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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치명적 죄와 중독(4) : 나태

치명적 죄와 중독(4) : 나태

 

노승수 목사

 

사랑 없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스캇 팩의 <아직도 가야 할 길>-

 

나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돌보지 않음을 의미하는 아케디아(acedia)이다. 지루함을 의미하는 프랑스의 Ennui는 싫증이나 불만족의 상태를 의미한다. 독일어에서 나태는 faulheit라고 하는데 이것은 faul ‘썩은’ ‘쓸모없는’ ‘게으른이라는 형용사에 상태를 의미하는 helt가 붙어서 형성된 단어이다. 영어에서는 여러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laziness, indolence, idleness 등이 있다. 이 중 idleness한가한’ ‘태만한’ ‘무익한의 의미인 idle에 추상명사형 ness를 붙여서 태만하게 한가하게 놀고 있는 무익한 상태를 뜻한다. 한자에서 게으름을 나타내는 글자는 게으를 ()’ 게으를 ()’ 게으를 ()’ 등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나태(懶怠), 해태(懈苔)는 게으름을 뜻하는 한자 단어이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그의 책 <다른 여섯가지 치명적인 죄들, 신조 또는 혼돈>에서 나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서 그것은 스스로를 관용(Tolerance)이라 부른다. 하지만 지옥에서 그것을 절망(Despair)이라 불린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와 처벌에 대한 공범자이다. 아무 것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 것도 즐거워하지 않고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것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런 목적도 찾지 않고,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려하지 않고, 그리고 애타게 간구하는 것이 없어 단지 살아 있는 죄이다.

 

많은 가족 상담가들은 어린이들이 훈련되지 않은 채로 자라게 되는 주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부모들이 게을러서 힘든 일을 할 수 없고 어린이들이 책임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들 부모의 정신적 상태가 피폐해져 있음에 대한 반증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그리스도인인 스캇 팩은 게으름은 악의 주요한 원인이며 정신병의 주요한 원천이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는 주요한 이유를 게으름에 있다고 본다. 가장 피상적인 수준에서조차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한 심리학자는 지나치게 겸손을 나타내는 교수와 적당히 자신감과 당당함을 드러내는 교수 중 누가 학생들에게 더 사랑을 받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 미국과 한국 양국의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국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결과를 같이 볼 수 있었는데, 지나치게 겸손한 교수보다 자신감과 당당함을 보이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대개 연애 관계에서 친밀감이 즉, 사랑이 부족해서 깨어지기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감이 부족해서 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지나친 잘난 척은 친밀감을 저해하고 지나친 겸손은 존중감을 저해한다. 인간관계이든 자녀교육이든 이처럼 노력이 필요로 한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건강치 못하고 성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자기 훈련에 게으르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 중 게스탈트 심리학은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는 주문을 외움으로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지워버리려 한다. 이와 같은 대중적 심리학의 기치 아래 우리는 쉽게 태만으로 빠져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구호는 사실 그럴 듯하고 바쁘고 분주한 현대인의 삶에 마치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아무런 도전도 없는 안전지대에 안착하는 행위는 나태하고 위험한 안전에 기만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과 같은 모습이다. 이 종의 결정적 문제점은 그 주인의 성품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만 그 있는 그대로란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창조하신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이처럼 무지에서부터 비롯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5:24) 이런 무지는 어떤 식으로 발생할까? ‘게으른 자 일수록 혀는 분주하다는 말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잠언 26:13에 보면,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했다. 게으른 자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앞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과 동일한 것이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릴만한 마땅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 그의 혀는 늘 분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은 늘 말이 많다. 교회에서도 일은 하지 않고 뒤에서 참견과 간섭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나태의 표상이다.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단순히 게으른 종이라 하시지 않고, 악한 종이라 칭하신다.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아무 일 하지 않는 것이 어째서 악한 것인가? <치명적 유혹>에서 윌리암 화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인간적이고 연약함도 인간적이다. 하지만 무관심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무관심은 치명적인 죄이다. 우리가 앞서 도로시 세이어서의 나태에 대한 치명적 정의에서 살폈듯이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무관심은 관계의 단절을 낳는다. 이런 나태를 실험으로 증명한 사람이 있다. 심리학자 링겔만은 1920년대에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독일인 근로자들에게 가능한 한 힘껏 줄을 당기라고 하고, 그들의 힘을 압력의 kg으로 측정했다. 참가자들의 수는 수시로 변했는데 때로는 혼자, 때로는 3인이나 8인 집단을 이루기도 했다. 상식적으로는 혼자일 때보다 팀의 일부일 때 더 열심히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혼자서 당겼을 때, 사람들은 약 63kg이 평균 압력을 보였다. 3인 집단일 때 전체 압력은 160kg으로 1인당 53kg에 불과했고, 8인 집단일 때 더 심해서, 전체 압력은 248kg으로 증가했지만 1인당 압력이 31kg으로 감소하여 혼자서 했을 때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처럼 혼자일 때보다 집단의 구성원일 때에 더 게을러지는 현상을 사회적 태만(social loating)이라고 한다. 특히 이렇게 집단상황에서의 사회적 일탈 현상을, 첫 연구자인 링겔만의 이름을 따서 '링겔만 효과(ringelmann effect)'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태와 태만을 낳는다. 이것은 일종의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누군가 혼자 다른 사람의 위험을 목격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단체로 군중으로 누군가의 위험을 목격할 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4호선 어느 지하철 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살인사건이 낫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말리거나 신고를 하지 않았다. ?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무관심 곧 나태의 다른 얼굴인 셈이다.

