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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일천번제의 성경적 관점

질문 : 교회에서 일천번제로 새벽마다 헌금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 생각엔 이게 잘못된 것 같습니다. 성경적 관점을 설명해주세요.. 
답변 : 안녕하십니까? 상담전문가 노승수 목사입니다. 
성경에 일천 번제는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왕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띄어쓰기를 잘 보시면 "일천 번제"이지요 구약성경에는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가 등장합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는 거제, 요제, 관제, 화제, 등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천 번제의 번제는 제사의 한 종류입니다. "일천번 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번제는 짐승의 각을 떠서 전체를 화제 즉, 태워서 드리는 방식으로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주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제사를 일천 번 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번제를 일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서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럼 "일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일천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여러 군데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솔로몬의 일천번제이고요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투정할 때 숨어있는 7000명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7 역시 세상의 완성을 의미하고 7×1000이니 더 완전한 숫자를 의미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집에 등장하는 것 처럼 7000마리의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어느 정도 하나님이 숨겨 두셨다는 뜻이 아니라 구약에서 나타나는 "남은 자 사상"의 원형입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무리가 있지만 남은자만 구원 얻는다는 사상입니다. 구원은 엘리야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 편에서는 언제나 완전하고 온전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잃어 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합의 박해 가운데도 하나님의 구원은 온전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신약성경의 로마서는 이 주제를 가장 강력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롬 11:4-5)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신약에 오면 계시록에도 이 같은 사상이 나타납니다. 천국의 백성을 144,000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12×12×1000을 한 것입니다. 그럼 왜 12가 두 번 들어가는가? 구약성경에 장자의 몫은 두 몫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형제가 4명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소유를 다섯으로 나누어서 장자에게 두 몫을 준다는 뜻입니다.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하지 않습니까? 이건 엘리야보다 영감을 갑절 달라는 뜻이 아니라 선지자 계보의 장자의 권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구속받은 성도 공동체의 맏아들로 묘사합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는 공동체는 당연히 두 몫이어야 하고 그 한 몫은 유대인이요 다른 한 몫은 이방인입니다. 실제로 계시록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환상을 보면 열두 문과 열두 돌에 열두 지파의 이름과 열두 사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첫째는 유대인이요 둘째는 헬라인이라는 관용적 표현은 구원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두루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 중에 
(행 3:26)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에서 먼저 라는 표현은 πρωτον이라는 단어로 로마서의 "첫째는" 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계시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구원이 완전하다는 의미로 1000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신학적 상징으로 일천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하는 "일천번 제"를 드려다 볼까요? 솔로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한 번에 드렸습니다. 성경의 제사법을 유심히 보시면 번제는 제사장이 각을 뜨고 준비하는 게 아니라 번제자가 직접합니다. 다만 제사장은 그 피의 일부를 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의 의미로 뿌리는 일을 했습니다. 
(레 1:4-5) 『[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광경을 제사자가 직접 일천마리의 소의 머리에 직접 안수하고 직접 죽이고 각을 떠서 번제단에 사릅니다. 이걸 하루에 일천번을 반복한 것입니다. 집에서 고기 썰어 보신 분을 알 것입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아니라 일천마리의 소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의 헌신이 얼마나 완전하고 온전한가? 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일천번제는 어떤 점에서 샤먼적인 "치성"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식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도 어떤 집사님이 새벽예배마다 일천번제의 헌금을 매일 드리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주께 매일매일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 상의 일천번제의 완전한 헌신과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천번제는 정성을 다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일천번제를 드리고 싶다면 솔로몬처럼 완전한 헌신을 보이십시오. 내가 가진 능력에 지나치도록 주께 헌물과 헌금을 드리고 나의 생애와 삶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보이는 것이 구약의 일천번제의 정신입니다. 정화수를 떠 놓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드리는 "치성" 한 부분으로 매일 매일의 새벽 혹은 매주의 정성은 말 그대로 정성이지 온전한 헌신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십니까? 그렇게 내 삶의 모든 부분의 주권을 주님께 양도하는 삶의 결단이 일천번제의 참뜻입니다. 그 때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잘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여러분의 일천번제는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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