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강의

핵심감정의 이론적 배경과 기독교적 원리

핵심감정의 이론적 배경과 기독교적 원리


노승수 목사 


1. 핵심감정의 기원과 개념들 


핵심감정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동식(1970)이다. 그는 한사람의 행동과 감정과 생각을 지배하는 중심 감정인 핵심감정은 "한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다 배어있다.", "쌀가마니의 어느 곳을 찔러도 쌀, 즉 핵심감정이 나온다 하였다."라고 했다. 이동식(1974)에 의하면, 핵심감정의 치료 과정에 관해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전인격적, 일거수 일투족을 지배하고 자나 깨나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서나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적 동기를 파악해서 없애는 작업이 정신분석 치료과정의 첫째 단계이며, 이 무의식적 동기가 현실을 착각하게 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병의 증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담자는 이 모든 장애의 원인이 되는 무의식적 동기와 대인관계의 형식을 파악하고 이것을 내담자로 하여금 자각하게 한다. 그의 설명은 정신분석과 이렇다 할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동식의 무의식적 동기로서 핵심감정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적 동기는 차이가 있다. 서양 정신치료자들은 이를 nuclear dynamics, main central dynamics, childhood emotional pattern, basic dynamics, central emotional force, nuclear emotional constellation, deficiency motivation, major motivations, central issue 등의 용어로 설명하는데, 주로 관찰자적 입장에서다. 그러나 이동식이 말하는 핵심감정(nuclear feeling)은 내담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 자체를 가리키며 치료자가 내담자와 주객일치의 상태에서 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이정국 외, 2002)고 했다. 이동식의 핵심감정에 대한 이런 설명은 그의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왔다. 그는 불교 신자로 오랜 기간 불교 신문에 칼럼을 기고해왔고 이것을 묶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후에 이동식은 자신의 정신치료를 도 정신치료라고 명명하는데 이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과 개체적 자아인 아트만(Ātman)이 같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은 정신사에서 주체와 대상을 분리해왔고 초월과 내재를 분리해왔는데 이런 개별화에 더해 동양적 사상을 심리치료에 가미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심리 상담의 초창기 서울대 지도연구소에서 윤호균(상담심리사 1급, 8호) 등이 이동식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한국 심리 학회 전반으로 핵심감정이 퍼져 나간 계기가 되었다. 김경민(상담심리사 1급, 35호)도 핵심감정을 인도의 사상과 결합해서 핵심감정을 녹이고 그 배후에 참나를 발현하는 것으로 핵심감정을 이해했다(2004). 그에 따르면, 핵심감정을 한 사람의 말과 행동과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는 중심감정이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주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는 어려서의 대상관계, 특히 부모, 형제 또는 그와 같은 의미 있고 정서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던 사람과의 관계 경험에서 형성된다. 핵심감정은 무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정으로 매 순간마다 작용하고 있으며, 자신의 전체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핵심감정을 철저하게 파악함으로써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며, 나아가 지금-여기에서 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현재 자신의 삶에 충실하도록 해준다고 보았다. 이처럼 핵심감정은 주로 서양 정신분석이 한국에 들어와 한국화하는데 불교나 도가사상의 결합으로 이뤄진 것이 보통이다.  


2. 핵심감정의 정의


핵심감정은 무의식이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연의 그무엇인가로 생각하기 쉽지만 무의식은 우리 일상에서 반복되게 하는 행동과 태도들 그리고 상황을 인식하는 방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감정들을 일컫는다. 마치 안경 쓴 사람이 안경이 몸과 일체된 느낌이 너무 강해서 세수할 때, 안경을 썼다는 사실을 잊고 세수를 하는 것처럼 내 무의식은 잘 지각하지 못하는 게 통상적이다. 분명한 지각은 없으나 어렴풋하게 어떤 느낌인지는 대게 알고 있다. 핵심감정은 인간의 죄성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개인적 형태의 감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핵심감정으로 현실을 지각한다. 현실에 대한 왜곡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리고 핵심감정의 내사된 대상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어렵다. 누가복음의 탕자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나를 나무라는 하나님, 만족하지 않는 하나님, 비난하는 하나님 표상 때문에 신앙 생활 전반이 왜곡된다. 성경에서 자비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도 이는 흘려버리게 되고 진노하시며 꼬투리를 잡는 하나님은 더 분명하게 다가 오게 된다. 이처럼 인식 자체가 선택적이며 왜곡이 가득해서 신앙 생활이 원만할 수 없다. 핵심감정을 작정이나 섭리에 비유한다. 핵심감정이 한번 형성되면 그 심정으로 평생을 살게 된다. 좀처럼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핵심감정은 우리 속담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모태에서 죄 중에 잉태되고 주요 양육자인 모친과의 수많은 상호작용 속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자기에 대한 느낌을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불수의적 느낌으로 갖게 된다. 이 세 살 버릇이 핵심감정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우리가 이 세 살 버릇을 알고 벗어나면 이 습관으로 살지 않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죄성의 바탕을 둔 사람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 맞추고 살면 인생의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3. 핵심감정의 기독교적 이해 


