뿐이지 기독교의 복음, 신학이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이제 다른 방면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주장이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려고 합니다. 자, 에큐메니칼 운동 함으로 이제 개신교가 처음에는 선교 목적으로 1948년 선교의 통일성을 위해서 준비해 오다가 1948년 암스텔담에서 WCC가 창설되었습니다. 그 후에 희랍 정교회가 가입을 하고, 같은 계통의 러시아 정교회도 가입을 했지요. 그리고 로마 카톨릭은 아직 가입은 안하고 업서버로 있지만 이 에큐메니칼 운동이 나타나고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아니고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게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을, 그런 내용을 ( )라는 책을 쓴 한스 큉,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독일의 신학자가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구원이라. 하나님의 지혜가 인류 역사 거의 전체를 통해서 마련하고 준비하시고 그리고 내놓으신 길이라. 이 복음이 뒤늦게 전파되고 모든 종족들에게 다 전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복음의 전파 그 사건 부터가 종말론적인 역사의 진해, 그리고 주님 자신의 약속대로 모든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 선포될 때에 그 후에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자, 한스 큉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3 강 
마태복음 25:1-13절까지 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것이 선포되고 또 (제자들) 당시 사도들의 생존 기간에 오실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또 생각에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재림의 연기로 인해서 교회에 여러가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주장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제 복음서에 기초해서 종말론, 일관된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이 나오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와서 일관된 종말론은 요한네스 바이쓰에서 시작하고 슈바이쳐와 그의 제자 베르너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는데 임박한 종말,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의 제자 당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렇게 해서 이러한 부분이 합리적인 주의자들 혹은 자유주의자들은 잘못된 것으로 이해를 했는데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강조하고 한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이 부분도 주의 재림이 당장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오기까지가 상당 기간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복음의 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이, 사역이 현 은혜시대, 교회시대만이 구원의 길이고 그 외의 시기에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다른 법으로 구원의 길을 내셨다 이렇게 주장하는 세대론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대론의 주장은 보수주의에 널리 퍼져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 복음의 도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이라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20세기에 와서 많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그렇게 되었고 또 뿐만 아니라 근본은 에큐메니칼 운동 때문이지만 교회 선교의 실패들이 기독교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냐, 이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냐는 데 대해서 상당한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16세기에 일어났는데 그때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구라파는 로마교회 세력하에 전적으로 있었는데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독일과 그 북부 세력이 루터교회로 넘어가고 그리고 독일 남부 화란, 스코틀랜드, 영국, 스위스 일부, 상당 부분이라 해도 좋구요, 이런 지역들이 그리고 동부 지역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이런 지역들에 칼빈주의 종교개혁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인 이태리와 불란서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종교개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아주 종교재판과 대학살 등으로 종교개혁이 퍼지지 못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로마교회의 주요한 세력 부분들이 개신교로 넘어가게 되므로 로마교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자기들의 교회 영역에서 상실해서 종교개혁 교회들로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실세를 회복하기 위해서 로마교회가 16세기에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선교를 시작할 때에 선교의 대상 지역으로 삼은 것은 아시아였습니다. 남미 같은 나라들에 식민지가 시작될 때 거기에는 이미 스페인의 왕관 밑에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으로 남미의 카톨릭에 그냥 영속되도록 그렇게 되었습니다마는, 아시아 세계는 전통적으로 전혀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눈을 돌리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러고 보면 기독교회들이 선교하는 일을 거의 포기하여 버리고, 혹은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나 있는 선교명령을 사도시대에만 국한한 것으로 보고 그 때에만 이 명령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그 유효성이 그 이후의 교회에서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거의 마찬가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명령 이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이 명령은 교회 사도들 시대에만 타당하고 그 이후의 교회들에는 타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 기독교 세계가 된 구라파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들에는 복음을 전할 생각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상당히 많은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실세를 회복하기 위해서 눈을 아시아로 돌리고 선교사를 파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열심하고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을 때에 로마교회는 벌써 인도와 중국과 일본 등지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를 보내서 아주 대대적으로 선교활동을 벌려 왔지만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400년 이상, 거의 500년 가까이 복음의 도를 전했어도 로마교회가 별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도 개신교 보다는 조금 많겠지만 전체 인구에 비해 카톨릭 인구가 사실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인도에서도 로마 카톨릭이 사실 복음의 도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는 또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지역이지요. 왜냐하면 교회 전통에 의하면 도마 사도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곳이기 때문에 이미 복음이 들어가 있었고 또 중국에도 큰 선교사들을 보내서 열심히 복음을, 교를 전했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략하러 들어온 일본군대와 함께 선교사들이 따라온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 그 침략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천주교는 한국에 정착하지 못했지만 이만큼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5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인도와 일본과 중국 주요한 나라들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미미한 사람들만을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처럼 교회가 사회의 주력세력이 되고 그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그러한 세력으로 전혀 확대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근세에 와서 상당히 선교의 성공여부와 함께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냐에 대해서 반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로마교회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소위 칼 라너라고, 라너는 20세기 로마교회 카톨릭 신학자라고 불립니다. 20세기에 개신교에서 칼 바르트가 영향력을 행사한 만큼 로마교회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신학자 입니다. 그 사람의 ( ) 「신학을 위한 저술들」이라는 책이 아주 큰 방대한 글로 14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주로 아티클들을 모았는데 3,000개 이상이나 되는 신학적인 아티클들로 그 책이 되어 있습니다. 칼 라너가 특별히 1962-1965년까지 바티칸 시 공의회가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열렸을 때 그때 결정된 대부분의 신학의 정의와 결정된 내용들이 거의가 다 칼 라너의 신학에 기초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보면 그 책 속에 ‘무명의 크리스챤’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무명의 크리스챤’ 거기에 보면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탈 기독교화된 구라파 사회에서 교회는 출석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그러한 구라파 상황에서 그런 글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로마교회 주장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초대 교부인 키프리아누스의 아주 유명한 신학적인 명제입니다. 그때부터 소위 교회에 분열이 생겨서 로마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때마다 이 신학적인 명제에 의해서 이 로마교회에서 갈려져 나간 교회들을 정죄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것이 전통적인 로마교회의 주장입니다. 그것이 로마교회가 2,000년간 주장해온 중요한 기본 명제라 할까요? 로마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이 명제를 사용했어요. 그러니까 이 갈려나간 개신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교회에 결부되어 있는데 교회를 떨어져 나갔으니까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주장으로 2,000년간 내려 왔는데 20세기에 와서 ( ) 소위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크리스챤으로서 살지 않고 신앙고백 안해도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서 라너는 하나님은 어디에 자기 존재를 계시하시느냐, 인간의 이성에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셨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계시에 접해 있어요. 꼭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라너가 주장을 했고, 대부분 가능성으로,, 가능태로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를 합니다. 이것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있어요.
한스 큉이라고 하는, 한스 큉은 우리나라에는 그 이름이 별로 잘 알려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마는 이 사람이 로마교회 교황의 유오설을 주장해서 큰 파문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성경이 유오하듯 교황도 유오하다고 주장을 했어요. 그래서 로마 교황청에서 튀빙겐 대학 카톨릭 신학부 교수였는데 로마교회 심학부, 카톨릭 신학부 교수 면직을 시켰습니다. 그래도 한스 큉이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변경시키지 않고 주장하기를 교황도 유오하다. 교황도 사람이면 그가 아무리 교황의 자리에 앉아서 예배모범과 윤리와 교리에 관한 교훈을 낼 때라고 하더라도 교황은 유오하다. 오류가 있다고 주장을 해서 파문을 일으킨 카톨릭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책들을 많이 썼는데 ( )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 중간쯤 보면 이에 대한 깊은 반성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고 주님께로 구원하기 위해서 생겼는데 이제까지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모든 세계 각국에 복음을 전파해도 이 복음으로 열매를 맺은 것은 참으로 적다. 참 얼마 안된다 그거지요. 거의 4-500년 가까이 카톨릭이 아시아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열심히 가르쳤어도 물론 전에는 복음이라고 안했겠지요. 지금은 우리 한국에서도 카톨릭이다 복음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리를 전하는 것으로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열심히 전해도 별로 성과를 거둔 것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이나 내가 추측하고 알고 있기로는 근자에 와서 6.25가 지나고 60년대 후반에 와서 로마교회가 이렇게 급성장을 한국에서만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성장보다도 로마교회 성장속도가 훨씬 앞질러가고 있지요. 대거 개신교회에서 로마교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개신교에서 30만 이상이 로마교회로 건너갔다고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지금 성장속도가 말할 수 없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데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에서는 거의 카톨릭이 쇠퇴하고 있는데 본래 카톨릭이 성한 지역에도 개신교가 성한 지역만 카톨릭이 명맥을 유지하고 성합니다. 제일 성한 지역이 아마 미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이 19세기 후반에 와서 반동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가지고 아주 낮은 자리에 있고 사회 전체 인구 분포도로 보아서 얼마 안되는 그런 수치였는데 반동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성공한 지역이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세가 20세기에 와 가지고 케네디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이 노조를 잡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중요한 노조들이 카톨릭 손에 있습니다. 상당히 막강한 힘을 미국에서 행사하고 잇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만, 서양지역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만 그렇게 카톨릭이 성하고 있고,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남미의 나라들 대부분 다 참 이름은 걸어놓고도 교회 생활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2,000년 동안 남구지역 이태리 중심한 남부 불란서, 스페인 지역들이 2,000년 동안 카톨릭 지역이었으니까 그 뿌리가 깊지요. 북구로 올라가면 북구지역의 개종이 13세기에 이루어졌습니다. 7세기경에 북구의 개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 13세기 동안 남부는 2,000년 동안 카톨릭 지역인데 북쪽은 1300년 정도 카톨릭 지역으로 지내왔습니다. 북구 지역들이 대부분 개신교로 넘어 간거지요.
아시아에 와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큰 구원의 사건을 일으켰으면 우리가 이렇게 아시아에서 여러 나라들에 복음을 증거했으면 이 복음의 증거가 결실을 맺어야 할 터인데 500년 가까이 증거를 해도 참 미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나라들에는 불교와 힌두교, 유교와 마호메트교들이 주력 세력으로 잡고 있고 또 매년 그 세력들이 확장됩니다. 아프리카도 매년 기독교 국가들이 줄어들고 회교도들이 늘어갑니다. 아프리카도 아시아도 그러지 않습니까? 불교 국각을 제외하고 일부 마호메트교가 성한 지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인도도 상당히 마호메트교가 성합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것들 다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다 영국이 개신교 나라가 지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것을 기독교화 하지 못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완전히 회회교로 넘어갔고 세일로는 불교로 남았고 인도는 상당수가 회회교지만 대부분이 힌두교로 남고 그리고 말레이지아는 영국이 지배를 했는데 이게 완전히 회회교국이 되고 인도네시아는 화란이 지배했는데 완전히 회교국이 되고 그리고 일본은 거의 불교가 주력세력이고 그래서 도대체 기독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큰 구원의 사역을 이루었으면 이들이 다 기독교를 받아들여 복음으로 들어와야 할 터인데 나오지 않는 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렇게 보면 꼭 기독교만이 유일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냐고 주장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이의를 많이 일으키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나 힌두교나 다 사랑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으로서 생활의 법을 가르치고 내세를 가르친다. 회회교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보면 꼭 기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종교들도 다 내세를 가르치고 이웃간에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고 그리고 바른 삶을 주장하니까! 이렇게 볼 때에 다른 이방의 종교들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신학들에 기초해서 로마교황이 가는 곳마다 교회지도자들만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도 초대해서 종교대화를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근거는 그러면 어디냐 하면 바르트 신학이라 할 수 있어요.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교리가, 바르트도 예정교리를 많이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예정교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그 인류 본성 자체를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존귀히 여기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기할 때, 내버리실 때에 다, 모든 인류가 육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선택되도록 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다. 그러니까 선택교리라고 하는 것은 지옥과 천국으로 나누어지는 그와같은 아주 반대급들의 첨예한 대립이 아니라 이것이 바르트에 있어서는 밝은 빛 뿐입니다. 선택교리라는 것은 모든 인류가 다 함께 구원에 이르렀어요. 그러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 다 인류가 선택되었으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하고 밖에 있는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이 구원의 사실을 전파받아서 알고 있고 한쪽은 아직 인지하지 못한거지요. 그 차이 뿐이지요. 그렇게 복음의 증거락도 하는 것은 선포가 아니라 대화가 되고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지요. 내가 화란에 있을 때에 설교를 들어봅니다. 그러면 바르트 신학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하, 바르트를 참 그대로 반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참 논리는 정연하고 좋은데 감동과 은혜는 없어요.
자, 그래서 이제는 이방의 종교도 고등종교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도록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참 우리가 이와 같은 신학자들의 반성과 고뇌를 생각해 볼 때에 우리 한국이야 이렇게 4천만 가운데 첨만, 그것도 개신교만이 천만이든지 로마교 인구까지 포함해서 천만이든지 간에 천만이라고 하는 수를 갖게 되었다 하는 것은 아주 대단한 세력이지요. 이렇게 거대한 세력으로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미국 리폼드 신학교에 개혁파 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있는 키스트 막커가 왔을 때에 제가 이야기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미국 인구의 40%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요. 그러니까 순전히 성경적으로 믿는 복음주의 인구가 40%라 하면서 이것이 미국의 힘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참 미국같은 나라는 아직도 복음주의 신학을 갖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그러니까 2,200만에서 40%니까 약 1억 수준되는 거지요. 대단한 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나라들은 그러지 못하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으면 이 복음이 선포되는 지역들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영이 많아야 될 터인데 물론 이것이 다 식민지 때문에 그러하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들이 다 기독교를 등지고 회회교로 가고 전통적인 종교에 남아있고 거기에 부착한 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전파되어도 왜 이렇게 안되느냐? 이것을 우리가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요.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른 길로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기 보다는 복음의 도를 바로 전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생겼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도가 온 인류에게 모든 종족에게 전파될 때에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 그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 당대에 자기가 알고 있는 전체를 복음화 하므로 주님의 재림이 자기 당대에 오시도록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를 하고 로마 천지를 자기가 아는 로마 지역을 다 복음화 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로마의 국경에 변방으로 있는 스페인까지 자기가 가서 복음을 전하면 자기가 아는 세계는 복음이 완전히 전파된 걸로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으니까 지금 우리가 많은 선교사를 보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이 근자에 이르러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의 1% 정도밖에 안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에 이만한 인구를 갖고 이만한 능력을 가지면 한 10% 이상 상당한 프로테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수를 늘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면 주님이 오실 뿐만 아니라 땅끝까지는 또 시대적으로 동시대에만 타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이어가면서도 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복음의 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재산을 상속하듯 상속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믿음의 가정에서 자녀가 출생하면 크리스챤으로 출생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지요. 출생할 때는 다 이방인으로 출생하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오는 세대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전파해야 되느냐? 장로교 식으로 개혁신학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마지막 피택자가 출생할 때까지 복음의 도를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오심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이 날을 계산하는 것이 너무나 퍼져 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 다니엘서하고 요한계시록을 연결해서 주님이 언제 오신다. 그런 계산이 아주 만연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의 오심이 결코 계산될 수 있는 걸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대의 묵시문학의 습관이었습니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날을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언제 오신다고 하는 것을 계산을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소위 지금 날을 계산하는 것이 관습이 이 교회에 널리 퍼져 있어 언제 주님이 오실 것이다 하는 것이 아주 성행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가 아니고 성경은 날을 결코 계산 할 수 없다고 주님 자신이 마태복음 13:32절 보면, 그 날과 그 시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해서 날이 언제 계산되어서 주님이 오실 것인지 전혀 계산할 수 없는 걸로 분명히 하셨습니다. 24장, 25장 이게 마태복음의 종말장들인데 25장에도 보면 그때 당시에 긴박하게 주님이 오실걸로 기대했던 그들의 기대가 바르지 않음을 분명히 혼인잔치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들로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이 날을 계산할 수 있는 때에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날은, 시간은 계산하지 못하면 주님이 오시는 징조도 없느냐? 그렇게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전통적으로 그와 같은 주장을 몇 가지 가져요. 첫째가 복음의 온 이방 종교들에게 전파됨, 복음이 모든 인류들에게 편만하게 전파되어서 그 복음이 그 민족들에게 주력 세력이 되도록 한다. 혹은 모든 민족들에게 다 증거된다. 주력세력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주로 천년 후기설, 후천년설 학자들에 의해서 많이 주장되는 것이고 복음이 모든 인류 종족들에게 전파된다. 그러면 그 말은 개개인 전부에게까지 복음이 모두 전파되어야 되느냐 그런 뜻은 아니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종족들이 거의 다 거의 전체적으로 복음을 선포받는다. 자, 복음이 들어가면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로마제국의 기독교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0년 동안 모질게 근 300년 동안 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교세력의 마지막 보루, 그리고 山城이라고 할 만큼 이 로마제국이 모든 이교신들의 집산이었고 그 이교신들을 섬기는 최후의 보루이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교회가 쉽게 속화되고 타락하지 않고 복음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서방에서 황제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는 막센치우스라고 하는 참주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나라가 하도 큰 나라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다스리는 때가 별로 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로인들이 보통 2,3명의 황제들을 추대해서 다스렸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릴 때 완전히 통일된 로마제국을 한 황제가 다스렸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그와 같이 한 황제가 계속해서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이 콘스탄티누스가 서방에서 자기 아버지와 자기의 군대들에 의해서 황제로 선포되어 즉위된 후에, 즉위되었을 때 동방에서 다스린 막센치우스 황제가 너무 황제로서 악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모으고 서방에서 진격해서 동방에 와서 소위 티베르 강 근처에서 막센치우스하고 세 번 싸워서 마침내 막센치우스를 쳐 부수고 통일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공인하고서 325년 교회가 아리우스 논쟁으로 분열되고 매우 시끄럽게 되기 때문에 이 통일 로마제국이 이 교회의 논쟁으로 인해서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 325년 니케아 회의로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황제가 아직 그때, 콘스탄티누스가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을 때! 그런데 니케아 공회의를 소집하여 그 아리우스 논쟁을 바르게 해결하도록 교회에 참여해서 인사 개회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이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 인해서 콘스탄틴이 기독교와 로마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합당하고 바른 평가를 못하는 것 같애요. 비록 콘스탄틴이 죽어갈 때쯤 해서 세례를 받았지만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 제국이 되는 데는 콘스탄틴 대제를 빼놓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 교회 가르침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아무도 쳐부수고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로마의 그 병폐들, 그 죄악들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도록 하고 자녀들을 거리에 팔거나 노예로 팔거나 그런 것을 못하게 하고 그리고 여자의 권리를 정당하게 인정받게 하고 그리고 결혼을 중시하고 성처녀를 강간할 때 극형으로 처벌을 하고 그렇게 하고 또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그 노예들, 야만인들을 짐승과 싸워서 맹수들에 의해 죽임받게 하는 이런 것들을 금지하고 십자가를 폐지하도록 그렇게 노력하고 노예를 폐지하도록 점차 권고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도 쳐부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난공불락의 이교의 마지막 보루였다고 생각하는 로마가 콘스탄틴 대제 밑에서 부서져 내리고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그때부터 서양사회가 기독교 국가가 안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교회가 늘 가르친 대로 로마 사회를 복음화 하고 성경의 법으로 모든 걸 다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하니까 다 팔고 이럴 때에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심지어 자기 돈을 내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고아들을 먹여 살리고 또 국가의 재정으로 그렇게 하고 해서 로마를 기독교화 했습니다. 그렇게 되므로 교회가 세속화 되고 타락한 것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커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 가지고 성경의 법에 의해서 로마의 법들을 전부 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로마의 법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이 ( ) 전통적으로 서양 사회의 기초적인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서양의 법을 이해하려면 이 유스티안 황제 때 그때 완성된 이 법전들을 빼놓고서 서양의 법률들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 때부터 계속적으로 서양 사람들의 이상은 신정정치가 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샤를르 마느, 챨스 대제가 프랑크 왕국의 통일 황제가 되었을 때도 바로 이 콘스탄틴 대제가 시도했던 자기 나라 전체를 기독교화 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그 샤를르 마느가 시작했습니다. 그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는 그 콘스탄티노플에 대(가람)를 짓고 거기에 어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황제가 지구본을 만들어다가 갖다 바치는 그림을 앞에 그려 놓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통치권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 모든 나라를 그리스도께 바쳐드린다는 표로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샤를르 마느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정신이 계속 구라파에 계속된 거지요.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신정정치를 한 것도 바로 콘스탄틴 대제 때 시작되었던 신정정치,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부의 13개 주를 식민지화 했을 때 그 식민지자들의 이상론, 바로 이 콘스탄틴 대제가 이룩하였던 신정정치를 재현, 구현하려 할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복음의 법대로 그 나라의 법과 풍습과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기독교 문화로 바꾸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기독교 인구는 많이 늘어나고 부흥을 해도 이 사회를 바꾸고 개조시키는 일에 복음으로 통일을 시키지 못하는 것, 이것이 큰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만큼 기독교 인구가 늘어났으면 우리 한국도 한국의 풍습과 법들을 그리고 의식의 개조 이런 것들이 많이 이루어졌어야 맞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 책임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다 증거되어야 하고 우리 당대 뿐만 아니라 우리 후대에까지도 이 복음이 계속해서 증거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지막 피택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출생할 때까지 복음이 전파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시지요. 거기다가 아브라함 카위퍼는 하나 더 붙여서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 하나님께서 이 창조안에 심으신 이 가능성들, 무한한 보화들이 다 계발될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다. 그렇게 보면 주님이 오실 징조를 다 빼버리면 두 가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 종족들에게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능으로 심으신 무한한 가능성들과 보화들을 거의 다 계발해낼 때라!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바울은 자기 당대에 자기 손으로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후손에게까지도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후에가서 바울이 깨닫게 된 거지요. 계시를 통해서! 마찬가지로 이 정말 현대문명이 말할 수 없이 많이 발달하였습니다. 지금처럼 현대 과학 기술 문명으로 훌륭한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 가지고 자유를 지배하고 통제할 때가 인류 역사에 다시 없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도 수천개의 인공위성들이 지구를 돌고 있고 또 과학 문명의 발달로 지구를 몇번씩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들이 가득 저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구를 관찰하고, 아직 초보적인 단계라고 하겠지만 지구를 관찰하는데 옛날에는 천체를 관찰하는데 망원경으로 하였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적만 해도 저 켈리포니아 팔로마 천문대에 직경이 2m나 되는 그런 망원경이 있다. 그것이 단편지식이 속해서 그걸 외고 또 외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 팔로마 천문대에 2m짜리 망원경이 있어서 지금도 가서 관관할는지 모르지만은 그것 가지고 하늘 쳐다보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것 봐가지고는 별로 볼 수 없는 거지요. 최신식 인공위성을 하늘로 쏘아 올려가지고 36,000km 상공까지 쏘아 올려 놓습니다. 거기가 무중력 지역이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에 고장이나 빨리 마모되지 않습니다. 무중력 상태이니까! 거기다가 아주 고도의 컴퓨터를 작성해 가지고 고도의 망원경을, 거기다가 사진기를 설치해서 우주를 관측해서 계속적으로 지구로 사진들을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36,000km 높은 상공에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서 최신식의 기계로 컴퓨터로 우주를 관측해도 가상된 우주 크기의 약 7% 밖에 못본다 그러거든요. 그것도 가상된 우주의 크기죠. 누가 우주를 재봤습니까? 다 추측의 세계죠. 천문학의 영역이 추측의 세계 아닙니까? 옛날에는 천문학이 자연과학이라 해서 큰 주장을 많이 했습니다. 과학이 말하는 절대적 의미에서, 특히 물리학자가 말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로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독자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요? 우주가 너무 넓고 방대하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있는 한계가 너무 절박하다는 것을 현대에 와서 과학자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들의 거리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넘어가면 그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거기까지 와 있습니다. 몇 억 광년, 십억 광년, 몇 만 강년, 그런 것도 허무맹랑한 소리들이지요. 이제 허블상수를 어떻게 잡느냐? 우주 별들의 거리가 얼마나 크느냐를 허블상수를 어떻게 잡느냐에 달렸습니다. 그 상수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거의 무한대 가깝게 늘어지기도 하고 또 유한한 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첨단의 기계로 하늘에 쏘아 올려가지고 고정해 놓고 관측해 봐도 7% 밖에 못 봅니다. 그러니 우주의 별들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 거지요. 별들의 수가 몇 개냐 그것도 모르는 거지요.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와 같은 소위 이런 은하계가 몇 개나 있느냐? 한 몇 만 개 말하지만 정확한 숫자가 못되지요. 추측의 영역이니까!
