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직신학/기타미분류

칼빈주의에 대한 여섯 가지 반론과 응수

칼빈주의에 대한 여섯 가지 반론과 응수
송인규 교수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질문과 도전을 받아 왔다. 필자는 이 반론들을 여섯 항목의 질문 형식으로 바꾸어 소개한 후, 곧 이어 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할 예정이다.
1)
(i)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작정/예정하셨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터인데, 왜 믿는 자들이 전도나 선교에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작정이 전포괄적임은 이 논문의 첫 번째 소분단에서 엡 1:11의 의미 규명을 통해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제기자는 다음과 같은 논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작정하셨다 [엡 1:11에 근거].
(2)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는 반드시 실현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부터 추론].
(3)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셨다 [엡 1:4-5에 근거].
(4) 하나님의 선택 대상이 된 이들은 반드시 믿게 될 것이다 [(2)와 (3)으로부터의 추론].
(5) 그러므로 선택 받은 이들은 어떤 인적 노력의 도움 없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4)로부터의 재진술].
(6) 따라서 이미 믿는 자들이 전도나 선교의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없다 [(5)로부터의 추론].
상기한 논변의 치명적 약점은 항목 (5)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작정과 예정에는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각종 결말들(issues)뿐만이 아니고 그 결과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 결과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는 자유로운 인간 행위들까지도 포함되어 있기”2)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는 또한 그가 복음을 듣도록 작정하신 것이고, 그가 믿고 회개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3) 사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에게 행동의 규칙으로 전해진 것도 아니고 또 그런 규칙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작정의 내용은 오직 그것의 실현을 통해서만 -- 따라서 그 실현 이후에만 -- 알 수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규칙은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말씀]에 구현되어 있고,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들을 활용해야 할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4) 그런데 성경에는 믿는 자와 관련해 복음 전파와 관련한 각종 명령(마 28:19; 막 16:15 등) 및 모범(롬 11:14; 고전 9:19-23)이 등장하기 때문에, 복음 전도의 책임을 등한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5)와 (6)은 (5a), (5b), (5c) 및 (6')로 바뀌어야 한다.
(5a) 그런데 하나님의 작정(예정)에는 그 작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각종 수단과 방편도 포함이 되어 있다.
(5b) 또 하나님의 작정은 행동의 규칙이 아니므로 오히려 성경 말씀 가운데서 행동의 규칙을 찾아야 한다.
(5c) 성경에는 믿는 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6') 이미 믿는 자들은 복음 전도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ii) 개혁파 신학에 의하면 택자만이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되는데, 어떻게 복음 전도자는 진심으로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의 요지는 복음 전도와 관련하여 전도자의 마음 속에 이중성(duplicity)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복음 초청 노력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중성”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보편적 복음 제시: 누구에게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초청하는 행위.
사 55:1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B. 특정적 복음 수납: 택자만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됨.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만일 전도자가 B를 의중에 두고 복음 제시를 한다면, 그는 마음 속으로 “택자만 오게!”라고 외치는 셈이 된다. 비록 A의 관점에서는 “아무나 오게!”라고 해야 하지만 -- 또 겉으로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 속으로는 여전히 “택자만 오게!”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중성의 고민은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의 구속과 관련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뜻/의향(secret counsel of God)과 구원의 보편적 제시 가운데 표현되는 그의 선언적 뜻(declarative will)을 조화시키는 것이 전도자의 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공식적인 대사(ambassador)로서, 그의 의무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일 따름이다.”5) 
이와 같은 작업은 흔히 신 29:29에 의해서도 설명이 되곤 한다.
신 29:29 오묘한 일(secret things)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revealed things)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에 의하면, 하나님께는 두 종류의 사항 -- 계시하신 것과 계시하시지 않은 것 -- 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계시하신 것에 대해서는 순종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전도자의 책임과 관련해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 오묘한 일: 복음 전파 대상 가운데 누가 택자이고 누가 비택자인지 구별하는 것.
