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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칼빈의 윤리관/ 귄터 하스(Guenther Haas)의 정리

제8강 칼빈 기독교강요 – 칼빈의 윤리관/ 귄터 하스(Guenther Haas)의 정리
- 칼빈은 기독교 윤리에 해당하는 책을 따로 쓴 적이 없고 강요에서도 이런 제목 아래 다룬 부분이 없기 때문에 과연 칼빈이 윤리학자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됨. 
- 그리하여 칼빈의 신학에 대한 논문에 비해 칼빈의 윤리에 대한 책이나 논문이 상대적을 적게 나옴. 
- 그렇지만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성과 윤리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 명백함. 
- 기독교강요에서 윤리란 단어를 결코 쓴 적 없음. 그러나 순종, 그리스도인의 삶, 도덕적인 삶 등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 
1.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의 핵심측면 – 그리스도와의 연합
- 강요III 우리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복/혜택들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받고 그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 
- 오직 그리스도와의 교통만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분리를 종식시키고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줌. 
- 이 연합은 성령을 통해서 이뤄짐. 성령은 신자 안에 믿음을 창조하여 신자가 말씀 속에 제시되어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됨. 성령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서 신자들이 그에게서부터 제자로서의 삶을 이끌어내게 됨. 
-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우리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 그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대속적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죄값을 지불하셨음. 
- 그의 육체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패할 수 없는 삶의 길로 들어가셨음. 따라서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들의 옛 죄악된 본성에 대한 죽음을 성취하여 그들을 죄의 통제와 형벌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성령의 권능으로 그들의 본성 전체가 갱신하도록 만듦. 
-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통해 성취한 것은 실질적으로는 그의 교회의 몸된 모든 참 지체들 가운데서 성취되었음. 그의 죽음 가운데서 의롭다 함을 받고, 그의 부활의 승리 가운데서 그와 연합함으로써 거룩하게 되었음. 
-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부활함은 그리스인의 생활에 필수적.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우리 회심의 특징만이 아님. 또한 성화의 패턴이기도 함. 성화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다시 사는 과정이 됨. 칼빈은 육체를 죽임과 성령의 살림이라 부름. 죽임은 우리의 죄악된 악한 소욕들과 세상의 유혹과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점진적 과정을 말함. 살림은 하나님의 의에 맞는 생명/삶의 새로움 가운데서 걸어가는/살아가는 과정을 말함. 
- 그리스도는 우리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날마다 놀라운 교통을 하면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는 우리가 완벽하게 그와 하나가 될 때까지 우리를 도욱더 그와 한 몸으로 자라나게 하신다.“ 
- 칼빈은 성화의 목표는 “아담의 범죄를 통해 일그러지고 말소되어 버린 하나님의 형성을 우리 가운데서 회복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강요 III.3.9). 이것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저희도 거룩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성취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회복된 이미지의 본성을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리스도가 모범이다.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네 가지 중심 측면들
- 기독교적 삶이란 외적으로 순응하거나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고, 영혼 전체를 소유해야 함. 마음의 가장 내면의 애정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야 함.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구현시키는 기독교적 삶의 4가지 핵심 측면들이 있음. 처음 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신자가 참여/동참하는 측면들임. 
-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는 부르심.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확신.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책무도 소유함. 
- 자기 부인에 가장 큰 장애는 과도한 자기애임. 이 자기 사랑은 우리의 죄악된 성품의 특징임.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을 더 살피고 애지중지하는 자기애로부터 벗어나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대체해야 함. 
- 자기부인은 무엇보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이끌어줌.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추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뻗어나가기를 추구함. 
- 이웃에 대해서는, 자기부인은 동료 인간에 대한 겸손으로 이끌어주어야 함.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와 자원들을 이웃들을 섬기고 세워주는 일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함. 
- 자기부인은 단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흉내내는 인간적인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동참한 결과이며, 그 동참이 주는 혜택임. 
- 그리스도의 죽음을 신자 가운데서 유효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의 사역임.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삶에서의 죄의 지배와 권세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다스릴 수 있게 함. 
