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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신론

칼빈의 섭리론

칼빈의 섭리론 
이양호 교수
제10강 섭리론 (1)
에른스트 트뢸취는 그의 저서 「기독교회와 집단들의 사회적 교훈」에서 칼빈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한 신학자로 해석하였다. “칼빈은…하나님의 특성을 절대적 주권적 의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루터주의와는 달리 하나님의 개념의 중심에 사랑의 관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엄의 관념이 있다.” “이 하나님 개념의 또 다른 결과는 칭의의 관념에 부여하는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의도이다.” “칭의는 감사 감격하는 행복 속의 정숙주의적 안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의 방식이며 행동을 위한 박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선택에서 사죄의 확증을 주시는 것은 죄책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이 하나님의 의지의 도구로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정신으로 침투되며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의 전사, 챔피온, 부하들이 된다.” 그래서 트뢸취는 “칼빈주의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세계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칼빈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대전에서 근대문화 안에 내재된 악을 절감한 사람들은 세속문화와 기독교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더 이상 칼빈주의를 근대문화의 주역과 일치시킬 수 없었다. 이제 칼빈의 섭리론에 대한 해석은 역사와 문화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향하게 되었다. 빌헬름 니젤은 그의 저서 「칼빈의 신학」에서 칼빈의 섭리론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교회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칼빈이 어떻게 이 섭리적 배려를 상세히 설명하는지를 우리가 고찰할 때 우리는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집중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의 주이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보존하시고 자신이 모든 피조물, 인간, 민족들의 주가 되심을 입증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교회를 지도하고 유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자연과 역사의 움직임들을 지도하신다.”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진정한 대상이다. 이 논제 속에 우리는 창조와 섭리에 관한 칼빈주의적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적 칼빈 해석과 그리스도 중심적 칼빈 해석은 칼빈 해석사에서 영구적으로 병존할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현실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면 할수록 그리스도는 작아지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배후로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론 이전에 삼위일체론을 둠으로써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을 균형있게 서술하려고 한 것 같다.
1950년 프랑소아 방델은 칼빈 연구사에서 방법론적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저서인 「칼빈, 그의 종교사상의 기원과 발전」을 내놓았다. 이 책은 역사적 연구방법을 시도했다. 즉, 칼빈의 신학사상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서 발전과정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 연구방법은 그 동안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방델은 칼빈의 섭리론에 있어서도 그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칼빈은 1539년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의 설명을 적절한 장소에 두지 않았음을 곧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1559년판에 와서 비로소 이것을 창조에 관한 충분한 설명 직후에 두었다.” 그러나 여기서 방델은 제한된 지면으로 칼빈의 섭리론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해석 없이 발전과정을 나열하는 데 그친 감이 없지 않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그의 논문 “칼빈과 일반은총”에서 칼빈신학에 있어서 일반섭리, 일반은총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이 은혜롭고 전능한 의지는 복음에서만 나타나고 신앙 안에서만 경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온 세상에 나타난 동일한 의지의 작용에 의해 둘러싸이고 지원받고 재강화된다.”
한편 찰스 파티(Charles Partee)는 그의 저서 「칼빈과 고전철학」에서 “칼빈은 철학자들처럼 보편적 섭리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파티는 일반은총을 강조한 바빙크를 비판했다. “바빙크의 논의에서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의 전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칼빈은 특별은총을 일반은총에 의존시키지도 않고, 특별섭리를 일반섭리에 의존시키지도 않는다.”