핵심감정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고난 죄된 본성에 가깝다. 이동식은 자비심, 인(仁)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며 이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치료자의 수도가 필수적이라고 주장(1974)하지만 한사람의 어린 시절에 베인 엄격하게 자동화된 습관이 바뀌어서 현실에 적응은 가능할 지 몰라도 그 영혼으로 하여금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도록 할 수는 없다. 물론 목회 돌봄에 차원에서 목회자는 사랑으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의 근본적인 부분은 은혜가 아니고는 변화되지 않는다. 이동식이 말하는 핵심감정 치료법은 서양정신분석처럼 인간의 내적 갈등이나 정서를 분석하기보다 수도자의 긍정적인 힘을 결집하여 해결되지 못한 정서적 문제를 긍정적인 힘으로 녹여 없애는 작업이라고 했다(1991). 그러나 이런 평가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치료자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심리치료로서 인간의 심성이 고쳐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불가이다. 물론, 현실적응의 문제에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죄의 세력과 사슬을 끊고 승리하는 것이 심리치료로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목회 돌봄과 목회 상담은 결국 중생자들의 구원의 여정에서 성화와 성화를 위한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조력하는 실천신학이며 따라서 실천의 원리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에서 나와야 한다. 


서양의 정신치료는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계론적 세계관을 반영, 물질주의적이며 자연과학적, 객관주의적 이론과 기법을 근간으로 내담자를 이해하거나 치료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생리학적인 힘으로만 규정하려는 시도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튼 정신분석은 병소의 제거(부정적 원인)에 초점 맞춘 서양 의학 모델이다. 동시에 핵심감정은 이런 서양 의학의 모델에 일부 동양 사상의 전통의 접합된 지점이 있다. 연구자는 핵심감정을 임상을 통해서 연구하면서, 이것이 기독교적 재해석의 필요성을 느꼈다. 정신분석의 치료법을 동양사상에 접목한 치료의 핵심에 있는 핵심감정에는 개인적 자아와 우주적 자아에 대한 종교, 철학적 이해가 밑에 깔려 있다. 이런 이해로는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고 이런 방식의 치료 접근법은 우주적 자아에 대한 철학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근본에 있어서 주체로서 개인이 그 중심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이해는 기독교 세계관과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 동양적 세계관의 인간 이해 방식과 우주 이해 방식이 병렬적이듯이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 방식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만드신 세계 이해 방식이 병렬적일 수밖에 없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단일적 주체로서 개인이 무애(無礙), 곧 걸림이 없음을 치료로 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걸림이 없는 것은 치료라거나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라 보기 어렵다. 


기독교 세계관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삼위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면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성령께서 나오시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영혼 내부에 삼중구조를 지닌다. 프로이트는 몸의 생리학적 힘으로써 추동은 정신, 곧 자기 영혼에 표상된다. 그리고 몸과 영혼으로부터 대상을 향해 추동하는 힘은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면서 양육자의 체계로 양육자 표상이 몸과 영혼 안으로 내사된다. 그리고 연구자가 믿기로 원래 이 자리에는 하나님 표상이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양육자 표상이 하나님 표상을 대신하고 왜곡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정통 프로이트 이론과는 달리 0-3세의 엄마와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성적 자기상을 종교의 기초로 보았다. 이는 종교의 화해적 기초를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리주토가 중간 대상으로 하나님 표상을 말하는 것도 이런 화해적인 종교 이해의 일환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해적 관계는 우리 안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동양 종교의 구원에 근거가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닫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점은 종교의 출발이 나 자신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정리하자면, 서양의 정신치료는 대상화하고 독립을 강조하는 반면, 핵심감정 치료는 주관화하고 주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며 자연의 영역이 지닌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튼 0-3세의 기간에 엄마와의 동일시를 통한 자기와 주체의 생성과 4-6세 기간의 오이디푸스기를 통해서 내사되는 대상과 하나님표상과 주체의 관계는 모두 다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내사된 대상표상과 관계를 주체적으로만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내사된 대상은 부모상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 표상을 왜곡에서 비롯된 상이다. 마이클 리브스도 '선하신 하나님'에서 미셀 푸코의 아버지의 사례를 통해서 하나님 표상의 왜곡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사된 체계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원천이며 이 관계가 경쟁과 불화적 관계라는 점은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불화적 관계에 더 가깝다. 오히려 대상관계가 0-3에 초점을 둠으로 화해적 대상표상으로 종교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자연 종교의 일환일 뿐이다. 우리는 문제를 대상화할 필요도 있고 주체적으로 다룰 필요도 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주체로만 구성되지 않고 대상으로만 구성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치보기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탐구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상호의존적 주체라 표현했다. 


