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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용서

용서


글: 노승수 목사(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졸업)


최근 5.18을 즈음에서 SNS 상에서 용서에 관한 이슈가 매우 뜨겁게 다루어졌다.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종교는 역시 기독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용서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는 혼란스럽기만하다. 이런 혼란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이, SNS 상에서 논의가 뜨거웠다.


과연 기독교적 용서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성경이 이 용서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글로 적어보는 것이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는 용서에 관한 교육학 석사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그래서 인지 이러한 논의들은 낯설지 않았지만 논의 중에 나타나는 용서에 대한 이해들은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용서에 관한 이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정의를 성경 해석을 통해서 좀 더 선명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용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본문은 마 18장:21-36에 나타난 용서에 관한 본문이다. 흔히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권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은 흔히 다섯 개의 강화를 중심으로 이적과 기사의 스토리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5-7장의 산상설교, 10장의 제자 파송의 설교, 13장의 천국 비유 설교, 18장의 교회에 관한 설교, 마지막 25장에 종말에 관한 설교가 그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다루려는 본문은 ‘교회에 관한 설교’ 중에 들어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루려는 본문 21절은 “그 때에”라는 시간부사로 시작하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는 용서에 관한 이 본문이 앞선 본문 곧 15-20절의 본문에 대한 부연 내지 개념의 확장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선 본문 15-20절의 본문은 형제의 범죄에 대한 권면을 다루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권면하되, 3번에 걸친 권도를 말하고 있다. 1) 개인적 권면, 2) 2-3 증인 앞에서의 권면, 3) 교회 앞에서의 권면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권면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절)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단절하고 그에 대한 치리를 말하고 있다. 이 가르침을 듣고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을 용서하리이까? 하는 질문으로 용서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용서가 면죄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른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사면이나 면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사면은 법적인 행동으로서 처벌 당사자에게 처벌을 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상처를 입은 당사자가 하는 행동이 아니다. 따라서 용서로 보기는 어렵고 용서와도 구별된다(Hunter, 1978 ; Murphy, 1982 ; Enright 등, 1992).


그런 점에서 용서는 개인이 먼저 정의(Justice)에 대한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 마태복음의 본문 자체도 이런 문맥을 보여준다.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앞선 문맥 즉, 권도를 듣지 않는 자들을 치리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공정성(Justice)에 대한 의식 없이는 도덕적 상처를 깊이 인식하고 이를 느낄 수 없고(Hunter, 1978 ; Brandsma, 1982 ; Enright 등, 1992) 오늘 본문의 주님이 가르치는 용서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상대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계속 잘못을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없다. 앞선 문맥에서 주님이 권면한대로 회개에 관한 권면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용서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공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려고 할 때, 우리 내적으로 그것은 시간이 걸리고 길고 어려운 과정이 될 수 있다(Rachel, 1987). 그런 점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용서의 횟수는 사실상 용서의 어려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우리의 상처들에 대해 이를 극복해 가는 내면적 과정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Augsburger(1981)와 Smedes(1984)에 의하면,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깊은 상처는 좀처럼 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용서는 망각과는 반대로 어떤 상처를 정확히 기억하고 직면하고 이해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수많은 반복과 훈습을 전제로 한다. 용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손쉬운 결정이 아니다. 결정한 후에도 우리 마음엔 계속적으로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미움과 상처들이 있다. 이것들을 대면한 신자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주님이 언급하신 ‘70번씩 7번이라도’라는 말의 진실된 의미이다.


Horsburgh(1974)는 용서는 타인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이나 무관심해 버리는 거나, 시간이 흘러서 상처로 인해 생긴 분노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용서는 그러므로 세월이 지난다고 그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산술적으로 490번 이상의 반복적인 결단이어야 한다. 용서는 능동적인 행동이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과정이다(Horsburgh, 1974 ; Fitzgibbons, 1986).


용서란 피해를 준, 범죄한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판단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는 이러한 판단과 감정을 가질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자비, 동정심, 심지어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인지(認知), 정의(情意), 행동(行動)적 복합체이다(Enright & Human Develo- pment Study Group, 1992). 이런 도덕적 결정과 그 결정을 실행해가는 과정에서 70번씩 7번이라도 응징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서 쏟구치게 된다. 이 때 마다 용서를 결정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범죄로 인한 권면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용서를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마태복음 18장 문맥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마음 속의 증오와 미움, 타인의 범죄로 인한 비통함과 같은 내적인 상처들 역시 용서라는 선택으로 극복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참된 의미이기도 하다. 신자는 이런 용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사면이나 공의를 배제한 용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