윌리엄 부스마(William J. Bouwsma)는 「존 칼빈, 하나의 16세기 초상화」에서 칼빈을 스콜라주의적 미로와 인문주의적 심연을 동시에 두려워했던 인물로 묘사했다. 칼빈은 이 불안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주장했다고 부스마는 보았다. “그의 불안은 그 자체가 힘에 대한 관심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다우위는 「칼빈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인식」이라는 책의 증보판에서 부스마를 논평하면서 칼빈은 신앙으로부터 예정을 보고 예정으로부터 섭리를 보았다고 했다. “내가 읽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이들 위험들은 단지 ‘운명이 지배할 때’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파커는 최근의 저서 「칼빈, 그의 사상 서설」에서 칼빈의 섭리론은 성서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칼빈의 섭리 개념은 성서에서 도출하려고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신적 원인과 지상적 결과 사이의 관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한 권의 책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 책은 몇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마치 고고학자들의 발굴터가 석기시대 문화, 청동기시대 문화, 철기시대 문화 등 문화층이 있듯이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20대, 30대, 40대, 50대 사상이 한 권의 책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의 칼빈연구 동향은 그의 사상발전의 이 층들을 분석하고 역사적 배경에 근거하여 그 발전을 해석하며 각 층의 독특한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교회론 중에 예정․섭리론을 다루었다. “교회는 거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들 모두가 주님에 의해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초판에서 교회론에서만 섭리론을 다룬 것은 아니다. 사도신경 첫 부분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해설에서도 섭리론을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는 교회론과 섭리론 사이의 관계를 추적하려고 한다.
「기독교 강요」 1539년판에서는 칼빈의 사고가 더욱 발전했다. 복음주의자 칼빈이 자기가 그 전부터 연구해 온 인문주의를 반추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의 첫 구절이 이렇게 변화되었다.
1536년판
1539년판
거룩한 교리의 대요는 이
두 부분, 즉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지혜의 전체 대요는--그것이 참되고 확고한 지혜로 간주되는 것이라면--두 부분, 즉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다룬 1536년판에서 우리 지혜의 대요를 다룬 1539년판으로 발전하면서 예정·섭리론은 독자적인 한 장을 구성하게 되었다.
칼빈은 1545년 자유주의자 반박론 제14장에서 섭리론을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셋으로 구분하였다. 즉, 첫째는 자연의 질서이고, 둘째는 특별섭리이며, 셋째는 구원의 은총이었다. 에티엔느 드 페이에(Étienne de Peyer)는 “칼빈의 섭리론”이라는 논문에서 칼빈의 섭리론을 3분법으로 나누어 ⑴ 일반섭리 ⑵ 개별섭리 혹은 일반은총 ⑶ 특별섭리 혹은 구원의 은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2분법이냐 3분법이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칼빈이 1545년 이 논문에서 주장한 것을 그 후의 「기독교 강요」 증보판에서 다시 주장하지 않고 단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둘만을 말하기 때문에 드 뻬이에의 주장은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칼빈은 1552년 예정론에 관한 소론에서 예정론을 다룬 후반에 섭리론을 다루었다. 여기서 다룬 내용들은 「기독교 강요」 1559년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1559년판에서 예정론과 섭리론을 분리시켜 섭리론은 제1권에서 창조론 다음에 두고 예정론은 구원론을 다룬 제3권에 두었다. 칼빈은 1559년판에 와서 다시 섭리론과 교회론을 관계시켰다.
1539년판
1559년판
나는 그것을 확장시켜서 우리 머리털을 세신다는 것을 우리가 신뢰하도록 한다. 머리털 하나라도 그의 뜻이 없이는 우리 머리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다른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는 그것을 확장시켜서 우리 머리털을 세신다는 것을 우리가 신뢰하도록 한다. 머리털 하나라도 그의 뜻이 없이는 우리 머리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다른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교회가 그의 거처가 되도록 선택하였기 때문에 그는 교회를 다스리는 그의 부성적 관심을 독특한 증거로 보여주심에 틀림없다.