** 나타난 일: 성경(막 16:15 등)에 계시되어 있는 바로서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따라서 전도자는 “오묘한 일”에 대해서는 착념할 필요가 없고 오직 “나타난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보편적 제공이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얼마든지 자신의 진심을 다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6)
(iii) 택자가 아닌 비신자에 대해서 믿음과 회개를 명하는 일은 불가능한 반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부당한 것이 아닌가?
상기 질문은 비택자 편에서의 난감함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택자인 비신자의 경우에는 그가 복음 전도를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마음에 중생의 씨를 심으시고, 그로 인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하게 하시지만, 택자가 아닌 비신자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택자인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리가 만무하고, 그리하여 그는 계속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 2:1)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로 하여금 믿음과 회개로 반응하라고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결코 복음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이러한 요구는 부당한 것이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안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비택자에 대해서 복음적 요구 -- 전도자를 통해 믿고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것 --를 하시는 것의 정당성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택자 편에서 그런 요구에 대해 반응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정당성의 질문은 모든 인간 -- 죄인이든 의인이든 택자든 비택자든 -- 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와 연관이 된다. 벌코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로서 인간의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시다 -- 이것은 절대적 권리의 문제이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죄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채 자신의 정당한 주권자에 대해 영적으로 순종할 수 없지만, 그의 고의적 범죄가 이성적 피조물의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절대적 순종을 요구할 하나님의 권리는 아직도 여전하며, 하나님은 바로 그 권리를 율법과 복음 가운데 주장하시는 것이다. 이 권리는 또 믿고 회개하라는 부르심에 표현되어 있다.7)
벌코프의 설명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인지라 모든 인간에 대해 순종을 요구할 -- 이는 복음에 대한 반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데 --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말이다. 흔히들, “당위는 가능을 함의한다” (Ought implies can)라는 명제를 참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환질 환위(換質 換位, counterposition) 명제 -- “불가능은 비당위를 함의한다” -- 또한 진리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당위가 반드시 가능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빚을 갚는 것이 당위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꼭 빚을 갚을 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빚을 갚을 의무가 없다”라는 환질 환위 명제도 성립하지 않는다. 똑같은 주장을 비택자와 복음적 요구에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그가 부패한 가운데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와 관련해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명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다음으로 가능성의 사안은 어떤가? 여기에서는 분명 하나님의 요구가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신학적 원리 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택자가 아닌 경우 신앙과 회개로 반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구체적 현실에서는 꼭 그 신학 원리가 확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도의 실제 상황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비신자 가운데 누가 택자이고 누가 비택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들은 이들의 반응 여부에 따라 그들의 선택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다 (cf. 살전 1:4-5,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다시 말해서 “영적 사안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은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은 실상 믿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8)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누구든지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자는 그가 택함을 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큰 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서 지혜로운 대답을 하는 서기관에 대해,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막 12:34)라고 개연성의 형식을 빌어 말씀하신 것 -- 이 경우 완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도 하시지 않았지만 동시에 전혀 하나님 나라와 상관 없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 역시 이런 추론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택자가 아닌 경우 신앙과 회개로 반응할 수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복음 전도의 상황에서는 누가 택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에 대한 반응 여부가 우선적 고려 사항으로 등장하게 되고, 이로써 (필요한 경우) 선택 여부를 판정하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자가 아닌 이들이 진정으로 예수께 나아가고자 할 때 그들이 택함 받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질문이 실제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이들은 결코 예수께 진심으로 나아가려고 들지 않을 것이요, 만일 어떤 이가 진심으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는 택함 받은 이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iv) 하나님께서는 그 속성 상 공정한 분이어야 할 텐데, 어떻게 인류 가운데 일부만을 선택하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일종의 편애(偏愛)로서 그의 공정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가이슬러는 이 질문의 요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드라마틱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농부가 수영 금지 경고가 명확히 게시되어 있는 자기 소유의 연못에서, 세 소년이 익사 직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자. 또 그들의 명백한 불순종을 목도하고 나서, “이 녀석들이 경고 규칙을 위반하고서 이런 결과를 자초했구만” 이라고 혼자 생각한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그 농부가 그 다음에 “그러니까 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겠어”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즉시로 그의 사랑에 무엇인가 결여된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이 되지 않는 그 어떤 변덕(whim)에 의해 그가 “나는 그들 중 누구도 구할 의무는 없어. 하지만 나는 마음이 착하니까 한 명을 구해 주지 -- 나머지 둘은 그냥 죽게 두고 말이야” 라고 언명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우리는 그의 사랑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9)
가이슬러의 예화는 상식적 차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예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유추점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 세 소년 ․․․․․․․․․․․ ․인류.
