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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성경해석과 주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해석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해석


글: 노승수 목사(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졸업)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본문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해석인 거 같다. 그러면서, 선대 곧 교부 시대의 알레고리 해석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보편적인 거 같다. 


이에 대한 선대의 교부 오리겐의 알레고리 해석은 매우 유명하다. 예를 들어보자. 


“강도 만난 사람은 아담이며, 예루살렘이 하늘인 것처럼 여행자가 강도만나 다친 곳은 세상이다. 강도는 사람의 적이며 마귀와 사람의 앞잡이 이다. 제사장은 율법을 대표하며 레위인은 예언자를 대표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 자신이며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관집은 교회 이고 두 데나리온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사마리아인이 ‘내가 다시 오겠다’ 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런데,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에게서도 비슷한 내용의 해석을 찾을 수 있다. 


“그를 때린 것은 그를 죄로 유혹하는 것이며 거지반 죽게 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이해한 만큼 산 것이다. 따라서 죄로 눌리고 약해질 때 그는 죽는다.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의 선교와 제사장직이 구원을 위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자의 상처를 싸매주는 것은 죄의 회개를 의미하며, 기름은 선한 희망의 위안이다. 여관주인은 사도 바울이요, 다음날은 주의 부활이다.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두 형태 즉 이생과 내생의 약속이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봉착하는 위기는 성경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적어도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시대마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다른 메시지를 본문으로부터 받는다면, 우리는 정말 참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 것일까? 하는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런 도전을 무시한 채 그저 현대적 해석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선대와 우리 사이에 해석적 일치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착안에서부터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출발한다. 


현대적 해석법의 놀라운 발달로 사실상, 본문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것은 거의 사라졌다.그래서 위에서 살핀 본문은 현대 주석가들에 의해서 거의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대부분 교회에서 익숙히 듣고 있는 해석은 모르긴 몰라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에 관한 모범적 교훈이 대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 알레고리가 해석적으로는 잘못되었다는 점은 동의가 되지만 교부들이 이 본문을 통해서 전한 메시지 역시 버려져야 했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이 전제가 사실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사도들의 전승을 이은 교부들과 이 본문에 있어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내가 가진 한 가지 전제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교부들이 사도들의 전승을 이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만약 이렇게 가정한다면 이 본문의 진의는 적어도 위의 교부들의 해석적 작업으로 얻은 메시지와 사도들이 기록된 이 본문을 가르치면서 가진 메시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기초로 한다면,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버리더라도 그 메시지는 취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교부들이 말한 바를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작업이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선은 누가복음 자체에 이런 장치들이 존재한다. 전 문맥인 22-24절이 아들에 관한 계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 12장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다른 문맥에서 제시되지만 구속사적 역할을 하는 본문이다. 그런 후에 이 비유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는 그리스도적으로 읽어져야 한다. 


현대적 해석들의 또다른 난점은 신학적 충돌을 일으키는 장치들이 본문 가운데 있는데 그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느냐?'는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그냥 읽으면, 선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유발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을 행위 구원론으로 읽게 되고 예수님이 그런 메시지를 하신 것으로 읽게 되어서 전통적 구원론과 충돌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본문 자체에 이미 이것을 피하기 위한 장치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표현과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는 누가의 나레이션이 본문을 이런 방식, 즉, 모범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해한다. 


내가 제시하는 해석은 교부적 메시지를 취하되 알레고리를 피하는 해석의 핵심은 이것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율법사에 질문과 이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 후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주님의 되물으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율법사는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비를 베풀 이웃'을 찾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의 처지가 강도만난 자와 같아서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드러내셨다. 즉, '내 이웃'을 물었는데, 그 내가 바로 '강도만난 자'여서 오히려 자비를 구해야 할 처지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에 관한 메타포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대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을 뿐' 율법 자체가 우리고 그 율법을 지키도록 할 능력이 없음이 이 본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동시에 사마리아 인은 율법에서 외인이다. 이 역시 바울이 언급한 이제 율법 외에 다른 한 의가 나타난 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차별이 없는 의를 보여준다. 즉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의 메타포인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하면서도 교부들과 동일한 의미를 취할 수 있고, 오히려 역사적 해석의 방증을 더 증가시킨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도 이와같이 하라'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살아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가 아니라 "율법을 이웃으로 삼아 절망하지 말고 율법의 참 실체이신 율법 외의 한 의이신 그리스도를 이웃으로 삼으라"는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대체로 교부들의 알레고리가 함의하고 있는 이 본문에 대한 메시지와 거의 같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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