- 비록 우리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접붙임을 받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었지만, 죄와 자기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면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임. 
- 기독교적 삶의 두 번째 특징은 십자가지기임.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닮는 외적 측면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따르고 동참하는 것으로 구성됨. 
- 하나님은 이러한 어려움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심. 특히 이런 고난과 박해들은 복음을 변화하기 때문에, 대의를 위하는 일 때문에 일어남. 그리고 그들의 인내를 테스트하고 그들에게 순종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일어남.
- 자기부인의 경우에서처럼, 자기십자가짊어지기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된 본성이라는 약점들을 제거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고, 하나님의 영적인 위로 가운데 쉼을 가지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들 가운데서 영적 기쁨을 발견하게 함. 
- 세 번째 측면 = 장래의 삶에 대한 묵상. 
-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함. 신자들의 삶/생명은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기 때문임.
-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영혼의 내적이며 영적인 갱신을 성취했음. 이것은 다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되는 일을 시작하게 했음.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과 온 세계의 완벽한 갱신을 미리 가리켜줌. 
- 확실히 이 세상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많은 혜택들을 즐기기 시작했음. 그럼에도 역시 죄악되고 타락한 세상의 비통함, 고난, 환난은 계속해서 경험함. 
- 신자들은 오직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소망을 둘 경우에만 내면의 갈등과 바깥에서의 환난과 고생을 감당할 수 있음. 
- 이 소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한 구원의 위로와 맹세를 제공해줌. 
-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죄와 악에 대해 승리하실 것과 그가 그들에게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신 부르심 가운데서 견딜 수 있음. 
- 네 번째 특징 = 창조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물들을 활용하고 누리는 일. 그것이 기독교적 삶임. 
- 이 세상에서의 삶의 위험을 의식하면서도 즉 지나친 방종과 너무 엄격한 금욕주의의 위험을 의식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선물들을 적절히 사용할 것을 권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넘어 서서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하고, 삶의 풍요에 더할 수 있는 기쁨을 주셨음. 
- 우리는 그런 선물들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과 방향에서 활용하는 한,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은 이런 것들을 활용하고 향유하고 누릴 수 있음.
- 여기에 몇 가지 원칙들을 제공. 1. 그것들을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해야 한다. 2. 이러한 좋은 것들을 활용할 때 중용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의 몫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 3. 청지기 원칙은 우리가 그 선물들을 활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4. 우리의 실천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 부르심/소명에 의해 이뤄짐. 
- 이 네 번째 특징은 칼빈의 윤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주제로 인도해줌. 그것은 창 1:26-28에 최초에 인류에게 주어진 나머지 창조 세계에 대한 주재권과 다스림의 부르심의 회복이라는 주제. 
- 이 (문화/창조) 명령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놓치게 되었음. 비록 그 외적 형식은 그대로 있지만... 
-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를 배척하고, 그 (문화)명령의 적절한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디자인/설계를 배격해버렸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말소되어 버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부르심/소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하사해 주신 선물들/은사들을 유실해 버렸음. 
- 영광의 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회복된 형상에 속하는 이 선물들/은사들을 받으심. 우리가 그와 연합함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동참하고, 이 은사들/선물들의 유익/혜택들을 받음. 이것이 원래 애초에 주어진 다스림의 주재권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게 만듦. 물론 그의 나라는 재림하여 그의 모든 원수를 멸망시킬 때까지 온전히 이뤄지지는 않을 것임.
3. 법/율법
- 법은 칼빈의 윤리학의 중심요소. 
- 칼빈은 법/율법을 인간 생활에 “지속적인 타당성”(perpetual validity)을 가진 “완전한 의의 규칙”(the rule of perfect righteousness)라고 여겼음. 
- 법은 인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 그러므로 오직 법/율법 만으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순종의 방향으로 인도함을 받음. 
-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지배할 규칙들과 법률들을 세울 권위를 갖고 계심. 
- 그렇다고 해서 법/율법이 단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인간 생활의 규범이라는 뜻은 아님. 진실로 하나님의 법/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로우심, 거룩하심, 선하심의 표현임.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반에서 변경되거나 내팽개쳐져서는 안 됨. 우리는 법/율법에 순복해야 하며, 살아가는 한 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심화시켜야 함. 