 

다메섹의 교부 요한은 나태는 뭔가 대단히 답답한 슬픔이라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은 일에 대한 지겨움으로서... 결코 선한 것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 마음의 게으름을 의미한다고 했다. 초서는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나태는 어떤 곤경과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가 서두에서도 살폈듯이 스칵 팩 박사는 사랑 없음의 본질을 게으름으로 보았다. 사랑은 일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이처럼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가 앞서 사랑과 존중을 얻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관계나 기타의 성취를 위해서는 이처럼 노력이 요구되는데, 그런 노력을 저해하는 것이 바로 게으름이라는 것이다. 그의 환자들이 삶을 책임져 나가는 도전들을 회피하는 특징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특징은 이렇게 진술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우리가 앞서 잠언에서 살폈듯이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두려움 속으로 도피하면서, 자신의 삶의 과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 심리적 증상이 흔히 히끼꼬모리라는 은둔형 외톨이들이다. 극도의 회피를 보이는 이들 이들은 바로 나태의 중독자들이다. 은둔형 외톨이는 단지 이 증상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중독 현상을 같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에 게으름이나 나태는 그의 행동이나 태도와 관련한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태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이 전형적 나태의 형태인 히끼꼬모리가 보이는 극도의 폭발적은 공격성은 현대 심리학자들도 풀지 못하는 숙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울증이나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폭력적 성향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나태는 충동조절중추에 이상을 가져오는 것 같다. 나태는 일종의 자기만족과 같다.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며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음에도 만족한다고 한다. 인터넷은 이들의 나태에 새로운 만족을 가져다준다. 누구와 접촉하지도 않지만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가상의 공간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 현실에서의 좌절에 대한 보상과 만족을 주는 곳이다. 이런 성취들은 뇌생리학적으로 볼 때, 도파민의 과다분비를 부른다. 전두엽의 충동조절중추는 도파민의 과다분비를 조절하기 위해 D2R을 만들어내고 그리고 중독자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이 몰두하게 된다. 충동이 조절되지 않을 때, 그의 공격성이 표출된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문제 곧 모든 영혼의 문제의 심저에는 공격성 특히 적개심이 그 원인이라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적개심을 자신이 품고 있을 때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는지 상상해보라 극도의 불안이나 공포에 시달리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태의 심리적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체로 인터넷과 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런 공포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다. C.S 루이스의 말대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안전이다.

 