** 수영 금지 경고 ․․․․․․․․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는 것.
** 규칙 위반 ․․․․․․․․․․․아담의 범죄와 그 이후 후손이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 자범죄를 짓는 일.
** 농부 ․․․․․․․․․․․․․ 하나님.
** 구해 줌 ․․․․․․․․․․․․영적 구원.
** 그냥 죽게 둠 ․․․․․․․․․ 유기(遺棄, reprobation).
농부가 세 명 가운데 한 명만 구하고 나머지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사랑이듯, 인류의 일부만을 선택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역시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사랑의 현시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이슬러의 예화 가운데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필자로서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가이슬러는 자신이 농부의 마음을 잘 알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일 뿐이지 하나님에 대한 광범위적 지식(comprehensive knowledge)은 여전히 우리의 인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가이슬러는 우리와 달리 훨씬 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특히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하면서 “설명이 되지 않는 그 어떤 변덕(whims)에 의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련해 주권적 선택을 하신 것이 그의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기분 변화 때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역시 왜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만을 선택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사 55:9),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롬 11:33)이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어떤 이유로 인해 그렇게 하셨으리라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와 달리 가이슬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안다는 전제 하에 하나님께서 “그 어떤 변덕에 의해” 선택을 하신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위의 예화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둘째, 농부의 선택적 구출 행위가 편파적인 것이듯이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도 편파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편파성”(partiality)이 문제되는 것은 편파적 경향을 보이는 이의 심리적 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의 편애가 형성되는 심리적 정황을 보면, 자녀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부모의 체면이나 위신을 더 잘 세워 주었다든지, 다른 자녀들보다 어느 하나가 속을 덜 썩였다든지 하는 식으로 결국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편견이나 오해 혹은 이기심에 기초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적 사랑을 행사하시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동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고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므로 이러한 그릇된 동기에 의해 행동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10)
물론 이 이슈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공정성”(justice/fairness of God) 문제로 연결이 된다. 하나님께서 선택적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칼빈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출발점을 달리한다는 것만큼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접근하는 것은, 우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죄된 모습을 인정함으로부터이다. 즉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마땅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 존재였다는 사실이다.11)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하나님의 선택 대상이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멸망에 빠지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내가 누리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우리 편에서는 그렇게 멸망에 처하는 이들로 인해 안타까움에 사로잡히는 것(예를 들어, 롬 9:1-3)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라고 독단적 평가를 내리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왜 저들은 구원하시지 않습니까?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저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식의 도전적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면 구원과 관련하여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그런데 이런 주장은 자신들이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을 초월하여 전혀 제 3자적 관점에서 의견을 개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즉, 공정성이라는 인간 보편 논리의 잣대를 정해 놓고 여기에 비추어 하나님의 활동이나 행위를 평가하려는 소치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접근이 더 타당하다고 -- 사실 가이슬러는 그러한 전제 하에서 상기한 예화를 제시한 것인데 -- 말해야 하는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하나님의 뜻이 지닌 초월적 불가해성을 먼저 인정하는 가운데, 함부로 “불공정하다,” “편파적이다” 라는 참람한 평가를 삼가는 것이 마땅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만일 이 제안이 합당하다면, 가이슬러의 예화는 단지 자신의 편견과 입지를 퍼뜨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예화 내용의 부적합성 및 부당성이 밝혀졌으므로 예화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자신의 주장 --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은 공정성에 어긋난다는 것 -- 또한 설득력을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v)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 진정한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것은 빈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 반론은 논리적 타당성이 상당히 높은 것이다. 