의존적 사랑의 욕구, 곧 추동의 힘은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대상 역시 자기 만족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경향을 죄의 경향성이라고 한다. 죄의 경향성은 내사된 대상의 힘에 의해서 좌절을 경험하고 이것이 하나의 엄격한 자동화된 체계를 구성한다. 즉, 내사된 대상의 힘과 의존적 사랑의 욕구로서 내적인 추동의 힘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건화되고 다른 상황과 다른 대상에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으로 해석되고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감정은 단지 주관적 느낌만이 아니라 대상으로 내사된 추동을 억제하는 힘과 우리 몸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신에 표상하는 추동의 힘의 균형으로써 핵심감정이다. 즉 핵심감정은 몸과 영혼, 그리고 대상의 세력 균형의 지형도인 셈이다. 이 지형도는 인간의 인격적이며 성격적 특성을 모두 반영한다. 그리고 이 힘의 균형의 중심점에 의식주체로서 인격이 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서 인격은 의식 주체 개념이다(이 부분은 박사 논문을 참고할 것). 주체로서 우리 인격은 내사된 체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심에도 우리를 섬기는 자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므로 우리 머리가 되셨다. 돌보시고 돌봄을 받는 관계는 동맹(alliance) 곧 언약관계다. 동맹은 청탁의 관계가 아니다. 마치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가 환자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치료자는 환자에게 배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 관계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자 종이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을 의탁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일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동맹을 맺으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이 동맹, 곧 언약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입해주신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경향성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힘이자 세력으로 현존하는 관계다. 상담은 이 믿음을 통한 내사된 체계의 수정이나 내면적 지형도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순종함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력과 힘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기독교 상담이다. 


