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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판타지 장르 해석

판타지 장르 해석


글: 노승수 목사(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졸업)


성경에도 판타지 장르가 있다. 이말은 오해하면 곤란하다. 성경이 판타지란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판타지라는 말이다. 우리가 영화를 고를 때, 장르가 매우 중요하다. 액션은 액션으로 문법이 있고, 멜로는 멜로로서, 코메디는 코메디로서 문법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어 낼 때도 본문의 장르를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 달려드는 것'처럼 눈치 없이 구는 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판타지 장르는 선지서나 계시록에 주로 등장한다. 판타지는 일반적으로 세가지 경우에 발생한다. 첫째, 현실에서의 도피 둘째,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망 셋째, 폭력과 압제에 대한 저항의 양식이 보통이다. 성경이 판타지 장르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이 중에서 세번째 이유에 해당한다. 선지서나 계시록이 기록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선지자들의 운명이 주로 순교로 마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의 문제와 죄들을 고발하는 선지자들의 상황은 목숨을 건 고발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판타지 형식을 취하게 된다.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는 이상이 예레미아서 1:11에 나온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도대체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이 살구나무는 원래 아몬드 나무이다. 우리 말로는 편도 나무라고도 한다. 중요한 건 이것이 아니라 아몬드 나무는 히브리 낱말로 '샤케드'이고, 개역 성경의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의 '지켜'는 '샤카드'이다.(렘 1:11).  일종의 워드플레이인 셈이다. 살구나무에서 지켜보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서 이 백성을 지켜보고 있음을 다른 여러 번역 본들은 '지켜보다'는 뉘앙스를 더 살려서 번역했다. 살구나무 판타지는 시각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켜보심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판타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은 매개체를 이용해서 사건의 본질과 핵심을 궤뚫는다. 앞서, 샤케드와 샤카드의 발음의 유사성으로 지켜보다는 의미를 살구나무에 투영한다.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이 병풍이나 문갑에 항상 박쥐 그림이나 문양을 넣는 이유는 박쥐가 한 자로 '복'이라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런 판타지 장르를 만날 때, 그냥 문자적으로 접근하면 본인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고패턴은 사람의 원형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아동의 사고의 패턴이기도 하며 꿈의 패턴이기도 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성경이 이런 이미지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알아보자.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신의 현현을 마주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 장면은 크게 세 가지의 이상이 등장한다. 광풍과 지진, 그리고 불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며 이후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 사실 너무 막연해서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근데 이 이상은 어디가 모르게 익숙하다. 어딜까?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세 가지 이상과 일치한다. 급하고 강한 바람(폭풍), 모인 곳의 진동(지진), 불의 혀와 같은 갈라지는 것(불)이 그것이다. 우리는 자꾸 방언에만 집중하지만 이 부분이 시사점이 더 크다. 게다가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해설은 요엘서의 여호와의 날의 성취라는 취지의 설교로 이어진다. 구약신학에서 여호와의 날은 '종말'로 이해된다. 원래 8세기 선지자들에게 이 날은 축제의 날이었다(암 5:18). 그러나 이는 심판의 날로 점차 굳어진다. 물론 심판에는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 세가지 이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에 따른 종말의 도래를 보여주는 이상이다. 


이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례요한에 의해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마태복음에 요한의 설교에 보면, 그리스도의 도래를 심판의 도래로 설명한다. 도끼와 키질, 알곡과 곳간, 쭉정이와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도식은 종말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이상들이 가진 의미가 이렇다면, 엘리야 본문을 해석해보자. 이 세 이상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일단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소했다. 그런데 이 이상 곧 심판의 이상 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심판은 유보된 것을 보여준다. 


엘리야의 사명은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판은 엘리야 다음에 오는 엘리사에 의해서 예비된다. 엘리사, 예후, 하사엘의 삼중 심판은 그리스도의 최종심판의 모형이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소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의 사람들에게 있었다. 심판의 세 가지 이상 곧 광풍, 지진,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심판보다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 판타지 장르의 다른 본문도 하나 연습삼아 살펴보자. 대체로 본문 자체에 힌트가 있다. 예컨대, 계시록의 경우, 짐승은 일곱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이게 뭔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다(계 17:9). 세계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다면 로마가 일곱 산 위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 왜 하필 짐승일까? 로마의 건국신화는 늑대 젓을 먹고 자란 시조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다가 로마 군대의 4개의 상징은 모두 짐승이다. 21장의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된다.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상징되지만 어린양 그리스도의 신부는 교회임으로 이 예루살렘은 결국 교회 곧 성도들을 가리킨다. 대개의 경우, 본문 자체에 해석에 힌트들이 들어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고 선생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누구나 이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