칼빈주의적 작정/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포함해 이 세상 만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자원(自願)의 자유”(freedom of spontaneity) -- 이것이 칼빈주의자에게 해당되는 자유 개념인데13)--를 행사할 때 발휘되는 “판단”과 “욕구”의 요소 또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바로 이 점은 칼빈주의적 자유 개념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된 공격 목표가 되고 있다. 여기 몇몇 아르미니우스주의 학자들의 비판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학적) 결정론자들[칼빈주의자들] 가운데 자유에 대한 가장 공통적 이해는, 의지가 자기 개인의 욕구와 동기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한 자유롭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원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 한 그의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
나의 판단으로는 이것이 거짓 개념인데, 특히 무조건적 작정의 맥락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미 살펴 보았듯, 결정론적 신학자들은 사람이 자기의 욕구를 좇아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고, 또 덧붙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런 욕구(혹은 동기, 혹은 사정) 또한 작정하시는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14)
또, 화인버그의 유신론적 양립론(theistic compatibilism)에 의거하자면, 나의 욕구 발동과 선택은 필히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니, 왜냐하면 내가 욕구를 갖는 것과 선택함도 사건들(events)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그 무엇이나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 말고 다른 것에 의해 욕구 발동을 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내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 욕구를 발동한다고 해도, 그런 욕구 자체 또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다. 역시 자유는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작정과 별도로는 욕구라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15)
… 이 전통[칼빈주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진정 자유롭다는 -- 심지어 온건한 결정론자(soft-determinist)의 의미에서라도 -- 주장은 전혀 맞지가 않는다. 유기자(遺棄者, reprobate)의 행동은 확실히 그의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런 행동들의 선행 조건들은 외부로부터,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소원, 욕구, 신념, 바람 등 유기자의 행동을 일으키는 것들은 자기 내부적인 것이지만, 그런 원인들은 신적 섭리에 의해 부여된 것이고 전적으로 신적 섭리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 물론 칼빈주의자의 견해로는 하나님이 최면술사나 마취제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과적으로 유효하다는 의미에서는 최면술사나 마취제와 똑같다.16)
이상에 소개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반론은 비록 세부 사항과 용어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논변의 요점은 똑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는 만사 -- 존재하는 모든 것 -- 의 원인이다 [엡 1:11 등에 기초한 칼빈주의의 기본 신조].
(2)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합리적 판단에 따라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칼빈주의가 인정하는 “자원의 자유”(freedom of spontaneity)의 기본 개념].
(3) 그렇다면 자유 의지와 행사와 관련해 등장하는 인간의 욕구, 합리적 판단, 선택 등도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과 (2)로부터의 추론].
(4) 따라서 인간이 자기 행위의 최종 원인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가 최종 원인이다 [(1)과 (3)으로부터의 추론].
(5) 인간이 자기 행위의 최종 원인자가 아니면 그는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자유롭다고 할 수가 없다 [(4)로부터의 귀결].
(6) 그러므로 이상의 설명에 나타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2)와 (5)로부터의 추론].
논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상의 논변은 건전한(sound)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로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 필자의 생각으로는 -- 단지 (4), (5), (6) 대신에 (4'), (5'), (6')를 주장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비(mystery)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4') 비록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가 최종 원인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자원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4'a)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가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엡 1:11 등).
(4'b)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인간에게 참으로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요 8:32; 갈 5:1 등).
(5') (4')의 내용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합리적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
(6') 따라서 인간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 
(vi) 비신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예정 때문이라면 결국 악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아닌가?
이 마지막 질문 역시 칼빈주의적 신학 체계를 옹호하는 이들로서는 합리적인 답변을 하기가 매우 힘든 항목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한다.