핵심감정에서 놓여 나는 훈련(찾고-보고-지우고-상호의존적 주체를 세우는 과정)은 내담자의 주관적인 감정인 이 핵심감정과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사된 대상인 하나님 표상을 다룬다. 핵심감정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상호의존적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주요한 특성이다. 삼위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서 상호 내주하시며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의 교제가 있었던 것처럼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는 주체로 존재하며 동시에 대상과 교제하는 존재로 내사된 대상이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  우리 안에 타자와 관계 맺는 끈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내사된 대상개념이나 이 영속적인 중간 대상은 하나님 표상의 전형이 된다. 그리고 핵심감정이 주로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고 이 감정은 의존해서 사랑받으려는 욕구, 곧 대상을 지향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핵심감정 안에는 그러므로, 주체로서 주관적 감정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상이 함께 병존한다. 대상과 현실의 문제와 무관하게 핵심감정은 자기 체계로서 추동의 힘, 그리고 그것이 정신에 표상된 자기 혹은 주체, 부모로부터 내사된 체계, 이 세 가지 세력의 균형 전체가 내적 체계다. 이 체계는 엄격한 자동성을 지니면 지닐수록 병리적이며 이는 모든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 다시 말해서, 양육자와의 관계가 재연될만한 연상이 일어나는 관계에서 이런 감정이 일어나고 여기에 엄격한 자동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행동주의 치료에서는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핵심감정을 불쌍한 영혼에 비유한다. 왜냐하면 핵심감정이 형성될 그 시기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유아적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나 다른 사람들에게 붙어서 살아야만 되는 불쌍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쌍하다는 이 말에 사람들은 발끈한다. 이 말을 인정하기가 힘이 든다. 우리는 죄인입니다는 설교는 들어도 우리를 죄인 취급하면 발끈한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이 불쌍한 영혼은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 영혼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영혼은 진정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 성경에서 긍휼(םהר)과 자궁(םהר)이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 영혼들이다. 완전한 인정과 수용을 받지 못한 영적 유산(abortion)자들이다. 우린 이제 육신의 자궁 외에 하나님의 영적 자궁에서 두 번째 영적 출생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전적인 인정과 수용의 메시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만 한다. 두 가지 돌이킴이 필요하다. 죄에서 돌이킴과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필요하다. 전자를 회개라 하고 후자를 믿음이라 한다. 긍휼의 돌봄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죄인인 우리를 부르셔서 의인으로 삼으시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나의 내면의 핵심감정의 목소리보다 더 귀기우려 들어야 한다. 돌봄이 결여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들어 내야만 했던 거짓된 나와 내적 체계가 바로 핵심감정이며, 이 거짓 나의 목소리에 솔직해지는 것이 불쌍한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과 그 체계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인 핵심감정과 하나님의 무한 긍정의 목소리가 서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이 불쌍한 영혼을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주체로서 나, 곧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으로서 원의(참지식, 의, 거룩)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호의존적 주체로서 어린 영혼이 있다. 그 어린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적 자궁의 돌봄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과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돌봄을 받는다. 물론 이 과정은 말씀에 나타난 나에 대한 평가로서 자기를 돌보는 자기 돌봄과 자기 양육 그리고 자기 공감이 먼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용서한 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자신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불신자일 수 있다. 또한 핵심감정은 내 삶 전체를 지배하고 현재의 나로 있게 하는 장본인이다. 핵심감정으로 인하여 나를 지탱하게 한 힘도 많이 되고 나를 힘들게도 했다. 이제부터는 나의 강점은 살리고 나를 힘들게 한 면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핵심감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 핵심감정을 제대로 해결하고 이 부분을 잘 보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은사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활성화시켜 나의 건강한 부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핵심감정은 기독교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한다(마16:24)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 신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자기부인란 무엇인가?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인가? 그런 종류의 자기 인격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 내부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부인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을 성경은 육(롬 8:6) 또는 옛 사람(골 3:9; 엡 4:22)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당히 추상적 개념이고 그것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핵심감정은 신자의 자기중심성의 진앙지(震央地)를 분명하게 목격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핵심감정의 수련은 신자의 성화의 과정을 촉진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가 된다. 신자의 성화의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 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 부인의 보다 실감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죽이기(mortification)이다. 둘째는 우리 안에 새사람의 씨앗이 자라는 소생(quicken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과정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감정은 이 두 가지 과정의 실제적 분기점이다. 죄 죽이기는 불쌍한 영혼으로 더불어 핵심감정을 가지고 작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생은 영적 자궁으로 되돌아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어린 영혼으로 더불어 영적 자궁 안에서 하나님의 돌봄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작업이다.


4. 핵심감정 공부의 필요성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이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요 10:10). 핵심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중생한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요, 그 생명을 누리는 삶이요 그 풍성함이 더하는 삶이다. 핵심감정을 공부하는 까닭은 이것이다. 자기를 알아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감정은 곧 자기이다. 그러기에 꼭 알아야 하고 이것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핵심감정을 수련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삶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고, 그와 같은 우리 내면의 소리 때문에 핵심감정은 수련은 쉽다. 그러나 이 추동은 자기를 향해 있다. 그 추동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기가 쉽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추동이 점차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믿음이다. 핵심감정에 휘둘려서 살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러면 당연히 돌이켜 하나님께 우리 추동의 힘이 향해야 한다. 은혜가 없이 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 만족을 추동하는 힘은 무의식이라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화되면 이렇게 사는 삶이 고생이며 비참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적 상담에서 말하는 직면의 근원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돌이키는 과정을 경험하고 핵심감정 공부의 맛을 보게 되면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경우를 많다.


핵심감정은 자신을 힘들게 하면서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특히 부모, 부부, 자녀관계에서 더욱 핵심감정이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니 가정이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이 핵심감정이 해결되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핵심감정은 대물림된다. 나는 부모에게 부모는 그 윗대로 부터 핵심감정을 대물림 받게 된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그대로 드러난다. 더 이상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말고 내가 건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달라붙어있는 핵심감정을 발견하고 이 감정으로부터 놓여나는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생한 나는 성화되어져 갈 수 밖에 없고 내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참 지식, 의, 거룩)의 씨앗은 성장과 열매를 향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과정이라면 수없이 고생하고 힘들여서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의식이고 무의식인 한에서 이유도 모른 채 고통 가운데 그 삶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핵심감정 수련은 이 길을 비교적 지혜롭게 만들어 준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일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깨달을 것을 기백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레슨을 통과하게 해준다. 


모든 관계에서 핵심감정이 작용을 하므로 이 핵심감정을 잘 지켜보고 있으면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에 중심을 두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핵심감정이 가짜임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속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핵심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현실에서 느끼는 핵심감정이 진짜이고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이 감정이 현실이 아님을 자각할 때에 핵심감정으로부터 서서히 놓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