- 칼빈은 도덕법을 창조질서와 동일시했음. 
- “자연의 질서”는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그의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창조세계의 질서를 가리킴. 
- 죄에 빠져들어서 이 질서에 대한 이해와 순종에 상실이 일어났음. 그렇지만, 이 질서는 여전히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음. 
- 롬 2:14-15에 호소하여 성경을 통한 하나님 지식이 전무한 이방인들조차도 이 자연질서에 종속된다고 주장. “하나님의 율법과 모든 사람 안에 새겨진 자연질서/본성적 질서(the order of nature) 사이에는 일치(conformity)가 있다.” 
- 십계명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내용들을 주장한다. 
- 칼빈에 따르면, 죄악에 빠진 인간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음. 
-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인간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제시. 이것이 신자들의 삶의 방향을 인도해 나가는 지속적인 역할을 감당함. 이 역할을 율법의 “주요 용도”(principal use)라 일컬음. 
-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침과 지도(instruction and guidance)를 제공하는 점에서 성경과 성령은 밀접한 연결이 있음. 성령은 성경의 가르침들의 저자. 성령은 우리의 의지들을 새롭게 갱신하셔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들에 대해 순복할 수 있게 하심. 또한 성령은 우리 정신을 계몽하셔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들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게끔 하심. 
- 성령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들을 위압하거나 파기하거나 수정하거나 덧붙이지 않음. 성령님은 성경의 충만한 의미와 방향과 적용에 있어서 성경의 법/율법에 대한 최상의 해석자이심. 
- 만일 십계명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항구적인 율법 즉 창조 세계의 도덕 질서인 그 법이 만인의 마음에 기록되고 새겨져 있다면, 칼빈의 윤리에서 자연법의 긍정적 역할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 칼빈학자들 간에 여러 견해 차이가 존재함. 칼빈의 사상 가운데서 어떤 측면을 강조하고 의지하느냐 에 따라 입장이 달라짐. 
- 한편으로 칼빈은 죄가 너무나도 전인(the whole person)에게 영향을 주어 타락한 인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이해할 능력도, 그 뜻을 행할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도 상실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함. 칼빈의 사상에서 이 측면을 중심으로 보면, 그의 가르침에서 자연법의 지위를 부인하게끔 됨. 
- 반면에, 그는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 “의에 대한 자연적/본성적인 빛”을 심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를 계속해서 공급하시고, 그 본성적인 빛이 “정의와 올바름에 대한 어떤 생각들”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했음. 인간의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 덕분에 지니고 있는 이 의로움을 증거하며 우리 앞에 “선과 악의 차이”를 보여주고, 선한 행위를 지원하고 우리의 악을 정죄하는 역할을 함. 이방인들의 나라들이 가진 법들은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가에 대한 어떤 지식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함. 이 측면은 칼빈에게 있어서 자연법의 긍정적 역할을 지지하고 있음. 
- 칼빈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상의 것들에 대한 지식과 지상의 것들에 대한 지식을 구분함. 비록 사람들이 신성에 대한 감각과 종교의 씨를 그들 마음속에 갖고 있다해도, 죄악에 빠진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의 의에 대해 적대적임. 
-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율법이 십계명의 내용들을 계시해주어도 그들의 자연적인 이성은 “첫째 돌판의 원칙적인 사항들에 순응하지 않음.”
- 그러나 지상의 문제들의 경우, 칼빈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십계명 둘째 돌판에 가르쳐져 있는 “어떤 민사상의 공정한 거래와 질서에 대한 인상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함. 
- 그러므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서는 눈이 가려져 있지만, 둘째 돌판에 계시되어 있는 대로의 하나님의 법/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 생활의 길/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통찰을 지니고 있음. 