칼빈주의 체계에 암시되어 있는 신념인즉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바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범죄하는 것, 비극이 펼쳐지는 것, 어떤 개인들이 구원의 제공을 거절하는 것[강조는 인용자의 것] 등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방적 작정에 의해 정해진 바이다. 칼빈주의자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행하는 것이 강권에 의해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원리에 호소할 수가 없으니, 왜냐하면 실상 일관성 있는 칼빈주의는 인간이 선(혹은 악)을 행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칼빈주의는 도덕적 악(moral evil)을 온전한 자유(libertarian freedom)에 비추어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이 자유로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 악의 잠재성이 요구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악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19)
로빈슨의 비판은 차분하고 명료하다. 칼빈주의적 신학 체계가 비신자의 지옥행 등 모든 도덕적 악에 대해 합리적 답변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에게 허락된 자유의 개념이 온전한 자유 -- 곧 임의(任意)의 자유(freedom of indifference)/온전한 자유(libertarian freedom) -- 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칼빈주의적 가장 기조가 되는 신조 --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가 악의 발생을 망라한 만사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 --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비신자가 지옥으로 가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이다. 비록 즉각적 원인(immediate cause)으로서 그의 불신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있지만,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은 역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있다고 해야 한다. 물론 일부 칼빈주의자들이 유기(遺棄)를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상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보고자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반하는 모순적 처사이다. 바로 여기에서 답변하기 쉽지 않은 신학적 난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악의 조성자(author of sin)이기도 하신가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합당하지 않은 처사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악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자 하는 시도로서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벌코프는 “작정이 죄된 행위와 연관이 되는 정도에 한해서, 일반적으로 허용적 작정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이 죄된 행위들이 그 실현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확실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런 행위가 자신의 이성적 피조물들의 자유에 의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이다”20)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허용적 작정과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기억해야 한다.
(i) 이 허용적 작정이란 것이 신적 의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어떤 일을 수동적으로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21)
(ii) 허용적 작정도 작정인지라 장차 죄된 행동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22)
(iii)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된 행동들에 대해서 하등의 책임도 없으시다.23)
이상의 세 가지 언명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이론적 모순이 발견된다. (i)과 (ii)에 의하면 결국 죄된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포괄적 주관자라는 뜻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포괄적 의지를 벗어난 가운데 인간의 악이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발생하도록 확실하게 해 주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의 발생을 주관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iii)에서는 하나님께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금 “신비”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4)
이상의 토론 내용을 다시금 비신자의 지옥행과 연관시켜 설명해 보자. 어떤 비신자(A라고 하자)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지옥으로 갈 터인데,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태 -- 일반화시키면 “악”(evil)의 문제 -- 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마땅한가? 필자는 이럴 경우 다섯 가지의 명제를 한꺼번에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A의 지옥행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로 말미암은 일이다.
(1a)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원인으로 한다.
(1b) A는 지옥으로 가도록 작정이 되어 있었다.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A가 예수를 믿지 않도록 (따라서 지옥에 가도록) 만드신 것은 아니다.
(2a)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2b) 하나님께서는 A에게 능동적으로 간섭하셔서 그가 예수를 믿지 않도록 (따라서 지옥에 가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
(3) 그렇지만 A의 지옥행은 확실히 일어날 일이다.
(4) A는 자유로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고 따라서 지옥행을 선택한 것이다.
(4a) 누구도 A를 강제적으로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다.
(4b) A는 자기가 원해서 지옥행을 선택한 것이다 [자원의 자유].
(4c) 물론 A에게는 지옥에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임의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5) 따라서 A가 지옥에 가는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들 사이에 (1)과 (5)는 양립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양립성을 지키기 위해 둘 가운데 어느 한 명제라도 희생시키면 칼빈주의적 신학 체계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1), (2), (3), (4), (5)의 다섯 가지 명제를 함께 주장하면서, 어떻게 (1)과 (5)를 함께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신비”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신비에의 호소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경건의 훈련” -- 하나님의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지적 제한성을 인정하고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찾는 것 -- 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건의 훈련과 관련해서 칼빈이 주는 충고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듯하다.