대체 중독의 증상은 한 편으로는 간절히 그 증상으로부터의 회복을 원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증상에서 벗어나는 일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태의 전형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움을 만나는 일을 회피함으로 이런 나태의 증상을 더 심화시키는 것이다. C.S 루이스의 <스크류테잎의 편지>에 마귀들의 회의 장면이 등장한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마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그 주제는 어떻게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신앙생활을 못하게 방해를 할 것인가? 이것이 주제였다. 여러 마귀들이 이런 저런 의견들을 내어 놓았지만 탐탁치 않았다. 바로 그 때 아주 노련한 마귀가 손을 들고 좋은 의견 하나를 발표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도록 합시다. 열심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열심히 읽도록 내버려둡시다. 봉사하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내일 하자!’ 하는 마음을 집어 넣읍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을 쓰러뜨리는 비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위협적인 것이 내일 마귀라고 한다. 이것은 게으름과 나태를 대변하는 좋은 예이다. 이것은 나태를 보여주는 좋은은유이며, 나태가 마귀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태는 근본적으로 휴식과 다르다. 휴식과 재충전, 삶을 즐기는 것은 나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태의 뿌리 곧 그것이 죄가 되게 하는 것에는 바로 의지가 있다. 의지는 인간 영혼의 본성 중 행동을 결정하는 집행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나태는 바로 이 의지에 해를 끼치는 전염병과 같다. 나태는 의지를 무감각하게 하고 마비시키며 그 원인이 어떤 것이든지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넓게 퍼지는 독버섯처럼 자랄 것이다. 게으름과 나태는 의지에 해를 끼친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그저 감정적 느낌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랑은 의지와 감성이 함께 움직이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조나단 에즈워즈 목사님이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표현도 바로 이런 의지와 감정이 함께 움직이는 현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중생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의지적 품행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캇 팩은 사랑은 결정을 요구하고 그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결정한다고 했다. 만약 사랑이 단순히 하나의 느낌이라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 하라’(5:25)과 같은 사랑의 명령을 받을 수 없다. 나태는 결혼 생활의 붕괴의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게을러지는 것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흔히 권태라고 부른다.

 

이처럼 나태는 책임회피를 부른다. <세속도시>의 책으로도 유명한 하버드대 교수 하비 콕스는 그의 저서 <뱀에게 남겨 두지 않은 것에 관하여>에서 타락은 교만뿐 아니라 나태와도 관계 있다고 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책임을 뱀에게 돌림으로 책임지기를 거절했다. 슈메이커는 교만은 인간 이상이 되려는 시도이고, 나태는 인간 이하가 되려는 시도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왕좌를 구하고, 나태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된다. 교만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고, 나태는 인간의 책임을 벗어난다고 했다. 교만과 나태는 이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나태의 화려한 징표는 성공한 사람들과 부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남용되는 마약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무감각으로 인해 마약과 술과 모든 종류의 천박한 오락으로 돌아간다. 헨리 훼얼리는 나태의 죄에 대한 치명적인 표현으로서 자기만족을 든다. 나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기만족이다. 스캇 팩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마귀의 심리의 핵심을 이 자기만족나르시시즘으로 보았다. 나태의 자기만족적 경향은 중독을 부른다. 최근 학계의 여러 중독에 관한 연구들은 보면 만족에 의한 뇌의 도파민 과다 분민와 도파민 수용체 D2R의 이상 반응과 중독의 연계성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다. 사람의 충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이 도파민의 과다분비로 인해서 충동조절능력을 상실하게되고 보수계(쾌락중추신경계)를 과다 자극하게 되고 전두엽의 기능이 상당한 정도 마비가 되면서 과도한 공격성의 표출과 그에 대한 쾌감 등의 자기만족이 중독의 증상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나태의 자기만족적 성향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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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와 히끼꼬모리

 

출처 : http://blog.aladdin.co.kr/auskor

 

2007416, 버지니아 공대의 캠퍼스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고 순간 교정은 피와 공포로 얼룩진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무려 32명의 동료 학생들과 교수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눈 일련의 행동들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늘 그러했듯 무섭도록 태연하고 차가웠습니다. 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잔혹함에 비해 그의 성장 배경과 가족 환경이 너무도 평범했기에 그의 정신질환이 범죄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줄을 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우울증 또는 선택적 함구증 (selective mutism; 극심한 사회불안의 일종)으로 진단이 되어 외래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병명으로는 그의 살인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울증이나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폭력적 성향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인을 찾아 대책을 강구하려는 각계의 노력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그의 평소 행동에 대해 주변 친구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은 지나치게 수줍어했고 과묵했으며 심지어 누가 말을 걸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집단 따돌림이나 폭행 또는 어떤 형식의 괴롭힘도 없었습니다. , 그는 스스로 은둔했습니다. 물론 이런 인상이 우울증과 선택적 함구증에 들어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 병명이 그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사회 불안 (또는 수줍음)이 핵심이었다면 그에게 먼저 다가오는 친구들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사회 불안의 특징은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간절히 원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자신감이 부족해서 나서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그가 스스로 녹화한 병적인 사회를 심판하는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암시하는 비디오는 우울증과도 다른 종류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울증이 극심해지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살할 수는 있지만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망상 장애를 비롯한 정신분열적 특징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지적 활동이 너무나 정상적이었습니다.