그렇게 보면 얼마만큼 가능성과 보화를 계발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다시 되돌아 오지요. 지금 얼마나 편리합니까? 전화 한대를 가지고 여기서 교환을 부를 필요도 없이 그냥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꼭 이웃집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도 얼마나 빨리 달립니까? 앞으로 기차도 더 빨리, 시속 600k 이상으로 달려서 자기 부상 장치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념 얼마만큼 가야 완전한 것이냐? 지금 이제 5세대 컨퓨터를 만들어 낸다고 그러면 이제 컴퓨터가 스스로 키펀치를 통해서 정보를 넣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사람처럼 정보를 모아 가지고 판단을 한다. 그게 지금 5세대 컴퓨터거든요. 그걸 지금 만들려고 일본과 미국의 학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는 윤리적인 판단의 문제도, 지금도 거의 그런 영역이 많아졌지만은 윤리적인 판단은 인간이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앞으로 윤리적인 판단은 어느 것을 선택하고 어느 것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컴퓨터가 할 때가 곧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인류사에 개입한다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용납될 자리가 있느냐 하는 데 갑니다. 윤리의 영역마다 인간이 결정하게 되었는데도 이제 5세대 컴퓨터에 가면 컴퓨터가, 기계가 다 결정하게 되는 때가 온다. 이렇게 세계가 또 한국이 경제개발 정책을 30년 가까이 해왔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방대한 정보들을 처리하고 정책을 결정해 내는 일도 컴퓨터 없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얼마큼 발달해야 하나님께서 넣어 놓으신 가능성들을이 다 계발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되면 또 의문부호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와 같은 과학의 발달과 같은 수준이 멈춰질 수 있느냐? 결코 멈춰질 수 없지요. 결코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항거를 나타내는 실존주의, 자연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자유가 축소되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똑같은 인과율의 적용 속에 인간을 넣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동,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실존주의가 기계에 대한 항거로 나타났는데 실존주의가 지나가고 과학문명이 계속해서 발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달해가는 속도가 앞으로 점점 더 커지지 줄어갈 리가 없고 더 가속화 되지요. 언제 어느 수준까지 그렇게 가야 다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냐? 한번 더 강조한다면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가 아니고 세대주의,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기독교로의 유입이라! 지금 이것이 우리 세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17,8세기에도 날짜 계산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세기 까지에!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 날짜 계산을 많이 하는데 17세기 종교전쟁 당시에도 날짜 계산을 많이 있었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 오신다고 날짜를 계산할 수 없다. 그러면 주님이 오실 징조, 말해주는 징조도 없느냐? 징조는 이제 한 대여섯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가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편만하게 전파됨이라! 그것이 동시대에 민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 시대적으로 마찬가지로 그 명령이 유효하고 시행되어야 된다. 또 전파되면 사회를 변화시켜서 기독교 복음으로 변화시켜 기독교화 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하는 것이 자연적인 추세라! 그러나 꼭 그렇게만 될 수 없다. 마지막에 큰 배도가 있을 걸로 우리가 보기 때문에 지금도 배도가 대단하게 진행된다고 할 수 있지요.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 배도가 있을 걸로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다음 두변째로 제일 큰 종말의 표가 이스라엘의 회심이다. 이스라엘의 귀환, 회심, 대개 보통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 것이라 바울이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 특히 이스라엘이 기독교에 크게 문제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라고 그럴 것입니다. 20세기 초엽까지도 많은 신학자들이 이스라엘의 귀환과 국가적인 독립이 불필요한 것이고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엽부터 해칠이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해칠이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키면서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그때에는 터어키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해서 지배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기 때문에 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디아스포라의 돈들을 모아가지고 구라파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돈을 모아서 땅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팔레스타인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지역이 섞여져 있는 이유입니다. 다 몽땅 다 사버렸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렇게 못하고 군데 군데 땅을 샀어요. 그게 터어키가 지배하고 있을 때에 돈으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땅들을 샀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들은 그렇게 대대적으로 사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4개구, 이스라엘 남쪽의 그 사막 지역을 그것은 통째로 살 수 있었지요. 그리고 요단강 서안과 동안, 요단강 양쪽을 사이에 두고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정착춘을 만들어 가지고 이스라엘이 확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야 맞겠지요. 2차대전 때에 히틀러 손에 의해서 600만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같은 데는 한 지역에서 300만이 죽었습니다. 거기에는 별별 방법으로 다 죽였는데 개스실에 넣어놓고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니까 운동장에 나무들을 다 깔아 놓고 그리고 휘발유를 거기다 뿌리고 그들을 밀어 넣었습니다. 철조망을 쳐서 못도망가게 하고 불을 놓아서 유대인들을 그냥 태워 죽였습니다. 그때 그 아우성과 타면서 사람이 터지면서 뼈가 터지면서 내는 그 소리 아우성 소리를 못듣게 하려고 강력한 방송을 걸어가지고 군가를 해서 그런 일이 진행되는 줄을 대부분이 모르도록 하고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폴란드의 한 지역 아우슈비츠에서만도 300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라파에서 600만이 죽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1,200만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 580만 정도, 소련에 약 300만, 290 얼마, 지금 이스라엘에 약 300만 채 못되지요. 그래서 약 1,200만, 구라파에는 지금 얼마 안됩니다. 거의 다 몰살당하고 없어요. 그때 그렇게 전쟁 중에 어려움 당할 때에 시온주의가 크게 공명을 얻어서 대부분 많이 돌아가게 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북구라파에 사는 유대인들이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을 구출해내서 이스라엘로 돌이키려고 하는 운동을 심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동구에서 빠져나온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가지 않고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가고 나머지는 구라파에 정착을 해요. 제가 아는 사람 화란있을 때도 루마니아에서 유명한 생물학자가 하나 왔어요. 가족이 같이 왔는데 부인은 루마니아 여자고 이 사람은 유대인인데 왜 미국으로 안가고 여기 남느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주 유명한 학자여서 우리나라 휴전선에도 생물 연구하러 두 번이나 왔다고 그래요. 나한테! 그런데 나를 여기 오게 한 사람들이 암스텔담 대학을 중심해서 암스텔담 사람들이 나를 이곳에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첫째 이유고 두번째로 미국에 가면 음악과 예술이 없기 때문에 여기 남는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래도 또 이스라엘로 일단 갔떤 사람들도 상당수가 미국으로 다시 가는 경우가 많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친구 하나도 암스텔담에서 만났는데 고등학교 선생이예요. 어머니는 화란인이고 아버지는 유대인인데 왜 너 이스라엘로 안가느냐? 그러니까 왜 내가 가느냐? 유대인이니까 가야될 것 아니냐? 내가 왜 가느냐? 너나 가라.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도 유대인이 아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법에는 모계법이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으로 쳐요. 그러니까 자기는 아버지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기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거예요. 자기는 이스라엘로 돌아갈 아무런 명분이 없다. 네오 나치즘이 자꾸 일어나서 유대인들의 회당들을 자꾸 폭파를 합니다. 거기 대해서 여기 앉아 있으면 그런 소식을 모르는데 거기 앉아 잇으면 그런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이런 것도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귀환을 제일 분명하게 뚜렷하게 말한데가 에스겔서예요. 그래서 북방에서 하나씩 다 불러내리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포로 당시에로 칠 것이냐? 지금 이것도 예언이 유효하다고 볼 것이냐? 문제가 있어요. 왜냐하면 종말을 예언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거의가 다 종말의 예언들을 이스라엘의 복귀 중심으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걸로 써놨어요. 그러기 때문에 소위 글자대로 읽는 세대론, 혹은 근본주의 눈에는 꼭 유대주의자들이 생각을 하듯 구약을 이해해야 바른 것처럼 될 수 있도록 씌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이스라엘이 완전히 구원을 얻는 것이 다윗 밑에서 다시 사는 것이 이것이 이런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라기 보다는 이게 완전히 다윗 왕국의 再版 형식으로 예언이 씌어져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예언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가장 구체적인 생활 언어로 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만 읽으면 이것은 완전히 유대 나라가 다시 회복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이 땅에서 천년을 다스려야 맞는 것으로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은 특히 요한계시록 20:1-6까지 연결해서 천년 왕국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아직도 나라가 이루어졌어도 이것이 다 회복된 게 아닙니다. 지금 아무리 전쟁해봐도 팔레스타인을 다 밀어버릴 수가 없지요. 다윗도 소위 가자 지역에 있는 그 불레셋을 다 밀어벌릴 수 없었듯이 지금 아무리 유태인들이 강력한 기를 가지고 제압하려고 해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노동당에서는 현 상태로 고착하고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해 준다고 하니까 이것을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해 주자 그렇게 하는데 보수당, 리쿠드 당을 중심한 보수당에서는 아주 강력한 보수정당이어서 강력한 보수 신앙고백적인 정당이어서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 그런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예루살렘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할 때에 소위 애굽 강까지,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너희의 자손들의 경계가 되리라. 그런데 한번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것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니까 소위 천년 왕국 때 이것이 이루어져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정말 이것이 꼭 그렇게 될 것이냐 이건 좀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도 도저히 이스라엘 복귀될 걸로 생각지 못했는데 2차대전 후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된 국가로 회복되고 나니까 이것이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서 이스라엘의 개종을 꼭 그리 돌아가는 그걸로 볼 것이냐 이게 좀 문제고 이제 300만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데 900만이 밖에 살고 있지요. 근데 대부분 돌아갈 뜻이 없어요. 구라파에서 그렇게 홀로코스트를 당해서 대부분 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구라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뜻이 별로 없어요. 그래 이것을 꼭 구약에 예언된 글자대로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에 보면 그 곡과 마곡이 쳐들어 왔을 때 즉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켰을 때 7개월, 전쟁을 해서 그 적군을 다 쳐부수고 그 무기들을 회수해서 7개월 동안 그것을 땔감으로 쓴다고 되어 있습니다. 글자대로 이 성경을 본다고 한다면 에스겔서의 이 성경을 글자대로 이해한다고 하면 재래식 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나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겟돈 전쟁을 소위 밴구리안 같은 사람도 초대 건국의 아버지이고 이스라엘 수상이었던 벤구리안 샅은 사람도 이스라엘 자체에서 아마겟돈 전쟁은 불가능하다 그럽니다. 너무 땅이 좁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같이 화학무기가 핵무기가 발달하고 있는 세상에 재래식 무기의 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느냐? 그것도 크게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회개인데 보통 이것이 두 가지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일단 귀환한 다음에 회심하느냐, 회심해 가지고 귀환하느냐? 이 두 가지 주장과 이론이 그냥 맞서고 있어요. 한쪽에서는 회심한 다음에 주님 재림에 이스라엘 대부분이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 세대론에서는 주님이 재림할 때에 재림을 보고서 회심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단은 귀환되어 있지요. 그런데 아직도 성전 부지는 찾지를 못했어요. 1927년 6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그때 국방장관이 모세 다이야이었습니다. 다이얀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성전부지를 점령했을 때 거기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선언이 그것입니다. 이 땅을 영구히 우리와 우리 후손이 내 성으로 삼고 결코 내주지 않을 것이다. 다이양 장군이 국방장관으로 있으면서 6일 전쟁이 나서 제일 먼저 점령한 것이 동예루살렘, 예루살렘 성전 부지 지역을 점령했는데 그때 다이얀 장군이 들어가 한 첫마디가 그것입니다. 이 성을 우리와 우리 후손을 위해 영구히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 예언이 성취되어서 베긴이 1972년인가 수상이 되었을 때 몇년 집권했습니까? 이 사람이 하도 인기가 없어가지고 벤구리안 수상 때 의회를 하면 베긴이라 이름 부르기도 싫었어요. 그래가지고 어느 국회의원 옆에 앉아있는 사람, 얼마나 지독했으면, 이게 게릴라 부대로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이어서 항상 벤구리안이 수상을 해서 의회를 할 때 지적을 하면 이런 말 할 때 말하기 싫어서 그렇게 할 정도인데 이 사람이 수상이 되어서 의회에서 입법을 해서 통과시켰습니다. 통일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다. 아직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이 소유가 못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 세계 3대 성지 중의 하나인 유명한 ( )가 성전부지에 서 있지요. 그런데 그걸 헐어야 성전을 짓거든요. 헐어야! 그런데 헐지 못하지요. 헐면 당장 전쟁나니까 헐지를 못하지요. 그래도 지금 솔로몬의 성전 부지가 완전히 다 측량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의 말에 의하면 혹시 하나님이 지진을 나게 하여 헐어 버리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면 지진이 났으니까 헐어버리고 거기다 성전을 지을 수 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의 출현문제하고 성전 문제하고 연결되는데 아직 이방의 때가 차기까지 이 땅이 이방인의 손에 있으리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돌아올 것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자, 그런데 분명히 귀환은 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지요. 돌아오지 않는다. 베긴이 수상이 되어 가지고 미국 가서 모금할 때에 제일 먼저 랍비들을 모아놓고 한 말이 제발 유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하는 당부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유대교에 남아 있는 것만이 마지막 유대인으로 남아 있는 표인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그게 없어져 버린다. 지금도 매년 몇천 명씩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럽니다. 그리고 아직 300만이 돌아와 있어도 이미 기존의 교회들, 로마교회, 희랍 정교회 등등은 전통적으로 거기에 예루살렘이 5대 교부, 큰 교부들이 앉아 있는 큰 교부 左列勢니까 그건 뭐 어찌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가는 것은 극렬 막고 있습니다. 귀환을 했어도 회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단 귀환한 다음에 회심할 것이라, 전부 다 보다는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 그런데 매년 몇 천명씩 이상 아직도 지금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의 캘린더라고 말했는데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으니 주님이 오실 때가 많이 가까와졌다고 우리가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지금 귀환을 하고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일단 귀환하고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귀환을 꼭 문자적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지금 귀환되어 잇으니까 우리가 이것을 거부할 수 없는데 그러나 지금 이렇게 매년 몇 천명씩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일이 계속 진행되어서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 자, 그런데 이스라엘이 본래 그 목표가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이루기 위한 수종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고 그의 구원이 완전히 성위되어서 이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특권층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 섭리가 다 이루어진 후에는 하나님께서 더이상의 옛 언약의 제도가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로마군의 손으로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을 완전히 멸종시켜 버렸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직도 제사제도를 복귀 못시킵니다. 왜냐하면 누가 제사장의 후손인지 밝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헨 성을 가진 사람, 제사장이 코헨인데 그것을 번역해서 코헨 성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을 하지요. 그래서 내가 암스텔담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칸이라 그래요. 불란서계예요. 왜 칸이냐? 코헨을 불란서 말로 하면 칸이예요. 그래서 칸이라고! 그렇지만 그것도 추측의 영역이지 코헨 性을 가진 사람이 제사장의 후손이라 그렇게 말을 못하는 거지요.
자, 하나님께서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취된 후에 성전을 헐어버리고 제사장 제도를 완전히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 뒤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을 구원의 대상으로 남지 이스라엘이 구원의 특권층으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가지고, 첫시간에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쿠크바 전쟁, 쿠크바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쿠크바를 가리켜서 메시야라고 선언을 했어요. 자기도 그렇게 주장을 하고! 그 전쟁이 끝난 이후에 완전히 유대인들을 다 쫓아내 버렸지요. 이스라엘에서! 그 때 불레셋 사람들만 남기 때문에 가나안이 팔레스타인이 되었는데 불레셋 사람들의 땅이라고 해서 그 이후부터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 퍼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북부로 퍼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올라간 지역이어디냐 하면 스페인으로 상륙을 했습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가고, 그래 카톨릭 국가에서 쫓으니까 불란서를 거쳐서 대륙으로 대륙으로 갔습니다. 계속해서 카톨릭 국가에서 쫓으니까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동구지역과 러시아 지역까지 유대인들이 퍼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제 역방향으로 되돌아 오지요.
자,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핍박을 많이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겨 두셨거든요.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요. 그 원하시는 대로! 무엇때문에? 마지막에 유대인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살아 남는데 특별히 그들의 교육이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핍박 속에 살았어요. 유대인들에게는 19세기 초까지 공교육 기관의 교육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것이 식료품상과 주로 보석상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고깃점, 식료품상, 그리고 보석상, 옛날에는 암스텔담이 유대인들의 보석, 다이아몬드의 산 중심지였는데 지금은 벨기에로 내려가 있어요. 이렇게 보석상, 이런걸 많이 한 것은 토지를 할 수 없고 자꾸 쫓으니까 몇 트렁크에 담으면 쉼게 갖고 다닐 수 있는 보석, 그것이 제일 좋은 장사법이지요. 그래서 보석류를 Jew라고 그러는데, 보석은 유태인들이 다루니까 보석류가 유태인이라는 이름에서 쥬라고 그럽니다. 공교육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토지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유대인들이 이렇게 문화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첫째는 성경교육입니다. 19세기 이후에 공교육의 교육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육이 허락된 이후에 유태인들이 말할 수 없는 많은 천재들을 내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거의 세계적인 대학계의 일인자들은 거의 유태인입니다.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언어학의 혁명을 일으킨 ( ) 그도 유태인 이름이거든요. 미국 가보면 ( ), 코헨, 벌보 등 유태인들의 性들을 식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 대법원장을 했던 벌보 그도 유태인 性이거든요.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정통파 유태인들이 유태교에 속한 사람들이 5% 밖에 안된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언제든지 모여서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더 적은 것 같애요. 안식일날 안식일 예배를 하고 그리고 오후에는 회당에 모여서 성경을 배웁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그리고 아직도 회당학교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학교를 두번 다닙니다. 학교 갔다 와서 회당학교를 또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을, 그들 대부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지요.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지킨단 말이예요. 2차대전 때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나치가 게쉬타포가 와서 하나님을 부인해라 부인해라 하니까 아니라 아니라 그래서 총 맞아 죽었습니다. 그 현장에 아들이 있었는데 내 아버지는 평생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해라고 하는데 부인하지 않고 총 맞아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배우기 때문에 비록 학교 교육에는 그들이 접근하지 못했어도 그들의 머리가 그렇게 비상하게 발달하고 그래서 공교육, 대학교육에 접근하게 되니까 그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있었다.
제가 암스텔담에서 유태인을 만났어요. 그래 자기는 완전히 유태인이라! 아내는 화란인을 얻었어요. 왜 그렇게 되었냐 하면 2차대전 때에 나치들이 와서 유태인들은 다 죽이는데도 기독교인 여자하고 결혼하면 죽이지 않았어요. 그래 살아남기 위해서 유태인들이 구라파 여자하고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물었습니다. 그 고등학교 교사 말고 그 사람은 지금 예술학교 선생이 되었는데 어째서 유태인들이 그렇게 많은 천재를 내었느냐 하니까 메시야주의 교육이라 그래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그래서 내가 잘 살기 위한 그런 교육이 아니고 그 사람들은 이 부조리한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와 같은 메시야주의 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많이 천재되게 했다. 거의 모든 역역의 일인자들은 전부 유대인들입니다. 자,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이 오시게 하려면 주님이 오시도록 십자가의 복음의 도를 개인들에게 열심히 전해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큰 배도. 큰 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부의 교회들이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복음에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교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떠나가는 것. 지금도 교회가 크게 배도해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미국에 아직도 교회가 성하지만 구라파 지역에 가보면 아주 교회가 황폐된 것을 말할 수 없어요. 내가 화란에 가서 제일 가슴 아프고 놀란 것은 TV에 독일의 개신교 교회의 예배가 방송되었습니다. 아주 대 가람에 정말 소수의 사람들이 앉아서 예배하고 그리고 찬송하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여자 목사가 하는데 할머니들 모아놓고요 자기들의 민요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들은 이제 죽어서 교회의 묘지에 묻혀야 될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못 떠나는 거지요. 그래 제가 암스텔담에 가서 시내에 석달 살았는데 그 때 그 훈넬 바르크라고 아주 유명한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주 거대한 공원이 있습니다. 그 옆에 교회가 있습니다. 하도 잘 지어 놓았길래 카톨릭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 기독교회라고 해서 갔는데 가니까 대 가람인데 한 3,40-50명 앉았어요. 그런데 자기들은 자유주의로 나가는 교회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선언을 하더라고요. 팜플렛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설교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3개월 나갔는데 그래요. 회교는 굉장히 성합니다. 교회들이 모이지 않으니까 회교에서 사가지고 회교 예배당으로 해요. 회교는 말할 수 없이 온 정성을 다합니다. 그런데 戰後에 사회복지정책을 많이 써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거의 책임지도록 완전한 복지정책이 되는 것에도 그 영향이 많은 것으로 봅니다. 저 암스텔담 교외에 ( )라고 하는 큰 아파트 타운이 있는데 거기에 내가 살 때 10만 인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 갈 때 보면 몇 사람 안갑니다. 심지어 (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유명한 네르크 교수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설교는 참 잘해도 신학은 자유주의 계통 신학이예요. 그런데 우리 집에 와보고 이렇게 여기 많이 사는데 교회 나가는 수가 어떠냐? 그래 주일날 교회 나가는 사람이 몇 사람 안된다. 그러니까 복음화 될 수 있느냐? 벌코프 교수가 그분이 WCC의 신학분과 위원장으로서 WCC에서 나오는 신학문서들을 많이 작성해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데도 와서 그렇게 놀라더라고요. 그리고 신학이 자유주의화 되어 가니까 교회의 세속화, 교회의 배도가 진행되어간 것으로 그렇게 봅니다. 제가 TV로는 그렇게 황폐된 독일의 예배들을 보다가 제가 한번 ( )지역의 ( ) 만명 정도 사는 지역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는 루터교회예요. 루터교회인데 제가 그 교회 자매님들이 오라고 그래서 주일날 나혼자 찾아 갔어요. 그런데 내가 묵는 집 할머니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루터교회에 가지 않고 주일날 방송 딱 틀어놓고는 하나님의 교회 목사가 방송으로 설교하는 것 듣고는 말아요. 그런데 나는 교회 갔습니다. 제가 그런데 상당히 큰 교회인데 깜짝 눈이 놀랄 만큼 수가 많이 나와 앉아 있어요. 그런데 앞부분 가운데는 젊은이들이 많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독일교회가 많이 모일까? 그래 목사님이 나오셔서 요한일서를 읽으시고 설교를 하시는데 성령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고 도움을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런데 설교 전체의 전개가 그렇게 논리적으로 잘 전개되지는 않아요. 그래도 아주 복음적인 설교를 해요.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복음적인 설교를 하니까 많이 모이는구나. 복음적인 설교를 하면 많이 모여요. 그런데 자유주의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지요. 그 루터교 신학자이면서 지금 시카고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에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 )이라고 하는 중진 신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구라파를 다 여행을 하고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글을 썼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이 높이 찬양되는 지역을 다 돌아보고 와가지고 다 폐허가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서 유명한 말을 했는데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닌 줄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이 먼저 안다. 그래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 이거지요. 자유주의 설교를 하는데 누가 모이냐고! 그래도 한국이 이만큼 교회가 크게 잘되고 있는 것은 그러나 한국 교회가 복음적인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런 걸로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이 높이 찬양되고 있는 지역들이 다 폐허가 되고 아니면 문 닫고 그리고 화란 같은 데만 가더라도 옛날의 그 대 가람들은 다 장식해 가지고 관광지입니다. 돈 받고 시간 정해서 문열어 놓고 그렇게 보게 해줘요. 독일도 가니까 그러데요. 아주 거대한 가람인데 돈받고 올라갑니다. 하도 높은 탑이기 때문에 하이델베르그에 가서 성 미가엘 교회당을 올라가 보았는데 거기서 함부르크 시를 거의 다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가람입니다. 돈 받고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신학이 자유화되고 공업화 되고 그리고 사회복지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지요. 미국의 교회가 그래도 성한 이유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힘으로 벌어 살아야 하지요. 구라파는 거의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너무 많이 심각해진 것 같애요. 그리고 영국도 5천만 인구의 얼마전에는 10% 이하로 복음 개신교가 내려갔습니다. 500만도 못되기 때문에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켜서 지금 거의 500만을 유지합니다. 그래 내가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 학위를 얻고 암스텔담에 온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도 영국 교회에 속해 있다 그래요. 그런데 카톨릭은 잘되는데 영국 교회는 너무 형편없이 안된다. 그리고 이 문제느느 죽 개신교 지역들이고 카톨릭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미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 뭐 카톨릭이기 때문에 가정이 다 깨어져 가지고 국가가 유지되기 어려운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카톨릭 지역으로서 전통적으로 공산주의 아래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지역이 없습니다. 이태리가 최대의 공산주의 당원을 의석수로 갖고 있지요. 지금 조금 내려갔지만 불란서도 아주 위험 수위를 조금 넘어섰을 때가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국회의원을 점령한 수가! 그리고 스페인도 공산당 안되기 위해서 내전을 일으키고 프랑크 독재가 50년 안되었습니까? 포르투갈도 마찬가지고! 이태리가 구라파 ( ) 우리나라는 로마니까 대단하게 선전하고 높이고 그러지만 내가 암스텔담에 있을 때 보이스카웃 그 지도하는 교장 이런 사람들이 왔어요. 그중에 카톨릭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로마이기 때문에, 성도이기 때문에 얼마나 성스러울까 이렇게 생각하고 갔는데 벌벌 떨고 왔대요. 도시 중에 제일 살벌한 곳이고, 2,000년간 로마 교황이 교구장을 한 곳이 이태리예요. 95% 이상이 카톨릭인데 교회가 안되는 거지요. 거의! 그리고 후일에 또 내가 거기 있을 때에 낙태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교회와 의사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천하의 악법을 교회가 통과했습니다. 의회가 통과시켰다. 의사들은 의사의 양심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낙태법이 통과되기 전에는 몰래 수술을 하니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낙태법이 통과된 후 전부가 보험으로 처리되거든요. 돈 몇푼 안되요. 수입이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비난하고 나쁘다고 이야기했지! 또 대부분 이혼상태예요. 로마교회가 이혼을 허락 안해주니까 별거상태로 지내요. 그리고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내가 있을 때만도 이태리 경제가 도무지 지탱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그래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지하경제 때문이라! 그러니까 이중 경제지요. 공공으로 하는 정식 경제가 있고 몰래 하는 암거래 그런 것들이 뒤를 떠받치고 있지요. 그래도 이태리 국민성은 형성되어 있습니다. 2,000년 동안 로마 교회 아래서 양육 받아 왔기 때문에! 뭐든지 자주적으로 혼자서 결정하는 법이 없어요. 전부 다 의논적이고 물어보고 해요. 친구에게 가서! 아주 어둡고 범죄가 많고 그리고 세계 마피아단의 본부가 70%예요. 지금 우리는 마치아단이 미국에만 많은걸로 알고 있지요. 1870년대 마치아단을 미국으로 수출해 가지고 거기가 제 2 본부가 된 것입니다. 모든 세계 범죄의 가장 깊은 범죄 소굴이 이태리라. 그걸 수출하는 거지요. 카톨릭 국가마다! 앞으로 한국도 올 겁니다. 더 카톨릭이 늘어 가면!
