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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2. 바른 삼위일체를 알게 하는 데 혼동을 일으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2. 바른 삼위일체를 알게 하는 데 혼동을 일으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첫째, 삼위일체는 신비로운 교리인가 아닌가?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로운 교리이다. 우리가 어떤 교리를 신비롭다고 할 때 그 진리의 깊이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신비롭다는 말은 맞다. 특히 '삼(3)위 일(1)체' 중에서 구분성을 나타내는 '3'에서보다 단일성을 나타내는 '1'에서 신비로운 교리가 삼위일체이다. 그래서 루이스 벌콥도 "이 삼위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여기에 삼위일체의 참된 신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신복윤 역, 루이스 벌콥, 기독교신학개론, 성광문화사, 1985, 71쪽).
그러나 본인은 삼위일체 교리보다 예수님의 양성 교리가 더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한 인격(위격) 속에 양성(신성과 인성)이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고, 반씩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하지도 않고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비롭다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가 있다. 즉 신비롭다는 말로 삼위일체 교리를 알 수 없는 불가지론적 교리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동안 알 수 없는 교리로 수많은 이단을 규정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삼위일체 교리라면 삼위일체 교리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에서 셋(3)의 의미와 하나(1)의 의미를 혼동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하나(1)를 말하면 양태론이라고 하고, 셋(3)을 말하면 삼신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하나도 되고 셋도 되는, 마치 손오공 같은 교리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셋의 의미와 하나의 의미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이고 셋은 셋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의미로 셋이라고도 하고, 셋의 의미로 하나라고도 하는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본인을 삼신론자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같은 부류로 이해된다. <교회와신앙>2001년 10월호에 기고한 김명용 교수의 글에 본인도 동감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 되는 극난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론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는 극난한 어떤 교리도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이 무언가 잘못 왜곡되어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삼위 하나님은 한 영인가 세 영들인가? 본인이 '인격으로 하면 아버지도 한 영이고, 예수님도 한 영이고(육체를 입으신), 성령도 한 영이요, 결국 인격으로 하면 세 영들이시다'라고 했던 말을 가지고 윗트니스 리 쪽에서 본인을 삼신론자라고 했고, 또 교단 안의 몇몇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최소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성부 성자 성령을 영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인가?
이종성 교수는 "하나님을 영이라"고 하면서 첫째는 "야훼신이 참 신이요, 영원자요, 완전자라면 물질적 존재일 수 없다. 그는 영적 존재라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영은 모든 존재의 생명의 근원이다"고 했고, 셋째는 "영은 삼위일체 신의 존재 형식을 의미한다"고 했으며, "신은 처음부터 그 존재 방식에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삼위일체라는 형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야웨신이 영적 본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물질이 가지는 모든 제약성을 벗어 버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야웨신은 가장 순수한 영적 존재다."고 했다(이종성, 조직신학개론, 종로서적, 1986, 63-65쪽). 
칼빈도 기독교강요 제1권 13장 2절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측량할 수 없으며 영적이다"고 하였다. 그렇게 볼 때 성육신 후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그러나 삼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시라는 말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이 본인에 대한 삼신론 시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아니면 '세 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했기 때문에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표현한 그것도 삼신론일 것이다. '세 분'이란 표현은 문제가 없고 '세 영들'이란 표현은 문제가 있다는 말은 네모난 삼각형 같은 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하나님을 "우리"라는 복수로 기록하였다(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다.
더욱이 본인이 윗트니스 리 측과 논쟁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제한적 의미로 한 말이었다. "(윗트니스 리가 삼위 하나님을 '한 영'이라고 했던 것이)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역시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히 양태론이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세 영이 아니요 한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과(하나님의 경륜, 16쪽), 그리고 삼위 하나님을 한 인격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과(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또한 Daniel Towle와 조동욱 씨는 그것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윗트니스 리가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본다"(교회와신앙 1998년 5월호, "윗트리스 리의 사상으로 한국에는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논쟁시 본인은 분명히 "인격(위격)으로 하면"이란 말로 여러 번 제한하였다. 그러함에도 본인이 삼신론자라고 한다면 인격(위격)으로 해도 '한 영'이라고 하는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주장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 본인은 윗트니스 리가 '한 영'이라고 한 말이 본질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인격으로 한 영이라고 하기에, 단지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영들이라고 변증한 것이다.이것이 삼신론이라면 인격(위격)으로 해도 한 영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윗트니스 리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을 변증할 때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변증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정통교회에서 삼위일체를 '영들'이니 '영'이니 하는 그런 소리를 별로 하지 않는다. '영'이라고 하면 주로 성령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단지 윗트니스 리가 삼위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한 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변증하기 위해서 했던 말인 것이다.