칼빈이 1536년판에서도 섭리론을 교회론과 관계시켰고 1559년판에 와서 다시 섭리론을 교회론과 관계시켰지만 그 의미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536년 칼빈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다루면서 교회론 안에 섭리론을 포함시켰지만 1559년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일어나는 세상적인 모든 일들을 관찰하고 난 다음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교회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섭리론에 있어서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특별섭리를 강조하면서 일반섭리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특별섭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일반섭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539년판
나는 특정한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반섭리를 상상하는 자들의 견해를 위에서 합당하게 배격했지만, 무엇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를 향한 이 특별한 배려를 인정하는 것이다
1559년판
(1539년판의 이 문장이 몇 개의 단어를 바꾼채 그대로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추가했다.)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세운 자연의 질서를 관찰할 뿐만 아니라 그가 그의 피조물들의 각각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행사하기 때문임을 그들이 인정한다면, 나는 일반섭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1539년판에서는 일반섭리가 아니라 특별섭리라고 하는 either/or의 사고가 나타났지만, 1559년판에서는 특별섭리를 중심에 두었으나 일반섭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both/and의 사고가 나타났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27세 때 초판이 나왔으며 결정판은 50대에 나왔다. 청년 칼빈에서 원숙한 칼빈에게로 감에 따라 그의 섭리론은 더욱 더 심원하고 포괄적으르 되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1강 섭리론 (2)
(섭리론의의미)
1) 칼빈은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론과 섭리론을 관계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섭리론을 시작했다. “더욱이 하나님을 그의 사역을 단순히 한 때에 완성한 일시적인 창조자로 만드는 것은 냉담하고 빈약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가 세상의 첫 기원 못지 않게 세상의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빛난다는 점에 있어서 특별히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기독교 강요」 1559년판에 첨가한 이 한 구절은 그의 섭리론을 잘 요약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어떤 원리에 의해 스스로 운행하게 했다고 보는 것은 에피큐러스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을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게으르고 나태함에 대한 칼빈의 의분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 9:4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할당된 짧은 삶의 시간을 볼 때 우리는 나태 속에 빈둥빈둥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게으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손발을 주었고 산업을 주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서에 따라 하나님은 조금도 주무시지 않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지키시는 분임을 강조했다.
⑵ 칼빈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의 표현이거나 심판의 표현이라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백성들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그들의 악한 감정을 교정하고 욕망을 길들이고 자기부인을 실천하게 하고 나태에서 분발하게 하는 것이며, 교만한 자를 낮추고 불경건한 자들의 계교를 분쇄하며 그들의 책략을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3) 칼빈은 하나님이 만물을 지배하시므로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 위에 비치면 그는 전에 자기를 누르던 극한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는다.” “그는 이전에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이제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 그가 위로를 얻는 것은 하늘 아버지가 만물을 권능의 장중에 잡고 그의 권위와 뜻에 따라 통치하며 그의 지혜에 따라 다스리므로 하나님이 작정한 것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천사의 보호에 맡겨졌으며 지배자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물도 불도 쇠도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위로를 받는다.” 칼빈은 악마와 모든 행악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굴레를 씌운 양 완전히 통제를 받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어떤 음모도 꾸미거나 그것을 실행할 수 없으며 혹은 철저하게 계획을 한다 해도 그것을 행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악마와 그의 무리들은 쇠사슬에 속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갈이 물려지고 억제되어 하나님께 봉사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섭리에 대한 무지는 모든 불행 중 최고의 불행이며 최고의 행복은 섭리를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4) 칼빈은 하나님이 만물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칼빈은 바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라고 일축했다. 도둑이나 야수를 만나는 것, 바다에서 갑자기 강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는 것, 집이나 나무가 넘어져 깔려 죽는 것, 광야를 방황하다가 구조를 받는 것, 파도에 밀려 표류하다가 항구에 도착하여 죽음을 면하는 것,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일들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는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가 지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이런 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을 비판하고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과 기독교 신앙의 섭리론을 구별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 교리를 악평하려고 하는 자들은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라고 중상한다…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원인들의 영속적인 관계와 이것과 긴밀히 관련된 연속에서 나오는 필연성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통치자와 지배자로, 그의 지혜에 따라 영원부터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을 결정하고 지금도 그의 권능으로 그가 결정하신 것을 수행하는 분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행위)
1) 하나님이 만물을 섭리한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칼빈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칼빈은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삶의 한계를 정해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삶을 잘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셨으며 불의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대비책과 치유 방법을 주셨다.” “이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가 만약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치유 방법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⑵ 칼빈은 인간의 과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지만 과실을 행한 사람은 그 과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태만이나 경솔로 인해 손실이 생겼다면 그는 이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발생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역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돌보아 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면, 그 사람이 한계에 와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 때문에 그의 잘못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우리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나태로 인해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3) 칼빈은 자기의 선행도 하나님이 사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 선행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요셉은 형들의 배신을 용서해 주고 형제들의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돌리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고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창세기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으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4) 칼빈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베푸는 선행에 대해서는 선행의 일차 원인인 하나님과 이차 원인인 사람에게 다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경건한 자는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친절에 대해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는 양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감사를 하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은혜를 갚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그는 주님을 그 유익의 제일 창시자로 존경하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5) 칼빈은 타인의 악행에 대해서는, 그 악행의 사용자가 하나님이므로 그 악행의 대행자인 타인에 대해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욥이 자기의 약대를 빼앗고 종들을 죽인 갈대아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그는 즉시 복수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식했기 때문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고 칼빈은 말했다. 또한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돌을 던졌을 때 다윗이 시므이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그의 부하에게 보복을 명령했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시므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부하들을 말렸다고 칼빈은 설명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해를 끼쳤을 때 그들의 사악함을 간과해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더욱 고통을 느낄 것이고 우리 마음은 복수의 칼을 갈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에게 악행을 가한 것은 하나님이 의로운 섭리로 허락하고 시킨 것임을 믿기로 하자.”