그런데도 저 거의 구라파가 탈기독교화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아직 그래도 복음으로 남아 있는 데가 미국과 카나다지요. 그리고 한국 그런 정도라! 복음이 많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이런 형태로 간다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다 기독교 복음에서 떠나서 완전히 자기가 믿는 본래의 기본 교리를 포기하고 거부하는 때가 멀지 않아서 쉽게 올 걸로 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교회는 나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것이 거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되어지지 않는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어떨 때는 참 나쁜 생각을 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간성면에서 볼 때는 거기다가 존경을 붙여야 될 것으로 그렇게 생각되지도 않거든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경배하는 것이지 사람만이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주라고 붙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지요. 그냥 예수라. 그리스도라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라파의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리고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이라 하면 믿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이 그렇게 대대적으로 배도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냐? 독일은 루터교하고 카톨릭은 종교세를 냅니다. 그래 가지고 신부하고 루터교 목사는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아요. 우리는 교회가 되어야, 개척교회가 되어야 노회가 다른 교회가 보조를 해주지만 그러니 이 교회는 내가 내 책임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야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지마는 일을 하든 안하든 봉급이 꼬박 꼬박 나오는데 뭣 때문에 그렇게 새벽기도 해가지고 그렇게 괴롭게 기도하고 철야하면서 기도하고, 설교 준비 하느라고 그렇게 애를 쓰고 그러겠느냐고요. 기도하지 않지요. 그러다 이제 오순절 계통의 목사들 설교 들어보면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애요. 아주 힘있게 설교를 하거든요. 독일이나 화란이나!
자, 종교가 기독교 국가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도 그것도 좋은 게 아닙니다. 신학의 자유화 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되어지지 않음, 그것이 배도의 제일 큰 원인이고 첫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공업화 되어서 사회가 모든 요구조건을 다 충족해 준다 그것이 교회를 다 이탈하게 한 큰 원인이지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에 젊은이가 많고 보수교회에는 고리타분하다고 해서 젊은이가 없는데 자유주의 가보면 50대 이상만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거의 탈교회화 해버리고 없습니다. 그런데 화란에 소위 왕실교회라고 할 수 있는 개혁연맹이 있습니다. ( )라고! 그 교회만은 교회 내, 아니 교단 내 교단이 또 있습니다. 그 교회만이 젊은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그대로 묶어 두고 있습니다. 한국이 교회로서 계속 남으려면 너무 물량적인 교회 팽창, 그리고 축복의 과도한 강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바로 배워서 바로 이 전통적인 이 신앙을 이 복음의 도를 전해야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우리 한국도 지금은 부흥하고 있어도 지금처럼 축복에 너무 강조를 하면 제가 30년 정도 지나면 한국도 구라파와 같이 그렇게 될 걸로 내 눈에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교회로 남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구원을 고백하는 데만 교회로 남습니다. 이 복음을 끝까지 사수하고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전파하면, 그러면 큰 배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 오실 때 교회가 없을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배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도 주님 오실 때까지 참 교회가 지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소수의 교회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 같아도 남아 있습니다. 소위 여로보암의 교회, 칼빈이 말하기를 여로보암의 교회라고 말했는데 다 우상 숭배로 넘어간 것 같아도 주의 교회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배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끝까지 고백하는 자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 4 강 
마태복음 24:1-14절까지를 한분씩 읽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지난 시간까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대강 어떤 일들이 일어남으로 주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는 중에 큰 배도가 있으리라 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한국은 종교가 기독교와 또 다른 종교도 크게 전통적인 종교가 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잘 살게 되는 나라들 참, 종교가 매우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화란에 있을 때 한사람하고 한국의 종교가 성한 것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 말을 받아서 하는 말이 한국이 아직 잘 못보게 되니까 그렇다. 그런 얘길 하면서 2차대전이 끝나고 선거를 했을 때는 화란도 공산당 수가 시의화 같은 데서도 대도시에서는 50% 이상이 나왔다. 그렇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은 화란 의회가 15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산당원이 2명입니다. 그러니까 공산당이 자유화되도 위험을 느낄만한 아무런 뭣이 없지요. 우리처럼 폭력에 의해서 그 사람들은 하는 사라들이 아니기 때문에 저 ( )할 때는 전통적인 레닌의 투쟁이론이 배제된 그런 형편이죠. 의회민주주의를 통용하기 때문에! 그런데 전통적으로 카톨릭이 가장 성한 지역들은 제일 공산주의가 심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태리가 로마교황이 이태리라는 나라의 교구장으로 일을 했는데 거기가 제일 큰 공산당을 갖고 있고 그 다음에 불란서 조금의 근자에는 공산당의 의회 점령수가 많이 줄었습니다마는 그리고 또 스페인도 공산당에게 거의다 먹히게 될 때 그것을 막기 위해서 내전이 일어나고 결국 프랑코가 평정을 하고 40여년을 독재를 할 수 있게 되었죠. 기독교 국가 사회에 이렇게 공산주의가 성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도 비슷하죠. 포루투갈도 마찬가지로 40여년 우익독재가 계속됐다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거의 동시에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어서 여러 공동체에 가입이 되었습니다. 보면 북구 쪽으로는 개신교 지역이고 남구는 거의가 카톨릭 지역인데 세속화 되기는 거의 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세속화 되는 면에 있어서 남구는 아주 강력하게 반 기독교적으로 지속화되고 탈교회화 되고 반면에 북구는 그래도 세속화 됐어도 온건하게 그렇게 격심하지 않게 탈기독교화 되고 탈교회화 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맨처음에 암스텔담에 가 가지고 교회들이 많이 안모이는 걸 보고 참 상당히 너무 많이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생각했는데 시골에 가보니까 시골은 교회가 시골 동네들이 다 교회라고 할 만큼 교단이 나누어져서 여러 교파가 됐지마는 거의가 다 교회가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이 개신교 지역은 그렇다 하더라도 남미 같은 지역도 거기도 본래 콜롬부스가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스페인의 왕관이 특별히 식민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왕관 밑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므로 그 곳에서 기독교 세계를 이루는 것 그것이 처음 식민지를 개척하고 주지할 때 식민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스페인 왕관 밑에 기독교 세계를 남미에서 이룬다. 그래서 가서 열심히 선교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이 무기를 많이 개발했기 때문에 무적함대를 엘리자베스 당시에 엑스공에 의해서 그 해상권을 뺏기기 전까지만 해도 무적함대가 스페인의 국위를 사방에 넓히고 있던 때입니다. 이들이 열심히 가서 선교활동 하고 또 원주민들도 개종시키고 그럴 뿐만 아니라 거기 나는 금을 많이 주어가고 또 많은 토지들을 점령을 했어요. 식민주의자들이 교회가 함께 가서 그렇게 해가지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원주민들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립의 권리를 허락할 수 없다 해서 대량으로 학살을 했습니다. 기독교도들이요! 로마 카톨릭이지만 지금도 그 학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을 향한! 그렇게 해서 그 남미의 나라들에 대해 재산들과 땅들을 식민주의자들과 교회들이 점령을 했습니다. 남미를 지탱하고 이제까지 3-4백년 동안 이끌어온 양대 지주 세력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리고 식민주의자들 입니다. 그들이 거의 대부분의 재산과 토지를 다 소유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도대체가 부의 어느정도의 균배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교회와 식민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이미 가진 소유한 것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려고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스페인과 포루투갈에서 와서 종교로는 카톨릭을 가졌어도 도저히 그들의 탐심 그런 것들이 나라가 정상적이 될만큼 서로 나눠가지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정상적으로 나라가 운영되기 어려울 만한 상황에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 이제까지 노력해도 도저히 길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해결의 길이 있을까 해서 너무 카톨릭만 판치는 자리에서 개신교에로 개방하는 정치를 일부 국가들이 썼습니다. 그래서 일부가 개신교로 개종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히 카톨릭에서 없던 새로운 종교적인 생활이 시작된 거죠. 예수 믿어서 구원에 이르므로 오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 살고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재산을 축적하고 소시민으로 이렇게 자리를 굳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것 가지고는 안되게 된거죠. 그리고 또 이 부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가져다가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노동의 고용효과는 어느 정도 거두어도 대다수 그 생산된 제품들을 원료들은 싸게 남미에서 공급해 가지고 제품을 만들면은 아주 비싼 값에 팔고 그 생산 제품에서 열매들 과실은 다 미국으로 송금하게 되니까 거의 부가 다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자본주의 가지고도 남미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은 사회개혁적인 정책과 제도들을 펴서 국민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될 터인데 이미 이걸 소유한 기득관청들 소위 전통적인 식민주의자들 계급들과 교회가 이걸 전혀 양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현 로마교회 체제로 그리고 식민주의자들이 기득권을 다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미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그렇게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지정책을 구라파에서 쓰고 있는 복지정책을 씀으로 어느정도 해결할 것인가 그것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돌리는 것이 소위 막스의 투쟁 이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큰 제도들이 기존의 제도들이 거대한 악을 생산해서 대다수의 국민들을 착취하고 압제하기 때문에 이것을 무너뜨리는 길은 막스이즘의 투쟁이론 그래서 더 큰 제도가 생산해낸 더 큰 악을 쳐부수기 위해서 작은 악인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해방신학이 거기에 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게릴라전과 투쟁의 방법들이 남미에 많이 도입됐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남미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우리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 밖에 없다는데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 두면 거의 아마 남미의 나라들이 공산화 될 도미노이론의 적용으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얼마전에 신문에서 다 보신대로 외채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으면 안 공산화 되는 길을 막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서구에 대한 위협이고 사실 외채 문제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죠. 외채가 와도 그 외채를 활용해서 전체적인 부를 생산하고 균배하는 수준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군대와 식민지 계급들 계층과 교회가 다 그 돈을 나눠 자기 호주머니로 다 들어가는거죠. 그렇게 되서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거죠. 그것은 자기들이 쥐고 있는 천문학적 숫자의 외채를 갚지 않으려 하는 현재로는 갚기도 어려우니까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고 실제로는 외채때문에 공산화가 되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로마교회가 공산주의를 키우고 있는거죠. 키워온거죠. 도저히!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는 연옥제도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죽었을 때 그저 영결미사를 성대히 해 올림으로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의 고통을 경감하고 천국에 들여 보낼 수 있다고 하는 연옥교의 때문에 많은 재산들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탈취합니다. 거의 다 교회에 바쳐버리는 거죠. 바쳐버리고 먹을게 없어요. 그 다음 조금 남은 것 다 먹고나면 갈데가 없으니까 결국은 교회 거대한 성당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이제 밀죽이나 콩나물죽을 써가지고 나눠줘서 그들을 먹여 살리죠. 성당 주변이 다 거의 다 완전히 빈민가들이라. 이런 형편이 되있죠. 그런 것들을 그런 재산들을 다 모아 대부분 다 로마 교항청으로 가고 있죠. 본래 로마교회가 처음 와서도 대부분의 땅들을 차지하고 큰 지주세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시대 이후로도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백성들의 재산을 다 탈취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남미의 문제는 결국 로마교회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다 형식적으로는 로마교회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전부가 다 공산주의를 수납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카라구아 같은 경우도 공산화가 되니까 지금 부시가 대통령이 돼가지고 콘트라 지원 그러니까 이 니카라구아를 항쟁하는 소위 우익 게릴라의 단체들을 지원하는 문제 때문에 그레그 한국 주재 대사로 임명된 그레그 대사가 다 연관되어 지금 곤경당해서 일편으로 봐서는 부시가 4년 제대로 잘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염려가 날만큼 어려움이 되고 있는데 그렇게 좌익 정부가 들어서니까 무너뜨릴려고 CIA가 개입을 해서 무기를 많이 공급하고 원조를 하고 이렇게 해서 계속해서 공산당 선으로 떨어졌던 것을 막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도대체가 지산에 있는 민주주의라든지 서구의 복지정책 가지고는 도저히 안된다. 그러니까 결국은 막스의 투쟁이론을 도입하여서 폭력을 가지고 큰 악을 생산하는 제도들을 무너뜨리는 길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해방신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해방신학을 쓴 사람이 무티에리스인데, 포르비아, 페루 사람이예요. 내가 알기로는 개신교일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게 로마교회에서 번역이 되었어요. 해방신학이라. 개신교적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는 본에노(블로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본에노는 제법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투쟁의 방법으로 결국 혁명의 방법으로 기존의 제도를 무너뜨린다. 그러니까 남미의 거의다가 다 공산화 돼 있습니다. 사실은 군대 조직과 교회와 식민지 계층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공산화 돼 있죠. 그 말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기독교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들이 다 공산화 되고 있다. 배도가 심하게 진행된거죠. 그것은 본래 신앙 자체에 의해서 신앙 그 자체에 대한 반대와 반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교회외적인 요소들 신앙외적인 요소들 특히 사회의 정치, 사회의 경제 이런 문제들이 소위 전역이 다 기독교 영역이라고 할 남미로 하여금 교회를 다 떠나게 한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배도가 매우 심각하게 넓은 영역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란에는 추기경이 두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교황 물망에 올랐던 추기경이 있어요. 그 사람이 트레이트에 앉아 있는 분인데 자기들 주장으로는 화란인구가 1,400만 인데 500만 정도가 카톨릭 인구라 주장을 합니다. 화란인구의, 그 얘기를 신문에 난 얘기를 어느사람에게 했더니 너무 많이 주장한다. 그런데 그래도 화란의 카톨릭이 형편없이 그렇게 완전히 패배해 버렸다고 하기에는 어려운데도 화란의 로마교회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고해성사를! 전통적으로 해오던 고해성사를 안해요. 그런데 그 추기경이 하는 말이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 곳이 어찌 우리 화란 뿐이냐? 보면 개신교가 성한 지역의 로마교회들이 일반적으로 성하고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화란 정도의 교회도 많이 피패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지금 로마교회가 개신교의 성장이 거의 멈춰졌다. 그리고 1년에 20-30% 성장을 한다고 그러는데 그래도 진정으로 한국처럼 개신교도들처럼 진정으로 개종을 해서 이렇게 된 것이냐는 문제가 많이 있죠. 로마교회의 방법이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이후에는 칼의 권세로라도 사람을 영생의 길로 밀어 넣어야 된다. 그러니까 칼의 권세에 의해서라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다 교회안으로 밀어 넣어야 된다. 그 정책이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서부터! 사실 그 정책을 어거스틴까지도 찬성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방 이교도들을 교회안으로 강제해서 강압해서 밀어넣어야 된다 그 방식이라. 일단 교회 들어오면 문제가 해결되는 걸로 다 생각하죠. 우리 개신교에서는 먼저 예수 믿어 중생해가지고 새사람이 되어 교회 가입하고 그렇게 되는걸로 돼 있는데 로마교회는 항상 일단 교회부터 데리고 오면 지금이야 우리 개신교도 다 로마교회의 선교방식이 됐습니다마는 그렇게 지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로마교회에 인구가 붙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참 복음의 도를 받아들이고 한 것이냐? 그런데 문제가 많이 있죠. 지금은 성경공부도 하고 신부들이 복음서를 읽고 복음서에 이해 설교를 하니까 많이 상황은 달라졌지만 다 60대 초반의 카톨릭 신자들과 얘기를 해보면 전혀 아무것도 아는게 없어요. 전혀! 도대체가 뭣하러 교회가냐 그러면 미사만 하고 온다고 그러는 거예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런 식으로 로마교회가 한국에서 많이 불어난다면 이것은 곧 핍박이 오고 전쟁이 일어날 때 흩어지고 없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종교 교회형태고 종교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보면 전세계적으로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대대적으로 교회를 떠나 있다 그렇게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도가 크게 진행되고 있죠. 그런데 얼마만큼 진행되느냐? 거의 전체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참 복음의 도를 떠나 형식만 교회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 큰 배도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도 계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래도 설교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부흥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고 소망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마는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들이 아직도 축복에 대해서 너무 강조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축복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기 때에 참 교회 부흥과 이런 것에만 집착을 하지, 참 복음의 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바가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바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다 세상이나 교회나 추구하는 목표는 다 물질이라. 지상에서의 성공이라. 그럴 경우에 그 사이에 어떠한 수단이 동원 됐느냐 그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보게 되는 형편이니까! 이렇게 앞으로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한세대, 넉넉잡고 한세대 지났을 때에 한국교회가 얼마만큼 교회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런 염려를 안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가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어야 되는데 축복을 강조하는 축복의 종교에는 회개가 없어요. 죄의 문제가전혀 개입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한국에 와서 교회 다녀도 정말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선포하고 십자가를 선포하는 그와 같은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물질추구, 세상적인 성공, 세상에서의 낙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자리로 나아간다면 지금이야 이 노사분규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도 아무래도 계속해서 조금은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고 지금 아무리 공권력으로 노사분규와 이렇게 학생들의 데모를 막는다 할지라도 이 막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막아만 갖고 안됩니다. 이 정권이 끝나고 다른 정권이 들어설 때는 상당한 많은 사회복지 정책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고 최소한 최소 수준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임금방식으로 향상해야 할 것이고 농촌의 문제도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정권이 위태하죠.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앞으로 10-20년 되면 한국도 상당하게 빈부의 격차는 커져도 그래도 어느정도 부의 평준화, 나는 그런걸 쓰기를 원치 않고 그건 또 불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부의 평준화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허상이예요. 허구고! 그런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안될 이야기입니다. 부의 평준화라는게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문제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살 수 있는 수준 인간수준을 할 수 있는 만큼 임금을 향상시키는 것,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부가 분배되도록 해야지 부의 평준화라 이런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이고 전혀 허구고 허상입니다. 이 지성인들이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한국의 지성인들이! 그렇게 해서 어느정도 해결될 때에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많이 모이고 열심을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나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계속해서 헌금하는 것, 교회를 봉사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급부로 세상에서 축복을 보상해주는 방식으로 교회가 진행되서는 일이 안될걸로 봅니다.
참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속을 입었으니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우리가 돌아왔으니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목적이, 본분이 하나님을 섬김이니까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에 봉사하는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가르쳐야지 그러지 않고 이렇게 이 세상에 잘되는 것만 강조해서는 교회가 교회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회의와 염려가 많습니다. 결국 이 말은 이렇게 구라파와 이렇게 전통적인 기독교 지역과 남미 지역만 배도가 많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직도 선교교회고 부흥하고 있는 한국 교회도 배도하는 날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대폭적으로 떠나고 교회를 이탈하고 그리고 복음의 도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게 되는 일이 늘있지 않다. 그걸 제가 말할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마는 근데 교회가 교회로 끝까지 남을려면 십자가의 도를 이 복음의 도를 전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화란에서 소위 왕실교회라 왕가가 속해 있는 교단이 그것도 화란 개혁교회입니다. 화란 말로는 구분이 되지만 우리 말로는 구분이 안돼요. 네덜란드 개혁교회인데... 그리고 우리가 아는 화란 개혁교회, 카위퍼에 의해 세워진 교회 000라고 그런는데 화란에 있는 개혁교회, 네덜란드에 있는 개혁교회, 근데 왕실에 속해 있는 개혁교회는 교회 내에 교회가 또 있습니다. 000라고 그래가지고 소위 개혁연맹이라는 것이 있어요. 거기는 대부분의 자유주의 교회는 전부 다 청산해 떠나고 남아있는 교인은 50세 이상 밖에 없어요. 자유주의 교회들은 ( ) 젊은이들은 하나도 잃지 않고 그래도 붙들고 있어요. 한국교회는 오히려 보수주의 교회들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 쫓고 오히려 자유주의 교회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교회들은 젊은이들을 많이 모아들이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 화란의 ( )는 젊은이들을 꽉 붙들고 있습니다. 빠져나가지를 않는다고요. 왜냐하면 소위 그래서 그 교회를 가리켜 정통주의자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 그쪽 교회를 가리켜 정통주의자들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로 남고 배도하지 않는 교회에 속할려면 이복음의 도를 끝까지 전해야 됩니다. 이 축복종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교회 성장이 지금처럼 이렇게 급격하게 일어나지 않고 더딜 것으로 그렇게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가 마지막까지 처음 받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받아 가졌던 복음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전파해야 우리 한국 교회가 체계적으로 진행된 배도의 반열에 안들어 설 걸로 봅니다. 그것은 목사님들, 여러분 교역자님들에게 전적으로 달린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빨리 주님 오시기 전에 이제 큰 앞으로도 주님 오시기 까지 배도가 더 급격히 진행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이제 앞으로 적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마는 배도가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면은 종교적으로 진공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종교적인 존재여서 기독교를 떠나면 탈기독교화 하면은 무종교적인 종교적으로 중립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귀신들의 종교가 대신합니다. 구라파에 가보면 이 귀신들의 종교가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 모릅니다. 최근에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퍼진 종교중의 하나가 인도에서 온 바와가니 종교였습니다. 소위 티엠을 가르친 바와가니 아주 귀신들의 종교가 무섭게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종교를 떠나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늘 불안하고 허전하고 공허합니다. 그렇게 되어서 참하나님을 섬기지 못해도 대신 그 대용물을 요구하게 됩니다. 대용물을! 그 때에 적그리스도가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그렇게 주장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아놀드 토인비도 결국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인간숭배라 그랬거든요. 결국은 인간숭배로 귀착하게 되어져서 하나님 자리를 적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대체적으로 수납될 것으로 봅니다. 
자, 다음, 큰 재난들이 연속될 것이라. 마태복음 24장에도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지진과 기근이 반란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종말때의 시작이지 끝이 아직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끝이 언제냐?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성경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마지막 피택자가 구원받을 때까지 이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 그 기간에 재난들이 연속될 것이라. 주님이 예언하신 큰 재난 중에 제일 큰 첫번째 재난이 소위 예루살렘 멸망입니다. 여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 이것을 다니엘서에서 따온 것인데 누가는 이걸 풀었는데 마가와 마태는 그냥 갖다 써 놓았어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외국 군대입니다. 우상이 아니고요. 우상이 아니고 외국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둘러쌀 때 멸망할 것이라. 그런데 이제 67년부터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70년에 결국 예루살렘이 망했는데 그때에 첫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로마 군인들 손에 의해서 죽은 수보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파당을 만들어서 자기 파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 상대방을 죽인 수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토성을 쌓고 넘어들어 갈 수 있도록 계단을 쌓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그 포위망을 뚫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96,000명 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다 잡아다가 십자가에 처형을 했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가 없어서 처형을 못할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심의 동요라든지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그런데 주님 예언하신 대로 이 멸망의 가증한 것, 외국 군대가 와서 둘러 쌀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도피해서 요단강 동편 필라에 가서 숨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몰살 당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여기 보면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때에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를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이 말할 수 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에 전부 다 무차별하게 다 칼로 쳐 죽이도록 하고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성에불을 놓고 성전도 완전히 불놓아 죽게 했습니다. 그때 죽은 인구가 110만 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보통으로 망하는게 아니지요. 그 옛날에 110만이 한꺼번에 죽었으니까 이것이 보통 큰 것이 아니라. 그런데 24장에 보면 주님 재림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같이 이루어지는 걸로 써졌어요. 그때 주님이 일단은 오셨다. 어떻게 오셨느냐? 예시적으로 오셨다. 그렇게 보통 이해를 하는 것이 맞는 걸로 봅니다. 그 이후에 다시 135년 바 코크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35년에 바 코크바는 자기 자신을 메시야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메시야로 추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로마 항쟁, 마지막 민중봉기, 유대인들이 그때에도 결국 마스다성에서 마지막에 잔류 군대를 쳐부시므로 완전히 봉기부대가 끝이 나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멸망 때에도 자기들이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출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전혀 그런 포위망에 대해서 대비를 하지 안했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동의대 사건도 순국이라고 해서 이번에 장례를 지냈지만 사실은 그건 그렇게 전혀 사고를 안낼 수 있는 것인데 무자비 하게 강경진압 방식으로 나가 죽게 했듯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직접적인 개입이 있을 것으로 믿고서 전혀 대비를 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거 몰살을 당했는데 135년 바 코크바 랍비가 다시 봉기를 일으켰을 때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그때에도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터서 팔레스타인이 소위 거주 불능의 지역으로 화가헤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황제가 명을 내려서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유대인을 거의 다 몰살을 하게 했습니다. 이런 비극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큰 재난이지요. 그러나, 그때 보다도 더 큰 재난은 70년 예루살렘 성이 망했을 때 입니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재난이 그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로마 밑에서 300년 가까이 핍박을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함이 없는 날의 연속이었지요. 그러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통일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서 기독교를 공인할 때 교회가 전반에 나서게 되고 이 전통적인 이교의 마지막 아서잉고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로마를 기독교회가 무너뜨리기 시작해서 그 이전에 이방 종교를 섬기던 그 자리에 기독교가 완전히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부터는 소위 요한계시록에 약속한 소위 1,000년 왕국이 도래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믿게 되었어요. 어거스틴이 353년에 출생을 해서 어거스틴이 그렇게 열렬하게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쓸 때에도 그랬는데 이 소망속에 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쓸 때에도 그랫는데 어거스틴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에 반달족이 점령을 하고 약탈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아직 살아 있으면서 히포의 주교에 있을 때에 이 반달족이 아프리카 북부까지 쳐들어가서 그 히포성을 약탈하고 포위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이 친히 총을 들고 무장을 하고 교인들에게 무장을 하고 히포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때 부터서 또 다시 교회가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5세기 초엽에 4백 몇년입니까? 서로마가 망한 것이? 그렇게 반달족들에 의해서 로마가 무참하게 패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로마가 망해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어거스틴이 22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을 걸쳐서 ‘신국론’을 썼지요. 그때 부터서 이제 계속해서 서구라파가 흑암 속에 놓이게 되고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비쟌틴 제국으로 바뀌어서 명맥을 유지했어도 전통적인 서방의 색채는 거의 다 잃게 되고 동방의 참주제국으로 바뀌는 그런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 1463년 입니까? 이제 소위 터어키 군대에 의해서 동로마가 망했을 때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는 그 중세 때도 참 어려움이 연속이 많이 되었고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1648년 소위 30년 종교전쟁이 일어났을 때 독일의 1/3이 황폐하고 독일의 인구 1/3이 죽고 반 정도의 나라가 황폐 되어졌습니다. 그때에도 종말이 오는 줄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기독교, 개신교와 로마교 사이에 30년 전쟁이 이루어졌으니까 국민들이 당하는 피해와 어려움이 얼마나 컸었겠습니까?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큰 전쟁 1,2차 대전이 일어났고 또 그 이후에도 한국동란, 그리이스의 내란 등등 또 20세기초의 스페인의 내전, 포루투갈의 내전 등의 전쟁의 연속이 게속되었습니다. 지금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큰 전쟁을 치루고 나서 국부적인 소수의 전쟁은 있어도 전쟁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거죠. 2차대전이 끝나고서 벌써 40년을 훨씬 넘어섰으니까 전쟁이 만일 또 다시 일어날 것으로 보아야 맞을 것으로 봅니다. 자,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었을 때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진도 많이 생겨났는데 87년입니까? 멕시코에 지진이 나서 한 2,000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주태 선교사 말은 그 원주민을 위해서 선교하는 그 선교사의 편지를 보면 40만이 죽었다. 지진으로! 금년에도 지진이 났는데 얼만큼 죽었는지 보고는 안되었습니다 마는! 이것이 과학의 기술장비에 의한 정확한 측정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점점 더 시대가 갈수록 지진의 빈도가 높아진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근이 전통적으로 중국이 가난 문제 기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공산당이거든요.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그 험한 산지들과 강들로 나뉘어져 있는 나라들을 다 도로를 놓고 그리고 농업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해서 소위 보릿고개 때 몰살당하는 가난으로, 기근으로, 그와 같은 일은 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전 세계 인구의 약 20억 정도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최소한 5억에서 10억은 완전히 기아선상 이하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사막지역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습니다. 생산의 양은 토지는 수확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자꾸 줄어드는데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니까 소위 도대체가 농업혁명 가지고도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라파에 가보면 이 중동지역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아시아 옛날 식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굉장한 퍼센트로 인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요. 계속해서 이 중동지역 회교도 지역들에서 구라파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67년인가 로마 클럽을 서구의 지성인들이 모여 가지고 기술과 부를 제 3의 세계로 이전을 해야된다. 그렇게 해서 많이 했지마는 사실 그것도 몇몇 독재자들과 권력자들의 손으로 들어가지 국민들의 손으로 들어가지 않거든요. 그러나, 계속해서 기술을 넘겨주고 재산을 넘겨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됐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모여들게 되지요. 스웨덴 같이 인구도 적은 나라인데 이주민이 반 이상이 넘습니다. 아니 1/3 이상이! 그 정도로 심각하게 인구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잘되고 있어도 잘사는 나라는 계속해서 흘러 넘치지마는 못사는 나라들은 말할 수 없이 못살게 되어서 전 세계가 전체적으로 평안하게 바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전세계적으로 동요와 불안이 심하지요. 우리나라도 자꾸 데모가 많이 일어나면 정권이 위협을 받아서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생각하니까 원천봉쇄, 강경진압을 해가지고 데모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데 이와 같은 동요와 불안들이 전세계적으로 일이 진행될 때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빵의 문제가 적그리스도 때는 많이 해결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과학 기술로도 이게 문제가 많고 그 다음에 지진들도 계속해서 많이 일어날 것이라.
