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유적(알레고리적) 해석과 모형론, 그리고 칼빈
윤성현 목사
1.풍유적 해석 (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란 텍스트의 단순한 문자적 의미를 극소화하면서 오히려 숨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극대화하는 해석법을 가리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성을 기본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세의 지나친 영적 풍유적 해석을 반대하면서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칼빈이 중세적 잔재라는 이유로 풍유적 해석을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칼빈은 욥기 해석에 있어서 욥기의 주제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논쟁이라고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계승하였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칼빈이 중세와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무분별한 풍유적 해석은 거부했지만,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풍유적 해석, 곧 모형론적 해석을 용인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에 기초하여, 성경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구약과 신약의 관련성을 살폈습니다. 중세적인 풍유적 해석이 신비적인 성격을 띤 것과는 달리, 칼빈은 성경이 말하는 성경 전체의 중심적인 가르침, 곧 기독론을 기초로 하여 교육적인 차원에서 모형론적인 해석을 적절하게 사용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칼빈의 풍유적 해석, 곧 모형론적 해석은 철저하게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우선, 성경 본문이 의미하는 역사적, 문자적 의미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구절이 의미하는 문자적 의미 이면에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혹은 예표)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세의 신비적인 풍유적(알레고리적) 해석과 근본적인 차이인 셈이지요.
사실, 칼빈은 초대 교부들의 저작들을 통해, 특히 어거스틴의 저작들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성경언어와 수사법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링거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수사학을 성경 해석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학문적 개방성을 보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성경의 수사학은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칼빈은 구약을 읽으면서 늘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인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모세오경, 율법, 성막, 절기, 제사, 예언, 시편 등에서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구약 성경이 그 자체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 말이 지니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세적 풍유적 해석과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2.사실 신약과 구약과의 관련성, 곧 신구약의 통일성을 주장하고자 할 때, 모형론적, 풍유적 해석은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구약의 많은 부분들을 그리스도의 모형(예표)으로 이해하면서 복음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기독론적인 모형론적 해석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클레멘트와 바나바 서신 등에서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2-3세기의 변증가들인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역시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에 반대해서 구약의 모형론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약에서의 성취를 강조하였습니다.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전통에 헬라의 알레고리가 혼합되면서 모형론적 해석의 건전한 방향은 상실되고, 오리겐과 같이 중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흐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칼빈이 지나치게 신비적인 중세적인 풍유적 해석을 거부했다고 해서, 풍유적 해석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칼빈은 알레고리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허무는 사탄의 고안물이라고 공격하였지만, 여전히 모형으로서의 구약과 성취된 실체로서의 신약과의 관련성을 기독론적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사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약과 신약은 모형에서의 차이일 뿐,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었던 것이지요.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역시, 기독론적인 모형론적 해석은 중요하게 강조되었습니다. 그들은 모형론적 해석과 알레고리적 해석의 차이점을 구별하여 설명하였는데, 알레고리란 사실들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감추어진 영적 진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모형론적 해석은 사실들 간의 비교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형들이란, 신약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그림자(예표)로서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구약의 어떤 사실들을 가리킨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3.분명 오리겐을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헬라적 알레고리는 칼빈이 말했던 바, 성경의 권위를 허무는 사탄의 고안물로서 우리는 마땅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 영향 하에 있었던 중세적인 풍유적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현대에 와서는 현대의 해석학적 흐름의 영향으로 정당한 기독론적 모형론적 해석이 비난을 받는 것 또한 우리는 경계해야만 합니다.
물론 지나치고 과도한 구속사적 해석으로 구약성경을 너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우리는 조심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론적 모형론적 성경해석, 곧 구속사적 성경해석이 우리에게 중요한 성경의 해석방식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구속사적인 신구약의 통일성은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핵심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서 더함 공동체 이진오 목사님이 던진 “왜 불뱀이어야 하는가?” 의미를 묵상하면서, 불뱀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관련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당시 사건과 관련하여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교만과 불순종에 대한 댓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는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본 놋뱀이 바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무한한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셨습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하는 내용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진오 목사님이 제기한, 그런데 놋뱀이 “왜 불뱀이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서는 저 역시 기독론적 모형론적 해석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불뱀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놋뱀으로 예표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영원한 지옥형벌, 곧 공의로운 심판과 연결시켜 본 것입니다.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을 보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뱀의 형태로 그 윤곽이 제시되었다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흔히 그렇게 여겨지는 “장대”, 곧 “나무”를 “십자가”로 연결시키는 해석은 오히려 거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라는 구절은 마치 높은 곳에 들려져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처럼,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십자가와 결부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든 것은, 복음은 널리 전파되어야 하며, 바로 그곳에서 누구든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얘기해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4.칼빈이 지적했듯이, 지나치게 과도한 풍유적 해석은 그것이 기독론적 모형론적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경계해야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말하는 성경해석의 원리 중, 단순성에 기초해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빈이 성경해석의 주요 원리를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성의 원리는 바로 그리스도 중심성의 원리와 연결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을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강조되어야할 중요한 원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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