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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정치적 의미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플라톤의 작품이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르기누사 해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했는데 폭풍우가 몰아쳤고 이 때문에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전쟁에 참여한 장군 6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변론에 기회도 주지 않고 이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때 유일하게 반대했던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10개의 부족이 매달 50명의 대의원을 내고 그렇게 모인 500명이 민회를 통해서 다스리는 민주정 구조를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당한 결정으로 해전에 실전 경험이 많있던 장군들이 사라짐으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아테네에 스파르타가 세운 괴뢰 정권이 스파르타식 과두정이다. 이 과두정 지도자 중 한 명이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었다. 과두정의 폭정으로 민주정 인사의 다수가 희생되고 다시 아테네에 민주정이 들어섰는데 이 민주정 치하에서 소크라테스가 기소를 당하고 사형에 이른다. 이 자세한 기록을 다룬게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아테네의 정치에 실망한 플라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망명 생활을 한다. 남부 타란토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이데아론을 완성한다. 이어서 반도의 동쪽, 서부 해안도시 엘레아로 가서 파르미네데스 학파에서 배운다. 여기서 아마도 동굴 비유의 현상 개념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칠리아 군주에게 가서 자기 정치철학을 풀어 놓는다. 이 야기는 앞선 포스팅에서도 다뤘기에 짧게 스킵한다.
오늘 포스팅의 주요 지점은 지금부터다. 이 과정이 함의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싫어했다. 왜?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두 지역의 망명 시칠리아에서의 실험 이후 이테네로 복귀해서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함의다. 이 통찰의 힌트는 들뢰즈의 "풀라톤과 시뮬라크르"에서 얻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 구조가 이렇다
1. 가시계로서 현상계는 독단(doxa)이 가득해 있는 대로 보기 어렵다.
2. 가지계로서 이데아계는 에피스테메(episteme)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다.
그런데 들뢰즈는 풀라톤의 의도가 가시계와 가지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데 그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즉, 이데아라는 원본이 있고 이 원본을 닮은 카피가 세상에 있으며 카피보다 원본을 닮지 못한 시뮬라크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나누는 구조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 얘기를 잠깐하자면 아테네 교외에 집을 짓고 살았다던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도둑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이 집에 재우고 그보다 작으면 늘리고 크면 잘라냈다는 우화가 있다. 나중에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마치 이 우화와 같다고 본 것이다. 카피는 우등한 것으로 시뮤라크르는 열등한 것으로 원본인 이데아와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존재에 차등이 매겨지는 것이다. 플라톤은 미술을 매우 열등한 예술로 치부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다. 원본도 아닌 사본을 베낀 것을 다시 베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의도는 이데아와 현상계의 구분이 아니라 이데아를 더 닮았다고 생각되는 카피와 덜 닮았다고 생각되는 시뮬라크르를 현실에서 구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학생으로서 모범을 정해놓고 1등부터 꼴등까지 석차를 성적으로 매기는데 이런 구조가 원본과의 동일성을 근간에 둔 사유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모범 사원, 좋은 남편, 좋은 부모, 자녀 등 원본을 상정해두고 그것과 닮을 정도로 세상을 둘로 나누는 차별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세상이 이처럼 동일성으로 구성되지 않고 오히려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원곡과 그에 대한 새로운 편곡의 곡에서 시대 흐름에 따라 우리는 새롭게 편곡된 곡에서 더 매력을 느낀다. 이처럼 시뮬라크르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며 차이가 오히려 존재자를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아퀴나스-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동일성을 강조하는 철학 전통이 있고 우리는 이런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시작점인 플라톤이 의도한 것은 철인정치에서 보듯이 동일성의 정도로 세상을 둘로 구분 짓고 차별을 강화하는 기득권 방어의 메카니즘으로 이것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헤겔이 정신 현상학에서 말한 절대정신의 대표적 예로 나폴레옹을 찬양한 지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근대법에서 나폴레옹의 업적은 적지 않다. 로마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 올라 있기도 하다.
이 동일성 철학은 기독교 신학과 닮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다양성 속의 일치를 말한다.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둘이 하나됨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다. 성경의 계시는 플라톤과 들뢰즈 그 중간 어디즘이다.