하늘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이냐? 땅에는 전쟁과 살륙과 고통의 연속이었어도, 아직 하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아마 주님 오시기 직전에, 주님 오실 때에 하늘의 권능들이, 현 천체 질서가 흔들릴 것이라. 천체 질서가 흔들리면, 그때는 주님이 진정 오시는 걸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해가 동쪽에서뜨고, 서쪽으로 지지만은 이게 언제부터 이랬는지 확정할 수가 없어요. 그 벨리스 콥스라는 학자가 쓴 ( ) “투쟁 중에 있는 세계”라 뭐라고 번역해야 좋은지 ( ) 벨리스 콥스가 쓴 책인데 지금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지만 옛날에 아직 문헌으로 남겨지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동쪽에서 해 뜨는 것을 표식을 했는데, 어떻게 했느냐 하면 무덤을 쓸 때 해뜨는 방향으로 표를 하고 무덤을 쓰고 장례를 지냈다. 근데 그때에 무덤들이 발굴 된 것을 보면은 그 태양이 뜨는 표시가 지금과 반대 방향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무덤들이! 그러니까, 옛날에는 해가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졌다.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혹 주님이 오실 때 다시 지구축이 바로 세워져서 또 한번 해가 서쪽에서 뜨고 동쪽에서 지는 일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금 3시니까 잠깐 쉬다가 계속 하겠습니다.
자, 여기 마지막 24장 29절을 보면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런데 이런 것들은 소위 과학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과학에서면 지금 또 우주의 생성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가 플라스마 상태라는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만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 )이론 “큰 폭발 이론”에 의해서 우주의 생성시작과 팽창을 설명을 했습니다. 어느 한 싯점에 물질이 우주의 한 공간에 놓이게 되니까 그것이 아주 거대하게 폭발하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록 확장되면서 현 우주가 생성이 됐다. 그런데, 그 작용이 소위 에너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마침내 어느정도 함유한 우주가 별들이 정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합니다. 그런 것은 전혀 맞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후에 노아와의 언약에서 이 창조를 마지막 때까지 주님 재림 때까지 정상적인 질서로 운행될 것을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지구위의 우리가 사는 그 주 거소인 지구의 생존 환경만 고정되고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주변에 있는 별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보존되고 유지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볼 때에 이런 식의 물리학적인 방식으로일이 해결될 것이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적그리스도의 출생인데, 적으리스도의 출현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사회가 거의 중앙 집중적인 방식으로 혀대사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소위 영어로 ( )라고 그러는데 전에는 ( ) 혹은 ( ) 다원주의 사회 혹은 다원주의라고 했어요. 어느 한 세력만 어느 한 원리만 어느 한 종교만이 모든 것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 독립적인 가치를 갖고 자기 대로의 사회를 이루고 살 수 있다면서 획일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주장할 수 있는 원리라든지 철학사상 이런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사상의 변천과 출현과 그 소멸과정을 보면 아주 빠른 속도로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직도 다원화 되고 있지만, 다원화 사회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반적인 추세가 중앙 집중적, 중앙 집권적 경향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후진국에서 더 심하지만,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고 이 일은 제 2세계, 제 1세계는 미국과 소위 구라파를 제 1의 세계라 한다면, 제 3의 세계는 아직 후진국인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들을 제 3의 세계라 그러는데 이 동구권의 공산주의 나라들을 제 2의 세계라 그렇게 말하지요. 제 2의 세계라고는 잘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소합니다만 그러나 제 3의 세계가 있으면 제 1의 세계, 2의 세계가 있을 것 아닙니까? 1의 세계는 어딜 말하고, 2의 세계는 어딜 말하느냐? 2세계는 후진국 제 3의 세계 보다는 높은 수준이면서, 자유주의 서방세계 보다는 낮은 공산주의 세계가 제 2의 세계이고, 제 1의 세계는 미국과 카나다, 그리고 서구등을 가리켜서 제 1의 세계라.
그런데 이 중앙집권적인 경향이 소위 동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소위 죠지 오웰의 1984년이라는 소설에 보면 사람들이 전부 다 기계에 의해서 행동하고 기계에 모든 것을 물어보고 사는데 사실 그 죠지 오웰이 1984년에 그린 세계는 그 모든 것들이 소위 동구의 세계를 모델로 하고 되어진 소설이지요. 그때 스탈린이 처음으로 스탈린이 집권을 하고서 시작했던 것이 소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정치가 큰 힘을 발휘하고 사회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가지고 당이 혹은 정치가 경제를 자기의 영역으로 포섭을 했습니다. 당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 혹은 정부가 경제계획을 세우고 그의 필요한 자본을 동원하고 기술을 동원해서 배분을 해서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차츰차츰 몇번 반복하므로 동구의 생활수준을 서구의 수준을 능가할 만큼은 안되었어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병폐들이 있어서 문제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지금 개방과 계획을 소련과 중국이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2차대전 직후에 시작된 이 소위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세워서 추진했을 때 이 기간 산업들을 일으키고 국민들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할 수 있는 산업들을 계속해서 추진해 갔을 때 그 효력이라든지 파급효과 그 영향력이라고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기계의 도움이 컸는데 특별히 컴퓨터라고 하는 전자계산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실 경제개발 5개년 개획이라고하는 것은 기간 사업들을 일으키고 주요한 산업들을 어느 개인들이 할 수 없어서 정부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 미래의 집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큰 거대한 프로젝트들이어서 소위 당대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개발계획이 진행된 나라의 50년 100년 후의 사람들의 운명까지 결정할 만큼 대대적으로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들이 필요했고, 그런 것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소위 전자계산기 아니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공위성을 맨처음 1957년입니까? 소련이 스프트니코 1호를 발사를 했는데 그렇게 발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부흥도 컸지만 그로 인한 국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고 또 컴퓨터가 발달했기 때문이라. 컴퓨터에 넣어가지고 다량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처리하고, 또 그로 인해서 경제를 계획들을 세우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자본, 기술, 인원 그런 것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역을 선정해서 하느냐? 이런 것들이 성공을 거두니까 소련의 위성국가들이라고 하는 공산국가들이 이것을 다 마찬가지로 공통으로 도입을 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공을 거두게 되니까 제 3의 세계들이 이것을 받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이 소위 경제개발 5개년 계호기의 정책을 받아들여서 눈부시게 성공한 나라가 소위 일본입니다. 일본이 전후에 물론 전중에서 분명히 크게 향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고 수행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전쟁 후에 이들의 경제를 부흥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소위 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우리말로 하자면 그래가지고 정부가 경제개발계획들을 수립하고 추진해서 성공을 했습니다. 물론 그러기에는 6.25와 월남전쟁에서의 군수 보급창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크게 힘을 입어서 그렇게 부흥했찌만 그러나, 경제개발 계획들을 일으켜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이 성공하니까 후진국 제 3의 세계들이 앞을 다투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을 수립하고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도 61년도에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살길은 국토개발과 경제개발 뿐이었기 때문에 장면이 들어서서 국토개발을 계획을 시행을 하다가 ( )에서 좌절을 당하고 5.16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이 살길이 소위 미국에서는 원조가 끝나고 대폭 감소되었으니까 살아날 길이 없지요.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고집을 완강하게 부리고 일본하고 국교를 맺지 않으려고 하니까 미국이 자기들이 계속해서 한국을 짐 지울 수 없으니까 이 대통령을 밀어내 버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워서 일본내의 원조로 인해서 한국의 나아갈 길은 그런 정책을 가지고 4.19에 미국이 크게 개입을 하지 안했습니까? 그래가지고 군사정권들이 일본과 협조를 맺고 통상을 갖고 3억달러의 무상 원조를 받아들이고 또 유상원조도 받아들여서 경제개발 계획을 일으키므로 지금 이렇게 될만한 터전을 닦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치 하는 사람들이 경제라고 하는 전혀 별개의 영역을 자기들의 영역으로 통합시키므로 나타난 귀결은 절대권력의 탄생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19년동안 정권을 잡고 한반도의 2,000년 역사에 그 사람만큼 강력한 절대권력을 휘두를 사람이 없다고 할만큼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것은 그가 물론 특별히 이 폴리테크날리지( ) 이 정치 공학적인 기술을 많이 활용을 해서도 그렇게 또 중앙정보부라고 하는 정보기관을 많이 활용해서도 그러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장구하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를 자기 손에 통합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경제를 자기의 영역으로 통합하면 나타나는 필연적 귀결이 절대 권력입니다. 후진국들의 독재자들이 그렇게 오래토록 정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경제개발 계획을 세워가지고 추진하므로써 자본을 정부가 동원해오소 기술을 정부가 가져와서 그리고 지역도 자기들이 선정하고 그외 필요한 인원도 자기들이 선정하고 그렇게 하므로써 정말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한국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정부가 자원을 빌려오고 받아오고 기술을 가져다가 배분하고 그러니까 이 엘리트들 손으로 권력이 모이게 되고 결국 그 엘리트들이 모인 권력은 다시 한사람에게로 모이는 그와 같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들이 다 마찬가지로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김일성 주석도 해방부터서 40년 이상을 한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머리가 보통 탁월한게 아니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정치를 하면서 경제개발을 해서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만 가능했습니다. 소위 지금은 밀려났지만, 마르코스도 그런류에 속하고 후진국의 독재자들이 다 그런류에 속합니다. 이렇게 해서 후진국들이 이와 같이 굉장하게 빠른속도로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자연히 권력을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도, 그 모임을 다시 최후에 한사람의 손으로 모아진 그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권력을 통합하는 일에 있어서 컴퓨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컴퓨터 없이는 현대 사회가 도저히 이와 같은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하고 수립한 사람들은 그 해당 부처에 있는 국장, 과장, 차관보 수준이니까 이런 사람들 손에 권력들이 아주 말할 수 없이 크게 몰려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모여진 정치와 경제를 통합하므로 이렇게 전체사회의 권력을 모으게 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인데 사실 제가 외국에 있으면서 청와대에 앉아있는 분이 국민학교 교장까지도 임명을 하고 청와대에서 교장 임명장을 수여한다고 할 때에 정말 아연했습니다. 청와대에 앉아 있는 사람이 오죽 할일이 없고 얼마나 고상한지 국민학교 교장까지 임명장을 청와대에 앉아서 주고 앉았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정치와 경제를 통합해서 절대권력이 나타난 그 다음 분야별이 갖는 권력들도 마찬가지로 통합되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의 성질상! 그런데 그것이 얼마만큼 한사람 손에 그것이 집중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반증해 주는 예라고 할 것입니다. 아니면, 박정희씨가 살해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집권을 했으며는 그와 같은 현상이 더 짙어졌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존재가 개방적이냐 폐쇄적이냐( )하는 것에 논란이 있어서 결국 사회도 절대권력자 손에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어서 자꾸 반동을 하고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결국 끝날 수 밖에 없었고 전두환씨도 8-9년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통합을 하다 보면 마지막에 정치가 군사는 말할 것 없고 정보매체를 안전히 통합을 하거든요. 정보매체, 다 독재정권이 그러지 않습니까? 정보매체를 완전히 장악을 하면 이것만큼 강력한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체를 통합하므로 여론을 전부 다 조작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만들거든요. 그렇게 하고 문화, 교육, 노동 할 것 없이 전부 다 하나로 통합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종교까지 통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 단계이지요. 종교까지 정치가 통합을 하는 것은! 그런데 유신 이후에 이 장로교 교회에 보수 교히에 가장 많이 정보정치가 들어오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지 않았는가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래 그 권력의 성향, 성질상 자연히 이렇게 통합을 하게 되면 전체를 다 통합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중세는 이렇게 위계적으로 이루어져서 교황이 구라파 전체에 명령을 내리면 그의 말이 구라파 전 영역에 미쳤다고 해서 절대 권력을 가진 것 같지만 물론 그때도 종교재판과 같은 인퀴지션이 있어서 강력하게 반대파들을 이단들을 압제하고 박해하고 그랫지만 그래고 거기에는 정신적인 영적인 영역에서의 권리이고 정치가 경제를 통합해서 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때 이것은 완전히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교황이 행사하느느 권력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면 못할 일이 없어집니다. 선과 악이 권력자의 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해야 할 것과 안해야 할 것이 권력자의 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래 자연히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고 중앙집권적으로 일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참 잘 설명한 책이 있습니다.이분( )이 1952년에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1970년인가 은퇴를 했는데 20에서 한 30년 지나가지고 이 책에서 화란 자유대학 철학부 교수로 은퇴를 했습니다. 지금 아마 80이 넘었을 걸로 보는데 참 좋은 훌륭한 친절한 교수들이다. 그런데 이분이 공학을 하다 철학으로 돌아서서 그런지 아주 예리한 눈으로 현대사회의 성향을 통찰을 하고 글을 썼어요. 1952년이면 이 책을 썼을 때는 일들이 그렇게 깊이 진행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은퇴할 때에 이 책이 기술한 대로 형대사회에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성취된 예언사라 그렇게까지 은퇴할 때 인터뷰하는 것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이게 영어로 번역되어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원제: ) 영어로 미래사회라는 책인데!
그러면 후진국은 그렇다 하더라도 선진국은 그러지 않느냐? 선진국도 戰後에 미국이 구라파가 일차적으로 복지정책을 도입을 했습니다. 戰後에 그 전에도 사회당, 노동당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뚜렷하게 사회당, 노동당들이 구라파에서 거의 전후의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정권을 잡아도 몇번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상당히 장구한 정권을 잡았지요. 그런데 후에 어느 정도 평준화를 위한,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회 복지 정책을 계속적으로 도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있지만 또 이들이 내가 보는 대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화되지 않는 길이 바로 사회 복지 정책을 쓰는 길 외에 이 자본주의, 미국 같은 자본주의 제도를 계속해서 해 갖고는 공산화를 막을 길이 없어요. 그래 공산주의하고 선을 그어 놓고 맞대놓고 있는 서구사회가 공산화되지 않기 위해서 한 정책이 바로 사회주의적인 복지 정책이었습니다. 그래 지금 전후 40년 이상을 했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세금을 많이 내게 되고 심지어 화란 같은데도 5일 일하는데 이틀분은 세금으로 가져갑니다. 의사들이 5일 일하면 2일분은 세금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니까 3일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갖습니다. 그래 5일 일하는데 3일분을 자기가 쓰니까 40% 선의 세금이 나가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외국인들에게는 영수증을 안주고 돈만 받는 일이 많아요. 영수증이 나오면 세금을 다 정확하게 내야 되지만 영수증을 안주면 세금 안내도 되지 않습닊? 할 수 있는 대로 일을 적게 할려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세금을 많이 받아들이고 결국 정부가 통제를 해서 나눠주지 않습니까? 세금만 내면 자녀 양육비가 다 나옵니다. 우유가 다 나오고 자녀 양육비가 다 나옵니다. 그렇게 하니까 자연히 중앙의 부처들이 엘리트들이 그런 걸 전부 다 관장합니다. 자연히 사회를 한 군데로 묶는 방식으로 서구 사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그들에게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렇게 해도 서도 같은 나라, 영구 같은 나라에, 서독만 해도 인구가 5-6,000만 되는데 그곳에 벌써 다 정보가 데이타 뱅크에 국민들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애요. 그렇게 해서 엘리트들의 권력이 자꾸 커지고 결국은 정권 잡은 사람들에게로 권력이 모여지지요. 물론 거기에는 내각 책임제가 주종이기 때문에 종신 할 수 없지만 그런 성향입니다. 엘이트들에게 권력이 모여있는 것이 서구에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强度는 달라요.
그 다음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니까 어떠냐? 저도 처음에 미국 가서는 정말 돈 없으면 보도에 꼼짝도 못하고 서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가다가 타이어가 빵구가 나면 어쩔 길이 없는 겁니다. 화란 가보니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도로에 아주 촘촘하게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움직일 수 없을 때는 그저 보험회사나 교통센타에 알릴 수 있도록 전화 장치가 되어 있는데 미국에는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만 없으면 완전히 꼼짝 못하고 죽는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몇년 지나서 미국 사회를 들여다 보게 되니까요 그게 아니었어요. 이게 자본주의 사회지만 이게 복지정책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을 내가 발견했어요. 흑인들이 돈 없다고 병 걸려 치료 못받아 죽는 일이 없고 일하지 못한다고 돈 없어 굶어죽는 일이 없습니다. 완전히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도록 모든 정부가 그들의 메디케어, 소위 의료진료 받을 수 있는 것을 완전히 보장하고 있고 그 다음에 심지어 흑인들 일하지 않고 마약이나 알콜 중독 된 사람들에게 돈 주어 갖고는 술 마시고 마약에 다 써버리니까 쿠폰을 줘요. 그래 그걸 내고 수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州政府에 보내서 쿠폰에 대해서는 돈을 받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굶어 죽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완전히 사회보장이 되어 있는 나라예요. 처음에 가서는 전혀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 대부분이 다 자기들이 일해서 하지 그저 미국 사람들, 백인들은 이 돈 받아 사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겨요. 그러니까 정말 자기가 벌어야 되고 자기가 벌어서 살아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줄 알아요. 가보니까! 조금 살다가 눈을 떠보니까 완전히 이렇게 되어 있는 사회더라고요.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갈수록 프랭클린 루즈벨트 때 더 그렇게 뉴딜정책을 써가지고 연방정부를 강화했습니다. 그 연방정부가 아주 강력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연방정부에 예산에 비례함을 재기 위해서 레이건이 선거 공약으로 그것을 내세우고 거의 주 정부가 독자적인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고 중앙 연방 정부는 그냥 이것을 중재하는 수준에, 2차대전 이전에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래서 국민들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 그렇게 하고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결국 전혀 못하고 끝났거든요. 전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립 대학들에게 정부가 보조 나가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나가요. 이렇게 되니까 자연히 권력을 잡은 중앙 부처들의 엘리트들 손에 권력이 모여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권한이 또 말할 수 없이 크지요. 그게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황제같은 대통령이 나왔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아 보니까 그만큼 연방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했습니다. 물론 워터게이트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제한되었습니다만 그래도 뭐 레이건은 할일 다하지 않던가요?
이렇게 제 1의 세계들도 사회들이 점점 다원화 사회에서 일원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권력이 한군데로 집중해요. 그러면 이게 전 세계적으로는 그렇게 안되느냐? 상당 부분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농업정책 같은 것, 거의 UN의 기구들이 후진국의 농업정책을 지배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후진국의 경제 정책들도 그들 나라 밖에서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돈을 빌려주는 나라가 정책을 결정해 줘요. 이게 후진국의 비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빚을 갚아야지요. 지금 한국에는 이자가 높기 때문에 그 이자 놔두고 빚을 갚아버리기가 도저히 안되다고 해서 안갚지만 이 나라가 독립적인 행사를 하려면 빚을 빨리 갚아버려야 합니다. 그게 후진국들이 거의가 다 경제 정책을 써도 그 경제 정책이 그 나라 밖에서 이루어져 가지고 그 나라에 들어 옵니다. 돈 빌려 준 나라가 거의 다 정책을 결정해 가지고 해줘요. 그러니까 UN의 기구들, 의학이라든지 전염병 질병 같은 것, 농약 기술, 농학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통합되어 있어요. 이런 식으로 사회가 점점 점점 앞으로 계속해서 통합하는 과정으로 가면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통합될 수 있다.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럽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전자 주민등록증 같은 카드 만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뜻하는 것은 나나 여러분들의 모든 정보들이 센트랄 뱅크에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정보가 집중되어 있으면 이 사람 다스리는 데 이것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게 맞는 말인지 어떤지, 실례되는 말인지 해서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우리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정XX씨가 말을 잘 안들으니까 전부 다 정XX씨 뒷조사를 해가지고 털어내는데 심지어 다방에서 정XX씨가 어린 여배우에게 돈 얼마 준 것까지 전부 다 털어냈다. 그러니까 뭐 꼼짝 못하는 거지요. 그래 저와 같이 무명인사고 작은 학교에 있는 사람인데 지금은 그 사람이 안옵니다만 그 안기부의 과장이 우리 학교에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래 첫마디 딱 인사하면서 아 서박사님, 하면서 나를 칭찬해 대는데 뭐, 내가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아니 나를 어떻게 다 아느냐고, 다 안다고, 야, 날 같이 무명 인사고 작은 데 엎드러져 있는 사람도 안기부의 과장이 소상히 알고 있어요. 야, 정말, 그래 이것도 좀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김수환 추기경 이전에 노기남 대주교가 한국의 대주교로 일을 안했습니까? 추기경 생기기 전에, 그런데 그는 강력하게 반정부 발언들을 활동들을 못했다 그러거든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스캔들이 있답니다. 정부가 모든 사람들의 신상들을 전부 다 쥐고 있는 거지요. 그 사람의 생년월일, 몸무게, 크기, 머리색깔, 경력, 부부관계, 외도관계, 탈세관계, 범죄관계, 교육정도 전부 다 소상히 알지요. 그래 학생이었던 사람이 청와대 근무를 했는데 심지어 명사들은 그분 말대로 그래요. 숟가락 몽둥이가 어디에 놓였는가도 다 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 조심하십시요. 심지어 그런 이야기들을 하더라고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 목사님이 하도 반정부 발언을 심하게 하니까 중앙정보부에서 부르더랍니다. 사진 몇 장 딱 내놓고, 이것이 목사님 맞지요? 할 말이 없지요. 이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할 말이 없지요. 목사님이 어디에서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어느 여자하고 이렇게 하는 행동이고, 그래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장면이 전부 찍혀 있는 거지요.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입 딱 다물고 와서는 열심히 정부를 옹호하고 편들고, 안 그러면 이제 폭로가 되어서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나라 4,000만 이상의 모든 행적이 센트랄 중앙 자료은햬에 들어가 있고 키펀치만 누르면 모든 것이 나오는 거지요. 그런데 나 같이 이렇게 실제하고는 반대되는 정보로 많이 침을 받는 사람은 정보를 빼보면 아주 굉장히 어려운 정보들이 많이 들어 있을 걸로 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나라들이 정보들이 중앙에 다 통합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것이 센트랄 데이타 뱅크에 안들어간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 의회가 막고 있어요. 그것 넣으면 국민들의 자유를 보장할 길이 없다고 막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그것은 시간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대신 흥신소가 성하지요. 흥신소들이 또 필요한 사람들의 정보를 전부 다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정보 회사들, 아마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이기 때문에 거의 가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누구하고 앉아 식사하고 있는 것 까지도 다 들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나는 그렇게 친정부적인 사람이 못되어서 언제 무슨 말 하는 것까지 전부 다 기록되어 있을 걸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모든 정보들이 국가마다 통합되면 이게 또 멀티네셔널스라는 게 소위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서 이런 정보들이 또 통합이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미국에 통신시장을 개방해야 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정부는 개방한다고 하는데 전문가들 말이 옳은 것 같애요. 개방을 해버리면 우리의 정보가 전부다 외국에 나가서 완전히 다 노출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후진국들의 정보들은 중요한 외국의 큰 은행, 큰 정보회사, 큰 대기업들이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만 정보가 수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들어가 있는 거지요. 외국에도! 이런 식으로 정보가 계속해서 통합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스리기가 너무 쉬운 거지요. 이런 방식으로 점차 사회가 나아가면 결국 한 사람이 세계를, 몇 사람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환상의 세계만이 아니다.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렇게 해서 권력자들이 모이고 결국은 정보들에 의해 통합되고 이렇게 되면 전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혼자 다스리는 것 보다 도지사도 세우고 시장도 세우고 해서 다스리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요. 
죠지 오웰의 소설보다 올드 헉슬리의 ( ) 우리말로 ‘멋진 인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멋진 인생이라기 보다 대담한 인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애요.