그[하나님]의 뜻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다 --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하나님의 뜻]이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무언가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보다 선행한다는 말이요, 또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얽매여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가장 고상한 법칙(highest rule of righteousness)이기 때문에, 그가 뜻하는 바는 무엇이든 그가 뜻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롭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이가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뜻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가 그렇게 뜻하셨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크고 더 높은 그 무엇을 찾는 것인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25)
이제 그대의 편협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손수 작정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광란의 탐색을 위해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것 -- 그대의 이성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대의 파멸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 이 그대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겠는가? 선지서들과 욥기의 역사(歷史)가 하나님의 불가해한 지혜와 무서운 능력을 선포하느니만큼, 왜 두려움이 최소한 그대를 제어하게라도 만들지 못하는가? 만일 그대의 마음에 고통이 있거든 부끄러워 말고 어거스틴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네는 한 인간으로서 내게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네만, 나 역시 일개 인간일세.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롬 9:20]라고 말씀하시는 이의 말을 듣도록 하세. 믿음에 입각한 무지(ignorance which believes)가 성급한 지식보다 낫다네 …”26)

-------------------------------
1) 한 가지 미리부터 밝혀야 할 사항은, 합리적 탐구와 신비(mystery)의 인정에 대한 관계 문제이다. 모든 신학 작업은 조만간 이 상반되어 보이는 두 범주의 인식론적 활동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신학 활동의 대부분은 우리의 합리적 사고 활용과 연관이 된다. 우리는 설명하고 비판을 가하고 증명하고 증거를 검토하는가 하면, 논변을 날카로이 하고 추론하고 요점을 분석하고 보조 논점을 준비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계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지적 노력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점 같은 것이 있다. 모든 학문 분야와 이론 체계마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이 존재하지만, 신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비록 지적 탐구의 자료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진리에 대한 성령님의 조명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국 기껏해야 하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와의 사이에 가로 놓은 존재론적 간극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때 우리의 신학 작업은 “신비”에 호소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적 추구 작업과 신비의 수용 사이에 어떻게 적절한 인식론적 경계를 긋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 물론 각 사람의 은사와 조건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지만 -- 은 너무 빨리 지적 추구 작업을 포기하고 덜컥 신비를 수용하곤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 -- 마땅히 신비의 영역으로 여겨 더 이상 범접하지 말아야 하는데 지적 과신의 경향에 빠져 성경과 신학 전통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 -- 도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자의 실수가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성경의 권위와 칼빈주의적 신학 전통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지적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겨지는 한계점에서는 “신비”를 수용할 것이다.
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 107.
3) Loraine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32), p. 254.
4) Louis Berkhof, ibid.
5) Louis Berkhof, op. cit., p. 398.
6) 이상의 설명과 관련하여, 송인규, “복음의 제시,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 「신학정론」, 제 23권 1호 (2005년 5월): 120-1을 참조하라.
7) Louis Berkhof, ibid., p. 463.
8) Louis Berkhof, ibid., p. 462.
9) Norman Geisler, “God Knows All Things,” in Predestination and Free Will: Four Views of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Freedom, pp. 69-70.
10) 역시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목적이나 행동의 이유를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들이 편애나 편파성을 발휘할 때 그것의 유발 요인이 죄된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런 죄된 동기 때문에 “편파성”을 발휘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1) Cf. Louis Berkhof, ibid., p. 115.
12) Cf. Jack Cottrell, What the Bible Says about God the Ruler (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mpany, 1984), p. 351.
13) 송인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I)”: 92-6.
14) Jack Cottrell, op. cit., p. 223.
15) Bruce Reichenbach, “Bruce Reichenbach's Response to John Feinberg,” in Predestination and Free Will, p. 51.
16) William J. Abraham,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Religion (Englewood Cliffs, New Jersey: Prentice-Hall, Inc., 1985), p. 146.
17) 인간에게 자유가 있음에 대해서는, 송인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I): 91-6을 참조하라.
18) 즉 신비에 호소한다는 말이다.
19) Michael D. Robinson, The Storms of Providence: Navigating the Waters of Calvinism, Arminianism, and Open Theism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Inc., 2003), p. 251.
20) Ibid., p. 103.
21) Ibid., p. 105.
22) Ibid., p. 105.
23) Ibid., p. 103.
24) Cf.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2 reprint), p. 211; William G. T. Shedd, Dogmatic Theology, Vol. I, 2nd ed.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80 reprint), p. 411; Louis Berkhof, op. cit., p. 108.
25)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p. 949; III. xxiii. 2.
26) Op. cit., p. 953; III. xxiii. 5.


'조직신학 > 기타미분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가톨릭 신학  (0) 2018.06.02
종교개혁 원리들의 재확인  (0) 2018.05.08
5가지 오직  (0) 2018.04.07
스프라울에 대한 김명도 박사의 견해  (0) 2018.04.03
볼프의 신학 방법론  (0) 2018.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