-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구속사에서 율법이 언제 나타나는지를 주목하면서 율법을 소개함.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뒤 4백년 뒤에 하나님이 그 언약의 후예들로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모세 유럽을 주셨음(II.7.1).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그와 그 후손들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의 토대이기 때문에, 율법은 그 언약의 은혜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 
- 율법은 결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을 제쳐놓고 의를 획득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
-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 성취의 맥락에서의 율법 이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롬 10:4과 갈 3:24에 호소. 
- 그리스도는 율법의 텔로스(목표, 끝).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의가 있게 하려 함.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여 우리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도록 주어졌음 (갈 3:24). 언약의 한 측면으로서의 율법은 언제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 (II.7.2; 롬 10:3-4, 갈 3:23-24 주석).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자기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법/율법을 분리시킨다면, 그 율법은 “그냥 법” 혹은 “문자로서의 법”이 될 뿐이며, 그 법을 가지고서 사람들이 그 법의 요구 사항들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획득하려고 시도하는 그런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라고 칼빈은 주장함. 이렇게 되는 것은 법/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며, 법의 왜곡임. 
- 칼빈의 지적: 갈 3:24에서 바울은 명확히 율법이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은혜의 언약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모세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찾게 움직이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구약 법제에 있는 의식법과 희생제사법에 대한 다양한 지침을 통해서 그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율법이 요구했던 의의 성취를 찾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게끔 몰아가는 역할을 감당. 
-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백성들에게 제시한 모세율법은 “자유의 입양의 언약으로 은혜를 입은” 법임 (II.7.2, 3-9; II.9.4-6). 
- 칼빈은 모세의 법제 가운데서 법의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 도덕법-의식법-민사법. 
- 도덕법은 이 세상에서 인류가 따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의의 규준(God’s enduring rule of righteousness for humanity in this age). 
-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전 시기의 결례, 희생제사,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특별한 지침을 가리킴. 이 많은 의식들과 제의들이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상징과 그림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가 드러났을 때 폐지되었음 (II.11.4). 
- 민사법(시민법)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하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에게 특수하게 적용되었넌 법규들과 법조문들을 포함하고 있음. 칼빈은 이 법률들이 요구하고 있는 정확한 요구사항, 엄밀히 요구하고 있는 바는 구별된 민족으로서의 구약 시대 하나님 백성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 
- 그러나 이 법률들에 구현되어 있는 정의와 형평의 밑바탕의 원리원칙들은 모든 나라들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고 봄. 이러한 것들이 바로 두 번째 돌판의 원리원칙들. 그 원칙들은 일반은총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만 백성과 만국에 대해 부과하는 율법의 원칙들임. 
- 칼빈이 생각하는 기독교적 삶 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기 때문에, 우리의 율법/법 이해도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 첫째, 모든 하나님의 복들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임. 둘째 율법/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는 하나님의 선물임. 셋째, 그리스도는 율법의 텔로스(롬 10:4)이며, “율법의 영혼”임. 모든 모세 법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춰서 이해되어야 함.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서 율법의 참된 진의를 회복시키고 계신다는 뜻임 (II.8.7). 
- 예수님의 사역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중심적인 모범임. 예수님은 그 사역을 통해서 율법의 성취를 드러내주심.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율버의 목표에 대한 완전한 예를 보여주심. 그것은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닌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임 (요일 3:3; 벧전 1:14; 엡 5:1 주석 참조). 
- 율법/법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 중 특별한 것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용법에 대한 가르침. 
- 첫 번째 용도 –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 그렇게 해서 율법은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경고하고 알려주며 죄를 확신하게 하며 정죄하여 모든 사람에게 그 자신의 불의함을 알게 한다 (II.7.6). 이렇게 해서 율법의 제1용도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켜준다. 즉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죄인들을 구한다는 점을 가리켜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 사항들이 충족됨.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입양됨 (II.7-9). 
- 둘째 용도 – 시민 사회에서 불의한 자들을 악행이나 불의한 행위를 못하도록 억제하는 데 기여. 국가의 법집행 제도들에 가하는 수치와 처벌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외적인 행동을 자제함. 그리하여 자신들의 악한 욕구들을 다 표출하지 않게 됨. 이렇게 억제된 외적인 의는 죄인들의 구원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행악자들이 공적 평화를 어지럽히는 것은 예방함. 일상적인 시민생활, 사회생활에서 사회적 조화와 정의의 척도를 제시해줌 (II.7.10-11; IV.20.3). 