()말. 이게 더 재미있습니다. 보통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포드 총재가 세계를 다스리거든요. 포드 총재가 세계를 다스리고, 그리고 여행이 비행기가 아니고 로케트로, 로케트로 할 수 있습니다. 로케트 시츄에이션이 세워지는 것이 그렇게 먼 시일이 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지금 로케트를 발사해 가지고 여행하는 실험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콜롬부스라든지, 또 이렇게 쏘아올릴 때는 로케트로 쏘아 올려가지고 지구를 돌고 돌아 내려올 때는 일종의 비행기 형식으로 내려오는데 그때는 그냥 내려오면 타버릴 테니까 비행기 식으로 내려와요. 내렸다가 다시 U자 형으로 틀었다가 또 이렇게..., 그런 비행기 벌써 실험이 다 끝났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이것이 군사에 적용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케트를 쏘아서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또 탁 눌러서 뉴욕 공항에 내려서 일보고 다시 로케트로 가는데 30분 오는데 30분, 그러면 시차에 의한 문제도 없어지고... 시차 문제가 상당히 힘든 것 같애요. 제가 미국 갔을 때 비행기 타고 열 몇 시간을 가니 필라델피아까지 말이예요. 그냥 한 달 내내 졸음만 오는 거예요. 또 오니까 얼마나 쓸쓸하고 처량합니까? 그런데 공부는 해야되니까 쓸쓸한 생각히 드니까 항상 졸음만 오는 거예요. 그런 문제도 없어지고 또 로케트 타면 30분 만에 가니까 일 다 보고 저녁에 또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곧 이루어질 거예요. 뉴욕에 그 센타가 세워지면 동경에, 런던에, 함부르크에, 또 파리에 한국도 그보다 조금 늦춰져서 서울에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이게 먼 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부부간의 관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공부화장에서 태어나요. 그러면 차기 포드 총재는 어떻게 하느냐? 차기 포드 총재가 될 사람은 α+ 주사를 놓아가지고 수정란을 기른다. 그래 제일 머리가 좋은 것은 차기 포드 총재고 그 밑에는 α- 주사 놓고 그 다음은 β+, 그다음은 β-, γ+, γ-...주사 주어갖고 전부 다 길러요. 그리고 번역하는 사람도 습성도 오래가고 했는데 뜨거운데 가는 사람은 뜨겁게 열을 가해서, 추운데 갈 사람은 차게 해 가지고 하고, 지금 현대 문명을 그대로 소설화 해 놓았어요. 그러면 性은 완전히 향락을 위한 거지요. 죽 갈수록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불란서에서 조사를 했는데 혼외정사 경험을 한 사람이 남자는 75%, 여자는 30% 이상이라. 우리나라도 점점 그 추세가 높아진다는 소리는 몇년 전에 제가 들었습니다. 성은 완전히 향락을 위해서 있고 어린아이는 인공부화장에서 병아리 깨듯 깨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포드 총재 1인이 다스리는데 거기는 기독교는 대형 박물관에 가 있고 포드 총재를 기리는 예배가 자주 자주 진행이 됩니다. 포드 총재가 세계를 다스리는데 그 총재를 예배해요. 그래 이게 적그리스도가 출현된 사회상이라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런데 1983년에 나오는 큰 형님이 빵과 안전을 보장하는 거지요. 왜 사회가 불안하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까 늘 사회가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그런데 한국이 기독교가 이렇게 많은데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가 왜 그렇게 불안한지, 보면 진정으로 믿지 않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한국의 미군이 철수한다고 하니까 제일 먼저 보따리 싸 짊어지고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목사님들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여기 살면 불안한게 사실입니다. 핵무기가 다 장치되어 있고 3.8선이 저렇게 가까이 있고 그러니까 불안한데 미국 가면 편안한 줄 압니까? 미국 가면 더 불안합니다. 한국은 군대에 있을 때 보면 군대에 있으면 제일 전쟁 안납니다. 그런데 서울을 나오면 전쟁 날 것 같애요. 미국 가면 곧 전쟁 날 것 같애요. 내일 모레 전쟁 납니다.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위협이 미국 사람들 만큼 심한 데가 없습니다. 핵무기에 대한 위협이... 한국도 핵무기가 많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잠 못 잘 사람 많이 있습니다. 이게 비밀로 묻혀 있으니까 편안하게 잘 자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 안계시니까 늘 불안하고 동요하고 그럴 때 적그리스도가 빅부라더가 큰 형님이 안정을 보장하지요. 그리고 빵을 약속합니다. 빵이 넘쳐도, 다 분배가 안될 테니까 그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교통 수단이 기차로 자동차로 간혹 비행기로 하던 수준에서 로케트로 대부분은 가고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서 빠른 기차들을 동원하면 전세계적으로 식량을 균등 분배하는 일이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후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게 불가능한 상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 문명사회가 적그리스도가 필연적으로 출현하도록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빵과 안정을 약속하면서 나를 믿으라 그렇게 약속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빵과 안정을 약속해 중 사람이 하나님 아니고 누구입니까? 적그리스도를 섬기게 되지요. 하나님으로! 바로 그때 그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앉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주님이 오실 날이 다 되었다 그렇게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자기를 섬기지 않는 반 적그리스도파들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과 숙청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것이 환난의 때지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제 5 강 
요한계시록 13:1-18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 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지난 시간에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냐... 말이 많지만 의견의 합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세에 나타날 정치적인 권세와 경제권, 종교권을 다 한몸에 가진 악의 화신일 것이라. 거기에는 이제 일치하고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자, 이런 존재가 종말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냐? 온 세상의 권세를 다 자기 손에 걸머쥐고 심지어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까지 하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가 출현될 수 있는가? 그런 가능성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문명의 추세대로 간다면 한사람 자꾸 중앙집중적으로 권세가 권력들이 집중되는데 이런 것들이 마침내 전세계적으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 이제 짐승이라고 표시했는데 짐승은 다니엘서의 영향으로 계시록이 짐승이라고 표시했습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과 성도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을 표시할 때에 적대적인 나라를 표시할 때에 짐승으로 표시했습니다. 그 표현을 요한계시록도 맏아서 짐승으로 표시를 했습니다. 하면, 적그리스도가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요한1서에 나오는데 거기는 적그리스도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를 막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대부분 로마나라를 적그리스도를 막는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주 로마를 적그리스도로 보지않는 초기에는 보지 않았다는 그런 교회의 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뿔이 나오매” 그럴 때 뿔이 나온 것을 네로가 다시 살아서 왕으로 되돌아 올 것으로 기대를 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이 지나가고 이제 콘스탄틴 대제의 등극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가 핍박되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숨어있는 자리에서 성도들의 할 수 있는대로 바라는 것은 조용한 중에 경건한 생활을 하기 바라는 것과 같은 삶의 자세에서 사회를 주도하는 적극적인 세력으로 나타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보통 1,000년간을 로마교회의 평화시대라 생각하고 이때를 1,000년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중세 천년기간을 살펴보면 우리처럼 우리가 생각하듯 소박하고 평화롭고 그런데 아니고 온갖 부조리와 악과 타락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세속화가 많이 깊이 진행되므로 권세들을 사고, 권세들을 높은 성직자들의 자리도 사고, 성직자의 자리도 살 뿐만 아니라 또 그 사람들이 세상 권세를 취하게 되고 그리해서 어려움이 많이 있었고, 힘은 가졌지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와 같은 역사는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때가 되니까 그와 같은 세상 권세를 다 탈취하고 교회권세까지 함께 가지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고 하는 칭호를 받은 로마교힝을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적그리스도로 지목을 했습니다.
결국 여기서 부터 칼빈도 그러하고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적그리스도는 로마교황이라 그렇게 했는데, 사실 그렇게 말을 받을 만큼 로마교황이 악한 것을 많이 했고 별로 선한 교황들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황이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들어와서라 할 것입니다. 그전 까지만, 20세기 들어와서 특히 요한 23세 그 전에서 부터 세상권력과 통치력을 구하던 데서 벗어나서 교회에 전념을 하게되고 교회에 전념하게 된 것이 결국 62년 제 1회 바티칸 공회를 소집하는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한 23세는 79세 땐가 교황이 됐는데 그때 교황이 되기 전에는 론갈리 추기경이라는 이름으로 추기경을 했어요. 그런데 열심히 목회에 전념을 하고 평생소원이 목회자로서 목회에 전심하기 바라고 또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대로 주님이 그 대제사장의 기도의 이 우리 이 우리의 속한 우리 말고 우리 밖에 있는 자에게도 자들에게도 하나되게 바라는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대로 교황이 이렇게 갈라진 교회에도 하나이 되서 한 목자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키프리아누스 이후서 부터 로마 특히 도나투스의 분리 때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을 했는데 그것을 핍박받을 때도 로마교회가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을 했고 더구나 갈려져 나간 개신교에 대해서는 열교로 찢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이 원리를 적용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열심히 주장을 했는데 갈려져 나간 개신교도들 한테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들이 하나되게 하기 위해 먼저 우리 교회의 문제 자체부터 반성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모인 것이 바티칸 제 2공회인데 그때에 개신교와 구교가 합칠 수 있도록 로마의 전통적인 미사 예배의 모범을 바꿔서 거의 개신교식으로 만들었죠. 그리고 그를 이어가던 바울 6세 지금 요한바울 2세 등도 목회에만 전심하는 사람들이 되서 세상적인 권세를 별로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로마교황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 그렇게 하는 말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20세기 초엽까지도 개신교에서 적그리스도는 로마교항이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만 하기도 해요. 왜냐하면 여기 음녀, 음녀라고 했는데 음녀로 표현된 것을 보면 타락한 교회들을 지칭하죠. 물론 글자 그대로 돈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지조를 파는 것을 가리켜 음녀로 지칭하지만 여기서 음녀라고 말할 때는 타락한 교회라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로마교회가 적극적으로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WCC 정식회원으로 가입은 안했어도 업서버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개신교도들과 희랍정교회가 정회원으로 가입되 있지요. 한국교회의 보수교회 몇몇을 제외하고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거의 다 WCC에 가입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인 (판넨베르크?)가 글을 쓴게 있는데 우리가 다시 로마교황권 밑에 합칠 수 있다고 이야길 했습니다. 단지 로마교황의 무오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제가 그전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한스 큉이 로마교황청에 도전을 해서 로마교황의 무오설을 인정할 수 없다. 교황의 무오라는 것도 그냥 무오가 아니라 ( ), 교황의 좌(座)에 앉아서 교회와 예배모범과 윤리에 관해서 정치에 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무오하다고 주장을 해 왔습니다. 이 주장이 공식 로마교회에 공식 교리로 채택된 것이 1870년, 제 1바티칸 공회에서 로마교황의 무오설이 로마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많이 주장을 했어도 대량 주장을 못 한거지요. 사실 로마교황쯤 되면 최소한 지금 7억 인구가 되낟고 할까요? 7억이 못될른지, 그 정도의 인구를 다스리는 그 큰 자리에 앉았는데 교황의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어떻습니까? 목사님들,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 목사님들이 말씀하는 것을 곧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으로 받으라고 강요하지 ㅇ낳아요? 그런데 더구나 이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카디날 추기경, 대주교들을 모아서 결정을 하고 교황이 승인을 해서 자기의 교설로 공포를 하면 그게 오류가 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지요. 그래 추기경과 대주교들은 교황의 보좌관으로 자문위원으로 일하는 격이 됩니다. 그러니까 공의회가 결정을 해도 일단 교황의 결정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교황의 무오설을 이제까지 주장하고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황이 세속적인 자리와 권세를 추구하던 자리에서 목회만 전심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습니다. 시기적으로 기간적으로 따지면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13세기에 체계를 완전히 구상을 했어요. 그래서 본래 로마교회에 있어서 은혜와 자유와의 관계는 은혜가 더 자유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자연은 본래 부족하게 불충분하게 창조됐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은혜가 와가지고 이 자연을 회복하는 수준도 있습니다. 또 부인하지 않아요.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 은혜가 와가지고 부족한 것을 끌어 올린다. 낮은 수준의 상태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요. 그걸 완성한다 그럽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도 타락으로 멍들은 병든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은혜는 와가지고 자연을 낮은 그 병들고 멍든 자연을 치료함과 동시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자연의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을 통치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보다 은혜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 자연의 영역까지 지배해야 된다. 그렇게 해서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모든 권력이 통합되도록 체계화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토카스 아퀴나스의 책에 의해서, 뭐 그전부터도 그렇게 했찌만 세속 권세를 위해서 아주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중세는 사실은 신성 로마제국이 있지만 이것은 허수아비이고 실제로 다스리는 것은 영주들이지요. 영주들이 다스리고 실제로 이 말을 해서 유럽 전체에 한 권위를 가지고 모든 백성들을, 지역 구석 구석까지 전달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교황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이지 구라파 전체에 영향력을 결코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권세가 보통 권세가 아니지요. 그리고 옛날에 위세 찬란한 드골 대통령이 불란서 대통령으로 남미를 방문했을 때 그 남미의 추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그 손에다 키스한 것을 여러분들이 TV나 신문을 통해 보시고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항상 교회가 모든 것을 다스리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어디든지 가면은 모든 사회 조직을 교회화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권세 아래 다 두게 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 교회 지배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계적으로 사회를 구성했는데 종교개혁 때 와서 그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다 끊어버리고 모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국면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 동등하다, 다 평면적으로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책임을 갖고 선다 그렇게 고친 것입니다. 완전히 위계적으로 되어 있던 전 사회질서를 뜯어서 평면화한 것이 종교개혁의 큰 공헌입니다. 그래서 각 영역은 그것대로의 고유한 법칙과 성질을 갖고 있어서 다른 영역이 그 영역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 그 고유한 법칙과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그 영역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다 선다 그렇게 평면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이 그 영역대로 하나님 앞에서 주권을 갖는다. 그것을 1880년 아브라함 카위퍼가 1880년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였는데 자유대학을 암스텔담에 세웠습니다. 자유개혁대학을! 한국에서는 한동안 보수가 너무 심할 때는 자유라는 말이 붙었기 때문에 이 자유주의 신학교란 말로 생각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자유라는 말이 붙었으니까 Free Refommed University, 이제 라전어 이름으로는 ( ), 자유개혁대학이라. 자유라는 말은 그때 당시 정부가 너무 종교에 대해 간섭을 많이 하고 또 교권이 너무 간섭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정부와 교회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대학이 대학으로서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자유대학으로 붙였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그렇지 않습니까? 문교부가 총장을 승인을 안하면 안되고 문교부가 뭐든지 간섭하지 않습니까? 사립대학이라고 해서 정부가 외국처럼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뭐 이러쿵 저러쿵 온갖 제재를 다 하지요. 이사장은 문교부가 승인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지금 사당동 이사장 문교부가 승인을 안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8개월이 넘도록 이사장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간섭을 많이 하고 1870년, 이야기 하다 벗어가서 미안합니다. 화란 의회가 이 신학부의 법을 고쳐가지고 신학부가 아니라 종교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화란은 지금 신학대학부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정부가 임명을 하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교단이 파송을 합니다.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런 교수를 ( )라, 교회가 파송한 교회교수라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하니까 더이상 이것이 바른 신학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지요. 정부가 늘 통제를 하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1880년 자유대학을 세워서 신학부를 세웠습니다. 그래 지금 화란에서 자유대학만 이중교수제가 아니고 신학부가 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1880년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아브라함 카위퍼가 ( ), 즉 자기의 영역에서 주권이라 하는 말로 자유대학 설립의 개회사를 했습니다. 그래 그 말이 지금 영역주권이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그렇게 전해 오는데 지금 영역주권의 사상이 종교개혁이 가져온 큰 선물입니다. 그래 모든 영역들이 그 영역의 고유한 법칙에 의해서 유지되고 다스려지게 해야지 다른 영역이 다스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가져온 큰 공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다시 없어져서 중앙집중화 되어서 다 다시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위계화 되어가는 중앙집권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자, 종교개혁이 위계적인 이렇게 사회질서를 평면적으로 바꾸고 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심판을 받도록 그렇게 세워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라든지 교육이라든지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의해서 그것을 건설해야지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거지요. 실질적으로 로마교회 사회에서는 전부 다 신부들이 전체적으로 이러쿵 저러쿵 다 지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찰스 핫지라고 하는 19세기 유명한 조직신학자가 큰 조직신학책을 썼는데 찰스 핫지가, 핫지에도 개신교가 공통으로 주장하는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황이라, 위계화되면 아마 집중권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로마교하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20세기 들어와서는 오히려 로마교황이 세상 권세를 추구하던 데서 목회에만 전심하는 목회자가 되었으니까 이것도 다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돈의 위력이 크고 정말 그 영향력이 지대해도 지금도 모든 나라에서 국민들의 생활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분은 정치입니다. 정치권력이지요. 경제의 힘도 크지만 이 정치가 경제를 자기 영역으로 통합한 이후에 더욱 정치력이 세어졌고 그래 정치만큼 모든 사람이 피부에 구석 구석 와 닿는 것이 없단 말이예요. 자연과학이, 또 기초과학이 이렇게 발달해도 옛날에는 자연과학자들 수준에서 그것을 연구하고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과학의 프로젝트도 어떠한 연구단체라든지 개인들이 모아가지고 그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는 수준이 도저히 안됩니다. 모든 과학은 전부 다 국가산업이고 국가 정치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국가의 정치력이 국가가 개입해서 추진하기 전에는 이룰 수가 없는 상태에 와 있습니다. 또 이렇게 과학적인 기술의 추구, 축적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는 일이 쉴 새 없이 진행되고 멈춰지지 않지마는 그러나 이렇게 모든 프로젝트들이 어느 대학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은 완전히 넘어섰습니다.
얼마전에 토쿄대학이 인공위성 로케트를 발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슨 관서 학원대학인가 하는 대학 교수가 암스텔담에 왔을 때 제가 물어 보았어요. 동경대학이 얼마나 크면 로케트를 발사해 낼 수 있느냐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말로 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라. 자기도 같은 대학의 교수인데 그 대학의 교수가 하는 말이 동경대학도 쉽게 말해서 하나의 대학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거대한 괴물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정부하고 밀착이 안되면 대학의 모든 연구 프로젝트들이 진행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전부 다 대학의 일들을 정부가 주재하고 그리고 돈을 대고 그 연구하는 것까지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북구라파에 세른이라는 소위 그 세크린톤, 그러니까 그 입자 가속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할 수가 없어서 여러 나라들이 합동으로 해서 지은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래 연구도 그런 수준의 입자 가속기를 세우는데도 한 나라가 할 수 없어서 여러 나라들이 합동해서 세웠습니다.
자, 그리고 내가 구라파에 있을 때에 미국이 너무 비행기 시장을 석권하고 횡포를 부리니까 구라파에서 도저히 우리가 안되겠다, 우리도 비행기를 만들어내자, 그래서 에어포트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그럴 때에 이 에어포트 프로젝트를 독일이나 불란서와 같은 그와 같은 국력을 가진 나라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혼자 하지 않고 다 공동으로 하더라고요. 서독, 불란서, 이태리, 화란, 그 주요한 나라들이 전부 공동으로 출자를 해가지고 에어버스를 생산해 내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그 큰 연구소들에서 필요한 기구들을 설치하는데도 정부의 보조가 가지 않으면 안되고 정부와 합작으로 그 연구 프로젝트들이 다 진행되지요. 그러니까 모든 과학 기술이 정치에 예속되고 정치를 위해서 진행됩니다. 그래 권력을 잡은 자들이 갈수록 권력이 커지고 결코 포기하지 않지요. 과학이 독점적으로 진행되는 줄 알면 큰 오산입니다. 결코 현대 과학 문명에 있어서는 지식의 발달과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대학의 연구기관이나 미국의 사설 큰 연구기관들이 혼자 할 수 있는 때는 벌써 훨씬 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할 때도 미국 같은데는 주 정부들이 돈을 막대하게 투자를 해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정치권력 만큼 국민 각자에게 와 닿는 피부로 직접 느끼는 일이 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금은 보수, 혁신 이렇게 갈등해 가지고 이 뭐 혁신세력이 나라를 뒤엎을 것처럼 그렇게 해서 좌경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그러지만 그게 오래 못 갈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권이 유지를 할 것 같아도 결코 그렇게 못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얼마 안가서 우리나라도 복지 정책을 대거 도입해 들이지 않으면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중앙 집권적으로 권력들이 모여지고 국민들의 각자의 생활을 통제하게 됩니다. 돈이 오면 국민들의 생활을 전부 통제하게 됩니다. 동구에서, 소련에서, 북한에서 다 여성들도 직장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탁아소를 만들고 아침부터 여자들도 평등하게 일하고 군대 복무하고 하게 하면서 가정 교육의 지침을 전부 다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내게 하거든요. 복지국가 정책을 도입해 들이면 그렇게 됩니다.
자, 그렇게 볼 때 다시 로마교회 교황청이 이 권력을 한꺼번에 잡고 휘두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 대해 제가 회의를 가져보는 겁니다.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16세기 부터 20세기까지 400년 이상 500년 가까이 우리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항이라, 그렇게 이제까지 가르치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 교황이 이렇게 전세계가 통합될 때에 그 활약을 다시 잡아 쥘 수 있고 그렇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시고... 
이 666의 수의 해석인데 라전어로 로마 교황을 가리켜서 교황의 다른 명칭이 (빅가리우스 필리데이 ),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입니다. 그런데 이게 로마자로 수를 666을 만들어내요. 자 D가 500 아닙니까? C가 100이지요. 그러면 600 나왔습니다. L이 50이지요. 그러면 650까지 나왔는데 16이 어디서 나와야지요. 빅가리우스 필리데이에서 666을 끌어내요.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대리 통치자, 여기 지금 13장에 666이라는 수가 나옵니다. 네, 666을 많은 경우에다가 적용을 합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네로를 희랍어로 써 가지고 666을 적그리스도의 수로 맞췄습니다. 얼마 전에는 키신저를 적그리스도로 해가지고 키신저에다가 666이라는 수를 맞췄습니다. 키신저가 왜 적그리스도입니까? 그도 유태인인데, 유대인, 유대교의 대의를 아랍세계에다가 팔았다. 평화를 위해서!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하고 애굽하고 화해하고 국교를 맺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키신저가! 그래서 666을 키신저에다가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레네이우스라고 하는 2세기 중엽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소위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최초의 조직신학자란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수를 설명하면서 소위 느부갓네살의 신상도 666의 수와 맞는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살펴보니까 다니엘서 2장, 3장에 600은 안나오고 60하고 6은 나와요. 66, 3장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으로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60규빗이요, 광은 6규빗이라” 그래 가지고 느부갓네살의 신상도 666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666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그러나 누가 진짜 666의 수를 완전히 적용받을 수 있는지는 그 출현까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666을 사람에게 적용해 가지고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조심하도록 하는 얘기를 한 거지요.
자, 그러면 666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느냐? 지금은 그러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은행에서 발급되는 크레디트 카드에 6을 이렇게 세 개 모아가지고 찍고는 일련번호를 붙였습니다. 그래가지고 별별 소리가 많지요. 여기다가 수를 새겨서 은행에 들어가면 문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돈이 나오고... 여기 13장에 보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것은 생존권을 박탈함을 뜻합니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매매를 못하게 하면 옛날에야 자급자족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게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돈으로 매매를 해야 하는데 이 표 받지 않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생존권을 박탈하는 거지요. 어떤 경우에 자기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이게 하요? 그런 자들은 종이나 자유자거나 간에 매매를 못하게 했지요. 생존권 박탈하는 거지요. 이 적그리스도를 혹은 불법의 사람을 경배하지 않으면 생존권이 박탈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아요. 크레디트 카드가! 그래서 한동안은 컴퓨터가 적그리스도라고까지 했는데 컴퓨터가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예, 컴퓨터야 혼자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마이컴, 퍼스날 컴퓨터 같은 거야 혼자 하지만 그러나 항상 여러 사람들이 대형 컴퓨터는 일을 해야 되거든요. 집중적으로! 그렇게 해서 다량의 정보를 모으고 거기서 결정을 내리고, 그런데 이것을 666을 글자대로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이제 옵니다. 글자대로! 그런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너무 사랑해 가지고 우리가 이 요한계시록을 언제부터 강의하기 시작했느냐 하면 소위 길선주 목사님 때부터 소위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어두워 기울어지고 정말 백척간두에서 나라의 운명이 흔들거릴 때에 이 정말 위안을 주고 소망을 주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하면서 이 문자대로 푸는 연습을 거의 100년 가까이 우리 한국교회가 길들여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글자대로 풀어야 이것이 정통이고 달리 풀면 이게 자유주의나 이단으로 규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의존하는 요한계시혹 주석 책은 일본 사람들의 주석이라고 하는 흑기 주석, 한국 사람들이 지금은 좀 덜 하겠지만 옛날 목사님들이 다 일본 건너가 공부를 하셔서 구로자끼 주석을 많이 인용을 하시는데 이 일본 주석들을 보시고서 거기에 맞는 주석대로 하는 것은 정통이고 아닌 것은 자유주의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해석의 원리에 있어서 한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불명료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산문으로 기록된 명백한 문장에 의해서 운문, 시로 된 상징적인 언어들을 해석해야 옳습니다. 이 초대교회서 부터 성경을 해석해 오는 기본 원칙입니다. 분명한 언어로 기록된 부분에 상징적인 언어, 시적인 언어들이 비췸 받아서 해석되어야 된다.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물론 같은 맥락입니다마는 그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된다. 그런데 지금 요한계시록이 제일 구약의 계시록적인 묵시문학의 영향을 다니엘서, 에스겔서의 영향이 제일 많이 들어가 있는 성경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 때문에 성경을 썼기 때문에 이 적그리스도의 나라들, 그러니까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나라들을 지명할 때 짐승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해석을 했습니다. 여기도 용, 옛뱀, 그리고 곧 사탄이라고 해석을 해요. 이것은 용이라고 하면서 그 다음은 옛뱀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인류역사 초기 낙원에서 생긴 사건에 이 옛뱀이 개입된 것을 지적합니다. 이 옛뱀이라고 하면서 그 다음 다시 한번 풀어서 설명하기를 바로 사탄이라, 그러니까 그 처음 낙원에서 인류들을 타락했을 때의 그 사탄이 뱀을 이용해 가지고 인류를 꾀일 때에 그 뱀을 도구로 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일치시켰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심판하실 때에 사탄이라고 지목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뱀에게 내리는 심판과 저주로 사탄에게 심판과 저주를 같이 내리셨어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뱀의 정죄와 저주에 대해서는 꼭 사탄에게만 적용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리라. 그래 뱀이 발을 잘 물어요. 그리고 지금은 하도 뱀이 보신재로 좋게 되어 가지고 뱀을 잡아다가 보신재에 쓸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뱀만 보면 다 잡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뱀과 우리 사람사이에 적개심을 하나님이 심어 놓으셨어요. 사탄과도 적개심을 심으셨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도구 역할을 한 뱀에게도 적개심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어릴 때라도 뱀만 보면 반사적으로 돌을 쳐서 다 죽였지 그냥 내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나이 많으신 분들은 갖고 계실 겁니다. 지금 어디 뱀을 잘 구경해 볼 수 있습니까? 실뱀이라도 다 잡아다가 보신탕재, 개소주에다 다 넣고, 뱀탕에다 넣으니까 뱀이 참 좋은 존재이어서 우리나라 뱀 같고는 안되니까 외국에서 수입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뱀이 많으니까 아열대 지역에 뱀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로 발꿈치를 물거든요.