셋째,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하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이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두 가지다. 먼저 '분'이라는 우리 나라 말이 인격(위격)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되기 쉬워서 혼동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내 집에 왔을 때 우리는 "세 분이 왔다"고 한다. 각각 독립된 인격을 가진 사람 셋이 왔다는 말이 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한 분이란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원문에는 한국 말의 '분'이란 개념이 없다. 단지 'Oneness' 이며 'Threeness'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 나라 말로 '분'이라고 하기 때문에 '일신' 내지는 '유일신'과 삼위일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이 '한 분'(Oneness)이심도 강조하지만 또한 '세 분'(Threeness)이심도 말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고, 성령은 아들이 아니다. 세 분은 독특한 특성에 의해 구분된다"(기독교강요, 1권 13장 2).
본지 전 호(2001년 10월호)에 기고한 학자들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보자.
"야웨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부신(父神)과 자신(子神)과 성령(聖靈)이라고 하는 세 분으로 계신다. 세 분이라는 말의 원어는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서방교회)라는 말인데 한국을 위시하여 한문문화권에서는 '페르소나'를 위(位)라고 번역하여 쓰고 있다. 한 인격적 실체를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야웨로서의 부신과 그리스도로서의 자신과 영으로서의 성령이 각기 고유의 존재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이종성 교수, 기독교학술원 원장).
"요컨대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그 본질과 속성이 모두 하나라는 것, 환언하면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이시면서 모두 참 하나님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므로 '일체' 곧 '하나'이시다"(차영배 교수, 전 총신대 총장).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신다"(김영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 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김명용 교수, 장신대).
본인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로 일하시고 '본질적으로'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윗트니스 리 측과의 논쟁중에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가 있다. 그런데도 양태론자로 판명된 윗트니스 리에 대해 변증하는 과정에서 나온 제한적인 말로 본인을 삼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이단을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연구가를 정죄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세상에 기독교 안에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부정한단 말인가? 본인은 칼빈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은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기독교강요, 1권 13장, 3.)는 말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또 본인의 신앙으로 고백한다.
넷째, 그렇다면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본인에 대한 몇몇 비판자들은 요즘 아다나시우스 신조에서 본인을 공격할 좋은 말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의 "세 영들"이란 말과 아다나시우스 신조에서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라는 말을 비교하여, 아다나시우스 신조로 볼 때 본인이 마치 삼신론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사람은 강춘오라는 교계 언론인인데, 그가 발행하고 있는<교회연합신문>이 그같은 내용으로 보도한 기사가 요즘 특별히 인터넷 상에 유포되면서 이단들의 귀를 달콤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두 가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먼저 삼위일체의 구별성의 의미와 단일성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는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의미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볼 때<교회연합신문>의 보도는 삼위일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말과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비교하여 그같은 기사를 쓴 것이라고 본다.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은 인격(위격)의 측면에서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을 '인격 또는 위격으로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했다면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 신조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은 본질의 단일성을 뜻하는 것임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알 수 있고, 삼위일체의 분리성과 단일성의 관계만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직접 살펴보면 그것이 본질의 단일성을 가르키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물론 위의 말에서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이나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는 말만 형식적으로 보면 본인의 말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위의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의미가 인격(위격)이 하나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첫째, 먼저 통합측 교단의 윗트니스 리에 대한 정죄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윗트니스 리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한 인격으로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윗트니스 리의 말에 잘못이 전혀 없게 된다.
둘째, 사벨리우스도 이단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셋째, 삼위일체는 하나도 되고 셋도 된다는 귀신 같은 교리란 말이 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면서 인격(위격)으로 해도 '셋'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라고 해야 한다면 삼위일체는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교리가 된다. 한 마디로 귀신 같은 교리가 되고 말 것이다.
넷째,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를 믿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신자들도 다 삼신론자란 말이 되고 말 것이다.
결론: 인격(위격)과 본질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인격(위격)과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한다. 동방신학에서는 구별성의 의미로 '위격'이란 말을 사용하였고, 서방신학에서는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여기 구별성의 의미로 사용한 위격(인격)이란 말을 단일성을 가리키는 본질이란 말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보자. 남자와 여자가 인간으로서 차별이 없다는 말을 할 때 "남자와 여자는 인격적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 말을 삼위일체에 적용하여 본다면 분명히 단일성의 의미로 인격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된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비록 인격이란 말을 본질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말로 잘못 사용하여 결국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이 되어 버리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서방신학의 근본 정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위격이란 말도 본질의 단일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이 나누어지기 이전에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명한 것은 동방신학이나 서방신학이나 모두 양태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끝까지 구별성을 나타내는 말(위격, 인격)과 단일성을 나타내는 말(본질)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본다. 그러면 삼위일체 교리는 쉬워지고 또 명료해진다고 본다.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은 진리를 밝혀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되리라 믿는다. 본인은 본인의 문제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바른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며 결과를 지켜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