제12강 섭리론 (3)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데, 왜 이 세상에 악이 횡행하는가 하는 질문은 오래된 신학적 문제이다. 칼빈은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이 문제를 다루었으나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 와서는 따로 한 장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칼빈은 이 장에서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세상에 악이 횡행하는데 과연 선하면서 전능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하나님은 선하지만 전능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전능하지만 선하지 못한 분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일, 즉 선과 악을 다 섭리하신다면 세계의 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세계의 악의 창시자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섭리와 세계의 악 사이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의 논적들은 하나님의 사용과 하나님의 허용을 구별했다. 그들은 세계의 악은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이에 대해 성경 구절들을 들어 반박했다.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는 추악한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이 일이 하나님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4장 28에서 사도들은 그들의 적들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다”고 말했음을 상기시켰다. 칼빈은 논적들을 향해 그들은 하나님을 망대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해 그의 결정이 좌우되는 분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⑵ 다음으로 칼빈의 논적들은 하나님이 율법으로 금지해 놓고도, 그 금지된 악을 행하도록 한다면 하나님 안에 두 개의 상반된 의자가 있는 것이 된다고 공격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으면서 원하시는 분이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의지는 서로 투쟁하지 않으며, 변화되지 않으며,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양 가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는 그 자신 안에서 하나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에게 다양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우리의 지성적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예로 들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그 행위는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3) 다음으로 칼빈의 논적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즉, 만약 하나님이 악행자들의 행위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의도를 지배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며, 악행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수행한다면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논적들의 주장에 대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율을 혼돈했다고 비판했다. 칼빈은 가룟 유다의 예를 들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려고 계획했으며, 유다는 악한 생각으로 그의 스승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었다. 유다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행했으나 악한 생각으로 스승을 넘겨줌으로 하나님의 계율을 거스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를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과 그의 논적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칼빈의 논적들은 합리성에 근거해서 칼빈을 비판했고, 칼빈은 성서의 역사에 근거해서 그의 논적들을 비판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은 그의 섭리론을 성서에서 도출했다는 파커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칼빈의 섭리론 연구사에서 한 가지 논점은 칼빈의 섭리론이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래서 온 세상에 관심을 둔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그래서 교회에 중심적인 관심을 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 소고를 통해 칼빈의 섭리론은 점점 교회 중심적으로 되어 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악마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끝까지 주장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의 칼빈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를 양자택일적으로 보아 특별섭리의 교리로 일반섭리론을 비판하였으나, 원숙한 칼빈은 특별섭리를 인정하는 한 일반섭리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칼빈의 섭리론이 그의 불안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섭리를 믿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 불행이라고 칼빈이 주장했음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칼빈은 1차대전도 경험하지 못했고 더구나 600만 유대인 학살사건과 2차대전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그의 섭리론이 20세기 후반 현재에 타당성이 있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칼빈은 고국 프랑스의 망명객으로서 고국으로 돌아가면 언제라도 처형될 죽음의 위험을 안고 제네바에서 나그네로 살았으며, 그의 부인은 질병 중 칼빈의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다 어려서 죽어 고독한 사람이었으며, 몸은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고통이 없는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런 칼빈의 섭리론이기 때문에 그의 섭리론이 오늘날 여전히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섭리론은 우리의 영감의 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