자, 그 뱀과 사탄과 일치시키면서 또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 그러면서 옛뱀, 낙원에서 일을 저질렀던 그 옛뱀, 그리고 사탄이라. 그리고 세 번 같은 저자가 풀어요. 그래 요한계시록이 가장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책입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도 다니엘이 짐승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들을 지목하지 않습니까? 지목을 해요. 그러니까 이 짐승이라고 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대적하는 적대 세력들을 지목하기 위해서 짐승을 썼습니다. 그래 여기도 지금 13장도 짐승을 썼어요. 제가 다 한 눈에 보이도록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가장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와 같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해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자,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적대 세력이기 때문에 그것을 짐승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666이라고 하는 수를 붙였습니다. 자, 성경을 해석하는데 요한계시록은 문자대로 해석을 하고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부분들을 영해해다가 이제까지 맞춰 왔습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이,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불명료한 부분이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고 부분이 전체에 의해서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 사람에 관해서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불법의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불법의 사람( )이라,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적그리스도가 곧 불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수들을 글자 그대로 받으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144,000을 우리 생각해 봅시다. 박태선파가 시온성에 들어오는 144,000만 구원에 이른다고 열심히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교회가 거기 박태선파에 144,000명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반박해서 이 144,000에 관한 한은 글자대로 봐야 하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144,000도 글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지요. 24장로도 마찬가지, 666도 마찬가지 입니다. 숫자들이 상징적인 숫자이고 또 대부분이 상징적인 언어들로 쓰인 책이 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44,000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런 144,000이 아니고 144,000은 구약 교회를 대변하는 12 수의 신약교회를 대표하는 숫자 12에다가 10의 완전수의 세곱인 1,000을 곱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구원 얻는 총수를 144,000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144,000을 유대인들 구원수로 한동안 또 바꿔서 주장을 했습니다만 유대인들로서 구원받을 자가 144,000 뿐일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껏 144,000! 그렇게 말하기가 나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면 144,000은 옛날부터 10이라는 숫자가 상당히 힘을 가진 수로 표시하는데 10의 3승, 구약교회, 신약교회의 구원받을 수의 총수를 144,000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66도 이렇게 크리디트 카드에 666 찍어 가지고 하니까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수가 아니고 이제 이것도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24장로도 마찬가지지요. 보좌에 보면 24장로가 있어요. 거기에 장로들이 앉아 있어요. 그들이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하나님의 어린양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24장로는 거기 앉고, 우리는 그러면 서 있어야 되는 거지요. 그런게 아니고, 그 24장로도 구약의 교회 대표의 12, 신약교회 대표의 12, 합해서 표현해서 24장로입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교회의 구원 얻는 총수의 대표가 24장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 666도 마찬가지 원칙에 의해서 그렇게 그냥 크레디트 카드에 666 찍어 놓았으니까 이게 적그리스도의 수다. 그러니까 더이상 우리가 지옥 가지 않을려면 은행하고의 거래를 하지 않아야 된다. 지금 세대론의 책들 가운데 그런게 많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기억소자와 ( )는 제가 잘 모르겠고 ( ), 하나님의 수에 관한 책을 제가 받았는데 키신저가 666으로 나와 있습니다. ( )는 솔직히 우리는 키신저가 적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다. 자, 사실 누구든지 알파벳 숫자를 조장을 한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도 666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 666이라는 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것은 참 설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666이라는 수를 그냥 그대로 딱 붙일 수 있을 것이라, 이름에다가 연결시켜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666이란 수는 데살로니가 후서 2:3절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오스카 쿨만은 “저느느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라 하느니라 지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호라동하였으나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이 부분을 오스카 쿨만이 해석해서 바로 적그리스도를 막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복음의 권세이기 때문에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고 있는 바울 자신이 적그리스도를 막고 있는 자라고 돌려서 지칭을 했다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오스카 쿨만이!
그런데 이 불법의 사람이라고 그러면 인류 역사가 그 종말에 도달해서 나타났을 때 악의 화신으로 나타날 사람이라. 악의 화신을 불법의 사람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그러면 666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제일 처음의 6은 6일에 창조된 전 창조를 지시한다. 그리고 60은 창조의 성취로 완성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600은 창조가 모든 과정에 다 도달해 완성에 이르렀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창조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역사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나타날 악의 화신을 666으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 악한 자가 초자연적으로 오기로 하지만 물론 뒤에 용이 서 있지요. 사탄이! 그러나 역사의 진행의 과정에서 나타나요. 처음에 낙원에서 나타난 악이 역사적인 과정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이 악에 불법이 마침내 역사가 거의 그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날 한 개인으로 집중될 악의 화신이다. 그것이 666이라.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한국의 장로교들이 신앙고백서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교회론 부분에 적그리스도는 교황이라 그렇게 햇다고 하는데 아까 내가 로마 교황을 현재 상황에서 적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느냐는 데 대해서 내가 의문을 제기한 데 대해서 반론을 제기했는데 이제 이 교리에 대한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교리는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동일하게 믿어지는 것 그것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수정이라든지 변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로마교회가!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을 모든 것의 최고의 표준으로, 궁극적인 척도로, 또 원리 원천으로 삼기 때문에 교리를 우리가 가장 필수적으로 여겨도 그러나 교리의 수정 가능성 인정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 이해에 더 깊이 나아가고 바로 나아가면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면 잘못된 성경이해에 기초된 교리들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교리가 전혀 변개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이와 같이 성경 이해가 깊어질수록 교리도 수정되고 바르게 교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제 2 니케아 공회가 787년에 소집되어서 주요한 교리들을 결정을 했는데 이때도 성상숭배를 교리로 채택했습니다. 마리아 상 같은 것 말이예요. 상을 숭배하도록 결정을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때도 로마의 황제들은 성상 숭배르르 반대를 했는데 교회의 주교들은 찬동을 했어요. 그래 황제를 바꾼 거지요. 그래 가지고 지상적인 것은 하늘의 것의 상이라, 그래서 상을 숭배해도 된다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787년 제 2 니케아 회의 때! 그래도 그 공의회가 그렇게 결정을 했어도 중요한 의제를 결정을 했기 때문에 787년 제 2 니케아 공의회까지를 우리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결정된 공의회 결의들은 전혀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우리가 결코 인정하지 ㅇ낳지요. 그것은 자유주의든지 보수주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 같애요. 개신교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배척하는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대해서 지금 지배적으로 많이 퍼져 있는 견해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금 로마, EC하고 ( ), 유럽공동체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 왜냐하면 유럽공동체가 열 나라가 아니고 열 두 나라지요. 터어키가 가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터어키, 터어키가 아시아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터어키가 EC에 가입하려고 해요. 왜 그렇습니까? 지리적으로 터어키가 소아시아 반도를 건너서 그 마게도니아 반도의 일부에 터어키 나라의 영토가 있습니다. 그것도 구라파란 말이예요. 강 전너서는 구라파니까, 바다 건너는! 그 영역 때문에 터어키도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려고 합니다. 12개 나라인데 지금 ( )가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가입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72년까지는 한 통상권이 된다. 그러면 강력한 강력한 블록화가 이루어져서 영내에는 완전히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지지만 그 EC 밖에는 완전히 강한 장벽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그렇게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큼 많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도 옛날 신성로마제국 시대처럼 EC가 그렇게 통합되어서 돌아갈 것이가? 아직은 속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상당히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보통 미국의 일년 초가 되면 주요한 경제 학자들이 모여서 금년도, 89년도 미국의 GNP가 총 몇 조원 몇천억원이 될 것이라, 달라가 될 것이라 계산해 냅니다. 모든 자료를 다 수집해 가지고 그래서 이와 같은 생산성으로 이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총 연말에 도달할 국민 생산을 달라로 환산했을 때 몇천억 몇조가 될 것이라 계산해 내는데 상당히 많이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30억, 50억 이 정도 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 통계낼 때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러나 딱 맞아 떨어지는 통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쓴 것을 내가 보니까 더 이상 예언하는 것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과학적인 자료에 의해서 예언하든지 이것이 도대체가 만지 않지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것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언하는 것을 그렇게 타당하지 못한 걸로 봅니다.
그러면 EC가 한 세대가 지났을 후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7년 가까이, 6년 3개월 제가 구라파에 있었는데 물론 화란이란 작은 나라에 있어서 파리나 본 같은데 살았으면 조금 더 시각이 달라졌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은 나라에 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정치권력까지 통합이 되어서, 물론 유럽의회가 있습니다. 유럽의회가 있어서 통상문제도 거기서 협의하고 그렇지요. 정치 권력까지 통합해서 하나의 정치권자가 유럽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확대되어서 스칸디나비아 저 위의 나라들까지 다 EC에 통합을 해가지고 다스리게 될 것인가에서 제가 현재로는 확정적으로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될 것인가? 이제 전통적으로 구라파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식 속에 자기들이 로마의 연속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로마를 연속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이 다시 나라를 세웠을 때도 로마 나라를 재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로마나라의 재판을 꿈꾸는 것... EC에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다.
몇달전에 한국 여자로서 하란인하고 결혼한 분이 있었어요. 그 남편이 화란에서 제일 좋은 공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고등학교 밖에 졸업을 안햇는데 펜팔을 해서 결혼을 해 잘 살아요. 그런데 한국엘 왔어요. 와 가지고 언니를 만나니까 소위 세대론에서 나온 책들을 열심히 읽는데 조용기 목사님 이야기를 들먹거리더라고요. 거기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지금 EC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러면 EC를 통합해서 다스릴 통치자가 벌써 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것은 곧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까 집 사고 아파트 사고 또 사업하고 애쓸게 없는 거지요. 곧 종말이 다 되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불안에 가득 차 가지고 이러고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형부가 그런다 이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오니까 그래 설명을 죽 다 해 주었어요. 가서 다시 설명을 해줘라. 그래 다시 설명을 해주고 또 설득을 하고 적어가고 해서 말해 주니까 이제 거기서 놓여 났어요.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은 엘림 복지원 같은 큰 ( )를 짓고 그것도 수백억 재산으로 평가될 일이 아닙니까? 또 신문사 내지 않았어요? 신문사! 그것도 완전히 개인 소유로 내지 않았습니까? 내일 모레 EC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다스릴 날이 곧 오는데 신문을 왜 내고 엘림 복지원을 왜 만들어 내냐고요. 물론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그런 좋은 뜻으로 했지요.설명을 다 듣고 나서 내 책도 일고 거기서 놓여났어요. 해방감을 갖고 이제 다시는 조국에는 안가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요.
두번째로, EC가 앞으로 미국의 경제가 쇠퇴하면, 지금도 많이 쇠퇴했지요. 쇠퇴했는데 이제 EC가 강대해지면 결국은 항상 분쟁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때 EC에서 통합을 하는 통치자가 거기 개입해서 중동문제 평화를 이루어 줄 것이라 그렇게 보지요.
그리고 이제 다른 견해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유대인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 왜냐하면 외부의 세력은 도저히 아랍세계와의 평화를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다.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 성경대로 하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거기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피 제사를 복귀해서 그때에 아랍전쟁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통치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적그리스도로 선언할 것이라.
글쎄요. 유대인 스스로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 참 기대되기 어렵지요. 그러면 점점 이렇게 세계가 통합되는 과정에 있어도 아직 현재로는 누구의 손에, 어느 국가의 손에 의해 세계 모든 권력이 통합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 )에서 했던 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라고 억지로 갖다 뜯어 맞추는 일은 삼가야 될 것입니다.
이마의 표 받는 것, 적그리스도의 수를 받으므로 은해의 거래가 점점 더 한국도 더하지요. 한국 사람들은 외국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 수표를 가지고 물건 사고, 슈퍼에 가서 물건 사고 그러는데 우리 한국은 전부 현금을 좋아하거든요. 그렇지만 큰 돈은 다 수표로 하지요. 점점 더 세계의 경제가 통합되면 은행 거래가 완전히 전 세계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배제될 수가 없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통합되는 과정으로 가면 세계의 금융의 흐름이 전체로 통합되는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은행의 거래를 못하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요.
자, EC에서 나온다.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물론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그런 어느 정도의 근거도 가능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지금도 세계 재정권의 거의를 쥐고 있기 때문에 참 배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미국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600만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아주 극소수지요. 소수 중에 소수인데도 미국에서 대통령이나 상원의원을 해먹고 그리고 하원에서 의원을 해먹기 위해서는 유대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빗나가는 말을 해가지고는 정치생명이 끝납니다. 살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까지 어느 대통령치고 이스라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런 사태의 진행 때문에 우리가 곧 유대인들 가운데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다. 글자대로 데살로니가후서 2:3절 이하를 해석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앉는다. 그래서 성전, 그런 것 보다는 적그리스도가 모든 정치권과 경제권, 종교권까지 통합을 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도록 강요하게 되고 그 경배를 로마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거부하는 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그와 같은 핍박이 심하게 진행되지요. 그때가 환난의 때입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어떤 일을 할 것이냐? 물론 전세계적으로 통치를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서 전세계적인 핍박을 감행할 것입니다. 전세계적인 핍박,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도록 하고 교히 형태를 가진 자들이 다 적그리스도에게 붙어서 그를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그래 메시야로 모시는 거지요. 전세계를 통치하게 되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이 적그리스도에게 경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쯤 있을 것이냐? 지금은 속도가 하도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먼 세월이 안 걸릴 것으로 보지만 나는 날짜를 계산하는 분들처럼 그렇게 곧 이루어질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된 인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발된, 창조의 계발, 열매들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기 때문에 종말이 갈수록 하나님의 창조된 ( )과 깊어져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결과들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 통합될 줄로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살로니가후서 2:3절 글자대로 보다는 하나님처럼 경배받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옳을 것이라.
그러면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종말이 문에 다다른 것은 확실하지요. 그러면 이제 조금 순서를 바꾸어서 정말로 역사가 종말에 도달할 수 있느냐? 과학적으로 과학에 의존해서 현재 나와있는 과학의 이론과 결과들에 의해서 사태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목사님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래요. 아무리 자연과학이 눈부신 결과를 내고 그 때문에 흔들림이 없는 것 같은 원리와 원칙이 제시되어도 자연과학은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은 곧 변합니다. 과학에 의해서 확정적인 단언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18,19세기 헐버트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철학을 건설할 때에 뉴톤의 물리학 중에서 물질의 질량의 법칙 중에서 자기 철학을 건설했습니다. 질량의 불변의 법칙 거기에! 이것이 가장 확실한 원리로 원칙으로 제시되니까 그렇게 믿고서 했는데 거기에 버틀란트 럿셀이 심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20세기에 유명한 철학자요 수학자인 럿셀이 과학은 확정적이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과학에 기초해서 했다. 지금 와서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지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지요. 미지의 세계에서 핵들이 결합되어 있던 것들을 깨면 거기에 그러니까 원자 속을 묶고 있던 결합들이 소실되어 버려가지고 찾아낼 길이 없다. 그래서 에너지 결손을 말해요. 결합에너지가 소실되어 버려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까지 전통적인 이해에 의하면 그 에너지가 형태만 바꿀 뿐이지 화학변화 전후에 에너지 총화는 같았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앟지요. 그러니까 과학에 의해서 신학, 우리의 믿음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전혀 맞지 않고 또 부당한 것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과학 중에서 우주론 중에 ( )이론이 있습니다. 혹은 핵폭발이론, 어느 시점에 우주 한 공간에 물질이 놓였다. 그 물질이 공간에 놓였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우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 퍼져나가면 소위 엔트로피 법칙, 그 가용 에너지의 감소법칙에 의해서 퍼져나가는 것이 어느 수준에 가서 멈춰질 것이다. 무한정 에너지가 공급되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멈추게 되면 그 때 세계가 서게 될 것이다. 그래 지금까지 나타난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는 열역학의 법칙, 1법칙과 2법칙, 1법칙은 에너지 보존법칙, 2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인데 갈수록 가용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이 진행되면 이것이 멈춰질 것이라.
그 예로 달이 지구가 있는데 달이 지구를 도는 그 궤적이 조금씩 늘어난다고 그래요. 그런에 이 궤적이 늘어나는 것이 1,2년을 두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몇십년을 두고 관찰해야 되는 것이니 최소한 30,50년을 두고 관찰해야 되니까 그것도 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하여튼 달도 지구를 중심하고 도는 궤적의 길이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 이렇게 무한정 늘어나고 나면 나중에 없어진다는 이론에 대해서 ( ), 진동설을 겸해가지고 확장해 가지고 다시 줄어든다. 그래서 원상을 다시 유지한다는 그런 이론이 있습니다만 흑백 이론을 가지고 종말을 많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런 식으로 우주가 종말이 된다면 아직도 수십억년, 수백억년 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속도로 자꾸 퍼져나가고 늘어가는 것이 된다면, 그리고 과학이 이것도 이론이지 확실한 법칙이 아니지요. 이론입니다. 어떤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설을 세워가지고 실험을 반복해서 그것이 많은 사례들에 의해서 입증이 될 때 그것을 이론으로 말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지 법칙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곧 뒤집히지요. 요새 플라스마 이론을 가지고 태양열과 같은 그것 보다 더 높은 상태에 나타나는 물질의 상태가 풀라스마라 그래 가지고 플라스마 이론으로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그와 같은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창조론에 많이 연결시키기 때문에 반동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는데 과학의 이론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에 의해서 우주가 역사가 진행된 다음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할 것이라 그렇게 결코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연과학자들이 정말 자신있는 소리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 앞에 개인들이 자연과학자들이 너무 왜소하고 초라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렇게 담대하고 자만에 빠진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들의 거리도 허블상수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정한 거리 이상을 넘어가면 그 별들의 거리에 대해서 확정적인 말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종말이 있을 것이라 그렇게 기대하고 거기에 대해서증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철학적으로 이 우주가 끝이 있느냐 이것을 증명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에 진술하기를 철학적으로는 이 우주의 시작을 증명도 부인도 못한다. 투마스 아퀴나스가! 철학적으로는 이 우주의 시작을, 창조가 시작되엇다고 하는 것을 증명도 부정도 못한다. 그래서 철학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입니다. 신학자로서는 달랐겠지만! 근세에 와서 칸트가 소위 전통적인 신존재 증명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무너뜨리면서 우주가 시작이 있느냐, 아니면 영원하느냐를 두 가지로 다 증명 가능하다. 시작이 없이 무한정 계속되었다 해도 가능하고 시작이 있어서 되었다는 것도 다 증명 가능하다. 결국 그 말은 철학적인 논리적인 사유로 이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결코 말할 수 없다.
다음은 이제 철학적으로 안되니까 인륜적으로 도덕적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 종말에 대한 생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 사례들을 많이 수집해 갖고 통계를 내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땐가 중공하고 대마도하고 싸우면서 거문도를 사이에 놓고 막 폭격을 가할 때에 내가 시골에 갔더니 거기 할아버지가, 동네 할아버지가 오셔서는 자, 이렇게 돼 가니 3차대전이 나서 세상이 끝나지 않겠느냐? 그래도 학교 다니니까 네가 더 알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나한테 물어봐요. 그런데 내가 무슨, 고등학교쯤 다닌다고 말할 수 있는 뭐가 있습니까? 그래 좀 싸우다 말겠지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한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분이 하는 말이 다 하늘의 정하심이 있는데 그러니까요, 내가 자란 동네가 서씨들의 단일 성받이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반대를 많이 갖고 있고 ( )는 아주 극소수예요. 그런데 이렇게 반기독교적인 정신이 가득한 분이 오셔가지고 전쟁이 나니까 온 세상이 뒤덮여가지고는 세상이 끝날 것으로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쟁이 나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다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요.
그렇게 볼 때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종말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식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언약 체결 때문에 그렇지요. 하나님이 처음 역사해서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책임을 다하게 하셨고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보고하게 하셨으니까 이 종말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 다 갖고 있는 것으로 봐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두 인류를 세워놓고 심판하실 때도 종말을 분명히예시하셨다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것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통치하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천지의 대주재가 되셔서 역사를 주재하시는데 그분이 자기의 구속을 다 완성하실 때에 세상을 완결시키실 것입니다. 그래 이것은 현재 진행된 체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진행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실 것이 있을 것이라. 그러니까 심판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그들 마음 깊이 다 인정하고 있지요. 제가 과학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종말에 가면 시간이 영원에 통합되지요. 통합되는데 폰 바이젝커라고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쓴 책에 보면 이 사람은 세계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데 거기 보면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이 처음 우주가 시작된 시간은 소실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우주의 끝부분에 가면 시간과 공간이 합친다. 그래서 이 우주의 중앙에서 시작된 시간의 시작이 우주의 끝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개핀하고 신약신학을 토론할 때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시간이 영원에 통합되는 구조를 창조에 넣어 놓으셨다. 그러니까 시간의 끝에 가서 만난다. 그것을 역으로 뒤집으면 바로 우주의 시간에 영원이 통합되는 것으로 넣어 놓은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자, 지나가는 에피소드고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주재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다 만드시며 그리고 자기의 창조가 계발되어 그의 영광이 충분하게 드러날 때에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종결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도입하시므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는 그때를 이루실 줄로 우리가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철학이나 과학을 끌어오는 것은 좋으나 철학과 과학에 의해서 그것을 기초해서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과학은 오래갈 것 같고 확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곧 없어질 것도 있기 때문에 또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렇게 열등의식을 갖고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 같애요. 과학이 눈부신 기술과학으로는 일을 했어도 그게 다 가설의 영역이 대부분이니까요.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순서를 이제 바꾸어서 조금 시작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중간기 상태에 대해서 재림으로 바로 가지 않고 중간기 상태로 조금 살피려고 합니다. 중간기 상태라고 하는 것은, 중간 상태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죽음부터 주님 재림까지의 개인의 영혼 상태를 중간 상태라 그럽니다. 역사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 죽은 자들이 어떤 형편에 속하느냐, 그걸 따지는 것이 중간 상태라고 말합니다.
보통 중간 상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많이 있고 또 그 처소에 대해서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중간기 상태에서 새로운 기회들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도 드는 것에 대해서도 로마교회 외에도 개신교회에 아주 이 생각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말 마지막 재림을 하기 전에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통 죽음은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자, 죽음은 첫째로 하나님에게서의 분리이고,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영과 육체의 분리일 뿐만 아니라 또 죽음은 우리가 사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 우주에서의 분리를 포함합니다. 단지 우리가 영육이 분리되는 것만 알면 문제가 많습니다. 영육이 분리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그 죽음이지만 죽음은 창조와의 분리라는 말을 분명히 기억을 해야 이게 문제를 푸는데 크게 도음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죽음이 진화론자들의 말이나 혹은 펠라기우스나 다른 파들처럼과 달리 죽음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 또 현대신학도 죽음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원래 죽게 되어 있고 이렇게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게 임시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인류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현재와 같은 죄 상태 아래 놓임으로 이와 같다 하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지요.
과학이 더구나 이런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로 세뇌받은 현대인들, 또 그 환경에서 신학하는 사람들이 이 죽음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인한 저주로, 정죄로 형벌이라고 하는 생각이 현대인들에게 없습니다. 본래 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출생해 가지고 죽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런 존재, 죽지 않을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를 한번도 우리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가 이렇게 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죽음의 씨를 처음부터 갖고 있는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임시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중보자를 세우셔서 그 창조 중보자라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닙니다. 현대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 중보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본래부터 임시적이고 파편적이고 불완전하게 지으셨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원형을 그 후에 지어 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원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성하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 사람처럼 짓도록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셨어요. 바르트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바르트의 제자들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로마교회도 그렇게 논의를 전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을 완성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될 게 아니냐, 표준을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습니다. 그래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란 역사적 인물을 하나님의 눈에다 보고 아담을 지으신 겁니다. 그래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혹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는 B.C 4004년에 천지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4000년 후에 지어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땅을 지을 때 눈에다 넣고 지으셨어요. 지금 아담은 임시적으로 파편적으로 지으셔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인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으로 고쳐 지으시기로 하셨어요. 그 바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쳐 짓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닮아가야 할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라, 그 면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가 창조 중보자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중보자가 아니고요! 그래도 창조 중보자라고 그럽니다.
자, 그러니까 인간 본성의 죽음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이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죄는, 죄에 대한, 죄과에 대한 형벌로 도입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분리이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영육의 분리인 동시에 그것은 창조, 우주에서의 분리라. 이것을 분명히 세번째를 분명히 안하면 조금 문제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귀신론 같은 것도 지금 많이 유행해 다니는 귀신론, 예, 일단 죽으면 창조세계에서 분리되기 때문에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의 잘못이 120년 살아야 되는데 60년 살면 60년 떠돌아 다니다가 간다 그러는데 그런게 아니고 죽으면 죽는 순간 이 창조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서 갑니다. 죽음이 이렇게 형벌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사는 곳이 산 자의 세계예요. 그리고 주 안에서 죽은 자들도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수적인 요소로 귀결되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상태는 부족한 상태입니다. 완전한 인격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품에 가 있는 자들도 죽은 자의 세계에 속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일단 죽으면 영육이 분리될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와 분리되기 때문에 그 영혼들이 아직도 세계와 미래를 갖고 왔다 갔다 하는 게 하니예요. 떠돌아 다니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 내가 며칠 전에 어느 은사를 만났는데 자기가 근무하는 실습하는 병원에 어느 박사가 귀신이 들렸는데 자기 오빠의 영이 들어 있다.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린 흔적을 갖는다는 얘기를 나한테 해요. 그래서 알아듣게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그 오빠의 영이 그냥 들어온게 아니고, 물어보니까 오빠가 결혼하지 않고 죽었다더냐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요. 그 귀신이 그 영을 받아서 처녀에게 들어간 거지요. 그런 것이지 그 오빠의 영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영육의 분리이고 창조하는 분리가 아니어서 이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 죽으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로 딱 갈라지는 것이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로 넘나드는 것도, 죽어 가지고 그 영이 이 세계에 방황하고 배회하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죽으면 중간기 처소로 성경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지 별도의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지 않다. 거기까지만 말씀하겠습니다.
