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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친천년왕국설(Promillennialism)

친천년왕국설(Promillennialism)
이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할 때이다. 무천년설(amillennialism)의 “a”는 부정 접두어로서 문자 그대로 의미는 마치 천년기를 부인하는 것과 같이 들린다. 그러나 무천년설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천년설과 같이 일정한 시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는 의미로 쓰였다. 또는 그 접두어는 “~을 반대하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이제 더 나은 천년기 이해를 위해서 부정 접두사를 가진 무천년설에서 친천년설(promillennialism)로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서 접두사 “pro”는 “~을 위한”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무천년이라는 용어가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위에서 말한 해석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173). 무천년설이라는 말은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그래서 무천년주의자들은 다른 천년설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단순히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싸우고, 전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들과 구분하려는 모습만 줬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심스러운 개념은 개혁신학자들 사전에는 여전히 존중받는 위치에 있다. “무천년의 견해는 그 이름이 말하듯이 아주 부정적이다.”라고 루이스 벌코프가 이 용어를 정당화하면서 말했다. 그럴만한 까닭은 “천년왕국의 기대에 대한 그 어떤 충분한 성경적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708).
후크마도 비슷하게 “무천년주의자들은...성경이 천년왕국에 대해서 그 어떤 형태로든 가르치지 않는다.”고 믿는다(Hoekema, Reformed Dogmatics, 816). 다른 대안적 개념인 “실현된 천년왕국설”조차도 “훨씬 어색한 것”이라고 거부하면서 후쿠마는 “더 짧고 보편적인 용어인 무천년설”이라는 용어 사용을 계속한다(The Bible and the Future, 173~174).
그러나 분명 ‘매우 부정적이며 방어적인 명성으로 둘러싸여 살기를 계속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제이 아담스(Jay Adams)는 이것을 “성경적인 종말론 체계에 대한 오칭”이라고 불렀다(The Time is at Hand, 107). 그는 “이 용어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만족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기는 힘들다.”고 인정한다(108).
그러나 이 어려움을 인정한다고 선 채로 도전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의 사상을 단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 더 적극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의무다. 이는 “무천년설 계열의 책들이 전천년설 책들을 거부함에 대한 반대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천년설 임무는 “천년왕국의 ‘설명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Adams, 107) 그러므로 친천년설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인상을 지우고 긍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친(親)천년설’이라고 부르는 견해를 지지하는 무천년설은 상대적으로 새롭고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것이라고 종종 주장되곤 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루이스 벌코프는 이 교리가 “기독교만큼이나 오래된 신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관점으로서...교회의 위대한 역사적 신앙고백 안에 표현되거나 내포된 유일한 관점이다”(Louis Berkhof, 708).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현재와 미래를 망라한 ‘마지막 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긍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계시적 잣대인 성경 이야기 구조와 함께, 개혁신학은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우리 삶을 형성하는, 신비스럽게 진행하는 사건의 과정을 이해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인간과 우주의 역사는 종말론적이다. 구약과 신약은 계속해서 더 크고 더 좋은 일들을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앞을 바라보라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이야기들 속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전 삶은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모두 처음 ‘주의 날’부터 다시 오실 위대한 ‘주의 날’을 향해 목적론적으로 향해 있다. 임시적인 ‘마지막 때’가 연속됐기에 이제 우리는 최종적인 ‘마지막 때’를 항해 나아가는 결정적인 현재의 ‘마지막 때’로 들어섰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 안에서 종말론(eschatology)은 시원론(protogy)과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 속에서, 종말에 모든 일들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는 전망은창조의 시작부터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이미 타락의 시간에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한가운데에서 다가올 구속의 승리를 선포하셨다(창 3:15).
이스라엘이 남긴 유산의 핵심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이다. ‘시대의 종말’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복음의 말씀 속에서, 삶,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은 현재적 실재로서 나라의 삶을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것은 이미 ‘이 마지막 날들’ 동안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은 구속사의 단절된 영속성 안에 중요한 전기를 나타냈다. 그것은 곧‘미래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현재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시며, 따라서 종말론적인 능력이시다...성령의 능력 있는 임재가 바로 종말론적 임재이다...(성령의 임재는) 종말에 대한 보증금이며, 그 보증금 자체가 종말의 기대 안에서 보는 실현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종말론적 실존의 첫 번째 불입금(installment)...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삶은 종말론적 삶이다(Richard Gaffin, “Life in the Spirit”. in The Holy Sprit: Renwing and Empowering Presence, 46~48).
이것이 바로 ‘천년’에 대한 친(親)천년적 견해의 계시적인 상황이해이다. 친천년설은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의 기간을 포함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 확장된다. 계시록의 다른 숫자들처럼 ‘천년’도 묵시적 상징으로서 온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천년”은 “정확한 개요를 내기보다 그림을 그려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미 ‘천년왕국은’ 현재 2천 년이나 지속되고 있다”(Adams, 86).
현재의 천년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적대적인 “정사와 권세”를 정복하시고, 요한이 “용, 옛 뱀(창 3)이라고도 하는 자, 곧 악마요 사탄”인 “강한 자를 결박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신호이다(마 12:29, 참조; 눅 10:18). 그는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천 년 동안...묶여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계 20:2)
구속역사 안에서 결정적인 전기는 우리 뒤에 놓여 있다.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이 이제 ‘종말’의 시작을 의미하는 종말론적 능력인 것이다. 어둠의 세력들은 굴복했지만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다. 쿨만의 비유대로 구속사의 “D-day”(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와 “V-day”(하나님의 승리의 시간) 사이의 “결판”의 시간 동안 삶은 혼합된 축복들로 가득 찬다.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혼재한다.
우리 주위에는 온통 “수수께끼들로 차 있다. 그리고 신비가 있다...이것은 아마도 종말론의 가장 깊은 신비일 것이다. 곧 종말론적 전망의 기쁨은 긴장감과 함께 동행한다”(Berkouwer, TheReturn of Christ, 322). 이것이 바로 요한이 본 “일곱 봉인”(계 5:1~8:50과 지구 위에 부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일곱 대접”(8:6~11:19)의 그림이다. 일곱 번에 걸친 시대의 징조는 역사 속에서 평행적이며 상호적인 과정이 뒤따른다. “각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새로운 세대 전체 기간이다.” 그들은 모두 “심오한 진보나 더해지는 갈등”을 드러낸다(William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 29, 30).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을 문맥적으로 읽으면 “미래에 있을 평화로운 지상적 통치에 대한 서사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는 숨겨진 채 고난과 순교의 실상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에 대한 묵시적 계시”인 것이다. 이러한 친천년적 해석학은 “계시록의 본질에 부합할 뿐 아니라 십자가와 영광 사이의 대조점을 명쾌하게 하는 데에도 일관성을 가진다”(Berkouwer, 307).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손쉬운 승리주의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부활의 종말론은 십자가의 종말론이기 때문이다...시작된 종말론의 표시는 십자가이다. 성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사실에도 또한 그러한 사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부활하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Richard Gaffin, 54) 용의 군대와 천사장 미가엘의 군대가 전체 기간 동안 싸우는 것처럼 “천 년”(계 20)은 현 세대 전체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계시록 전체가 “아직 감추어진 오실 주님의 승리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erkouwer, 313).
* 고든 J. 스파크만 [개혁주의 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637쪽~6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