 

현존하는 심리 장애의 진단 분류 체계에서는 그가 보인 병적인 상태에 대한 적절한 진단명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유독 일본에서 자주 발생해서 온갖 매스컴이 수년간 이 문제로 떠들썩했으며, ‘히끼꼬모리라 이름을 붙이고 지난 십년간 꽤 활발하게 연구를 해 왔습니다. 현재 백만명 정도의 히끼꼬모리가 일본에 살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히끼꼬모리의 대부분은 청소년 및 젊은 성인이며, 기본 특징은 철저한 은둔생활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집 안에만 틀어 박혀 모든 문과 창문 그리고 커텐까지 내리고 숨어 사는 완벽한 동굴 생활을 합니다. 이런 기간이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지속되는 예가 허다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마음 안에 사회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로 나와 무참한 학살을 거행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 발표에 따르면, 히끼꼬모리들은 학교, 직장 및 사회에서의 숨가쁜 진행 속도와 효율성 및 지속적인 성취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도망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직장으로 옮겨 가야하는 시점에서 대부분 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쉬면서 천천히 가고 싶지만 그러다 보면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위기 의식 때문에 숨가쁜 질주를 하도록 몰아가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설명입니다.

 

조승희의 사례가 히끼꼬모리와 무척 닮았습니다. 그는 전공을 바꿔서 시도한 글쓰기에서 연속되는 좌절을 겪었고, 이제 사회에 진입해야 하는 시점에 있었으며, 이성과의 로맨스를 시도한 적이 여러번 있지만 적절하지 못한 접근 방식 때문에 번번히 좌절을 겪었습니다. 전형적인 히끼꼬모리들 처럼 완벽한 24시간 은둔은 아니었지만, 성장기 내내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켜왔고 마음 안에 축적되어 온 분노가 어느 날 폭발했습니다. 미국인들에 비해 작고 색깔이 다른 재미동포 1.5세로서 겪는 청소년기 정체감의 혼돈 역시 문제를 더 악화시켰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이 버거울수록 백일몽이나 환상에 더 집착하고 위로받으려는 경향은 누구에게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승희에게서도 그런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자신의 환상을 쏟아내고 스스로 어루만질 수 있는 글쓰기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성공을 꿈꾸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환상마저 무참히 꺾였고 그의 분노는 안타깝게도 사회를 겨냥했습니다.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은둔자들이 모두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대부분의 은둔자들은 지나치게 온순하고 타인 앞에서 목소리 높여 주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히끼꼬모리는 사회적 은둔자들 가운데 가장 희귀한 부류입니다.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미래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사회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충격을 받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이 충격이 미래에 더 만연할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은 산업의 발전과 함께 늘 지적되어 온 인간 소외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가족, 친척,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조차 도태되어 나락으로 빠지는 한 개인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고 참을성 있게 지켜보면서 다독여 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합니다. , 히끼꼬모리는 현대 사회의 신종 질병입니다. 입시 및 입사 경쟁이 가장 치열하고 대인관계도 철저한 계산 속에 이루어지는 일본에서 이들 사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은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적절한 대책을 찾지 못한 듯 합니다. 전 세계 모든 학문을 선도하는 미국 사회에서 그동안 수십 차례 매스컴과 학술 논문에 보고된 히끼꼬모리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서양의 학자들과 매체들은 아직도 동양에서 이민 온 정신질환자가 희대의 싸이코 드라마를 실현했다는 결론에 집착하면서 증거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모든 매체에서 그 문제 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그 외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사전 차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 아직 모호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것이 유일한 설명이라는 느낌을 대중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히끼꼬모리를 심리 장애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만 현실 감각을 잃은 정신 질환자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서 고립된 은둔자들은 일단 요주의 인물이라는 편견이 자라날까봐 염려됩니다.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조승희가 일본의 히끼꼬모리 연구자들의 눈에 먼저 띄었다면 이런 사건은 방지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정부의 지원 하에 히끼꼬모리들이 모여서 치료를 받는 곳이 많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왜 그렇게 힘들고 아파했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사회에 다시 올라갔을 때 이겨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중이며, 차후에 다시 학교나 직장으로 돌아가서 그 숨가쁜 경주를 다시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강의안으로 각주와 출처는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