질문>저기 보면 불신자에 대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높은 사람들을 위하여 불신자 왕의 사역에 대해 간여하시는가? 
응답>예, 하나님께서 인류를 통치하시는데 이렇게 시민정부를 세워 가지고 인류를 다스리게 하시고 그들이 불신자이건 신자이건 간에 그 팔의 권세를 맡기심으로 악이 제재되고 질서와 선이 이루어지므로 인류의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인류 종족이 보존되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받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국가 생활을 통해서 국가 질서가 세워짐으로 창조를 계발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부는 하나님께서 인륜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의 방식이예요. 그러니까 타락 후에는 하나님께서 시민정부를 세워서 다스림이 악을 억제하는 방편이고 그리고 인류 세계가 존속되게 하는 법이예요. 그러니까 불신자이어도 악을 제재하고 선을 포상해서 선을 장려해서 시민생활이 가능하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그리고 바빙크가 ( ), 그것은 고등 종교들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고등한 종교도 그런 종교는 다 우상종교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 종교가 아니지요. 그런데 거기에 역사하셔서 기도굑 수준으로 오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마침내 모든 종교가 발달하면 기독교 수준에 도달한다.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맞지 않다. 
다음에 카위퍼가 일반은총에 대해 ( ).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에 그때 대기권과 생태계가 많이 변했습니다. 보통 그 전에 노아 홍수 전에 비가 쏟아졌지만 땅에서 솟아 올랐지요. 보통 창조론 과학자들이 그때는 수증대가 있었을 것이라, 그래 수증대가 설치되었으므로 이렇게 보온 효과가 큰 물이 열을 받아 가지고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는 모자랄 때 발산하므로 밤이나 낮이나 기온 차가 없게 해서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와 같은 온실 효과를 갖도록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홍수 전에는 온 지구가 고루 따뜻해서 모든데서 생물이 번창했다 볼 수 있지요. 그렇게 번창하도록 했기 때문에 북극과 남극에 석유와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그렇게 추워갖고야 거기에 별로 많은 나무들, 식물들이 자랄 수 없지요. 그때는 수증대에 대해서 온 지구가 온실 효과를 가지므로 따뜻했기 때문에 북극과 남극에 다 거의 나무가 잘자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로 그 수증대를 헐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기상의 변화가 아주 대대적으로 커졌지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연의 질서를 고정시키고 그리고 일반 은총의 역사로 악이 계속해서 죄악에 흥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민 생활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양심이라든지 여론이라든지 시민선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의해서 악을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게 했지,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결코 끌어가는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와서 선포될 수 있는 기관은 마련되고 유지되어 왔지, 그 일반은총의 역사가 바로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결코 마련하지 못합니다. 둘째 시간에 설명했듯이 타락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지 그렇게 일반은총의 역사 수준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마태복음 24:29절에 하늘의 별들도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하는데 그때 여기 이제 박윤선 박사는 대기권의 변화를 말한다고 하는데 지금 창세기하고 요한계시록을 같이 읽으면 이 별들이 언제까지만 빛을 내고 빛을 발하느냐 하면 현 역사가 진행되는 데까지만 그럽니다. 그때는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의 빛을 비추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므로 태양과 별들이 더 이상 빛을 낼 필요가 없어여. 그런 의미로 이 별들의 세계가 그 봉사의 기간이고 역사적 기간이라 잠정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별들과 태양의 영광들은 하늘 나라에서 종말 때 전개될 그 찬란한 그 영광의 빛을 예표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 오실 때에 이 현 질서 체계를 바꾸시기 때문에 이 처체계가 흔들릴 것으로 봐야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6 강 
안녕하십니까?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6장입니다. 제가 19절을 읽은 후에 한 절씩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31절 까지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이 시간에는 중간 상태를 오늘로 마치기를 바라고, 제일 종말론의 중심기론이 천년기론인데 다음 시간부터 천년기론을 여러분과 같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죽음은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이고 영과 육체의 분리이며 또 인간의 거주환경인 우주로부터의 분리이다 거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 그런데 과학에서는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과학이 다 부인합니다. 과학은 감각적인 기관에 의해서 대상들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이 감각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육체로 끝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으로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의학에서 영혼이 없는 전통이 그대로 받아져서 지금 육체안에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길버트 라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 육체하고 구분되는 독립된 별도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기계 안에 유령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마치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데 그 안에 옛날처럼 유령이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말 과학적으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모든 걸 탐구하는가? 그래서 표상이라는 말이 철학에는 참 깊이 쓰여지고 있어도 우리 한국 말에는 조금 생소한 말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냥 칸트에 의하면 물리학 시간의 (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기관이 상을 만든다. 사물의 이치를 바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의식 기관이 이와 같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상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상이 이루어지는 것만 감각기관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만 과학의 대상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래서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영혼은, 그것을 만일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두뇌의 기능, 작용일 뿐이지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고 그것이 공통적으로 맞는 것으로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에 그 어느 마취하는 한국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사람을 마취를 했더니 영혼이라는 별도의 존재가 있으면 비록 육체가 마취되었다 하더라도 그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마취 상태는 완전히 송장이었다. 그러니 그게 진짜 영혼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이의를 토론 석상에서 제기해요. 평신도니까! 자, 그래서 전통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우리의 두뇌작용 외에 별도의 독립기관으로서 영혼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도 다 항상 선입주견, 전제가 더 중요한 것이어서 같은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또 자기대로 증명했다고 하는 삭람이 있습니다. 와일드 팬 필드라고 하는 미국 태생의 카나다 두뇌 과학자입니다. 이 교수는 본래 의학을 한 사람이 아니예요. 1921년 프린스톤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일류대학 몇 개 중에서 미국은 모든 과가 일류대학이면 다 좋은게 아니고 대학별 과별로 좋은 대학이 있어요. 철학으로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듯 프린스톤을 제일 좋은 학교로 봅니다. 1921년 프린스톤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 사람이 철학을 공부하고서는 두뇌의학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당시의 영국의 세계적인 두뇌학자인 쉐링턴 경에게 가서, 그때 당시 쉐링턴 겅이 또 세계적인 대가였는데, 세계적인 권위였는데 이 두뇌과학에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서 두뇌의학을 공부해 가지고 소위 팬 필드가 또 세계적인 권위가 되었습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소련의 국보라고 하는 수학자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을 때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와일드 팬 필드 교수를 초청했습니다. 소련 당국이! 그럴만큼 탁월한 두뇌 의학자 입니다. 가서 두뇌가 완전히 깨어졌는데 검사를 해보니까 의식이 있고, 그래서 수술하지 않도록 하면서 고치도록 그렇게까지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두뇌의학을 해가지고 수없는 간질 환자들을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교통 사고 만난 사람들을 두뇌를 수술해서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두뇌에 대해서만은 정말 구석구석 연구를 잘 했어요.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영혼은 두뇌하고 개별적인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또 그럴 뿐만 아니라 이 영혼은 출생하고 나아가서 창조된다고 해야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두뇌 전체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가령 어떤 기관에 어떤 기억을 장치하고 있는 기관에 전기를 걸어가지고 압력을 세게 가했을 때는 그 말을 보여 주면서도, 그 환자에게는 말해도 못하니까 그 근처에 비슷한 단어를 말하게 하고 모든 결론들을 다 집약해 가지고 그 사람이 영혼은 독립된 존재로 존재하고 그리고 사후에도,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육체를 떠난, 육체와 분리된 상태의 영혼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운 일은 하지 아니하나 기억은 그대로 갖고 있다. 
마치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비유를 했느냐 하면, 영혼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비유하고, 그리고 두뇌는 컴퓨터에 비유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식 수준이 학습의 도가 높아갈수록 낮은 수준의 지식 활동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영혼이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이루어지고 그 수준이 넘어서는 영혼이 되어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1975년, 그 사람이 죽었는데 1976년 그후에 책이 나왔어요. 그 책 ( )란 책으로, 그 책을 죽기 얼마전에 미국의 철학회에 우리나라에도 철학회가 있습니다. 작은 철학회들이 있는 것을 아는데, 미국 전체 철학회에 가서 그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마음의 신비”라 하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1975년에 죽었는데 1976년에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작성해 가지고 멐퓨터에 입력해 놓으면 프로그래머가 없어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뇌의 상당한 수준까지에 학습으로 그 과정을 마치면 그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영혼도 더 고차원적으로 일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퍼스날 컴퓨터 프로그램이 발달해서 프로그래머가 계속해서 키펀치를 쳐줘야 일이 되지만 큰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별로 큰 회사가 아닌데도 이 방보다도 큰 데이타가 아주 큰 컴퓨터가 여러 대 장치되어 있는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세워가지고 키펀치들이 와서 키펀치를 해놓고 가면 이게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해내거든요. 누가 없어도, 자동적으로! 
마찬가지로 영혼이 두뇌와 별도로 활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뿐만 아니라 영혼은 출생하고 그리고 창조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영혼은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사후에도 존재하고 또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한 에너지의 공급이 없이 때문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시에 가졌던 모든 것이 다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을 완전히 신진대사를 한번 하는데 7년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러면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들이 7년이면 완전히 바뀌는데도 그 물질 자체에만 기억이 들어있다면 이게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도 어찌해서 기억은 계속 존재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부록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자연과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서 이렇게 자기 학설을 뒷받침하고 그리고 정립을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가도록 하는데 자기가 어려서 부모님들에게로 부터 받은 신앙교육, 주일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이 말씀의 교육이 자기로 하여금 이 결론에 이르도록 역사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집에서의 신앙교육,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놓으면 커서 자연과학을 아무리 연구하고 세상 학문이 어떻다 하더라도 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의 나라를위해서 큰 일을 한 사람이지요. 그가 두뇌의학에 큰 공헌을 했는데 이 사람 소설도 썼어요. 소설도 쓰고, 두뇌 수준이 높으니까 의학자라고 소설 못 쓸 것 뭐 있습니까? 철학을 하던 사람이 의학 못 한다는 법도 없는 거지요. 
자, 과학적으로 두뇌와 독립된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후에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억을 갖고 있다. 나아가서 이 영혼은 출생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뇌가 얼마나 긴요한 것이냐! 통계가 나옵니다. 지금 현재 알려진 우주의 원자가 몇 개냐.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몇개냐 하면, 이것이 추정치이지만 1에다가 0을 66개 한 것 만큼! 그런데 두뇌 속에 있는 뉴우런들의 결합은 몇개냐? 두뇌 안에 있는 뉴우런을 형성하는 그 결합들이 몇 개냐? 7에다가 0을 2백 7십 8만 3천개 붙인 것 만큼 있다. 이런 굉장한 두뇌를 실은 우리가 많이 못 쓰고 있다. 얼마냐 쓰고 있냐? 윌리암 제임스라고 하는 하버드의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소위 근세 실험심리학의 창설가, 그러니까 심리학을 과학적인 기초 위에 확립해서 건설한 사람이라고 할 윌리암 제임스가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의 두뇌를 많이 써도 10%-20% 밖에 못 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데 기이한 것은 유물론을 강력히 가르치는 공산주의 세계의 대학들이( ), 이상심리, 정상심리가 아니라 투시나 원시, 예언할 수 있는 능력, 예언과 같은 영혼의 능력이 물체에 영향주는 것과 관계를 다룬 이런 이상심리를 공산주의 세계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1930년에 이 이상심리가 학문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때에 듀크 대학에, 소위 닉슨이 나온 법과 대학에 심리학과에 라인 박사가 이상심리를 연구하고 확립하고 결론 내리기를 인간은 피와 살 덩어리의 결합만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피와 상덜어리 만으로 아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그 대학들에서 이것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다. 과학으로 그런 인간이 피와 살 만이 아니고 그 이상 넘어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다 알고 있는 거지요. 
자, 그러면 아무리 과학이 뭐라 하더라도 다른 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으면 그 영혼이 존재해서 저 세상으로 간다. 자, 그런데 철학적으로도 그 영혼에 대해서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해서 확실한 말은 못해요. 이제 칸트가 18세기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세 개의 비판을 썼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가 쓴 것은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지성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는 이 감각기관으로 표상할 수 있는 세계 뿐이고 내세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초월의 세계 이런 것에 3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 마지막에 가서 나는 신앙을 위해서 지식이 자리를 양보하도록 한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늙어서 한 말이고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저 영원의 세계 미래의 세계 이런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찌 알 것이냐? 하나님은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학문을 구성하는데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요청해요. 하나님이 꼭 있어서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를 구성하는데 통일의 원리로서 한계개념으로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하나님은 그런 한계개념으로 요청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계라고 하는 말, 세계는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보지 못한 통일의 원리예요. 세계가 무엇이냐? 세계를 몇 바퀴 여행하면 우리 한국 분들 요새 여행 자주 다니시는데 그 어디서 돈이 많아서 자주 다니시는지, 나는 외국에 한 10년 있다 돌아와서 갈 일도 없지만 돈도 없어서 한번도 못 나갔습니다. 한 몇 번쯤 여행하면 세계를 알 수 있습니까? 한 열 두 번쯤 돌면 압니까?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물론 이런 우주적인 세계도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냥 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갖는, 지구상의 인류가 갖는 모든 지식을 포함해서 경험이 곧 지식이지요? 모든 경험들을 총화를 이룰 때 그걸 세계라고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내용을 전달하는 진술을 할 수가 없지요. 과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서 확정적인 그런 진술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단지 우리의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일의 원리로 그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세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세계가 어떻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자유대학에서 철학부에 있으면서 철학을 열심히 박사과정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한번 토론을 했습니다. 그래 세계 철학이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랬더니 ( ) 실제의 총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렇게 답을 해요. 그래서 내가 묻기를 도대체 ( ) 이 뭐냐? 그 사람 미국에서 온 학생인데,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서, 물론 자유대학 박사과정 하기 전에 자유대학 과정을 하고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철학이 무엇이냐? ( )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내가 단번에 묻기를 도대체 ( )가 뭐냐? 실제의 총화가 무엇을 말하느냐? 도대체 네가 무슨 내용을 그것으로 말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단지 어휘, 단어의 장난일 뿐이지,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말해 봐라. 네가 그것으로 무슨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날 보고 하는 말이 너는 너무 칸트적으로 말을 한다. 그래요. 
자, 마찬가지로 (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계란 말로, 그렇지만 우리가 ( )라고 할 때 무슨 구체적인 진술을 할 수 있느냐? 저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게 없지요. 단지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합의 원리로서 세계를 한계개념으로 체계 구성에 도입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모든 세계에, 우리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있는 통일의 원리, 결국 어디서 왔느냐? 신에게서 온 거지요. 그 이 좋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런 의미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 모든 우리가 갖는 경험을 통일해 주는 통일의 원리로서 필요합니다. 이것은 체계를 구성해 주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철학을 하시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게 너무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나 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세계나 신에 대해서 이런 총체적인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 이런 존재에 대해서 도대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어요. 칸트의 철학으로는! 그러면 칸트가 그걸로 끝내느냐? 그게 아녜요. 실천이성비판에 오면, 실천이성이란 말은 윤리적인 이성 도덕적인 이성을 말해요. 혹은 윤리 공동체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데 그 바른 삶의 법칙을 제시해 내는 일을 하는게 실천이성비판이라. 우리의 윤리적인 행동,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이 윤리적인 행동하는데 그걸 하는 데 있어서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는 내세와 하나님과 자유의 개념을 도입해 들입니다. 어떻게 도입해 들이느냐? 인간이 우리가 덕을 닦고 살아야 하는데, 인간의 본질이 윤리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바르게 사는가? 그걸 칸트는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 그것이 윤리적이라. 우리 윤리가 무엇이냐? 도덕적인 것이 무엇이냐?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들 그것이 윤리다 도덕이다 그렇게 말해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지요. 관용해야지요. 그리고 이해해야지요.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잘 됩니까? 이해한다는 것이 잘 됩니까? 여러분도 아시는 총신 교수 중에 부인이 의사인데 미 8군에서 정신 담당 의사로 일을 해요. 그래 한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미국인들이 너무 외롭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여자들 하고 결혼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죽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상담을 하는데, 나느느 한번도 내 아내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밥을 내 구미에 맞도록 한번도 식사를 해 준 적이 없습니다. 이거 보통 기가 막힌 일이 아닌 것 같애요. 그래 어떻게 하느냐? 싸우다 못해서 서로 완전히 냉전 상태에서 자기는 빵에다가 버터 같은 걸 발라서 치즈 끼우고 이렇게 채소 썰어 넣어서 자기가 해서 들고 서서 먹고, 아내는 김치하고 된장찌게 해 갖고 밥하고 먹고 앉았단 말이예요. 그러니 이게 참, 한번도 이해 차가 나는 걸 설득하고 논의하는 걸 하려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한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삽니까? 결혼했는데, 물론 이혼하고 털털 털고 가버릴 수 있지요. 그러나 결혼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터인데 마음대로 이혼 못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냥, 그 국제결혼의 장벽이 얼마나 쎈지, 오죽 하면 미국에 가서 사는 한국 동포가, 우리 교포가 나중에는 천대와 박대가 너무 심하니까 자살해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한국 여자들이 속으로 고민하고 자기부족을 탓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쪽을 네가 틀렸다고 증명해 주고 그렇게 잘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압박받고 천대를 받을 때마다 그걸 가서 토로하고 어디가서 호소하지 못하고 혼자 당하고 고민하고 괴로와하다가 그 사이클이 계속 돌면 나중에는 미치고 이혼하고 죽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이해해 주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환자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고독하다 고독하다 하면 누굴 부른다고 합니까? 한국은 아직 그러지 않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아직 떼지어서 어울려서 사는 사회입니다. 고독하다 고독하다 견디다 못해 의사를 부른다고 합니다. 의사는 자기 말을 들어 주니까! 그런데 조그만 차이에서 오는 이해의 갭을 메꾸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서로 이해하는 것, 이번 동의대 사건도 대통령이, 죽자마자 뭐 순국했다, 무슨 순국입니까? 자기들이 죽여놓고! 설득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데 왜 강경진압만 하냐고요. 내가 5월 초에 갑자기 KBS에서 오라고 그래서 폭력에 대해서라니까 다 피하니까 날보고 오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가서 이야기 했어요. 데모하게 해라. 강경진압, 원천 봉쇄해 가지고 한번 데모라도 일어나면 정치생명이 내일이라도 끝나는 줄 아는데 누가 그렇게 정권 물러나라고 하느냐?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나 국민들이 그러길 원하느냐? 데모하게 하라. 의사발표를 해야 될 것 아니냐? 의견 발표하면 순환여부는 해당 ( ), 그건 빼버렸어요. 나중에 편집할 때 보니까, 데모하게 하면 스트레스 효과도 있다, 하게 해라. 그리고 공공질서가 어긋날 때는 그 최루탄이나 총포 쏘지 말고 소독처럼 고무 호스로 물 뿌리면 안되느냐? 그렇게 하고, 정부가 너무 가진 자 편에 서서만 그러는데 중재해라, 중재! 정부하고 노동자들, 그래서 그들의 생존권, 농촌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면에 대해서 해야 된다. 그러면서 광주사태도 이야기하고 다 했습니다. 할 이야기를 저는! 
그런데 그렇게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설득 안했다. 대화를 안했어요. 너무 급해 가지고, 막 때려 부수고! 감히 어떻게 나를! 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그 젊은 사람들 6명이나 죽였는데 사실 그렇게 우리 한국은 경직된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 너무 힘들지요. 그런데 그것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 참 어렵거든요. 그래 우리 한국 사람들 외국에 가서 보면, 내가 한번 KAL 비행사에 갔어요. 암스텔담 지점에 갔는데, 본사에서 나와서 그 화란 사람들 직원을 조사하는데 말이예요. 그 심문조로 하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기분이 나빠가지고 화가 나가지고는 곧 싸울듯이 내가 뭐 이 회사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 난 나가도 좋다는 식으로 하고 버티고 그러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어학, 말이 짧으니까 외교적인 술어를 못쓰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마음 안상하고 물을 말 다 묻고 다 부탁할 것 다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나가서는 자기는 잘했다고, 본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화란 사람들을 우리가 고용한 회사니까 그런지 몰라도 완전히 한국 회사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게 하고, 그래 내가 물어 봤어요. 그 지점장 보고, 한국 항공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일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이 짧으니까 외국 나가서 상담을 해도 이런 외교적인 언어들을 전혀 못하거든요. 말이 짧으니까! 우리 말로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통역을 시켜 놓고! 이해를 해야 이게 사회생활이 되고 좋은데 이해할 길이 없는 거지요.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수까지 잘 사랑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셨으니 원수를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외치기도 좋고 듣기도 좋습니까? 허나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느분이 목사님보고 7계를 범했다고 하고 그냥 소문을 내서 왈칵 뒤집어졌는데 그래 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물으니까 사랑을 어떻게 해요? 죽어도 못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사랑하다니요? 그게 원수 아닙니까? 세상적인 원수야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지만 법적으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고 내어 쫓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가려면 성자의 경지에 가야지요. 바쁘게 살다보면 언제 그 경지에까지 갑니까? 짧은 이 세상에서 돈벌고 가정생활하고 바쁘게, 아무리 열심히 그리스도인이 덕을 쌓아가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함양해 간다 하더라도 이거 어려운 거지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칸트가 80을 살았는데도 그 바른 도덕을, 덕을 함양하는 데는 이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니까 내세가 있어야 되겠다. 내세가! 그리고 이 세상 살면서 온갖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잘산다. 그렇지요? 지금 뭐 5공 비리를 행한 사람들 그냥 뭐 백담사에 가 앉아 있어도 철옹성 속에 가 앉아 있지 않습니까? 누가 총을 들고 가 쏘겠어요? 칼을 들고 가 찌르겠어요? 정호용이 물러나야 한다고 그래도 내가 왜 물러나? 내가 37명이나 되는 TK사단의 장인데... 그렇지요? 내가 대통령을 해먹을 그 다음 바통을 이을 사람인데, 내가 왜 물러나? 그러고 끄덕도 안하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뭐 존 많이 먹은 사람들 얼마나 잘 삽니까? 
그리고 우리같이 이렇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조금만 교인들이 돈을 가져와도 황공스럽고, 혹 돈을 조금 받아도 이게 부끄럽고 창피스럽고, 이렇게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가난하게 살고, 그러나 통 큰 사람들, 그렇게 전두환 씨 같은 사람들 쥐고도 잡고 7,8년, 9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고, 그래 죽어가지고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다면, 내세가 없어서,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간에 아무 차별도 없이 내세에 가서 똑같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예요? 그러면 누가 일률적으로 살려고 하겠어요? 바르게 살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이 선악의 진보의 도에 따라 상급과 형벌을 주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요청이예요. 요청! 
하나님이 계셔서가 아니고 우리의 윤리생활을 바로 하려면 내세도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 또 그것 뿐이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한다면 그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하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 의지 있는 것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바른 윤리 생활을 하려면 자유가 요청됩니다. 증명되지 않지만 요청됩니다. 자유를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까지 자유에 대해 많이 노래하고 찬양하고 자유를 위해서 투쟁해도 자유를 증명할 수 있어요?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증명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요청됩니다.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말해야 윤리가 성립하지, 자유가 없이 어떻게 윤리가 성립하겠어요? 
결국 자유와 내세와 영원의 불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됩니다. 이건 지식적으로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요청됩니다. 그런 식으로 칸트는 하나님과 내세를 요청해요. 이건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윤리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상황이예요. 철학적으로도 내세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까 과학으로도 참 과학도 증명을 하지만 대부분의 거짓 과학은 부정하지요. 거짓 과학들, 그러니까 우리가 과학을, 이중에 자연과학을 가지고 신학을 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과학을 모르는 우리들, 과학에 대해서 조금 컴플렉스가 있지요. 잘 모르니까! 그래도 과학에 대해서 그렇게 컴플렉스 가질게 없습니다. 과학처럼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이 없어요.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계시지요.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한다. 그리고 죽으면 신자는 하나님 품으로 가고 불신자는 여기 음부라고 되어 있는데 지옥으로 간다. 