- 셋째 용도 – 칼빈은 이 용도를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가장 근접한 주요 용도/ 핵심적인 용도(principal use)라 일컬음. 그 마음에 성령님이 살아 있는 중생자들은 두 가지 점에서 의의 길로 율법에 의해서 방향 인도를 받음. 첫째, 율법은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삶에 대한 주님의 뜻을 가르쳐줌. 그리하여 그들이 그 뜻을 알면서 서서히 성장해나가게 됨. 둘째, 율법은 그들에게 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인내하도록 권면함. 게으르고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고함.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은 우리를 모든 선한 역사를 위해 갖추어지도록 형성시켜줌 (II.7.14). 
- 기독교강요에서 십계명을 하나씩 설명하기 전에, 칼빈은 자기의 강해를 가이드해주는 세 가지 원칙을 드러냄. 1. 믿는 자들은 모세법이 단지 외적으로 의로운 행위를 권고하는 게 아니라, 또한 “내면적이며 영적인/신령한 의로움”을, 즉 본질적으로 “마음의 순정함”(purity of heart)을 권고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함(II.8.6). 2. 각 계명에서 “입법자의 순전하고 진정한 의미”(the Lawgiver’s pure and authentic meaning)을 분별해야 함. 이를 위해 세 단계를 거쳐야 함 (II.8.8). 첫 단계는 그 계명의 관심분야를 분별해야. 사실상 각 계명들의 모든 말이 제유법(synecdoches)으로 되어 있음. 즉 각 계명에 있는 특정 단어들은 각 계명에 해당하는 도덕적 관심사 일반을 가리킴. 예를 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제5계명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자리하게 하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우리에게 촉구한다는 것. 둘째 단계는 이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를 찾는 것임. 이를테면, 제5계명의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탁월함과 우수성을 부여하신 자들에게 존경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반대하는 경멸과 옹고집을 싫어하신다는 것. 셋째 단계는 각 계명들의 주해를 가이드해주는 반대의미의 법칙임. 악을 금하는 계명이 있다면, 그 계명은 그 반대의 선을 추천한다는 것임. 이를테면, 제6계명은 사람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 계명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 이웃의 생명/삶에 도움으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 마찬가지로 덕스러운 행위를 권하는 계명은 그 반대의 악덕을 정죄한다는 것. 
- 칼빈의 주해를 가이드해주는 세 번째 원리원칙은 율법의 두 돌판을 구별하고 그 관계를 이해하는 것. 첫 돌판을 이루고 있는 네 계명들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고 예배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다루고 있음. 두 번째 돌판을 구성하고 있는 나머지 여섯 계명들은 동료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다루고 있음 (II.8.11-12). 
- 칼빈은 마태복음 22:37-39에 나오는 이중적인 사랑 계명을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요약으로만 보지 않고, 또한 그 두 돌판의 완벽성의 표현(the expression of their perfection)으로 이해 (II.8.51-54). 그 두 돌판이 표현하고 있듯, 사랑은 율법의 성취/완성(fulfillment)임. 첫째 돌판 즉 하나님 사랑이 일차적이며 토대가 됨. 그 사랑이 없이는 참된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없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의 유일한 목적은 아님. 반드시 이웃 사랑을 결과하게 되어 있음.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이며 효과임. 둘째 돌판을 언급하면서 칼빈은 “사랑은 이 모든 계명들 속에 주어져 있는 가르침들을 다 내포한다”고 진술함.
4. 그리스도인의 자유
- 칼빈 학자들은 칼빈의 윤리학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기독교적 자유(Christian liberty)와 양심의 자유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 
- 칼빈은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생활/기독교적 삶에 있어서 최고로 필요한 주제로 간주함. 왜? 이것이 바로 칭의의 열매이기 때문. 칭의가 없이는 영혼이 전혀 평안을 찾지 못하고, 그들의 양심은 의심과 공포와 주저함에 사로잡히게 됨 (III.19.1). 
