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지식에 관하여...
헤르만 바빙크
중간지식설은 우연적 미래를 하나님에게도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것으로서 제시한다. 이것은 오리게네스가 사건들은 하나님이 사건들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지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단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예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서는 -필연적 지식, 직관적 지식, 그리고 창조의 작정-이 아니라 -필연적 지식, 중간 지식, 창조의 작정, 그리고 직관적 지식-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자유로은 행위에 관한 그의 지식을 자신의 존재, 자신의 작정에서 도출하시지 아니하시고, 피조물의 의지에서 도출하시게 된다.
하나님은 따라서 세계에 의존하게 된다. 그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그 스스로에게서 도출해낼 수 없는 지식들을 하나님은 세계를 통해서 얻게 된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의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요, 단순하지도 않으며, 자기 의존적이지도 않게 된다 - 즉 더이상 하나님이시지 않게 된다. 역으로, 피조물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독립적이게 된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어느 시점에 '존재'를 받고 '가능하게' 되지만 이제는 피조물이 완전하게 그 스스로(it's own hand) 의지(volition)를 갖게 된다. 피조물이 주권적으로 자신의 결정들을 만들어 나가며 하나님의 작정과는 매우 무관하게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이루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제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며 자율적이 되고 주권적이게 된다.
세계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 아래에 있지 않게 되고 인간들의 손에 좌우케 된다. 첫째로 인간이 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결정에 상응하는 계획으로 대답하게 된다. 이제 만약 그러한 것이 단 한 차례 - 아담의 경우-라면 우리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크고 작은 결정들은 인간의 모든 삶에서 수천번에 걸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러한 모든 결정들을 기다리면서 그러한 모든 가능성에 대한 모든 가능한 계획들을 가지고 준비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한 계획들을 인간이 구체화 시켜야만 한다면 과연 희미한 밑그림이라도 남을 수 있겠는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종노릇 해야 한다면 도대체 지배라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게 된단 말인가?
중간지식설에서 바로 이러한 것이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인간이 결정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를 구별시킨다.은혜는 공로에 따라 분배되며 예정은 선한 행위에 의존한다. 이러한 관념들이, 성경이 어디에서나 거부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적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거부한 관념들이 예수회에 의하여 로마 카톨릭의 표준 교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순서는 -필연적 지식, 직관적 지식, 그리고 창조의 작정-이 아니라 -필연적 지식, 중간 지식, 창조의 작정, 그리고 직관적 지식-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자유로은 행위에 관한 그의 지식을 자신의 존재, 자신의 작정에서 도출하시지 아니하시고, 피조물의 의지에서 도출하시게 된다.
하나님은 따라서 세계에 의존하게 된다. 그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그 스스로에게서 도출해낼 수 없는 지식들을 하나님은 세계를 통해서 얻게 된다. 그러므로 따라서 그의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요, 단순하지도 않으며, 자기 의존적이지도 않게 된다 - 즉 더이상 하나님이시지 않게 된다. 역으로, 피조물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독립적이게 된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어느 시점에 '존재'를 받고 '가능하게' 되지만 이제는 피조물이 완전하게 그 스스로(it's own hand) 의지(volition)를 갖게 된다. 피조물이 주권적으로 자신의 결정들을 만들어 나가며 하나님의 작정과는 매우 무관하게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이루지 않게 된다. 따라서 무언가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제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며 자율적이 되고 주권적이게 된다.
세계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 아래에 있지 않게 되고 인간들의 손에 좌우케 된다. 첫째로 인간이 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결정에 상응하는 계획으로 대답하게 된다. 이제 만약 그러한 것이 단 한 차례 - 아담의 경우-라면 우리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크고 작은 결정들은 인간의 모든 삶에서 수천번에 걸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그러한 모든 결정들을 기다리면서 그러한 모든 가능성에 대한 모든 가능한 계획들을 가지고 준비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한 계획들을 인간이 구체화 시켜야만 한다면 과연 희미한 밑그림이라도 남을 수 있겠는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종노릇 해야 한다면 도대체 지배라는 것이 무슨 가치를 지니게 된단 말인가?
중간지식설에서 바로 이러한 것이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인간이 결정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를 구별시킨다.은혜는 공로에 따라 분배되며 예정은 선한 행위에 의존한다. 이러한 관념들이, 성경이 어디에서나 거부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적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거부한 관념들이 예수회에 의하여 로마 카톨릭의 표준 교의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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