자, 죽으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 주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신 그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냐? 그렇게 증명을 하고 말하라 그러면 어렵지요. 그러나 그 세계는 시간이 지배되고 있는 이 세계는 아니다. 그럼 은하계 밖이냐? 은하계 밖이면 그럼 시간이 없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시간이라는 것이 명암으로,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니까 영혼은 육체를 벗으면 그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요. 그래 영원의 세계로 가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러면 죽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을 하기 전에, 그러면 낙원하고 음부는 무엇이냐? 자, 지금 신지들이 죽으면 낙원에 가고 주님 오셨을 때는 천당에 가는 걸로 알고 있고, 불신자는 음부에 가고, 주님 재리하신 심판 후에는 지옥으로 가는 걸로 알아서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는 걸로 대부분 믿고 있어요. 그런데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별도의 처소로 낙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강도르르 향해서! 그것은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낙원이 천당과 별도의 곳에 있기 때문에가 아니고 여기보면, 누가복음 23장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 그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천국과 별도의 지점으로 불신자들이, 악한 자들이 가는 마지막 종착역 전에 음부에 상하는 지점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면 주님이 낙원이라고 했느냐? 첫 낙원이 타락으로 인해서 폐쇄되고 그리고 노아 홍수 때,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해요. 언제 이것이 완전히 소실되었느냐? 노아 홍수로 하나님이 완전히 흔적을 없애 버리셨다.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하는데, 현대 신학자들은 낙원이라는 것을 별도의 그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지요. 칼 발트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하는 장소를 뜻할 뿐이지 어느 지구상의, 지도상의 여기를 딱 찍어서 낙원이라고 지시할 곳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합니다. 칼 브르트가! 지구를 딱 펴놓고 바로 여기라고 할 곳이 지구상에 없다. 그래 지금 보면 ‘동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자, 그런데 처음 낙원이 소실되니까 후대 유대교에서 낙원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하늘로 올렸습니다. 지상에 있던 낙원을 후기 유대교가 하늘로 올려요.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 의하면 낙원이 메시야의 처소입니다. 그래서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형성되는데 메시야의 처소를 낙원이라고 말해요. 그 바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예수님께서 “오늘 에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심으로 밑에 사람들이 다 듣고 있지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다 듣고 있는데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하심으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너희들이 못 박은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낙원을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야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것이예요. 그런 것이지 낙원이 천당보다는 증간지점, 우리가 아브라함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처럼 아직 천당과 같은 상태 이전의 곳이 아니라, 죽으면 다 주님 계신 곳에 가지 낙원이란 별도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음부는 어떠냐? 음부는, 음부란 말은 구약에서는 스올이라 그러고 희랍어에는 하데스라고 되어 있어요. 그 23절에 보면 ( ), 하데스에서 그의 눈들을 들어서, 어디 있느냐? ( ), 밑에 있으면서,( ) 멀리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 ), 나사로도 보고 그의 품 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그래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음부로 갔으니까, 하데스라는 곳으로 갔으니까 음부라는 곳이 따로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스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보통 여기서 세 가지 뜻인데 첫째로는 죽음을 뜻하고, 두번째로는 무덤을 뜻하고, 세번째로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죽은 자들이 다 저승으로 간다고 했어요. 다 저승으로! 그 저승이 죽은 자들의 세계 아닙니까? 스올로 간다. 죽은 자들에게로 간다. 구약도 말했는데 계시가 점점 더 명백히 밝혀지면서 스올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에서 구분되어 나왔지요. 그때는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구분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죽은 자들이 다 같이 가는 곳으로 말했는데 이것이 이제 하데스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데스나 스올이나 다 마찬가지로 악령들이 가는 곳이라. 그러면 이곳이 지옥 전이냐? 아브라함 카위퍼는 재미있게 해석을 해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지옥의 문 앞과 같은 데다. 하데스를! 아브라함 카위퍼가요! 이 본문 보면 거기서도 분리되는 괴로운 곳이니까 다 지옥을 뜻합니다. 그래서 음부하고 지옥을 말하고 별도의 처소가 아니다. 
그러면 왜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하느냐?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했듯이 우리의 인간의 인격에는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연적인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혼은, 육체를 벗은 영혼은 산 자의 세계에서 끊겨있고 적극적인 활동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에게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품에 가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도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그러니까 주님께로 간 영혼들은 죽은 자에 속하지 산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죽은 자에 속한다. 
자, 중간기는 있으나 중간기 처소는 없다. 그것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요점입니다. 중간기 상태는 있으나 중간기는 있지요. 중간기 처소는 없다. 개인 영혼이 죽을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가 중간기 상태라. 그러나 별도의 처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 그것이 바른 기본이고 죽으면 죽은 자가 일단 산자의 세계에서 끊긴 것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저쪽 가야 할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습니다만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생존기간에 결정이 됩니다. 그것이 확실하고 확실히 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 중간에 많이 생긴다고 하는 이론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요. 첫째 하나가, 이것 하기 전에 스칸디나비아에 스웨덴보르크라고 하는 아주 입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완전한 육체적인 몸하고 영적인 몸으로 되어 있다. 죽으면 육체적인 몸은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참 좋아요. 죽는 것이 더 좋은 겁니다. 왜냐? 육체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몸은 우리가 부활 때 주의 권능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우리 지금 현재 몸 속에 영적인 몸이 또 들어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아는 이와 같은 몸 이외에, 영적인 몸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나 다른 것으로 전혀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스웨덴보르크는 신인합일, 또 입신 이런 걸 너무 많이 해서 세계를 너무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혀 이런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주의 품으로 가는 것이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영적 몸으로 부활, 우리의 몸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지금 보이는 몸이 육체적인 몸이고 이 안에 영적인 몸이 또 있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 죽음이 바로 부활이예요.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죽는 것 자체가 부활입니다. 영적인 몸으로, 옛몸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으로 살게 되니까요. 
그 다음에 스피리티즘이라, 영계주의인데, 이게 지금 뭐라고 번역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뉴욕에서 생긴 사건인데 어느 집에 살인사건이 생겼어요. 19세기인가, 18세기인가, 그런데 이 영이 늘 들어와서 괴롭힌다. 그러니까 그 딸이 어느날 그 집의 딸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이 테이블을 가지고 표시를 하게 하자 그렇게 했는데 실제로 영이 와서 테이블을 흔들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두렵고 그래서 딴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영이 또 그대로 따라왔다. 그 집에 와서 또 테이블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영이 나타나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또 연필로 긁어 써서 의사를 표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영혼이 현재 살아있다. 저 세계로 가지 않고, 저승에 가지 않고 이 세계에 살아서 운동하고 활동하는 걸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초대교회서 부터 있던 이단이지요. 그래 이것이 변형된 형태가 소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 김기동 목사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글을 안 읽어도 다 돌아다니는 말로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읽지는 못했어요. 김기동 목사 저도 옛날에는 만나서 압니다. 옛날에 60년대 69년인가 70년도 그 어간에 내가 만났어요. 그때는 아주 귀신을 쫓는 초보적인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을 때고 그렇게 문제가 아주 적을 때였어요. 그런데 귀신을 쫓아냈을 때 녹음한 것을 틀어주면 이것이 귀신이 말하는데, 여자 귀신인데 이것이 김기동 한테 데리고 와갖고 나를 나가게 하려고 그런다고, 목소리를 변해갖고 말하는 걸 들어보고 했는데, 이 사람은 이 김기동 목사는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 귀신을 만들어 내는지,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에 120세까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20세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수명이고 그 이전에 죽으면 120세 수명을 지상에 있으면서 떠돌아 다니다가 120년이 차면 저승으로 간다. 음부나 낙원으로 간다 그러는데, 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가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고, 우주로 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로 가지 산 자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일단 죽은 자의 세계에 갔던 자가 산 자의 세계에 넘나들 수 없습니다. 이게 전적으로 그릇된 이론이고 그 귀신이 되어 가지고 또 들어간다고 그러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귀신이 있습니다. 있는데 죽은 사람이 버정상적으로 죽었을 때 그 되풀이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근거를 가지고 그 사람의 탈을 쓰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들어가지요. 
내가 며칠 전에 어느 의사를 만났는데 그 병원에 약사로 근무하는 약사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거예요. 누구 귀신이 들렸느냐? 오빠의 귀신이 들렸다. 여자가 몇 살이냐? 28살이라. 그래 그러면 내가 물어봤어요. 그러면 그 오빠가 결혼하지 않고 죽었다더냐? 그렇다 그래요. 처녀귀신,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추측하긴 그래요. 오빠가, 그런데 영락없이 귀신 행세를 한다는 거예요. 영이 들린 사람이! 그래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쫓고 원장도 벌벌 떨고 많이 어려움을 당했다는데!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신자는 주님의 품으로, 악한 자는 다 지옥으로 가지요.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경우, 그런 경우는 귀신이 그 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명분을 얻고 그 일을 하지요. 그런 것이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김기동 목사도 사람의 영혼이 귀신된다고 말하는데 사람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악령들이 있는데 그 악령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한을 받아가지고 지상에 산 사람들에게 악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러나 산 사람의 영혼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이 하도 위기를 당하니까 사무엘을 불러 올리지 않습니까? 그건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성경이 구약의 그러한 현상까지 부인하는 게 아니예요. 인정은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을 금했지 그러한 현상까지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영들의 활동은 인정을 한다고요. 목사님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가르치셨어요? 교인들에게! 분명히 영매를 이용해서 사무엘을 부르니까 사무엘은 몰라도 영매들은, 그 점쟁이는 보지요. 사무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허연 옷에 어현 수염을 내고 머리가 어떻게 생기고 했다. 그래 맞았다. 영락없이 사무엘이다. 그러면서 네가 오늘 죽을 것을 예언한다 말이예요. 그러니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의 영이 이렇게 신접한 자에 의해서 불려져 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귀신이 신접한 자의 영매에 의해서, 주술에 의해서 귀신이 사물엘의 형태를 입고서 나타난다. 예언은 어떻게 하느냐? 예언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무엘 자신이 예언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사무엘의 형태로 예언을 한 거지요. 하나님이 지금 사울을 죽게 하기로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영들이기 때문에 알아요. 될 일을! 그런 것이지 사무엘의 영이 땅으로 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지요. 
자,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은 죽으면 저승에 간다. 우리 말로 하면! 신자들, 선한 사람의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가고 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지 이 산 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아까 제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해서 여러분께 이야기 했는데 칸트에 의하면, 칸트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윤리입니다. 물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제일 훌륭한 저서이고 그 책이 근세를 만든 분수령입니다. 칸트 이전의 신학하고 칸트 이후의 신학은 180도 반대극에 서 있어요. 그러니까 근세 신학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알려면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도대체 근세신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왜 그렇게 내용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칸트를 알아야 필수입니다. 근세철학과 신학에서 분수령이 칸트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서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제한을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그렇게 한 기본 이유 중에는 오히려 윤리 세계의 생활이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한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중심점은 순수이성비판, 그러니까 지식을, 순수한 지식을, 과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그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 만큼 의무를 강조하고 윤리의 법을 도덕을 강조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칸트 속에 칼빈이 들어있고 또 둘이 서로 영향을 주었다. 한쪽은 16세기 사람이고 한쪽은 18세기 사람인데, 200년의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해요. 그만큼 칸트가 윤리를, 법을 강조를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칸트에게서 영향이 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기독교 영향으로는 슐라이어막허가 그와 같은 신학을 했고 슐라이어막허의 윤리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영향을 입은 사람들이 윤리의 진보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이것이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발전하고 윤리를, 인간의 덕을 함양하는 진보의 단계가 있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19세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 일이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적으로 완전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차후에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걸 반대하지요. 전통적인 우리의, 특별히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살아있을 때, 중생 후의 성화의 과정이 어떠했든지 간에 죽는 순간 하나님의 그의 특별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로 성화를 종결시키고 완결시킵니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갈 때에는 완전히 죄과를 벗고 죄의 몸을 벗고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 앞에 가요. 그러니까 죽은 후에도 지상에서 성화가 계속되는 방식으로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순간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완전하게,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품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때는 비록 어린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아이라도, 선택된 경우는 성령의 특별한 공작에 의해서 그를 중생시켜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가요. 그러기 때문에 죽은 후에 성화같은 진행이 주님 품 안에 가 있는 동안, 천국에 가 있는 동안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해요. 죽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덕의 진행이 이루어진 다음에 사후에 완전한 운명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이게 신학을 이해하려고 해도 철학을 조금은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18세기에, 18세기가 분수령인데,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신학하는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이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 신약의 복음을 그 당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신학작업입니다. 그것이 신학하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로, 그 당대의 사상으로 번역하는 것, 그래서 그 당대의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신학 활동의 기본작업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원칙 이후 때문에 18세기 이후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 철학이 나올 때마다 그 철학에 맞추어서 신학을 새로 만들어요. 칼 바르트도 그렇고, 불투만도 그렇고, 틸리히도 그렇고, 지금의 몰트만도 그렇고, 판넨베르크도 그렇고, 다 철학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 그 배경이 전부가 철학이 결정하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연옥, 연옥은 로마교회가 중요한 교리로 확정을 하고 있지만 연옥교리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갖고 있습니다. 희랍정교회가 갖고 있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도 이 연옥 사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근자에 와서 연옥 사상이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 교부들, 그러니까 그레고리, 대 바실, 그런 사람들에게 벌써 연옥 사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해야 되냐면 로마교회는 계속적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 희랍정교회, 동방정교회는 5세기가 제일 분수령이예요. 451년 칼세돈 공의회가 의합 신학자들의 활동의 최고 피크이고 그 이후에는 거의 없는 것처럼 사라져요. 거의 신학 활동이 없어집니다. 그 이후에는 완전히 서방측으로 논의 주도권이 넘어옵니다. 그런데 787년 제 2니케야 공의회는 거의 신학활동이 없다고 해야 맞습니다. 동방교회에, 그러니까 그전에 이미 형성된 교리만 붙여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정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정통교회, 그러니까 희랍정교회는 연옥은 있어서 거기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인정은 하나, 그 면은 인정은 하지만 로마교회는 지상에서 하는 행동이 그 연옥에서의 정화과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미사와 선행과 많은 헌금을 통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정화기간을 단축하고 천국으로 들일 수 있지요. 그러나 희랍정교회는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행이라든지 교회의 많은 헌금이라든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것이 이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의 정화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 그러나 우리는 서방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연옥은 성경적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목회학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이게 참 그럴듯하고 좋은 점 아닙니까? 내가 미국에서 참 신실한 가톨릭 신자를 만났어요. 자기 말로 그래요. 자기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어느 음식점, 식품회사 같은 데서 일한다고 해서 거기서 혹시 피로하면 먹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갖고 싸 짊어지고 집에 가는 일은 없다. 참 착실하고 훌륭한 크리스챤, 로마 가톨릭이야요. 그래 내가 물었어요. 너 오늘 저녁 죽으면 천당가지? 예수 믿지? 한참 있다가 연옥은 가겠다. 천당가는 자신이 없어요. 연옥은 갈 수 있대요. 내가 교회 속해 있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 안했고 그랬기 때문에 천당에 직접은 못가도 연옥은 갈 수 있다. 연옥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옥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말이예요. 죽을 때에 세례 받고서 죽을 때에 교회하고 화평한 중에 죽지 못했거나, 그러나 완전히 고해성사를 이루고 죄과를 다 해결하지 못했거나 그의 생활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간다. 그래 얼마나 인도적이고 좋습니까? 거기서 정화해 가지고 그 악들을 다 쏟아내고 정화해서 천국으로 올라가니까 좋은 거지요. 그런데 그 천국에 올리는 것을 누가 하느냐?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받아 가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교회가 해요. 그러니까 미사 같은 것을 통해서 천국으로나 지옥으로는 안보내지요. 천국으로 보내고 단축기간을 줄일 수 있다. 지상에서 진행된 큰 선행이나 교회를 위한 큰 봉사나 교회에 바친 큰 헌금들이 그 기간을 단축시킵니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들어온 것이지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가 없다. 
여기 보면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보면 죽은 자가 바로 지옥에 가고 또 나사로가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갔지, 중간기 처소에 가서 정화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선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만 세례받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연옥으로 가고, 그래도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고, 그리고 이제 세례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 죽은 선악을 가부간에 행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 로마교회에 가면 천국, 연옥 림보, 지옥, 세례도 받지 않고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은, 세례도 받지 않았으니 구원받을 수 없지요. 로마교 교리에 의하면! 그렇다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림보로 보낸다. 림보는 적극적인 악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그래요. 이것도 목회학적으로 참 좋은 것이지요. 어린 아이가 낳자마자 얼마 안되어서 죽었는데, 죽어서 얼마나 참 슬프고 섭섭한데 신부님이 오셔서 유아림보에 갔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있겠어요? 내 자식이 지옥은 안갔으니까 소망이 있고 기쁜 거지요. 참 우리는 이런 데 가서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어요. 뭐라고 위로를 합니까? 지옥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천당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말 못해 주지 않습니까? 로마교회는 훨씬 앞서 있어요. 그런 면에! 
그래 노르만 빈센트 필 목사도 그 책에 보면 처음 목회지에 갔을 때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 어린 아이가 죽었다. 찾아가도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뭐 위로할 말이 없는 거지요. 그래도 위로하면서 교회도 아직 자기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자기기 부임해 왔기 때문에 찾아가 위로한 거예요.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들이 죽었는데 뭘 나를 사랑해요? 그런 슬픔과 고통이 심할 때에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왔더니 그 후에 장례 지내고 다 끝나고는 자기 교회 나와서 좋은 크리스챤이 되었다. 
우리는 할 위로의 말이 없는데, 어린 아이들이 죽었을 때 가서 로마교 신부님은 유아림보에 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래 얼마나 좋은지... 거기는 또 좋지만,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지금 연옥에 갔다. 불의를 행해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교회를 위해서 큰 일을 하면 고통 받는 기간이 단축되고 빨리 정화가 이루어지니까 큰 고별미사를 하도록 해라. 재산 다 바치는 거지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냥 다 바치고 나면 살 게 없는 거지요. 살 게! 그래 나중에 어디로 갑니까? 천막 치고 성당 주변 가서 교회서 주는 옥수수 죽 먹고 사는 거지요. 남미가 대부분 그 상황이예요. 성당 주변이 다 빈민촌이예요. 
그리고 림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사람들, 구약 교회 조상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에 못갔어요. 어디에 가 있어요? 조상림보, 조상들의 림보에 가 있어요. 그래 또 그럴 만한 성경구정이 또 있어요. 없는게 아니라고요. 어디에 있습니까? 
자, 베드로전서 3장에도 있어요. 18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또 여기만 있습니까? 바울에게도 있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사로잡힌 자들을 땅에 내리셨던 그가 하늘로 올리시면서 사로잡힌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되어 있어요. 바울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조상림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거지요. 왜 그들이 천당 못 갔느냐?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전에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 못 간거지요. 그러니까 조상림보에 가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을 때 그 오신 곳이 어디예요? 여기 영으로 옥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베드로전서 3:18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전파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가서 옥 문을 열고 조상림보에 갇혀있는 아담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이전에 죽은 유대인들을 다 끌어 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됩니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흘려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권능에 의해서 그의 피와 그의 의가 그의 조상, 택한 백성들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바로, 물론 그들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용서되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그의 피의 공로가, 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의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그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 품으로 갔어요. 시간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로마교회의 조상림보가 더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 나치에 관한 그런 글들을 읽어보면, 기억이 분명히 잘 안납니다만 이제 독일에서 김나지움을 다니다가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자기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문학가가 되기를 원했는데 모든 친족들이 다 반대를 해서 할 수 없이 법관이 되기로 했어요. 변호사, 그래서 밥을 벌어놓고 문학은 그때 해도 된다. 그래서 문학을 해서 자기가 김나지움 시절에 나치 시절에 박해받던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런데 보면 그 헤르초크, 공작의 아들이 한 반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사람과 자기와의 관계를 주로 써놨는데 그때 자기를 향해서 나치에 대해서 선전을 하니까 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그렇게 저주하는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러니까 나치 아이들이 아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이 말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 이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지옥 갔을 것이고 조상들의 림보로 갔다.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흘리기 이전에도 아담과 셋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택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역으로 진행되어서 하나님의 품에 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기 이전에라도! 
그 다음에 현대, 이것 하기 전에, 조건적 영생설, 본래 사람은 다 죽도록 창조되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은 사람은 멸절된다. 또 조건적 영생설과 비슷한 말이 있지요. 조건적 불멸설, 또 뭐 있습니까? 보면 마찬가지예요. 본래 사람이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다 죽게 되었고, 멸절설, 죄 지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거나 멸절설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고, 없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이 설에 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끝나니까 뭐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 죽어도 두려울게 뭐 있어요? 끝나는데, 멸절하는데, 죽으면 멸절이 아니지요. 멸절하고 죽은 것 하고는 다르지요. 오히려 죽으면 적극적인 행동이예요. 존재방식이 변하지요. 이런 것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배치,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 영생에 이름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을 배척하고 훼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영벌을 받아야 맞지 그냥 죽어버린다, 멸절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이게 맞아요. 왜? 현대인들은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이 끝이예요. 죽음이란 모든 것의 마지막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냐? 하이데거가 뭘 강조합니까?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열반, 열반으로 되돌아가요. 열반이 무엇입니까? 극락이란 곳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열반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처럼 영원히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불교에 있어서 도는 것이다. 그래 영혼이 저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 사상을 원효가 토착화해 놓은 것이고, 불교 이름으로! 본래 불교 용어로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만 있다. 그것이 해탈하면 더 이상 사이클에서 놓여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 형태로 구애받지 않아요. 그래 의식이 소산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의식이 흩어져요. 없어져요. 완전히 의식의 흐름이! 그것이 입적이예요. 열반이예요. 그것이 소위 불교가 말하는 우리 무식한 한국 백성들이 믿고 열심히 시주하게 한 그 극락세계에 가는 거지요. 없어져요. 죽으면 끝나요. 불교에서는! 해탈하면, 다 거짓 종교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지옥,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인들이 영생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상급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정화처이기 때문에 종말에 가면 지옥이 소실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세에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부터 이 사상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셔요.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할 존재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에 심지어 사탄까지 정화되어서 그 완성된 단계에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뭐하는 곳입니까? 정화하는 곳이예요. 정화처!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완전히 회복하신 그 때에 그 때, 물론 다음 얘기가 또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니까 할 건 없고, 그 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들이 다 정화되어서, 원상 회복입니다. 그 때에 그런 것을 일으킨 모든 것의 장본인인 사탄도 정화되어서 하나님의 그 완전히 회복하시는 그 세계에 회복되어요.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요.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역사의 드라마가 끝납니다. 그 다음 얘기 또 있지만 그 얘기는 할 필요 없고... 어떻습니까? 이 이론은? 아주 좋지요? 
칼 바르트가 20세기에 와서 구원론을 폈는데,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선택교리가 있지 않습니까? 선택교리, 이게 이것 때문에 얼마나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이 욕을 먹어요? 칼빈이 제일 욕을 많이 먹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 때 칼빈이 죽었을 때 교황 이름이 피요스네스인데 그 사람이 칼빈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교황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도 내 신하 중에 저와 같은 이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칼빈이야말로 정말 돈에 욕심 안부리고 복음만을 위해서 일생을 자기 뼈를 갈아서 바친 사람 아닙니까? 대의를 위해서 전력을 다했지요. 
한번은 카디날이 칼빈을 방문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를 카디날이라고, 추기경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어요. 다 제네바의 삐에르 성당, 교회당과 자기의 집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살고 있는데 너무 비참하게 살고 있거든요. 칼빈이 그리고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었어요. 칼빈에게 카디날이! 그래 바로 그걸 받아서 헌금함에 넣었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카디날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러자 칼빈이 크게 사과를 했어요. 제가 추기경이신 줄 알지 못하고서 추기경의 존귀에 합당하도록 처음부터 예우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런데 칼빈은 로마교회도 싫어하고 루터교회도 싫어하고 복음주의요 감리교 계통도 싫어하고 다 싫어 하거든요. 너무 지독한 사람이라고! 그 중에 제일 미움받는 이유 중에 첫번째로 꼽아댜 할 이유가 바로 선택교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 부패의 덩어리들 중에서 일부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를 간과하셨다. 그게 선택 교리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20세기에 와서 칼 바르트가 완전히 뒤집었어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게 악한 자와 선한 자와,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와, 야곱과 에서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인류 전체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유기됨으로 모든 인류가 다 유기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선택하므로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다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교리는 밝은 태양불이지 어둠이 없어요. 어둠이 좋습니까? 물론 죄 지으려면 좋지만, 태양만이, 밝은 빛만이 좋은 거지요.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알게 해 줘야 해요. 그들도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줘요. 다 선택되었는데 누가 유기됩니까? 다 선택되었는데 어느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니까 종교간의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도 종교간의 대화를,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교회 밖의 그리스도, ( ) 칼 라너가 참 비상한 정력가 입니다. 윈스터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칼 바르트가 14권의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13권, 그런데 이 사람도 13권인가 14권인가, 그는 신학을 위한( ), 그는 주제 아래 쓴 것이 아니고 아티클들로, 제목들로 썼습니다. 3,000아티클 이상, 이렇게 굉장히 방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 ), 무명의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가증적으로 그리스도인, 다 이미 은혜에 접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요? 라너에 의하면 이성의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이 20세기 로마교회 신학자의 논리입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논리도, 논의가 시작이라고요. 그러면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지옥에 가서 마지막에 멸망으로 끝맺음 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지옥이 정화처로서 지옥이 종말에 의무를 다해요. 그래 지옥이 종말에 소실돼요. 그래 다 불로 정화해서, 악을 제거해 가지고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게 했는데 지옥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종말에 지옥은 없어집니다. 이것이 만인구원설의 가정, 결론입니다. 
이 바르트 좋지 않습니까? 왜요? 화란에서 내가 설교를 가끔 들어봅니다. 참 신학적인 논의는 매끄럽게 잘 하는데 복음의 생명력은 없거든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저 사람 바르트 신학을 잘 개진하고 있다. 자, 만인구원설이 되면 예수 안믿어도 됩니다. 지옥에 가서 고생 좀 해도 최후에는 다, 사탄도 정화되어서 완전히 창조에 회복되는데 우리야 육체를 입고 조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물론 많이 사람을 죽인 자도 있지만, 사탄보다는 다 정하지 않습니까? 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 다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려고 바득거릴 필요가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있어요? 오늘 이렇게 해서, 그리고 제 2 시련설이 있는데, 그것만... 이것도 연옥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진보를 말하는 중에 매개 신학자들, 이거 뭐 옛날 이야기니까 할 필요는 없지요. 19세기 매개 신학자들, 헤겔 철학의 영향을 입은 신학자들을 쉽게 말하면 매개 신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거기도 하늘로 올라가도록 인류가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렇지요. 자, 살아 있는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죽은 후에 머무는 상태에서, 거기는 아직 중간기 상태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거절할 때만이 정죄되어 지옥에 이른다고 하는 제 2 시련설이 있습니다. 이것도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 죽은 자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변경이 사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음으로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복음 외의 방법으로 또 한번의 구원의 길을 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로 복음을 내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예수의 구원을, 이 방법 외에 다른 물리적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이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세라, 권능이라고 그랬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에 복음의 충족성에 배치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 구원의 경륜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아니라! 
자,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그 이후의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구원의 방식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의 영원한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그의 작정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그러기 때문에 배척을 해야 맞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