- 칼빈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이해. 가장 근본이 되는 첫째 부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로서,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자유.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의 온전한 확신과 자기들을 하나님이 은혜로 받아주시고 용납하셨다는 충만한 확신을 갖게 됨.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의의 요구들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공로적 의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었음 (III.19:2-3). 
- 둘째 부분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율법을 준수할 자유임. 첫 부분의 자유에 기초해서 믿는 자들은 기꺼이 행하는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동기를 갖게 됨.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그의 은혜에 기초해서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자신들의 불완전한 수고와 업적들을 받아주신다는 확신을 갖음. 우리들이 한 순종의 일들과 수고들이 그냥 법조문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받는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이 자유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선을 행하고, 의의 도구들로서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도록 고무됨 (III.19.4-6). 
- 세 번째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아디아포라’(a-diaphora) - 즉 선이나 악, 죄나 선행의 기준에 상관없는 일 - 를 사용할 자유임.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들임. 이러한 선물들이 성경에 금해져 있지 않다면, 또한 그 주어진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눈에 합당한 대로 그 선물들을 갖다가 쓰고 즐길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임 (III.19.7-8). 
- 자유의 이 세 번째 부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음. 첫째, 죄악된 방종이나 허랑방탕한 일을 위해서 그러한 자유를 사용해서는 안 됨 (III.19.9). 둘째 이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사랑이 바탕이 되어 하나님을 공경하고 우리 동료 인간들의 구원과 교화(덕세우기)에 기여하는 방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임. 특히 우리가 이 자유를 행함으로써 믿음이 더 약한 신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경우에는 삼가야 함.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 사람들의 문화나 종교적 행습에 적응하는 문제의 경우에서도 이 자유를 사용함에 삼가야 한다고 봄.
5.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 칼빈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적 생활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의 교회 지체들의 연합에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 (IV.1.2). 죄의 용서와 구원의 혜택은 복음 전파와 성례 집행을 통해 교회 사역자들에 의해서 관리됨 (IV.1.20).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회와의 연합의 이 관계 때문에 칼빈은 “만일 사람이 자기 형제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됨. 
-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이 성화(거룩하게 됨) 가운데서 성장하는 일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을 통해서 일어남.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가는 법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임. 믿는 자들은 말씀과 성례전들, 공동 기도, 그리고 교회 사역의 많은 다양한 측면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계발되는 것임. 믿는 자들의 교통/사귐(the communion of believers)의 일부가 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서 그는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나 불행스럽다”고 경고함(IV.1.4). 
-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신자의 소명은 교회에서의 삶을 함의하고 있음 (III.6.3; III.3.8-9). 1. 자기부인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믿는자들이 자기 이웃들의 유익에 헌신하고 특히 교회의 복지에 헌신하게끔 하기 위한 것임. 그리스도처럼 믿는 자들은 인내하면서 잘못을 참으며, 서로 용서하고, 교회의 공통적인 향상을 위해서 자신들의 자원과 은사들을 사용해야 함 (III.7.4.7). 2.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의 모범을 따라가야 함. 다른 사람들에게 “순전함의 완전한 모범”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어야 함. 동료 교회 멤버들 가운데에 우리의 모델들이 있음. 
- 칼빈은 사랑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발전하는 일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사랑함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함. 서로 교제하는 관계 가운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는데 헌신해야 함. 자기사랑, 교만, 이기심 대신에, 믿는 자들은 겸손과 사랑과 인내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형제자매들을 포용해야 함 (III.7.4). 
김재영 목사님 페북 담벼락에서
- 믿는 자들은 상호복종으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에, 서로 덕을 세우고 서로 교화가 이뤄지도록 평등함 가운데서 서로 존경해야 함 (III.7.5). 더 강한 자와 더 약한 자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명백히 나타나게 되어 있음.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들을 자신들의 강한 힘으로 지원하기 때문임 (III.19.1). 더 약한 자들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일을 삼가고 그들이 덕을 힘입고 세워나가도록 뒷받침해주어야 하는 것임 (III.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